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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chizedek@naver.com누구나 겪어보았음직한 환상, 판타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든가 장르나 소설에 열광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어떤 이에게나 그럴 듯해 보이는 예쁜 동화―――
―――김이환은 훌륭한 이야기꾼이다.

'나'는 엄마에게 '크면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지만 공부하는 것에 비하자면 성적이 안 나오고 성적이 안 나오는 것에 비하자면 노력하지 않는 그저 그런 고등학생이다. 부모님은 틈만 나면 티격태격 싸우다가 중2때 이혼 하셨다. 나를 진짜 사랑한다면 합쳐달라는 말에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서로 맡아 기르겠다고 싸움을 할 정도로, 아예 애정이 없다고 볼 수도 없는 그럭저럭한 가정이다. 이 무채색의 세상에서 그래도 나를 이냥저냥 살게 하는 것은 연두라는 여자친구. 엄청나게 열렬한 사이는 아니지만 서로 마음이 잘 맞는 친구다. 평범했다. 나를 맡기로 한 엄마가 다짜고짜 나를 내 방 벽 앞으로 끌고 가기 전까지는.

처음, 두 번째 김이환의 정식 출판작을 집어 들었을 때 나는 이게 그의 모바일 출판작 '착한 농부와 비둘기 공주'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차라리 토끼탈을 쓰고 현실 세계를 마시멜로우 덩어리로 가득 채우는 에비터젠의 유령에 가깝고, 그보다는 그의 단편 '문근영 대통령'의 확장판에 가깝다.
김이환의 단편 중 내가 드물게 애착을 가지는 '문근영 대통령'은 작가의 사심이 꽤나 풍부한 예쁜 소품 같은 글로, 양줍소 또한 그러한 통통 튀는 은근하고 가벼운 매력을 풍긴다. 하지만 장편(전3권)이라는 한계(?)상 반복되는 구조가 식상하고 작품이 품고 있는 메시지가 구태의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나는 내가 본 적도, 그런 곳이 있다고 들어본 적도 없는 곳에 갔다. 그리고 나는 지금 환상의 나라에서 양말 줍는 일을 하고 있다. 엄마는 아무 것도 설명해 주지 않고 이 곳의 사람들도―――동물을 포함한―――자세히 이야기해 주지 않지만 나는 아무래도 여기에 적응해 살아야 할 것 같다. 벽을 통해 넘나들고 앵무새에게 심부름을 시키며 고양이가 말을 하는 '환상의 나라'에서.

감상을 쓰며 내내 해리포터가 맴도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 그것을 넘나드는 선택받은 소수, 자격 시험, 불우한 가정사를 가진 주인공, 한 소년의 성장담이라는 사실 등등 대자면 셀 수 없을 많은 공통점과 더불어 결정적인 차이점 때문이다. 무지 한국적이라는 점. 해리포터가 영국적인 전통과 유럽 신화에 적을 두고 있다면 양줍소는 도깨비 또치 같은 반만년 한국 전통의 혜택을 입지는 못했을지라도 광복 후 50년간의 우리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간단히 말하자면 비슷한 소재를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인데, 둘 다 비일반적인 가정의 아이가 다른 세계에서 중요한 인물이 된다는 판타지를 다루지만 해리포터가 현실의 대착점 세계를 자세히 다루는 데 중점을 둔다면 양줍소는 결국 이 두 세계가 그리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결국 현실에 움푹 발을 담그는 자세를 보인다. 두들리 가족을 벗어난 해리가 현실이라면 꿈도 꾸지 못한 활극을 펼치고 악을 물리치는 동안 양말을 줍는 소년은 환상세계에서도 여전히 돈에 얽매이고 시험을 보아야만 한다. 즉, 해리포터가 일상이 지겹고 힘들 때 떠나는 일탈이라면 양줍소는 당장 해야 할 일을 눈앞에 두고 이리저리 우스운 모습으로 뒤집어 보며 낄낄대는 해학에 가깝다.

나는 어디서 살든 상관없다. 하지만 아빠를 볼 수 없다면? 혹시 연두와 영원히 만날 수 없다면? 이 곳의 기린은 너무나 마음에 들지만...

양줍소는 스타트가 너무너무 마음에 든다. 이혼한 가정의 자녀 심정을 담담하게, 굉장히 그럴 듯하게 잘 그려냈다. 나는 김이환이 그리는 그 시기의 치기어린 소년의 모습이 참 좋다. 그런 척 꾸민 것이 아니라 그대로의 모습인 것 같아서. 이 황당한 이야기가 장르 독자가 아니라도 그럴 듯한 개연성을 느끼게 만드는 힘의 원천은 그런 것에 있다. 너무 천연덕스러운 화자라서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된다.
작가가 부여한 여러 장치도 좋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마냥, 계산하기 보다는 천천히 흐름을 따라가면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순차적으로 공개되는 이름의 의미도 재미있다. 읽는 재미와 더불어 시각적 효과가 있다. 이름이 밝혀지는 순간 머리 속의 영상이 뚜렷해진다. 그림자극의 주인공이 얼굴을 드러내고 커다란 영화 스크린으로 공간이 이동하는 순간이다.

아빠는 엄마를 싫어한다.
엄마도 아빠를 싫어한다.
엄마 아빠는 나를 사랑한다.
하지만 나는 서로를 싫어하는 엄마 아빠가 싫다. ―――책에서―――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역시 이야기 자체.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복잡한 세상사를 잊고 즐거울 수 있었다. 이 작가의 강점은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나간다는 데 있다. 3권 내내 이야기는 어둡지 않았고 잔잔하지만 훌륭하게 마무리되어 간다.

연두는 나를 사랑한다.
나도 연두를 사랑한다.
우리는 기린을 여전히 사랑한다.
기린은 여전히 환상의 나라에서...(스포일러) ―――책에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내가 몇 번 이 작가의 글에서 '해야 할 부분과 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함께 있어 아쉽다'라고 한 적이 있다.
글 마지막 부분의 '재미있었는지 모르겠다...' 문단은 사족이다. 글 중간중간에도 이런 식의 자조적인 표현이 몇 번 보이는데,(지루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등등) 이것은 화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갑자기 작가가 삐져나와 이야기하는 형국이다. 지나친 솔직함을 거북함을 부르기도 한다. 정제하지 않는 듯한 단순담백한 문장은 김이환의 장점이지만 독자에게 너무 날 것을 들이대는 것은 프로작가로서 아쉬운 부분이다.

잘 읽었다. 1권이 가장 좋았고 2권은 좀 지루했으며 3권은 다시 몰입했다. 이 정도면 굉장히 좋은 책 아닌가. 세 권 다 일러스트도 좋았고 중간중간의 펜그림도 좋았다. 엽서 3장도 마음에 든다. 언젠가 이 작가의 책이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처럼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에 어울리는 작품이 그에 어울리는 모양새로 잘 빠져서 기쁘다. 좀 많이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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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s 08.05.30 23:54 댓글 수정 삭제
    끄덕끄덕 양줍소 참 즐거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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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ine27 08.06.04 14:14 댓글 수정 삭제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모두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소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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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개 08.06.04 23:53 댓글 수정 삭제
    저도 많이 사랑받았으면 하는 책이에요. 진짜 남녀노소 누구한테도 권할 수 있는 책인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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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반향 08.06.12 16:15 댓글 수정 삭제
    이번에 학교 도서실에 어느 후배가 신청해서 들어왔더군요. 후배가 하도 추천해주길래 봤는데, 정말 재밌더랩니다. 거부감없이 다가오는 재미있는 상상..=_=// 하하
    작가님 블로그 들어가보니 곧 2쇄 찍을 것 같다고 많이 사달라시네요, 하하하==
    그거보고 한 번 더 웃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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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해리 포터보다는 네버 앤딩 스토리가 생각났어요. 계속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겠다." 라는 거나, 균열 등등이요. 네버 앤딩 스토리에는 허무라는 게 등장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비슷했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건 아니예요. 얼핏 생각나기는 했지만, 굉장히 신선하고 재미있고, 마지막까지 깔끔한, 좋은 소설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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