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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판타스틱 2008년 3월호

2008.03.28 21:0803.28





rosebird.egloos.commaskduke@hotmail.com

어쩐 일에서인지 돌아온 학교에는 [판타스틱] 과월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어쩐지 후덕한 인상의 학우께서는 제가 사람을 잘 골라 물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구체적인 증언을 하였지요. 말하자면 도서관측에서 어느 날 갑자기 손수레를 끌고 잡지를 처분하러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밤에는 도서관에서는 국악과의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덕분에 이번에도 연재작에 관해서는 짜게 식겠습니다.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지만 저는 지난밤을 꼴딱 새워, 운석을 소환하는 고교생에 대한 단편소설을 한 편 끝냈습니다. 칭찬해주세요. 후원(?) 감사드립니다.

   먼저 특집에 대해서 말을 해볼까요. 생각해보니 [판타스틱]에서는 특집에 맞추려고 듀나의 로맨스 소설을 이월해 싣겠다고 기대감을 한 층 부풀려 놓았었지요.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메리고라운드}는 총 16페이지나 더 늘어난 잡지의 기타 수록작 틈에서도 그닥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것은 듀나 소설에 대한 평균적인 기대치가 높아졌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호러라는 장르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탓일까요. 사실 저는 {너네 아빠 어딨니}를 좋아하지 않아요. 오히려 [용의 이]에 실리지 않은 단편 {여우골}의 상투성을 더 좋아하지요. 그래도 저는 역시 {히즈 올 댓} 하나만으로도 여전히 작가 듀나의 팬입니다만. 그렇지만 {메리고라운드}가 특집에서 다루는 로맨스 장르에서 확실히 멀리 떨어진 것은 사실이겠지요. 오히려 괜찮은 스파이 소설 하나를 실었더라도 스파이물 특집이 되었을 거예요. 각 기획의 무게감은 여전히 서로 비등하군요. 이십대 중반의 남정네가 탐할 장르가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분명하지요. 때문에 푸콘 가족을 떠올리게 하는 표지를 보며 눈물을 닦았습니다. 하지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아기 고양이!

   말하자면 {메리고라운드}가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었다는 거예요. 내용에 대한 코멘트는 함부로 할 수 없네요. 듀나 스스로가 숨은 화자가 되어 들려주는 진부한 개탄에 가까운 문체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고 밖에요.

   기타모리 고의 {물고기의 교제}는 좋았어요. 일본인들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은 너무도 자기파멸에 가까워서 거부감이 들지만요. 사실 너무도 개인적인 이유로 죽은 이를 추적하는 방식은 사후 얼마나 주변인들의 삶을 지배하는가 하는 이유가 됩니다. 분위기 있는 중년 남성에 대한 젊은 여자의 연민도, 너무도 차분하기 그지없는 존재감 있는 마스터도, 항상 주위를 맴도는 사연을 가득 품은 죽음들도 소설을 써나가기엔 편할지 모르지요. 다만 어디까지나 고생해서 추적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줘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해요. {꽃 아래 봄에 죽기를}에 비하면 추측이 넘치는 {물고기의 교제}가 매력이 떨어진다고 봐야지요. 이지마 나나오에게 있어 사에키 기누에의 죽음은 그다지 개인적이지 못합니다. 사실 세상 살기 참 각박한데도 불구하고 소설가는 자신의 주인공에게 너무 넓은 오지랖을 부여하는 경향들이 있어요. 참 다들 착해요.

   그럼 이제 너무나 멋진 코드웨이너 스미스의 소설 두 편을 언급해 볼까요.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저는 일반 독자를 자처하기 때문에 당연히 처음 만나는 작가의 작품에 대처하는 올바른 태도 및 관점 따위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감상 도중 충격을 받아도 어느 정도는 퉁겨낼 수 있어요. 하지만 이 매력적인 소설은 나에게 두 번이나 현기증을 심어주었네요. 그럼 {수즈달 중령의 범죄와 영광}을 먼저 이야기할게요. 먼저 도입부를 슬쩍 읽어볼까요. 심상치가 않아요. 이 소설에서 인류는 그 자체 점점 신화에 가까운 서사시로 변모했군요. ‘아라코시아’라는 행성 자체의 원시적 세계에 대한 묘사는 탁월하다고 할 수밖에 없더군요. 맞아요. 마치 오랜만에 {데빌맨}을 다시 읽는 기분이었습니다. 기억나시는지 모르겠네요. 만화책을 가지고 있지 않아 확실하진 않지만, {데빌맨}에서 주인공이 데몬의 역사에 대해 주입받는 이야기가 초반부에 나오지요. 거기서 작가가 개입합니다. 마치 {수즈달 중령의 범죄와 영광}에서의 코드웨이너 스미스처럼요.

   이 이야기를 읽으면 안 된다. 그러니 빨리 책갈피를 넘겨버려라. 읽으면 동요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어차피 이미 아는 얘기일 수도 있다. 알고 있으면 아주 불안해지는 얘기다. 사실 모르는 사람이 없다. 수즈달 중령의 범죄와 영광은 지금까지 수많은 방식으로 회자되어 왔으므로. 이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안 된다. (……) 그러니까 깨끗하게 잊고 다른 곳으로 가서 뭐든 좋으니 다른 글을 읽기를 권한다.

   이런 식으로요. 그리고 <데빌맨>의 작가 또한 비슷한 어조를 사용하고 있어요. 경고하는데 이제부터 나오는 이야기는 뛰어넘어도 좋다. 명심해라. 읽으면 반드시 불쾌해진다. 그렇다고 바보가 아닌 이상 정말로 읽지 않는 독자가 있을까요. 그리하여 아라코시아 인들은 정말로 데몬들처럼 불우한 전투종족이 되어 원시세계 속을 뛰어다닙니다. 여기서 로저 젤라즈니가 영향을 받았다는 말은 너무도 완벽한 설득력을 지니게 되지요. 어리석은 독자는 감동하였습니다. 서구 SF에서 설마 {데빌맨}의 향기를 맡게 죌 줄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고양이족! 하악하악. 인류는 어느 순간부터 야생과 과학이 공존하는 시스템을 긍정하게 되는군요. 어찌 되었건 고양이족은 너무나 귀엽기 때문에 이 소설은 최고입니다. 장화 신은 고양이 여럿이 서사시 갈래의 대사를 읊으며 전투를 벌이다니!

   {황금의 배가…… 오! 오! 오!}도 제목을 입으로 발음하기 좀 남세스럽긴 해도 재미 면에서는 충분히 만족했습니다. 서사시적인 글쓰기는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영웅들의 시대는 계속되어야만 해요.

   토마의 만화 {오늘 저녁 봉골레 파스타}는 충분히 팝툰…… 아니 로맨스 장르에 부합되었고 장겹섭의 만화 [인 더 라비린스]는 항상 그랬듯 훌륭하군요. 작가에게 기대하는 것 이상이 나올 때는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몽상만화 [지문사냥꾼]에서도 {제불찰 씨 이야기}가 가장 제 취향에 부합되었고, {그와의 짧은 동거} 또한 현실과 일상을 뒤트는 솜씨가 일품이었습니다. 다만 [인더 라비린스]는 마무리가 조금 아쉽네요. 220페이지에서 잠시 [베르세르크]의 광기 어린 가츠 얼굴을 본 것은 뜻밖의 즐거움이었어요. 앞으로도 장경섭의 만화는 간간이 실렸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입니다.

   박도빈의 {망고가 있는 자리}는 꽤나 각색이 안타깝네요. 막대한 분량을 투자하고도 연출이 지나칠 정도로 심심하지요. 공감각을 끌어내려고 일부러 올컬러를 사용했는데도 불구하고 지나친 설명이 거슬립니다. 각색이란 조금 더 자유로워도 되는 것 아니었던가요. 이대로 12호로 넘어가면, 정말로 원작의 내용을 확실히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건가요?

   국내 과학소설의 출판 현황을 고찰한 {국내 과학소설 출판 산업, 한계와 희망을 이야기하다}는 2회에 걸쳐 정말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습니다. 나머지 낚이기 좋은 기사들도 즐거웠습니다. 편집장과 편집자가 바뀌는 와중에도 계속 신경을 써주어 좋은 잡지를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매달마다 [판타스틱] 읽는 즐거움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답니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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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호에 로맨스 특집 운운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스파이물 특집이라고 해야 하지 않으려나요. 기사 하나 달랑 싣고, 로맨스 특집 운운한다는 건 좀. 그래서인지 이번 호에는 로맨스 특집이라는 이야기는 눈에 띄지 않더군요.
    하지만 지난 호에 광고했던 건? 그냥 스리슬쩍 구렁이 담?
    듀나의 단편은 개인적으로 무척 좋았지만... 장르 로맨스는 아니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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