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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적의책에서 근간 예정인 [화성의 공주](왼쪽), 그리고 아이디어회관 시리즈로 출간되어 절판되었다가 ‘SF직지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SF팬들에 의해 복원된 [화성의 존 카아트].

1. 돌아온 존 카터
아이디어회관 시리즈의 하나로 우리나라에 첫 선을 보인 ‘화성의 존 카아트’가 돌아왔다. 아동용으로 번역되어 소년소녀 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던 이 작품은 사실 어른들을 위해 쓰여진 어른의 엔터테인먼트인데, 이제야 중역과 축약이 아닌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완역본으로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다.
물론 작품의 정수만은 변하지 않아, 여전히 활기차고 신나는 영웅 모험활극이다. 스페이스 오페라와 히로익 판타지의 원류로 여겨지는 작품이지만 SF인지 판타지인지, 설정이 어떤지, 고증이 맞는지 조금도 고민할 필요 없이 신나게 즐기기만 하면 그만인, 롤러코스터와 같은 소설이다.

2. 화성 시리즈가 끼친 영향
E.A. 포나 쥘 베르느가 그랬듯 장르소설이 현대와 같이 분화되기 이전의 작품은 수많은 근연 장르들의 시조이며 영향을 주고받는 역할을 했는데, 이 [화성의 공주]를 위시한 바르숨(화성) 시리즈 역시 이전 작품의 장점을 이어받고 SF와 판타지의 서브 장르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작품은 알려지지 않은 신비한 장소에서의 모험을 그린 비경 탐험물이고, 태양계의 행성들을 무대로 한 SF들에 영감을 준 SF의 원류이며, 그러면서 SF의 과학적이고 지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서부극에서 이어진 유쾌한 모험을 그린 스페이스 오페라의 시초이고, ‘검과 마법(Sword and Sorcery)’이라 불리는 히로익 판타지의 기원이고, 행성 로맨스(*1)의 원조이며, 일종의 차원이동물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비경/모험소설이라는 면에서는 동시대이나 약간 먼저 활약한 문학적 선배 헨리 라이더 해거드의 뒤를 이었고, 코난 시리즈의 로버트 E. 하워드에 깊은 영향을 주어 영국식 하이 판타지와는 다른 미국식 판타지의 전통을 이어갔다. 우주를 무대로 한 서부식(웨스턴) 모험활극이라는 점에서는 행성 로맨스나 (잘 쓰이지는 않지만) 검과 행성(Sword and Planet)이라는 서브장르 자체가 이 작품을 시작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며,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여 [스타트렉], [스타워즈]로 이어지는 미국 팝컬처의 한 축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후 수많은 후배 작가가 외전적인 작품을 쓰거나 자기 작품에 이 작품에서 따온 인명ㆍ지명을 쓰며 애정과 존경을 표했다(*2). 가장 최근의 예로는 일본 SF애니메이션 [탑을 노려라! 2]에 나오는 화성의 무장집단 이름이 ‘바르숨’인 것에서도 이 작품이 장르 전체에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를 실감할 수 있다(*3).



▲ 페이퍼백으로 출간된 [화성의 공주]의 다양한 판본들. 차례로 Penguin Classics(2007), Leonaur Ltd(2006), Lulu.com(2006), Dover Publications(2005), Modern Library(2003)에서 출간된 판본들이다.

3. 화성의 정복자가 아닌, 화성인이 된 영웅
사실 100년 정도 된 작품인지라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자면 눈살이 찌푸려지는 부분도 없잖아 있다. 미국적 가치관을 지닌, 자칭 버지니아 신사인 백인 남성이 유색인을 연상시키는 화성인들과 싸워 이긴다는 점에서는 미국식 영웅주의의 산물이며 (많은 스페이스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무대만 화성일 뿐 판타지나 별반 차이 없는 내용에 허술한 세부 설정들도 문제삼을 만 하다.
하지만 1912년에 미국 독자를 위해 쓰여진 작품에 오늘날의 정치적 공정함을 기대하는 건 무리이기도 하거니와, 애초에 과학적 엄밀함을 고려하지 않은 본작에서 화성은 같은 작가의 유명한 시리즈 무대인 지저세계 펠루시다와 마찬가지로 신비롭고 환상적인 배경이요 무대장치일 뿐이다.
오히려 의외로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용감한 데자 소리스의 모습, 적대시하던 화성인과 우정을 쌓고 협력하는 모습에선 작자의 감성이 미국/남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지만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백인 남성과 유색인 공주의 로맨스는 촌스러울 정도로 전형적이긴 하지만 적어도 존 카터와 데자 소리스는 그들이 상징하는 스테레오타입을 극복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하긴 힘들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백인 남성인 존 카터야말로 화성에서는 이방인이고 소수자의 위치이기 때문에(그가 화성 도시에 잠입할 때 피부를 붉게 칠해서 위장하는 부분을 떠올려보라), 주인공 존 카터의 시각에서 보면 그의 활약을 그린 모험물이며 이방인으로서 이국의 공주를 얻게 되는 출세극이겠지만 외적인 시각, 즉 화성이라는 세계관 속에서 조망하면 백인이 엽총 들고 인디언을 사냥하는 서부극보다는 귀화한 외국인 장수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전쟁물을 더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강력한 능력을 지닌 영웅의 활약을 그렸으되 거대한 세계 속에서는 이방인이며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개인의 이야기일 뿐 결코 강자가 약자를 쳐부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리고 그가 적국을 쓰러뜨리기 위해 취한 것이 협력이요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우정과 신뢰였음을 떠올려보라. 그러니 (재미를 위해 ‘정복기’라고 표현하긴 했으나) 존 카터가 화성을 ‘정복’했다고는 볼 수 없다. 최후의 자기희생과 유언에 이르기까지 이 이야기는 그가 화성에 적응하여 귀화에 이른, 화성인이 되는 과정을 그린 셈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을 미국식 영웅주의로 단정짓는 걸 성급한 시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4).



※ 주석
1   Planetary Romance. 여기서 로맨스는 오늘날의 연애물이 아니라 기사도 로망의 의미로 쓰인다(그래서 홍인기의 경우는 ‘행성 대로망’이라고 번역한다).
http://en.wikipedia.org/wiki/Planetary_Romance 참조
http://inkeehong.com/articles/09_themes_terminologie_of_the_fantastic/1193_ca_eeia_planetary_romance.html 참조
2   http://en.wikipedia.org/wiki/Barsoom#Legacy 참조
3   정확하게는 외전격인 소설 [탑을 노려라! 2: 초컬릿 스타]에 나옴.
4   http://djuna.cine21.com/movies/cliches_0035.html 참조

※ [화성의 공주]는 기적의책 출판사에서 근일 출간 예정으로 출판사측과의 협의하에 소개를 겸하여 한 발 앞서 리뷰하게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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