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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bragon@naver.com

거울 웹진의 2007년 중단편선인 [비몽사몽]은, 제목과 달리 그다지 꿈에 치중된 편은 아니다. 물론 환상문학치고는 그렇다는 것이고 그 전의 [변신]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단독으로 보았을 때 꿈으로 대표되는 환상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게다가 애초에 제목 자체가 어떤 테마를 두고 글을 모았다기보다 표제작의 제목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니 꿈에 관계된 작품이 적다고 문제될 것도 없다.

   비록 직접적으로 꿈과 관련되거나 꿈을 연상시키는 작품은 {비몽사몽}, {길}, {갈증} 같은 몇 편에 머무르지만, 다양한 작가들이 유려하게 보여주는 다양한 환상세계는, 이 책이 저번 중단편선보다 조금 더 진일보하고 색감 또한 풍부해졌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표제작이기도 한 {비몽사몽}은 아주 현실감 있게 와닿는 소재를 유효적절하게 사용해, 중후반까지 눈을 못 떼고 단숨에 읽어버릴 만한 흡인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중반 이후 결말까지는 너무 맥락이 약하고 코믹한 느낌까지 주는 단점도 있다.

   이런 단점들은 {비몽사몽} 외에도 이 책의 상당수 작품에서 보이는 경향성이기도 한데, 처음에 진지하게 나가다가 희극적 반전이 분위기를 확 뒤집어 버리는 글이 많다. {흡혈귀의 여러 측면}은 이런 구성을 아주 적절하게 사용한 모범적인 글이지만, {붉은 심판}은 허무하다 못해 살짝 지인들 간의 말놀이에 불과한 느낌도 든다. {유전자가 이상하다}의 경우는, 글 자체가 극도로 짧기도 하지만, 아예 그런 허무한 말놀이 자체가 작품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작품도 많아서, 애절하거나 진지한 글도 그 못지 않게 늘어서 있다. 어쨌든 스무 편이나 되는 글이 한 책에 묶여 있으니, 이리저리 다양한 경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니 이건 어쩌면 경향성이 아니라 그냥 임의로 기준을 세우고 유사한 특성을 가진 작품들로 분류하는 작업에 불과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장르가 어떻다든가, 희극이니 비극이니 어쩌구 하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보이는 경향성 한 가지는, 많은 작품들이 사소설적이고, 결말이 좀 흐지부지하다는 것이다. {사과에 관한 이야기 하나}나 {첫 번째 금빛}, {노래하는 숲}, {거울애} 등 눈에 띄는 몇몇 작품들을 제외하면, 과반수 작품들이 ‘무엇을 전달할까’보다 ‘무엇을 보여줄까’에 치중한 면이 있다. 대부분 시각적이며, 이리저리 떠오르는 대로 흘러가는 듯하고, 명확한 주제가 없다. 아니, 바로 그 ‘보여 주기’가 주제로 보이기도 한다. 마치 일기를 쓰듯, 수다를 떨 듯 자신의 환상을 나열할 뿐, 그것을 그러모아서 하나의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만든 경우가 적다. {불량 애완용}이 그렇고 {종이 바깥의 영화}가 그렇다. {갈증}이나 {아들의 방} 역시 예외는 아니며, {도넛}은 구조 자체는 나무랄 데 없지만 주제가 너무나도 고전적이어서, 도넛 모양의 껍데기를 제외하면 할 말이 별로 없다. SF 스킨을 씌운 로미오와 줄리엣과 뭐가 다르랴.

   어떻게 쓰다 보니 핀잔에 가까운 얘기만 늘어놓은 것 같은데, 위에 언급된 작품이든 그렇지 않은 작품이든, 이 책에 실린 모든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문장과 표현이 일정 수준 이상이다. 최저의 경우라도 눈에 거슬리지 않으며, 평균적으로 아름답고, 경탄스러운 부분도 자주 눈에 뜨인다. 지엽적인 부분만 끊어서 보자면, 대부분의 작품이 무라카미 하루키보다 못할 것이 없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문장들이 전달하는 내용 면에서는 아무래도 아쉬움이 있는 작품들이 있고, 그 결과 공감보다는 과시에 가까운 느낌을 받게 된다. ‘이 작가는 현재로선 장편을 쓰기엔 무리겠구나’라는 안타까움이 스멀거린달까.

   물론 단편이 장편으로 가는 과정도 아니고 우열을 비교할 것도 아니지만, 어딘가 어설픈 구조는 작품의 분량이 늘어날수록 큰 단점으로 부각되기 마련이다. 멋진 특수효과와 화면 구성으로 그 해 최고의 기대작으로 꼽혔던 [스타워즈: 에피소드 1]의 예고편 2분이 결국 최악의 본편 2시간을 고밀도 압축한 것에 불과했듯이, 수려한 묘사와 섬세한 감성으로만 이루어진 글은 단편에선 멋져 보일 수 있지만 장편으로 가면 아무래도 밑천이 드러날 수 밖에 없다.

   굳이 장편에 뜻을 두지 않는 단편 작가들에게 이런 껄끄러운 말을 꺼내며 헤집는 것은, 앞서 말한 단점들이 크게 부각되지만 않을 뿐 단편에서도 그대로 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부각되지 않기 때문에, 쉽게 고쳐지지도 않는다. 그러다 보면 결국 작품 활동에서의 근본적인 한 축을 제대로 잡지 못한 채, 해가 갈수록 지엽적인 기교만 늘어나고 작품 수준은 늘 비슷한 언저리에서 맴돌 수도 있다.

   대량 생산품인 사진과 영화가 그냥 공산품이 아니라 예술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 품질이 정교하고 기법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것이 만든 이의 의식을 담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이 색상이 아니라 인간을 담아내면서, 영화가 움직임이 아니라 이야기를 담아내면서 그들은 예술이 될 수 있었다.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는 환상은 환상이 아니라 도피일 뿐이다. 물론 일상으로부터의 도피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건 오락일 뿐 예술이 되지 못한다. 거울의 수려한 작품들 중 상당수가 현실과의 접점을 잃고 피안의 세계에서 떠돌게 되는 것은, 그래서 결코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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