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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을 저지하라

스프레이그 드 캠프, 안태민 옮김, 불새, 2015년 1월


pilza2 (pilza2@gmail.com http://www.pilza2.com)



1. 재미있는 이유

 우선 이 말을 꼭 해두고 시작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이 소설은 재미있다. 필자가 과거 쓴 리뷰를 보면 사실 ‘재미있다’보다 ‘재미없다’는 표현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재미란 주관적인 것이며, 과거의 소설을 오늘날의 독자가 보면 재미없게 느낄 수 있음은 이전 여러 리뷰를 통해 몇 번이나 거듭 확인한 바 있다. 그럼에도 왜 이 소설에 굳이 재미있다는 수식을 붙였는지 설명하고 넘어가겠다.
 결정적인 이유는 그동안 불새 출판사의 작품들이 얻은 선입견 때문이다. 불새에서 나온 책들은 옹호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의미는 있지만 재미가 없는’ 작품들이라는 오명 아닌 오명을 갖고 있다. SF 평론가 고장원은 왜 SF가 안 팔리느냐는 의문에 대해 정말 재미있는 작품을 소개하는지, 만듦새나 마케팅에 문제는 없는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불새는 완전히 ‘망하기 위해’ 거꾸로 가고 있는 셈이다(더구나 아작 출판사에서 과거 절판작을 좋은 만듦새와 마케팅으로 재출간해 히트시키는 것을 보면……).
 참고로 불새 라인업 중에서 의미가 있는 작품과 재미가 있는 작품을 뽑는다면 전자의 경우로 『양심의 문제』, 『최후의 성』을 들 수 있고 재미로 따지면 하인라인의 작품을 들 수 있겠다.
 앞에서 재미가 주관적 기준이라고 했는데, 사실 대중소설이라면 어느 정도는 객관적 지표를 마련할 수가 있다. 개성적인 혹은 감정이입이 쉬운 등장인물, 빠르고 긴장감이 넘치는 전개, 비교적 짧으면서 몰입이 쉬운 문장, 다음 내용이 궁금해지는 사건(페이지 터너라고 부른다)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런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본작은 불새에서 군계일학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재미가 있다. 빠른 속도감, 개성적인 등장인물, 독특한 발상, 연속으로 터지는 사건, 다음이 궁금해지는 전개, 그러나 어렵지 않고 이해하기 쉬운 내용 등을 모두 갖추고 있다. 책이 출간된 2015년에 신인 작가의 신작으로 처음 나왔어도 먹힐 만한 발상과 플롯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작은 대체역사의 초기 걸작으로 불릴 정도로 의미를 갖고 있으면서 현대 대중소설에게 요구되는 재미 요소까지 갖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놓치기 아까운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2. 어디까지 알아보고 읽으세요?

 너무 작품소개가 없는 불새 출간물 특유의 성격 탓에 본작을 얼만큼 소개해야 할지 망설여지는 게 사실이다. 아무 정보 없이 읽었을 때 얻어지는 발견의 재미도 있기 때문에 섣불리 내용을 밝히기가 곤란하다.
 그래도 이 정도는 스포일러라 생각하지 않으니 미리 밝히자면 시간여행은 갑작스럽고 이유와 방법 같은 것도 드러나지 않는다. 다시 돌아오는 일도 없다. ‘아, 꿈이었구나’ 하는 식도 아니다. 주인공 패드웨이가 중세 유럽으로 이동하여 그대로 평생 살면서 끝난다.
 작품 내부에서는 시간여행에 대한 논리적이고 과학적 근거도 안 나온다. 대다수 시간여행을 다룬 작품이 이유나 원리를 설명하려 애쓰고, SF와 거리가 먼 모험활극이란 비난을 받는 마이클 크라이튼의 『타임라인』조차 장황하고 복잡한 시간여행 방법을 소개하느라 초반을 할애하는 것에 비해(명작으로 칭송받지만 『둠즈데이북』 같은 경우 특히 설명 부분이 길어서 SF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지루하게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본작은 시간여행의 이유와 방법은 전혀 안 나온다. 그냥 번개가 옆에 떨어져서 몸이 붕 떴는데 과거로 이동했더라, 이게 전부다.
 현대인이 판타지 세계로 뜬금없이 이동하는 흔한 양판소, 환협지보다도 더 간단하고 빠른 이동이다. 최소한 양판소에서는 사고 등으로 죽으면서 이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그것도 아니다.
 즉 시간여행의 가능성이나 과거를 바꿀 때 현재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논리를 다루려는 의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현대의 지식인이 과거를 바꿀 수 있을까, 있다면 어떻게 바꿀까’라는 사고실험에만 집중하고 있다. 주인공은 역사학자로 역사에 대한 지식이 출중하다는 점 외에는 특출난 능력이 없다. 심지어 총 한 자루도 안 가지고 사실상 맨몸으로 이동했으며, 중세에서 총기를 만드는 능력도 없다(『아서왕과 코네티컷 양키』에 대한 문학적 반론을 보는 것 같다). 자기 몸 하나 간수하는 건 어렵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패드웨이는 중세 유럽의 역사를 바꿔 긴 암흑기를 막고 문명의 발전을 몇 십, 몇 백 년이나 앞당기려고 한다.
 이를 위해 그가 시작한 일은 역시 직접 읽어보고 알아보기를. 전술했듯 전개가 무척 빠르므로 독자는 패드웨이와 함께 중세기를 겪으면서 파란만장한 반생을 함께 보내게 된다. 과연 암흑기라 불리는 중세를 지식과 과학과 이성의 힘으로 구원하고 찬란한 빛의 문명을 일굴 수 있을 것인가?



갑자기 생각나 덧붙임.
 한 가지 걸리는 점은 복선 한 가지(158쪽)를 회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쓰다가 잊어버렸든지 아니면 처음부터 복선으로 여기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다뤘을 수도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 무언가 중요한 의미가 있는 복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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