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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라크리모사], 윤현승

2008.05.30 23:5605.30





lunaticun.netlunaticun@msn.com

0. 노블레스 클럽, 윤현승
리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노블레스 클럽’에 대한 언급이 빠져서는 안 될 것 같다.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양질의 경계 문학을 발굴, 소장가치 있는 단행본을 지속적으로 출판하겠다는 야심찬 기획으로 시작된 노블레스 클럽은, 그 첫 타자였던 하지은의 [얼음나무 숲]이 출판된 지 두어 달 만에 3쇄를 내며 선전하여 눈길을 끌었다. [라크리모사]는 노블레스 클럽 이름을 달고 나온 세 번째 작품인데, 갓 출판된 세 작품을 토대로 노블레스 클럽의 운명을 점치기에 아직은 시기상조이긴 하다. 그러나 그동안 현대 장르문학의 대세적인 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 경계 문학을 본격적으로 출판하려는 시도가 주로 해외 작품을 소개하는 정도에 머물러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기획 자체는 대단히 환영할 만한 것이고 실제로 어느 정도 독자들의 호응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초 공개한 출간 예정작과 준비 중인 작가 목록에도 신인과 기성작가들을 두루 포섭하려는 시도가 엿보여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라크리모사]의 작가 윤현승은 그동안 [다크문] 시리즈와 [하얀 늑대들] 등의 작품을 통해서 기성작가 중에서도 상당히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했으며, 균형 잡힌 세계관과 건전한 주제의식 속에 내재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작가로서 나의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뫼신 사냥꾼]에 이어 또다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그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며 작품을 풀어헤쳐 보기로 한다.


1. 라크리모사의 플롯
레퀴엠 중에서 ‘눈물의 날(Lacrimosa)’이라는 일부분을 가리키는 제목에 많은 독자들이 생각보다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보다는 기독교적 심판의 날, 즉 인류 멸망 혹은 구원의 때를 뜻하는 관용적 표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띠지에 적힌 그대로 ‘세상의 존망을 건 악마와의 거래’가 작중에서 진행되는 주요 사건이다.
이탈리아 어느 지방 도서관의 사서 루카르도는 평소와 다름없이 한가한 오후를 보내던 중도서관장이 연쇄살인범으로 지목되었으니 달아나라는 경찰의 전화를 받게 되고, 곧이어 도서관을 절대 벗어나지 말라는 낯선 여인의 전화가 걸려온다. 사건을 수사하는 티에로 경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서관 밖에서는 사람들이 계속 살해되고, 전화 속의 여인이었던 소피타의 말에 따라 지하 서고로 내려간 루카르도는 악마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존재, 레오나르를 만난다. 인류의 멸망이 채 다섯 시간도 남지 않았다는 그의 말에 루카르도는 ‘진실의 원’을 사이에 두고 세 번의 위험한 거래를 시도한다. 인류의 생존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 베니카를 지키기 위해서.

이 소설의 대결구도에는 좀 별난 구석이 있다. 분명 싸움은 존재하고 있는데 선과 악의 대립은 아니다. 악마나 천사가 등장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레오나르를 가리켜 악마라고 부른다고 해도 그가 사악하다거나 추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견딜 수 없이 무서울 따름이다. 루카르도는 인류의 존망을 걸고 필사적으로 싸우지만 그의 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 나타날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애초에 등장인물 가운데 누구도 그것을 쓰러뜨려 멸망을 저지한다는 발상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싸움은 악마나 괴물이 아니라 주인공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인류의 멸망을 저지하려는 싸움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질문하며 서로의 진실을 시험하려고 한다. 그것은 결국 진실과 거짓의 싸움이며, 주인공 하나하나가 저마다 진실을 좇는 구도자이기도 하다.


2. 공포와 속박의 공간, 도서관
소설의 주된 배경인 ‘도서관’은 처음부터 수상하기 짝이 없는 공간이다. 그 자체로서 대단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문화재이며 가치를 짐작할 수 없는 지식을 담고 있으면서도 지키는 것은 단 두 사람. 게다가 관장 외에는 발을 들일 수 없는 닫힌 서고와 그에 얽힌 괴담에, 세월을 초월한 역대 관장들의 초상화까지. 잘 살펴보면 작품의 처음 5분의 1 정도는 도서관에 대한 묘사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도서관이라는 공간 자체가 루카르도의 생각처럼 단순히 고서 애호가들을 흡족하게 해줄 인류 지식의 보고가 아니라 어딘가 비인간적인 신비를 속에 품고서 현실 한가운데 버티고 선 괴물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닥치고 내려가!”라는 목소리에 이끌려 도서관 지하에 위치한 비밀 서고로 향하는 주인공의 발걸음이 마치 끝없는 심연(profundo lacu)으로 걸어 내려가는 듯한 분위기로 묘사되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루카르도는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벗어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처음에는 낯선 여인의 전화가 안겨준 불안감 때문이었다면 사건이 진행될수록 도서관 밖에 출몰하는 ‘무서운 것’의 실체적인 위협과 도서관 자체에 내재한 알 수 없는 신비함이 그의 발목을 잡게 된다. 도서관에 발이 묶인 주인공의 활동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뉜다. 지하에서는 레오나르와의 거래, 지상에서는 거래를 위한 물건을 수집하며 단편적이지만 외부와의 접촉이 이루어진다. 관련 인물들과 하나씩 이야기를 나누며 나름대로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애쓰지만 그들의 진술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단편적이고 한정적이다. 도서관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진실의 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3. 진실의 원: 누가누가 거짓말을 더 잘하나
작품에서 작가가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 바로 ‘진실의 원’과 관련된 복선이다. 악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없기에 그를 가둔 인간은 ‘진실의 원’이라는 규칙을 만들어내었다. 원 안에 갇혀 거짓을 말할 수 없게 된 악마에게서 지식을 얻어내기 위한 거래 규칙도 만든다. 단순해 보이지만 분명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낸 것이 틀림없는 이 규칙들을 가지고 작가는 등장인물들뿐만 아니라 독자와의 줄다리기도 시도한다.
진실의 원 안에서 말해진 것은 참이다. 그러나 참인 것을 말하지 않을 수는 있다. 악마가 선심 쓰듯 던져주는 말들만을 가지고 궁극적인 진실을 알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우므로 이미 알아낸 사실을 바탕으로 한 추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주인공들은 저마다 진실의 일부만을 보면서 필사적으로 답을 찾으려고 몸부림치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은 ‘1+1=2’처럼 간단하게 답이 나오는 상황이 아니다. 알고 있는 사실이 많든 적든, 시키는 대로 따르든 스스로 행동에 나서든 함정에 빠지는 데에는 예외가 없다. 결국 그들은 진실만 가지고 쌓은 성이 알고 보니 실은 신기루였다는 필연적인 결합의 오류에 맞닥뜨리게 된다. 게다가 이 눈속임은 비단 닫힌 서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도서관이 그러하고, 나중에는 세상 전부로 확장된다. 한번 진실의 원이라는 규칙을 접한 주인공들은 닫힌 서고를 벗어나서도 보이지 않는 굴레에 사로잡혀 있다. 작중 소피타의 대사처럼 마음속의 거짓 앞에서는 진실도 진실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일까.


4. 끝으로,
[라크리모사]는 상당히 세련된 작품이다. 탄탄한 구상과 밀도 있는 전개로 등장인물의 캐릭터성이나 자잘한 사건에 기대지 않고도 충분히 독자들을 잡아두는 힘을 가졌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복선들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 다소 지나치게 직접적인 언급이라고 여겨지는 부분이 있었다. 물론 작품의 결말에 영향을 줄 만큼 중요한 장치이니만큼 지엽적인 설정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순간순간 작가가 나서서 해명을 하려고 시도한다는 인상을 받아 전체적인 세련됨이 약간은 빛을 잃었다. 또 주요 인물들의 시점을 병렬적으로 배치하여 빠르게 장면 전환이 이루어지며 긴장감을 유지해나가고 있었는데, 작품 후반부로 갈수록 앞에서 이루어놓은 비중의 균형이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작품 구성의 치밀함을 떨어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크리모사]가 매우 공을 들여 닦아놓은 티가 역력하여 독자에게 읽는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열쇠가 철컥하고 맞물리듯이 작가가 깔아놓은 복선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갈 때 느끼는 쾌감이 상당한데다가 장면마다 강하게 힘이 실려 있다. 작가의 필력에 따라서는 독자에게 허탈감만 남기는 데 그칠 수도 있었을 반전부터 마지막 장까지 이야기는 결코 느슨해지지 않고 본래의 힘을 유지해 나간다. 그동안 윤현승의 소설을 읽어오면서 항상 아쉬우면서도 그의 작품을 더 읽고 싶어 목말라하게 되는 것도 그의 중심을 잡는 탁월한 능력과 함께 이런 뚝심(?)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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