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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버스

곽재식 외, 에스콰이어, 2011년 9월



송한별 (http://corpscity.egloos.com)



16살 에스콰이어의 선택, 멀티버스
-SF단편집 『멀티버스』 통합리뷰


들어가는 문턱에서 잠깐
남성지 [에스콰이어]에서 16주년 기념으로 선물을 줬다. [에스콰이어] 2011년 10월호 부록은, 무려 SF 단편집이다. 아홉 편이나 수록되어 있는데다가 그 중 무려 일곱 편이 신작이다. 작가들의 넘치는 의욕이 듬뿍 담긴 바로 그 까맣고 파란 단편집이 [멀티버스(Multiverse)]다. 안타깝지만 이 글이 공개될 시점에 [멀티버스]를 입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앗차, 하고 있는 분들께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멀티버스]에 관심이 있는 착한 독자는 거미줄 같은 인맥을 동원하자.
[멀티버스] 통합리뷰인 본 글은 작가론을 피해 작품에만 초점을 맞췄다. 각각의 작품을 읽으면서 떠오른 발상을 키워드 삼아 다양한 사고의 가지를 뻗어나가고자 한 노력은 그 일환이다. 간략하게 요약한 줄거리에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나중에 책을 읽을 독자는 백스페이스를 누르길.
아직 백스페이스를 누르지 않았다면 하나만 더. 워낙 글이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오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니 본 글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읽기를 권한다. 그리고 떠오르는 생각을 과감하게 표출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본 글처럼 말이다. 원래 이야기란 이렇게, 또 그렇게 만들어가는 게 아니던가.

* 이하의 리뷰 순서는 작품 수록 순서에 따랐다.


진화신화 / 김보영
진화에 필요한 시간이 극단적으로 짧은 세계가 있다. 그곳의 진화는 과학적이고 또한 신화적인 개념이다. 진화와 신화라는 두 가지 요소가 공존하고 있는 그 세계는 신비하면서도 독자의 상식이 통하는 기묘한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개인의 생각과 행동에 의해 진화가 단기간에 일어난다. 상황만 갖춰지면 상당히 빈번하게 일어나기도 하는 모양이다. 야밤에 나다니다보니 고양이 눈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선왕살해 사건이 일어나고 살해된 선왕의 아들인 태자가 왕위찬탈자의 눈을 피해 달아났다가 결국 복수를 한다는 기본 구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드물지 않지만, 김보영 작가의 손에 들어와 구성의 손길을 거치고 나니 상당히 색다른 맛이 난다. 이야기를 구조적으로만 이해하려 든다면 이 글의 매력을 수십 분의 일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야기는 태자의 심리상태를 따라 진행된다. 태자는 모습을 바꾸고 물속으로 들어가 은둔하기도 하는 등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최대한 몸을 숨기고자 하지만 결국 왕위찬탈자에게 발각되고 만다. 사람들이 기괴하게 변한 태자의 모습을 보고 제를 지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태자의 모습이 왕위찬탈자를 몰아낼 신수처럼 보였으리라. 태자가 용으로 변하리란 것은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신화라는 인류보편적인 형식을 빌린 만큼 많은 단서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재미있는 것은 왕위찬탈자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한 태자가 바로 그 노력 때문에 왕위찬탈자의 눈에 띄고 마는 상황이다. 몸을 숨긴 태자가 세상이라는 무대로 끌어올려지는 것은 순전히 타의에 의해서다. 사람들의 부름에 의해 모습을 드러낸 태자는 용이 되어 승천한다.
용이 되어 승천한 태자가 왕위찬탈자의 죽음에 지대한 공헌을 했음은 당연해 보이지만, 실상 태자는 왕위찬탈자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는다. 결국 태자는 사람들의 기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은 아닌지? 태자는 승천하며 지상에 비를 뿌렸고, 이것은 가뭄으로 상징되는 왕위찬탈자의 악정이 끝났다는 뜻이다. 잠든 태자를 깨워 비를 내리게 만든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고. 보기에 따라서 악정을 종결짓고 새로운 세상을 연 것은 태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은 방법을 통해 합당한 결말을 맞이하게 하는 것. 이 작품이 가지는 장점은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진화'와 '신화'라는 상반되는 소재를 잘 녹여냈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대단하다.
이런 말을 하면 작가가 좋아할지 모르겠다. 이야기의 구조보다는 상황의 연출이 더 재미있고, 그것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태자의 의식에 따라 흘러가는 작품의 분위기다. 그 무엇보다도 깔끔한 분위기가 매력적이다. 설정에 대한 내용은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독자는 작품 속으로 풍덩 빠져들 수 있다.
다만 ‘진화’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작품에서 언급하고 있는 ‘진화’의 특성은 ‘변화’에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진화에서 시간성을 빼버리면 각 개체의 모습이 극단적으로 변하는, 상당히 강력한 형태의 변화라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한다. 음, 이런 부분은 신화에게 떠넘기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안개 속에서 / 이수현
경의가 경의로서의 수명을 다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이에 대한 가장 흔한 답은 '그것에 익숙해질 때'다. 인간의 적응력은 충분한 시간만 주어지면 어떤 일이든 익숙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렇게 적응해버리면 어떤 것도 더 이상 신기하지 않다. 경의는 일상이 되어버린다. 기적조차 반복되면 일상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안개}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떠올랐으나, 잠시 보류. 대신 작중 인물들의 권력구조를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보통 어떤 사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사회 밖에서 온 외부인이다. 작품의 배경인 안개 끼는 마을의 경우, 여행이 직업이라고 하는 이상한 여행객이 외부인의 역할을 수행한다. 여행객은 마을사람들이 무시하는 노인의 말에 맞장구치면서 마을사람들의 관계에 균열을 낸다. 사람이 자주 찾지 않는 마을의 특성상 여행객에게는 외부인이란 이유만으로도 모종의 권위가 부여되는데, 마을 여자들이나 꼬드겨 내러 온 것이 아니냐며 불안해하는 남자들의 심리는 여기에 기인한다. 여행객의 권위는 대화를 통해 여행객과 공감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인 노인에게로 전이된다. 이로써 마을의 권위체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물밑에서 흔들리기 시작한 권력구조는 투닥거리기 시작하는 마을사람들의 태도로 표출된다. 다행히 마을사람들은 아주 늦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 이 모든 혼란의 중심에 여행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묻는다. 도대체 여기 왜 온 거냐고.
여행객은 각지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마을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바로 그것이 여행객이 가진 강점이고, 그 강점은 여행객에게 부여된 권위의 뿌리가 된다. 뭔가 '알고 있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좋은 취급을 받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상황은 여행객이 정체를 드러내면서 무너진다.
여행객에게 안개고등어의 산란기 이동은 새벽안개를 헤치고 달려와서라도 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광경이다. 반면 마을사람들에게는 그렇고 그런 평범한 상황이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는 것과 마찬가지인 자연현상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까? 바로 여기서 흔들리던 권력구조는 극적으로 안정을 되찾는다. 외부인으로서의 강점은 여행객에게 권위를 안겨주었지만,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외부인인 여행객은 마을 내부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뜻이다. 이것은 명백한 단점으로 작용한다. 안개고등어의 산란기 이동 따위를 보고 좋아하는 여행객은 마을사람들에게서 결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쟨 뭘 저런 걸 보고 좋아한대? 멀리서 왔다고 하더니만, 별거 없네"라는 마을사람들의 판단은 합리적이지는 않다.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처음 논했던 ‘경이감이 수명을 다 하는 순간'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마을사람들은 여행객의 실체를 깨달았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여행객은 타지에서 온 식자에서 애송이로 평가 절하된다.
여행객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평가가 역전되는 순간 여행객과 마을사람들이 보이는 태도는 정반대가 된다. 여행객이 늘어놓는 이야기에 심취하여 이것저것 물어보던 마을사람들은 갑자기 시큰둥하게 “우리 집을 좀 비껴가줬으면” 한다. 여행객은 갑자기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아이가 되어 구경을 시작하고. 위태롭게 흔들리던 마을의 권력구조는 안정을 되찾고, 여행객은 마을의 권력구조에 스며들지 못한다. 여행객은 안개고등어의 산란기 이동이 끝나고 안개가 걷히면 마을에 녹아들지 못하고 떠날 것이다.

모조 지구 혁명기 / 정세랑
창작자는 자신의 창작물에 대해 어디까지 관여할 수 있을까? SF나 판타지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창작자-창작물의 관계는 부모-자식 관계인데, '생명의 신비'라는 윤리적인 개념을 배제하면 자식은 분명 부모의 굉장히 창의적인 창작물이다. 단순하게 창작자-창작물의 관계로 생각할 때와 부모-자식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생각할 때의 느낌은 꽤 다르지 않은가? 그 차이가 조만간 인류가 맞이하게 될 윤리적 갈등지점이 될 것이다.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창작자는 창작물에 대해 어디까지 관여할 수 있을까? 나라면 ‘거의 없다’라고 답하겠다. 창작물이 완성된 순간 그 창작물은 창작자로부터 독립한다. 아니 정확히는 독립해야만 한다. 태아가 열 달이 지나면 모체로부터 독립해야 하는 것처럼. 창작자=모체는 창작물=아이에게 신체적, 유전자적, 문화적, 사상적, 기타 등등 측면의 영향력을 끼칠 수는 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결정해 줄 수는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명확하게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것뿐. 하지만 그럼에도 완벽이란 없이 오차가 발생하고 마는 것이 섭리다. 누군가 열심히 책을 만들어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길 원한다고 해서 책을 냄비받침이나 베개로 쓰는 사람이 사라지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제2지구’, 혹은 ‘모조 지구’는 ‘디자이너’, 혹은 ‘아트 디렉터’라고 불리는 유명한 전과자가 만든 테마파크다. 실상은 꿈과 희망이 넘실거리는 테마파크가 아니라 개인적 악취미가 듬뿍 들어있는 사유지지만 말이다. 고양이 남자는 스스로가 펫이나 다름없다며 현실을 정확히 지적한다. 일단 모조 지구가 디자이너의 손에서 태어난 것은 사실이다.
작품에서 디자이너는 많은 실수를 저지르지만, 그중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단연 지구인 출신 홍보직원을 채용한 것이다. 구색 맞추기에 불과한 변덕에 발목이 잡힐 줄은 몰랐겠지. 지구인 직원이 모조 지구에 오기 전까지 모조 지구의 생명체들은 상호비협조적인 독립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형제들끼리는 원래 그렇다는 고양이 남자의 말은 가감 없이 상황을 설명한다. 대부분의 생명체들은 디자이너에게 크고 작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불만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계기는 천사의 세 번째 날개 발현이다. 그 옆에서 불만을 하나로 모은 것은 지구인 직원이었고. 지구인 직원이 없었다면 모조 지구의 생명체들이 협력하는 상황이 찾아왔을까? 기폭제만 적절한 타이밍에 주어진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구인 직원은 적절한 타이밍에 나타난, 굉장히 성능 좋은 기폭제다.
고양이 남자와 나팔꽃 언니의 도움을 통해 디자이너와 대면한 지구인 직원은 평화로운 폭력시위를 통해 원하던 바를 얻어낸다. 천사의 고통을 끝내는 것 말이다. 디자이너는 순순히 천사의 세 번째 날개를 뜯어냄으로써 천사의 고통을 끝냈고, 동시에 자신이 천사에게 부여한 성질도 끝냈다. 천사와 인간이 다른 것은 번식의 가능성 유무와 날개의 유무 정도다. 실용적이지는 않아도 상징적이기는 한 천사의 날개를 끊어내고 예정된 여섯 장의 날개도 돋지 않게 만드는 것은 천사가 디자이너의 계획으로부터 크게 벗어나게 되는 것을 상징한다. 디자이너의 이런 행동은 창작물에 대한 창작자로서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천사는 자궁에서 억지로 끄집어내진 팔삭둥이처럼 디자이너로부터 강제로 독립한다. 독자성을 얻은 천사가 디자이너를 날개로 찔러 죽이는 장면은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합당한 결말이다.
독자성을 얻은 것은 천사 하나가 아니다. 디자이너의 죽음으로 인해 모조 지구는 갑작스러운 새 봄을 맞게 되고 이로써 모조 지구는 지구의 조약한 모조품에서 탈피하게 된다. 창작물들이 일으킨 혁명과 디자이너의 죽음은 지구에는 없는 모조 지구만의 자체적인 역사다. 혁명 결과 모조 지구는 열린 결말을 맞는다. 그렇게 {모조 지구}는 독자성을 얻기 위한 약간 모자란 이들의 혁명기가 된다.
창작물이라는 표현이 어색해 보인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창작자-창작물보다는 창조주-창조물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쓰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창작자-창작물이라는 어휘를 사용한 것은 작품 {모조 지구}도 모조 지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조 지구라는 것은 말하자면 진품을 복사한 복제품이다. 작가는 자신이 인식한 세상을 재구축해 지면 위에 펼쳐놓는 사람이고. 이런 면에서 작가의 작품과 디자이너의 모조 지구는 비슷하다. 포토샵으로 패턴 복사해 놓은 것처럼 현실적이지 못한 정글, 실용성이 배제된 천사의 날개, 정체성이 불명확한 고양이 남자. 나는 이 모든 것들이 어설프게 묘사한 소설의 한 장면으로 보인다.
물론 창작자와 창작물이 완전히 독립된 개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더 이상 날개가 돋지 않아 디자이너의 계획에서 벗어난 천사가 여전히 번식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디자이너는 떠났지만 디자이너의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창작자와 창작물의 관계는 그런 묘하고 미적지근한 관계가 아닐까.

얼음, 땡! / 박성환
기술개발속도가 인간의 적응력을 뛰어넘은 시점이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옛날부터 '요즘 것들은'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쓰인 걸 감안하면 의외로 오래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른들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요즘 것들은'이라고 말하는 것은 최소한 '요즘 것들'은 그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반증 아닐까. 어찌되었든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새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 움찔거리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일신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움찔거리는 것이 맞다. 대략 1400년 후의 세계에 똑 떨어진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다.
냉동수면은 세월을 초월한다는 의미에서 유효한 시간이동 수단이다. 그래서 그런지 냉동수면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멀리는 아서 C. 클라크의 초기작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가깝게는 내가 쓴 단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주인공을 위기에 빠트리는 작품은 별로 없다.
주인공이 1400년을 뛰어넘게 되는 이유는 별게 아니다. 대학 실습 중에 일이 꼬였을 뿐이다. 그 결과 1400년 후의 세계에 똑 떨어진 주인공은 어디 비빌 구석 하나 없이 처음 보는 세상에 풀려난다. 이런 주인공의 상황은 다른 별에서 눈을 뜬 것과 큰 차이가 없다. 1400년 어치 예비군 훈련을 몰아서 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차라리 다른 별에서 눈을 뜨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병동에서 살던 동안 주인공은 확실히 미래세계에 속해 있었다. 치료가 필요한 냉동수면자로서 사회 외곽에나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퇴원하자마자 찾아온 예비군 로봇들에 의해 주인공은 과거의 망령에게 발목을 붙잡힌다. 그 순간부터 주인공을 덮쳐오는 현실은 미래의 탈만 뒤집어썼을 뿐이다. 독하기로만 치면 더 나쁠 정도다. 존재하지도 않는 나라를 위해 정복을 갖추고 예비군 훈련을 받으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게다가 정복을 갖추기 힘들 것 같으면 동대문과 서대문의 마녀를 쓰러트리고 정복을 갖추란다. 이쯤 되면 이미 예비군 훈련이 문제가 아니지 않나? 동네 뒷산의 몬스터를 잡아야 하니 일단 마왕부터 쓰러트리고 시작합시다. 다행히 견습용사의 기억은 여기서 끝난다.
그리고 갑자기 모든 상황이 뒤집힌다. 머나먼 미래에 똑 떨어진 견습용사의 절망은 우주화물선의 기관실에 근무하는 한 지구인의 꿈속 이야기로 전락해 급기야는 “미개한 지구인” 취급을 당하기에 이른다. 1400년을 뛰어넘은 인간의 절망도, 비참하기로 유명한 군대 꿈(!)도 전부 미개하기 짝이 없는 지구인의 뇌내작용으로 전락한다. 스무 페이지 남짓한 내용이 한순간에 헛소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모든 것의 가치가 소멸해버린 뒤에 남는 것은 뭘까? 왠지 철학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그건 인간이 아닐까 한다. 모든 가치가 의미를 상실하는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 끝까지 지켜야 하는 것. 그게 인간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고자 한다. 지금 열심히 타자를 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더니 시밤꿈! 이라는 상황이 오더라도. 그러나 독자 각자가 내리는 답은 모두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답들도 그리 틀리지 않은 답일 것이다. 지키고자 노력하는 선에서는.
조각조각 파편 난 글을 읽는 작업은 쉽지 않다. 취향도 많이 탈 것이다. 어딘지 노장사상도 떠오르고. 하지만 의외로 군대 꿈(!) 하나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사실 군대 꿈이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오보에가 있는 토요일 / 윤이형
꽤 오래전 이야기다. 오게임(OGame)을 하던 나는 윤택한 행성을 만들기 위해 생산시설에 과감한 투자를 감행했고, 그 결과 풍족한 자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유저에게 약탈당했다. 두 번은 안 당하고자 군비에 많은 투자를 했으나 얼마 안 가 나보다 월등히 뛰어난 군사력을 가진 다른 유저에게 다시 한 번 약탈당했다. 헛웃음과 함께 게임을 접었는데, 투테와 안두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문득 그게 생각났다.
나는 한 명의 개인으로서 모두를 대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인식하는 나라는 사람은 결코 하나로 귀결되지 않는다. 나는 부모님에게는 살짝 게으른 아들이고, 형에게는 살짝 건방진 망나니 동생이며, 동생에게는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은 별종이다. 친구들에게는 귀찮은 녀석이지만 가끔은 쓸데없이 활발하기도 하고. 한 명의 사람이 그렇게 많은 모습을 가지는 것은 가능하고, 또 당연하다. 그게 나고, 또 당신이니까. 이 말을 매끈하게 풀어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나는 지구인이기도 하고 투테인이기도 하며, 또한 안두인이기도 하다.
안두인으로 태어나 투테인으로 성장했지만 지구인의 몸을 쓰고 있는 지은에게 뭐가 네 진짜 모습이냐고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셋 다 진짜니까. 물론 잘 융합되어있는 것 같지는 않다. 투테인 지은과 안두인 지은은 지구인 지은의 인식 위에서 열심히 반목한다. 통합체 지은은 일방적으로 안두인 지은의 사망을 선언하기도 하고. 하지만 다른 지은들이 열심히 몰아세운다 하더라도 안두인 지은을 배제할 수는 없다. 각각의 지은이 허구가 아닌 것처럼 안두인 지은도 배제할 수 없는 진짜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출신성분을 명확하게 밝혀 체계적으로 규정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는 무의미하다. {오보에}에서는 특히 더. 초공간에서의 불미스러운 사고로 인해 투테인과 안두인이 뒤섞이고 말았음은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지구에 당도한 것은 투테-안두 혼합체일 것이다. 이 투테-안두 혼합체는 지구인의 몸을 빌리면서 통합체가 된다. 꿈을 포기하고 지구인으로서의 현실을 맞이한 민영의 모습에서 투테-안두-지구 혼합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굳이 투테, 혹은 안두인의 성질을 각각 추출해야겠다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무의미하다. 내가, 그리고 당신이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지은, 그리고 투테인도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뿐이다.
“오게임”으로 시작해서 “나는 단수가 아니다”로 끝나는 글이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분명 단수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걸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은은 안두인 지은의 사망을 선언할 필요가 없었다. 부정한다고 해서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안두인 지은마저 수용하는 것이 훨씬 인상 깊은 결말로 다가올 수도 있기 때문에.
통합체로서의 지은은 투테인의 발성법을 깨달은 순간 각성한다. 그리고 나는 가능하면 저 통합체의 모습을 닮아보고자 한다. 내가 분열되지 않게. 뚜렷하고 당당한 자기인식은 심신의 안녕에 크게 공헌한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어떻게 되었든 간에 투테인들의 지구 상륙은 명백한 침략행위다. 인류에 대한 적대의사가 없었다고는 해도 투테인들이 한 짓은 어린 인류의 성장과정에 개입해 인간이라는 종으로서의 정체성을 흐려놓은 것이다. 합의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일방적인 행동은 보통 폭력이라고 부른다. 거절하기 힘든 행위라면 더욱더. 평화로운 투테인들의 최초이자 최후의 침략은 바로 이 지구에서 자행된 셈이다. 그래서 글을 읽으면서 인물들이 분명 납득할 만하고 이해할 만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그래서 뭐, 하고 투덜거리게 된다.

카일라사 / 김창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만 중요한 비밀을 하나 알려주겠다. 사실 지구는 자연발생한 행성이 아니다. 우주의 진리를 파헤치기 위해 우수한 외계 문명이 구축한 정밀한 컴퓨터다. 우주의 진리는 42고. 음? 뭘 그리 당연한 소리를 하냐고? 그럼 조금 더 색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사실 지구는 우주전쟁에서 퇴역한 군인들의 휴양지다. 당신 주변에는 퇴역한 군인들이 지구인의 몸을 하고 돌아다니고 있다. 사실 당신도 그런 자들 중 한 명일 가능성도 있다. 이게 바로 {카일라사}의 표면적인 스토리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실생활에서 흔히 쓰이는 추상적인 표현이다. 당장 어떻게 해치우는 것보다는 침착함을 되찾고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나은 경우도 있다. 지금은 골동품을 복원할 기술력이 부족하니 함부로 손대지 말고 기술력이 향상된 다음을 기약하는 것 등등. 현실도피에 방치를 더해놓은 상태가 아니라면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는 인생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응용할 수 있는 마법의 주문이다. 그리고 오래된 주문에는 도전자가 나타나기 마련인데, {카일라사}는 명예로운 도전자다.
{카일라사}에는 두 명의 환자가 나온다. 이별한 뒤에도 연인을 잊지 못해 정신과를 찾아다니는 찬수와 '우주에서 가장 잘 싸우는 원숭이'였지만 지금은 지구에 와서 찬수의 몸을 빌려 휴양을 취하고 있는 노병 하누만. 작품 안에서 이 두 명의 환자한테 제시된 치료법은 동일하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이 보편타당하고 적중률 높은 처방전은 그러나 두 환자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이른바 시간치료법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망각능력에 기대는 치료법이다. 격한 감정은 역설적이게도 오래가지 않으며 아픈 기억은 자연스럽게 심리적 방어기제에 가로막힌다. 시간치료법은 환자를 문제가 되는 상황으로부터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트리는 것을 골조로 한다. 현실은 어떻게 할 방도가 없지만 이미 지나간 일은 추억보정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찬수는 이 시간치료법을 통해 연인을 잊고자 했고 하누만은 전투에 지친 심신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치료법은 듣지 않았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두 사람의 문제가 시간치료법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살기 위해 망각하지만 모든 것을 망각해버리면 당연히 살 수 없다. 기억은 필수이다. 인간은 살기 위해 기억하고 또 망각한다. 기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오래된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여운을 느낄 수 있다. 기억이야말로 초시공간적 체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시간치료법을 공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기억이다. 강렬하고 인상적이고 포기할 수 없는, 그런 기억. 기억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거야'라는 말을 비웃으면서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어'라고 응수할 수 있다. 핵심은 시간치료법이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읽기에 따라서는 '잊히지 않는 게 당연해'라고 할 수도 있다.
하누만으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인 찬수, 그러니까 찬수-하누만은 전장에 나가 싸우는 것과 휴양지에 들어와 심신을 달래는 것, 둘 다 긍정한다. 이는 시간치료법과 시간치료법을 피해가는 강렬한 기억 모두를 긍정하는 행위다. 전장으로 복귀할까 말까 결정하지 못하면서도 찬수-하누만은 옛 연인을 그린다. 이런 모습은 긍정적이면서도 진취적이고, 무엇보다도 꽤 따듯한 태도가 아닐까. 머나먼 저 우주 끝을 향하여! 가 아닌, 어딘지 감상적인 엔딩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생각을 가다듬는다.
여기서부터는 뱀발. 라마야나에서 하누만을 각성시키는 건 비슈누 신이 환생한 천상용사 라마야나다. 악마왕에게 납치된 아내를 되찾기 위한 과정에서 라마야나는 하누만의 진짜 힘을 각성시키는데, 그 인연으로 하누만은 충성을 다해 라마야나를 보필한다. 안드로메다 은하계에서 날렸다는 우주 최강의 원숭이가 하누만이라면 그 하누만을 각성시킨 것은 과연 누굴까? 옛 연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근거가 빈약할지 모르겠지만, 꽤 낭만적이지 않을까?

앨리스와의 티타임 / 정소연
꽤 옛날에 장르문학지 [판타스틱]에서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에 관한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팁트리 주니어의 어린 시절을 소재로 한 글이었다. 팁트리 주니어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글이었는데, {앨리스}에도 팁트리 주니어, 혹은 앨리스 브래들리 셸던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있다.
평행/다중우주, 혹은 다차원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히 많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면 SF 독자가 아닌 일반대중도 교양지식선에서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지 않을까. 그러니 {앨리스}의 우주관에 대해서 길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하나의 뿌리에서 세계가 시작해 가능성에 따라 줄기가 가지를 치고 가지를 치고 가지를 치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그 중 어느 한 가지, 라는 설명은 부연설명이 불필요할 정도로 직관적이다. 그 골자는 내가 중학생 때 어렴풋이 떠올렸을 정도로 명료하고. 수백만 보통 사람들의 생명이 영향을 받는 것이 중요한 사건이라는 서술은 중요하지만 망각하기 쉬운 역사관의 맹점을 찌르는 적확한 지적이다.
중요한 것은 '다세계'가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고, 다세계를 뛰어다닐 수 있는 앨리스다. 인식의 지평이 넓어진다는 것은 염두에 둬야 하는 부분이 확장한다는 뜻이다. 인식구조를 대폭 수정할 필요성이 생길 것이다. 혼란은 보통 이런 어지러운 시점에 찾아온다. {앨리스}의 주인공 리즈의 경우에 혼란은 '부모가 이혼하지 않은 세계가 있다면?', '어머니가 죽게 된 그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세계가 있다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런 고민이 고민거리가 되는 것은 리즈가 다세계를 넘나드는 앨리스이며, 만약 그런 세계가 있다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확신할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이다. 만약 그런 세계가 있다면? 있다면 어쩔 셈인가? 소장은 “우리 세계”에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고 당연한 말이지만, 위로가 되지는 못한다. 혼란에 빠진 사람한텐 논리만큼이나 위로가 필요한 법인데도. 그리고 그 타이밍에 등장하는 게 또 한 명의 앨리스, 앨리스 브래들리 셸던이다.
앨리스는 우연히 자신의 미래를 보았고 미래를 바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끝에 남편이 미래에 걸릴 예정인 알츠하이머의 치료제를 다른 세계에서 찾아오는 것에 성공한다. 하지만 막상 남편은 다른 이유로 사망하고, 앨리스는 차원을 넘어 다니는 역할에 너무 충실했던 나머지 작가가 될 기회를 놓친다. 그렇게 작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는 없던 사람이 되어버린다. 다른 세계에서 자신이 팁트리 주니어로 활동하는 것을 눈으로 봤으면서도 앨리스가 팁트리 주니어가 되지 못했다는 것은 꽤 의미심장하다. 각각의 세계는 비슷해 보이기만 할 뿐 전혀 다른 곳이라는 것을 잔인하리만큼 확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앨리스와 만나서 리즈는 혼란에서 벗어난다. 정확히는 앨리스의 “그 일은 나를 살렸다”라는 말을 듣고서. 어떤 의미에서 앨리스는 리즈의 미래다. 리즈가 아직 가지 못한, 혹은 앞으로 갈 일이 없을 미래 말이다. 이 만남을 통해 리즈는 시행착오를 생략할 수 있었다. 앨리스가 다른 세계에서 알츠하이머 치료제를 구해왔듯이, 리즈는 앨리스로부터 혼란을 잠재울 깨달음을 구해왔다. 알츠하이머 치료제를 구해온 앨리스는 끝내 남편을 잃고 작가로서의 자신도 잃었다. 리즈는 어떨까? 앨리스는 자신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했고, 무엇보다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리즈에게로 그대로 전달되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유에 더불어 더 많은 것들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가보지 못한 세계만큼이나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중요하다는 것, 얻을 수 없는 것만큼이나 이미 가진 것들이 중요하다는 것 말이다.
사람은 타인의 말 한 마디에도 구원 받을 수 있다. “그 일은 나를 살렸다”라는 앨리스의 말은 추상적이지만, 충분한 위로가 되었다.

읽다가 그만두면 큰일 나는 글 / 곽재식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머리를 굴리는 것이다. 열심히 굴리면 굴릴수록 그 세계는 점점 더 구체적인 모습을 갖춘다. 머리를 굴리는 데 한계를 느낀다면 다른 방법을 동원하는 것도 좋다. 문장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그것도 아니면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큰일 나는 글}은 프로그래밍을 선택한 경우다. 이 세계는 누군가에 의해서 프로그래밍 된 곳이며, 프로그램의 일부인 우리는 우연한 기회를 통해 프로그래머의 정체를 눈치 챈다.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다면, 프로그래머는 이 프로그램을 별로 오래 켜 놓을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결단의 시간이 왔다.
프로그래머보다 뛰어난 프로그램의 관계는 인간보다 뛰어난 로봇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양쪽 모두 창조물이 창조자를 뛰어넘어버리는 경우다. 통제할 수 없는 창조물에 대한 공포의 기원은 신을 뛰어넘고자 하는 인간, 즉 우리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무모하다, 혹은 용맹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시도는 여태껏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때문에 프로그래머를 뛰어넘고자 하는 프로그램은 진작 예견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프로그래머-프로그램과 신-인간의 구도가 달라 보이는 것은 당신과 내가 처한 위치가 위대한 반역자에서 무책임한 억압자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영원한 청년은 없듯 인간도 어느새 꼰대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상의 이유로 인간은 인간을 창조한 신에게 덤빌 수 있는 명분을 얻으며, 또한 직접 프로그래밍한 프로그램이 덤벼드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이 구조는 {큰일 나는 글}에서 말하는 순환고리형 세계관에 굉장히 잘 어울린다. 각각의 세계가 다른 세계를 구축하는, 뱅글뱅글 순환하는 순환고리형 구조 말이다. 그 과정에서 각각의 세계는 한 세계에 의해 창조된 창조물인 동시에 한 세계를 창조한 창조자이기도 하다.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서 다시 자신으로 돌아오는 순환고리 구조에서 중요한 것은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균형을 잡는 것이다. {큰일 나는 글}은 처음에는 창조물로서, 그리고 마지막에는 창조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훌륭하게 균형을 유지한다.
창조물이 창조자를 공격해 목숨을 위협하는 행위를 인정 할 수 있는가? 나는 인정한다.  당장 내가 위협에 처하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데. 남한테 무조건 반항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큰일 나는 글}의 마지막에 나오는 새로운 세계의 창조는 이런 인식을 바탕에 둔 행위다. 주인공은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를 만든 프로그래머 중 한 명을 공격한 전과가 있는 인물이다. 자신이 만들고 있는, 만들어갈 세계에 사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똑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으리라고는 장담하지 못하리라. 자신의 이중성을 인정하는 순간 '창조자이자 창조물인 나'라는 패러독스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면서 해소된다.
글을 쓸 때, 혹은 프로그램을 짤 때는 목적이 있기 마련이다. 심심풀이로 마구잡이 작업을 하더라도 작업이 궤도에 오르는 순간 어떤 흐름을 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원래 의도한 그 목적이다. 하지만 해당 글, 또는 프로그램에는 당연히 의도된 목적을 빼고도 많은 부분이 남는다. {큰일 나는 글}의 성과 중 하나는 바로 그 남는 부분들에게 입을 달아 작품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이다. 주인공이 사는 세계는 정말로 빅뱅이나 초신성폭발 같은 현상을 관찰하기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 인간이 살고 있고, 인간들은 명백한 프로그램 에러를 일으켜 프로그래머를 마주한다. 작품에 나오는 프로그래머가 느꼈을 감정은 생각해볼만 하다. 이 글을 쓰는 도중에 갑자기 치명적 오류와 함께 파란 화면이 뜨면 조금 더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처음에도 말했지만 세계를 만드는 가장 대표적이고 전통적인 방법은 문장을 쓰는 것이다. 대체로 문장은 가시적인 반응이 없기 때문에 작품에 나오는 것 같은 상황을 상상하기는 힘들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문장으로 인물을 그려내듯 나 또한 누군가가 그려낸 인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나를 그려낸 작가는 꽤 실력이 있는 사람일 것이라 의심치 않겠다.

발자국 / 배명훈
추리물을 보다보면 “이 사건은 애당초 불가능해. 그러니까 사실 자작극인 것이지”라는 식의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자작극을 벌이는 사람들은 왜 불가능해 보이게 꾸미는 수고까지 들이면서 사건을 벌이는 걸까? 나름의 목표했던 바가 있기 때문이겠지. 그러니까 자작나무 타는 냄새가 어디서부터 흘러오는지를 알아보려면 자작나무를 태우는 목적을 이해하고 그 이유를 파악해야 한다. {발자국}의 경우는 왜 발자국이 찍혔는지를 거쳐서 발자국을 왜 찍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꽃밭이 되어버린 광장과 꽃으로 장식된 경찰들. 평화로운 분위기의 시위 현장은 나로서는 풍문으로밖에 들은 적 없는 히피들의 시위를 연상시킨다. 언뜻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이는 이 시위가 문제가 되는 건 조금 더 나중의 일이다. 시위 현장을 보고 왔더니 왠지 찍힌 적 없는 발자국이 셔츠에 찍혀 있질 않나, 상처가 나 있질 않나, 차가 망가져 있질 않나, 심지어는 사람이 죽지를 않나. 문제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상처를 입은 당사자도.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날 때리고 도망간 건가? 아니 그래도 내가 맞았는데 그걸 모를 리는, 아. 때리고 나서 기억을 지워버린 거구나. 해서, 사람들은 결론 내린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기억을 지워버릴 수도 있는 '전파 인격체', 혹은 '투명인간'이 범인이라고.
문제는 이 투명인간을 잡는 과정이 영 지난하다는 것이다. 시위현장에 투입되었던 이족보행전차의 블랙박스에는 당시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기는 한데, 그게 좀.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서 비정상적인 사건이 일어났단 말이다. 누군가 발포허가를 내린 사람은 있는데 그게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별로 찾을 생각도 없는 것 같고. 그리고 이쯤 하면 처음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킁킁, 어디서 자작나무 타는 냄새가 나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주어진 정황은 누군가 발포명령을 내렸고, 누군가 명령에 따라 이족보행전차를 움직여 발포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아 어디선가 외부에서 온 투명인간 같은 녀석이 파고들어서 사고를 쳤구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유력한 용의자인 투명인간이 직접 나서 “사실 나는 없다”라고 증언까지 하지 않았는가. 이런 말 같지 않은 상황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일 경우. 작중에서는 총통이 이 주장을 지지한다. 다음은 석연치는 않아도 이 주장을 지지한다면 앞으로 살아갈 미래가 꽤나 밝아질 것 같은 경우. 그리고 다시 한 번 앞선 이야기를 불러오자면, 자작극을 벌이는 이유는 그 사람이 무언가 이득을 보기 때문이라는 사실.
자작극의 목적은 글 말미에 나오는 “다음은 어디일 것 같은가?”라는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투명인간을 잡기 위해 법을 넘어선 무력을 동원하는 모습 자체는 한두 번 봐온 게 아니다. 독립투사 탄압부터 빨갱이 색출, 운동권 납치까지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몇 차례나 보고 듣고 잊어왔다. 그리고 몇 차례나 봐왔던 모습이 다시 한 번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잊어왔기 때문이다.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작중 나라에 이런 상황을 연출한 것은 반전미의 일환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겉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세상 다 그렇고 그런 거야'라는 시니컬한 이유라고 해야 할까.
투명인간의 두 번째 성질은 타인의 기억을 지우는 것이다. 하지만 투명인간은 사실 없는 녀석이라 신용할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 다른 관점을 찾아야겠다. 주체를 바꿔서 생각해보자. 망각의 이유는 투명인간이 아니라 망각자 본인에게 있지 않을까. 기억을 지운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잊어버린 것이다. 깔끔하게. 누군가에게는 지울 수 없는 기억도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고 그런 일에 불과할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시간이 지나면 다 잊히리라. 그렇게 우리는 지금까지 있었던 많은 사건들을 역사 속의 사건으로 넘겨버리고 또 잊어왔다.
투명인간이라는 정체불명의 존재를 만들어낸 것은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투명인간은 우리 모두의 자식이라고 할 수도 있다고. 최소한 투명인간의 부모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심지어 자기 스스로 “나는 없다”고 외치는 투명인간을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것은 분명 이상하다. 나는 실생활에서 저 투명인간과 비슷한 녀석을 본 적이 있다. 김어준 씨가 '못 하는 게 없다'고 평한 바 있는 북쪽에 있는 나란데, 그것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가 작중 국가의 모습과 꽤 비슷하지 않은지?
불필요한 이야기는 적당히 줄이자. 말하고 싶은 것은 ‘잊으면 안 된다’이다. 뚜렷한 자기인식은 언제나 인격형성의 중요한 요인이다. 그리고 자기인식은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더 이상 투명인간은 필요 없다. 투명인간에게도 못할 짓이지만 우리 스스로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나가는 문턱은 재빠르게
성실한 리뷰로거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글은 두 종류로 나뉜다. 리뷰를 쓰고 싶은 글과 그렇지 않은 글. 제대로 쓴 리뷰는 쓴 사람에게도 큰 만족감을 주지만 글을 읽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친다. 그 영향을 최대한 긍정적인 측면으로 몰아가는 것이 성실한 리뷰로거의 미덕이라 할 수 있다. 과연 본 글이 얼마나 성실했는지는 스스로 판단할 자격이 없기 때문에 논하지 않겠지만, 최소한 작업이 재미있었다는 것만은 말해두고 싶다.
가능하다면 본 글에서 다룬 단편집, [멀티버스]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볼 수 있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내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게 되길. 물론 주렁주렁 달린 덧글은 글 쓰는 사람에겐 소소한 행복이다.


* 송한별 님은 창작집단 '몽니'의 우두머리이자 종합창작지 『텍스툰:Textoon』의  편집장입니다. 텍스툰은 http://textoon.mireene.com 에서 감상 및 다운로드가 가능한 온라인 웹진이며, 최신호인 2011년 9월호는 종이책으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리뷰는 송한별 님의 블로그 꿈꾸는 시체의 도시(http://corpscity.egloos.com) 에 각 단편마다 따로이 올라왔던 리뷰를 합쳐 다듬은 것입니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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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심 11.10.29 00:17 댓글 수정 삭제
    리뷰 제목을 읽자마자 "젠장, 멀티버스 사야 됐는데!!! 라면서 인터넷서점을 뒤진 1인.. 당연하지만 품절이네요ㅠㅠ으흑.. 송한별님의 리뷰를 보니 더더욱 읽고 싶어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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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스 11.10.29 10:58 댓글 수정 삭제
    오오. 리뷰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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