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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인간

메리 셸리, 김하나 옮김, 아고라, 2014년 7월


pilza2 (pilza2@gmail.com http://www.pilza2.com)



지난번 『뒤돌아보며』에 이어 다시 아고라의 〈재발견총서〉를 소개하게 되는데, 우연찮게도 이 작품 역시 필자가 만든 ‘번역되지 않은 고전 목록’에 있었던 작품이다. 아고라 측의 안목은 나쁘지 않다고 판단되지만 아쉽게도 괄목할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저 이 총서가 끊기지 않고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우선 본작에 대해 소개하려면 짧게라도 저자 메리 셸리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프랑켄슈타인』과 본작 두 작품만으로도 메리 셸리는 SF라는 장르에 지워지지 않을 족적을 남겼다. 특히 『프랑켄슈타인』의 경우 평론가에 따라서는 현대적 의미를 가진 SF 장르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작가이자 평론가 브라이언 올디스가 대표적이다). 비록 대다수는 포, 웰스, 베른을 꼽지만.


본작 역시 포스트 아포칼립스, 종말소설의 장르의 시초이자 원조 격으로 대우받고 있다. 따라서 완역본으로 소개되었다는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최초가 곧 최고는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장르에 있어서 최초가 최고인 경우는 많이 없고 사실 그래서도 안 된다. 더 많은 모방작과 후계자가 이어져야 장르가 융성하게 되고, 작가와 작품이 많아져야 그 속에서 영향과 경쟁을 거쳐 진정한 걸작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밀알이 죽지 않으면 그대로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성서의 문구처럼 한 작가 혹은 한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아도 혼자 고립된 채 있다가 잊히면 그걸로 끝이다.


가령 한국 판타지 소설을 보자. 『드래곤 라자』는 큰 인기를 얻었고 또한 좋은 작품이라는 것에 많은 이들이 동의를 하지만 이후에 ‘제2의 『드래곤 라자』’라든지 영향을 받은 모방작, 아류작으로 알려진 작품이 거의 없다. 간혹 히트를 쳤다는 의미에서 드래곤 라자를 비교하여 언급한 경우는 있으나 내용이 비슷하다든지 이른바 철학적인, 문학성이 있는 판타지라는 후계 작품을 찾기는 힘들다.
전민희를 언급하는 사람은 있지만, 두 작가는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시작했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은 부분이 사실상 없기 때문에 두 작가 모두 별도로 취급해야 하고, 전민희가 한국 판타지 장르에 끼친 영향 역시 미미하므로 결국 외딴 섬처럼 남을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반면 예를 들어 『카르세아린』은 유치하고 서툰 소설이지만 드래곤이 사람으로 변신해서 인간 세상에서 모험을 펼친다는 설정이 큰 인기를 끌어 이후로 아류작이 그야말로 쏟아져 나왔고 이런 ‘드래곤의 유희’가 한국 판타지의 커다란 서브장르 중 하나로 굳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 판타지 소설의 역사와 조류를 정리하는 사람이라면 『드래곤 라자』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카르세아린』을 비중 있게 위치시켜야만 한다.
찬반양론이 있었던 귀여니 역시 마찬가지다. 귀여니의 작품 자체의 수준만 두고 왈가왈부할 게 아니라 끼친 파급력과 영향력, 뒤를 이어 쏟아진 모방작과 유행을 통해 로맨스 장르를 영화·드라마의 주요한 원작으로 만드는 등 양지로 크게 성장시켰고 현재 웹소설의 주류가 되기까지의 큰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에 족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메리 셸리라는 작가와 대표작 두 작품은 SF와 호러 장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소설만이 아니라 특히 『프랑켄슈타인』이 호러 영화에 끼친 영향력은 크다), 특히 당시의 시대를 생각할 때 활동에 불리한 여성이라는 입장에서 과학이 낳은 괴물과 세계의 종말을 각기 다룬 소설을 남겼다는 점에서 더욱 높이 평가할 만하다.
결국 명작, 걸작은 오래 살아남은 작품이 얻을 수 있는 명예라고 봐야 한다. 『프랑켄슈타인』이 ‘단순한 과학소설을 넘어’ 운운하는 찬사(?)와 함께 문단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에 보란 듯이 포함되는 현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문학적 의의는 대충 알았으니 본작의 내용으로 돌아오자.
종말소설의 원조라면 굉장하고 재미있을까, 생각하고 덤벼들었다간 실망할지도 모른다. 『뒤돌아보며』 리뷰에서도 똑같은 말을 하지 않았던가? 옛날 소설을 지금의 독자가 읽으면 재미없는 것은 사실이며 이는 어느 쪽의 잘못도 아니다. 지금 시청자에게 흑백TV나 무성영화를 보여주면 일단 재미없게 느껴지듯이. 더구나 재미라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의 결과이고 『뒤돌아보며』와 본서를 재미있게 읽은 독자에게 이 리뷰는 실례가 될지도 모르니 섣불리 재미가 있다 없다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오늘날 이 소설을 일반적인 장르소설로 출판사에 투고한다면 편집자는 10페이지도 못 넘기고 쓰레기통에 넣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작법서도 심사평에서도 강조하는 건 도입부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종말소설이라면 사람이 죽어나가든가 멸망 후의 황폐한 세상을 보여주며 시작해야 하는 게 클리셰이긴 하지만 정석적인 도입부다. 하지만 이 소설은 주인공의 부모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몰락한 가난한 귀족 자제임을 드러내기 위해 길고 긴 분량을 할애하며 지루한 넋두리를 늘어놓고 있다.
스포일러가 아니리라 믿고 밝히자면 본격적으로 전염병이 창궐하는 게 1권 후반부터, 인류가 멸망하는 건 2권에 해당하는 3부에나 되어야 등장한다. 그 전까지는 18세기식 여섯 남녀의 통속극 같은 애정사가 이어질 뿐이다.


본작의 무대는 2100년 정도로 보이지만 작중에 미래를 묘사하는 부분은 거의 없고 등장인물의 행동과 대사 등은 소설을 쓴 1800년대 당시 그대로다. 작가는 굳이 미래임을 드러내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이 부분도 장르의 클리셰에 익숙해진 독자들이 실망할 수도 있는 요소이다. 이런 식으로 딴죽을 걸자면 끝이 없기 때문에 말로만 21세기고 그냥 19세기 소설이라 생각하고 읽는 게 편할지도.
그렇게 여기면 초반의 여섯 남녀 이야기는 러브코미디 드라마 못잖게 쉽게 흘러간다. 맺어질 남녀는 금방 서로에게 빠져들고 딱히 밀당도 없이 수월하게 맺어진다. 유일하게 시련이 있다면 아이드리스의 어머니가 심한 반대를 해서 강제로 헤어질 위기에 처하는 것인데, 이 역시 사랑의 도피를 하자 의절하는 대신 포기한다며 쉽게 물러났고 커플은 결혼에 성공한다.
이 귀족 자제들은 하는 일도 없이 산책과 토론만 하며 유유자적 지내다가 야심을 되찾은 레이먼드가 총리에 해당하는 높은 자리에 당선되면서 이야기가 급물살을 탄다.


워낙 긴 이야기이라서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한 인물 소개문을 첨부한다.
라이오넬(화자) - 몰락 귀족 가문의 아들. 가난하지만 성격이 좋은 전형적인 주인공.
퍼디타 - 라이오넬의 여동생.
에이드리언 - 영국의 마지막 국왕의 아들로 라이오넬의 절친.
아이드리스 - 에이드리언의 여동생, 라이오넬에게 첫눈에 반한다. 주인공 보정이라 해도 할 말 없음.
레이먼드 - 전쟁 영웅으로 야망을 가진 인물. 아이드리스와 결혼해서 신분상승한 후 왕이 될 야심을 품는다. 그러나 이후에는 퍼디타를 진정으로 사랑함을 깨달음.


이렇듯 속칭 끓는점(잡지 〈판타스틱〉에서 만든 용어로 작품에 빠져들게 되는 지점)이 늦은 작품이라 극단적으로 말해 종말소설 장르를 원하는 독자는 1부를 읽지 않고 넘겨도 무방하다. 사실상 1부는 등장인물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인물 소개문만 숙지해도 충분하다.
본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2부에서 비로소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하며 3부는 급기야 주인공 일행 주위에도 사망자가 속출하며 영국을 떠나 여행에 나서고, 결국 제목 그대로 ‘최후의 인간’만이 남을 때까지의 절망적인 여정을 그리고 있다.


역자 후기에도 밝혔듯 이 소설이 세계 최초의 종말소설(이전에도 다른 작품이 있겠지만 장르의 기원이 된 작품이라는 의미다)일 수 있었던 이유는 작가 스스로의 체험을 기반으로 ‘나 주위의 죽음’으로 인한 ‘나의 세계가 멸망하는 것’을 그렸기 때문이다. 이는 즉 일본 서브컬처계에서 말하는 세카이계(セカイ系)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물론 의미가 일대일로 대응되는 건 아니다. 주인공은 세계의 변화 및 멸망에 관련된 주체가 아니고 멸망하는 사회의 모습을 그저 관찰자로서 세심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잃다보면 내 주위 인물의 사망만이 사건이며 멸망하는 사회는 부수적인 요소(혹은 자연적인 현상)로 그려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엔더의 게임』과도 통하는 점이 있다.


다만 이런 식으로 작가의 개인사를 투영한 내용이라는 기존의 정신분석학 이론에 따른 비평은 장르소설에 맞지 않는다는 점은 반드시 언급해야겠다. 실제 다수의 장르소설은 재미와 도피를 위해 쓰였으며 작가의 체험이나 사회의 반영이 적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당대의 문학은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이고깽(고등학생이 이세계에 가서 마음껏 활약하는 내용의 판타지 소설을 비하하는 명칭)에서조차 한국 고등학생의 가혹한 입시경쟁과 스트레스, 청소년의 도피심리와 일탈욕구 등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어찌 되었든 이곳은 환상문학 웹진의 서평란이니만큼 장르소설의 문법에 맞게 살펴보자면 조금 길고 지루한 1부는 2부와 3부로 이어지는 비극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볼 수 있고, 당시의 시대적이며 기술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미래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염병 전파로 인한 혼란과 문명사회의 붕괴를 훌륭하게 그려내었다.
특히 사람이란 이토록 쉽게 죽으며 문명도 인간이란 존재도 빠르고 덧없이 사라질 수 있을 거라는 깊은 허무주의와 비관적인 세계관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는 확신을 주게 된다.
SF의 시초이자 거장이라는 찬사를 받는 메리 셸리에 대해 의심을 품은 독자가 있다면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지금까지는 소개된 번역 텍스트가 『프랑켄슈타인』밖에 없기에 판단하기가 어려웠다면 여기에 당당하게 하나의 증거가 더 있다고.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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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이립 16.06.05 20:39 댓글

    카르세아린과 귀여니에 대한 통찰력있는 해설을 보여주는데 반응이 적어서 제가 다 섭섭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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