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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전

박애진, 페이퍼하우스, 2011년 6월



배명훈 (mh_bae@hotmail.com)



1. 바깥쪽
 어떤 물건이 있습니다. 평범한 물건은 아닙니다. 사실은 굉장히 특이한 물건입니다. 도대체 왜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지 이해가 안 가는 신기한 물건. 그런 물건을 보면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합니다. “도대체 안에 뭐가 들었는지 분해해 보고 싶어!”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그랬고, 로스웰에 나타났다는 외계인이 그랬고, 아인슈타인의 뇌에도 그런 이력이 붙어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은 사이가 틀어진 연인들의 이야기를 들어준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둘 중 한 사람이 그런 고민을 털어놓더라고요. 대화가 안 된다. 상대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 사람은 어쩌면 연인을 해부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궁금하다고 전부 해부해 버릴 수는 없는 법. 그게 사람일 경우에는 더 그렇겠지요.
 해부하지 않고도 내부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있습니다. 해부도를 하나 더 그릴 수 있거든요. 안쪽에 하나, 바깥쪽에 하나. 생각해 보면, 특이한 물건을 접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사실 하나가 아니라 둘입니다. 1) “분해해 보고 싶어”와 2)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 바꿔 말하면, 내부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를 궁금해 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그 물건이 어떤 세상에 놓여 있던 물건인지를 궁금해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 지우와 연아와 명이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쪽에서부터 호기심을 발동시켜 볼까요? 안쪽으로 파고들까요, 아니면 바깥쪽을 들여다볼까요. 저는 바깥쪽을 고르겠습니다. 이유는, 안쪽으로 파고들 사람은 저 말고도 충분히 많을 것 같아서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 인물들의 바깥쪽, 그러니까 지우와 연아와 명을 둘러싼, 그리고 그 세 사람이 그 세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도 괜찮으냐고요? 저도 잘은 모르겠는데, 아무튼 지우는 그러더라고요. 첫 번째 장 “달이 구름에 가리다”에서 자신의 정체를 궁금해 하는 계향에게 지우가 보여준 것은, 내면이 아니라 세계였거든요. 그러니 저도 그 방식을 한번 따라가 보겠습니다. 인물의 내면이 아니라 각각의 인물들이 놓인 세계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뜻입니다.

2. 두 세계
 첫 번째 장을 지나 두 번째 장. 이야기는 오대산 산채에서 시작됩니다. 부제에 등장하는 “칼,” 명이라는 인물이 놓인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 세계, 어쩐지 낯이 익습니다. 사극에서 자주 등장하는 곳이거든요. [임꺽정]이나 [수호지]를 떠올려도 되겠죠. 이 공간이 익숙한 곳이냐 참신한 곳이냐는 큰 문제가 아니고요, 중요한 건 이 세계가 움직이는 원리입니다.
 오대산 산채는 2세계입니다. 1세계라고 부를 수 있는, 주류세계 혹은 정상세계의 맞은편 어딘가에 존재하는 대안세계라는 뜻에서입니다. [지우전]에서 1세계는 왕이 있는 곳, 즉 옛 서울 중에서도 궁 안이 되겠고, 2세계는 그 세계에 반기를 든 곳, 반란의 공간이겠죠. 그래서 이 두 세계는 “정-반”의 관계에 놓여 있는데요, 1세계는 2세계가 없어도 존재할 수 있지만 2세계는 1세계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의존적인 공간입니다. 1세계가 없다면 2세계 스스로가 1세계가 되어버리거든요. 여당과 야당처럼.
 그래서 1세계와 2세계는 서로 많이 닮았습니다. 세 번째 장, “바람”을 들춰봅시다. [지우전]의 1세계는 정치세계입니다. 권력과 계산, 명분과 체면, 첩보와 전략이 난무하는 곳이죠. 그리고 이 규칙들은 이 안에 사는 사람들을 굉장히 귀찮게 합니다. 아주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롭힙니다. 주인공 연아와 세자, 그리고 세자빈의 처지가 그렇습니다. 이들은 모두 누군가로부터 이 1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을 끊임없이 주입당합니다. 학습의 주체는 주로 “엄마”이고, 세자의 경우는 특이하게도 “아빠”입니다.
 그렇습니다. 학습의 형식은 잔소리입니다. 그 잔소리가 어찌나 괴로웠던지 세자의 형제 하나는 제가 3세계라고 부를 세계로 도주를 해버렸습니다. 특히 연아 모친의 잔소리가 아주 일품인데요, 그건 연아의 출발점이 제일 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출세라는 분명한 목표가 주어진 이 공간 안에서, 연아의 신분은 너무나도 보잘 것 없거든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1세계는 인물들과 따로 떨어져 그냥 존재하기만 하는 세상이 아니라, 인물들에게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주는, 도저히 거부하기 힘든 규율들로 촘촘하게 짜여진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소설의 주요 인물들뿐 아니라 이 공간에 놓여 있는 모든 인물들이 이 규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규율은 이 세계 안에 놓여 있는 인물들 전부가 권력 상층부를 향해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도록 규정합니다. 마키아벨리식 합리성을 갖추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실패하면 엄청난 잔소리가 뒤따릅니다. 그리고 인물들은 계속 실패를 합니다. 아니, 때로는 실패하고 때로는 성공합니다. 그래서 자아가 분열됩니다. 세자라는, 세자빈이라는, 총사라는, 각자의 직급에 해당하는 공적 자아의 임무와, 사랑하고 열망하고 원망하는 사적 자아의 내면으로 자아가 갈라집니다.
 그럼 이 세계의 반대 세계인 2세계는 어떨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차라리 1세계가 낫습니다. 이쪽은 아예 스파르타식 기숙학원이거든요. 앞서 말한 것처럼 2세계의 구성 원리는 1세계와 같습니다. 다만 1세계의 ‘세련된’ 마키아벨리적 합리성을 수단으로 하지 않고 보다 직접적인 폭력을 도구로 삼는다는 점에서만 차이가 납니다. 목적은 물론 권력에 한 발 더 다가서는 것이겠지요.
 2세계에 놓인 명이 받는 스트레스는 연아가 받는 스트레스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어마어마합니다. 말을 안 들으면 잔소리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죽을 수도 있거든요. 이 트레이닝의 결과는 훨씬 더 철저한 자아 분열입니다. 그래서 2세계가 요구하는 명의 공적 자아는 “칼” 그 자체입니다. 내면의 동기와 관계없이 오로지 명령에 따라 작동하는 살인기계. 애착할 수 있었던 유일한 대상인 개를 스스로 베어 버리는 과정을 통해, 명의 사적 자아는 아예 완전히 지워진 듯합니다. 하지만 사라진 건 아닙니다.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명은 혼란을 겪습니다. 자아가 사라진 게 아니라 분리된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렇게 철저한 분리를 통해 만들어진 “칼”이라는 이름의 공적 자아는 1세계의 세련된 권력놀음의 관점에서 볼 때 전혀 이질적이지 않습니다. 이질적이기는커녕 완전히 자연스럽게 호환됩니다. 산채를 접수한 임금이 “칼”을 없애 버리지 않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한 것도 바로 그래서입니다. 이 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은, 왕의 손에 들어갔다가 다시 2세계의 인물인 형의 손에 쥐어진 명의 갈등 부분입니다. 다시 명을 잡으러 온 임금의 장수들, 그리고 명을 믿고 토벌군에 대항하는 반란군들. 그들은 명에게 똑같은 명령을 내립니다. 적을 베라고. 명은 갈등합니다. 사적자아와 분리된 명의 공적 자아는 그 두 가지 명령을 모두 수행할 수 있습니다. 형인 인도 역시, 권력을 향해 한 걸음 더 움직이라는 이 두 세계의 원리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에는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두 명령은 서로 충돌합니다.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경쟁적인 두 세계. 연아와 명은 그런 세계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같은 도구를 쥐고 있었습니다. 바로 칼이었습니다.

3. 세 번째 세계
 여기에 세 번째 세계가 나타납니다. 제3의 세계. 1세계와 2세계는 쌍둥이지만,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2세계가 천하를 갖지 못한 세계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그 둘은 대결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 번째 세계는 좀 다릅니다. 둘의 영향을 받지 않는 별개의 세계, 3세계는 도사들이 사는 도가적인 공간입니다.
 3세계 사람들, 즉 도사들은 다른 세계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이라고 불리는 특별한 격리공간을 3세계 안에 만들어 두곤 합니다. 세계를 분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점은 1세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에는 이런저런 신물들이 있어서 그 안에서는 도술을 사용할 수 없다고 돼 있거든요. 즉, 3세계는 1세계와 섞이지 못합니다. 그게 이 두 세계 사이의 규칙입니다. 그 사이를 오갈 수 있는 건 오로지 사람들뿐입니다.
 세자의 명으로 도사 지우를 잡기 위해 3세계로 떠난 연아는, 곧 자신이 1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1세계와 3세계 사이에 놓여있는 사람임을 드러냅니다. 우선 연아는 보통 사람들은 볼 수 없다는 도사들의 격리 공간, ‘막’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자 호위라는 자신의 공적 자아에 의해 1세계가 자신에게 부여한 도구인 ‘칼’을 통해 그 막을 벨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는 심지어 도사들처럼 땅을 접어 단시간에 원거리를 주파하기까지 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동행하던 도사들은 연아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도대체 어느 별에서 왔니?(본문에 있는 표현 아님)” 1세계에 속한 사람인지 3세계에 속한 사람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연아가 1세계의 규칙이 아닌 3세계의 규칙대로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완전히 3세계에 놓여있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지우입니다. 세상에 알려진 어느 도사보다도 더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젊은 도사 지우. 그런데 뭔가가 이상합니다. 3세계가 부여하는 자아를 완벽하게 지니고 있지만, 언뜻언뜻 3세계가 부여하지 않은 자아도 내비치곤 합니다. 지우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1세계와 2세계가 나오기도 전, 서장 같은 첫 장에 나타나 구름을 타고 하늘을 가르며 도가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야릇한 애정행각을 벌이고 사라진 이 인물을, 작가는 도대체 어떻게 이 이야기 안에 녹여내려고 한 것이었을까요? 무엇보다, 지우의 이런 유유자적과 명의 극단적인 폭력을 어떻게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시키려는 생각일까요?
 연아는 지우에게 바로 그 점을 묻습니다. 그러니까 연아가 속한 세계가 지우가 속한 세계에게 묻습니다.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 그리고 어디로 갈 거니?” 지우는 대답 대신 연아에게 세계를 보여줍니다. 첫 장에서 계향에게 한 것과 비슷하지만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거대한 세계를 보여줍니다. 사실 그 세계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적 우주와 가깝습니다. 거기에 용과 붕이 더해지니 정확히 우리가 놓여있는 이 물리세계와 동일한 세계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아무튼 그 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점이 중요한 건 아닐 것 같습니다. 중요한 건, 지우가 놓여 있는 세계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세 번째 세계에 한정된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지우는, 바로 네 번째 세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지우 혼자만이 유일하게. 혼자서 외로이.
 연아와 지우의 이 4세계 여정은 참으로 오묘합니다. 사랑에 관한 은유로 보일 수도 있겠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황당한 세계의 출현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4세계는 이야기 전체를 끌고 가는 핵심 장치이지, 그저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보려는 환상성 짙은 장치에서 그치는 게 아닙니다.

4. 음각, 숙명
 이야기의 무게중심은 물론 뒤쪽에 가 있지만, 이 소설 [지우전]의 ‘힘’의 균형은 앞쪽으로 상당히 기울어 있습니다. 이 소설의 백미인 명의 칼부림 장면이 바로 두 번째 장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 칼부림 장면이 어찌나 인상적이었던지, 책의 표면, 즉 표지나 홍보자료에 쓰인 말들도 거의 이 부분의 이미지에 압도당해 있어서, 본문을 읽기 전에는 자칫 이 책을 무협소설로 착각할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두 번째 장인 “칼”에 나오는 명의 칼부림은 칼부림이 아닙니다. 어딘지 묘사가 애매하다고 느꼈다면 틀리게 읽은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장은 이 책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 이유는 명의 칼이 양각이 아니라 음각으로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명은 화려한 검법으로 칼을 휘두르지 않습니다. 사실 거의 칼을 휘두르지 않는 것도 같습니다. 다만 칼을 드는 순간 상대의 몸이 갈라져 있을 뿐입니다. 칼을 다루는 모습 자체가 도드라져있는 게 아니라, 칼이 지나간 뒤의 자국, 칼이 세상에 남겨놓은 흔적이 사람들의 몸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 음각의 칼이 이토록 강렬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작가가 거울에 남긴 글들 중 소품처럼 보이는 짧은 글들, 서사보다는 강렬한 에너지를 여과 없이 담아낸 짧고 잔혹한 글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체절단과 유혈로 이어지는 이 짧은 글들은, 명의 칼이 인간들의 몸에 새겨놓은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이며 압도적이기까지 한 폭력을 음각으로, 즉 수동적 관점의 폭력으로 묘사하는 데 결정적인 밑바탕이 되었을 것입니다.  
 칼을 뽑은 바로 다음 순간, 칼을 휘두르는 장면에 대한 묘사조차 생략된 채 곧바로 피해자의 몸에 새겨지는 상처. 그래서 명의 칼은 빠르게 느껴집니다. 명의 칼을 다루는 작가의 문장도 그만큼 빠르게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인상적인 장면이 이야기의 절정 부분에 배치된 게 아니라 도입 부분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명이 칼을 신나게 휘두르는 이야기가 아니라, 명이 그 어마어마한 폭발력을 가진 칼을 어떻게 손에서 내려놓게 되느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요? 아마도 스트레스 때문일 것입니다. 자아가 분리될 정도의 스트레스. 진짜 나 말고 세상이 나에게 일방적으로 부여한 또 하나의 자아, 그리고 그 자아는 절대 진짜 내가 될 수 없다는, 내면의 외침.
 명은 어떻게 칼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나는 어떻게 나를 찾아낼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이 주제는 또다른 주인공 연아에게도 공통적으로 해당됩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세계 사람인 연아와 2세계 사람인 명은 필연적으로 똑같은 무기를 손에 쥐고 있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칼입니다. 세상이 연아에게 부여한 공적 자아의 상징 같은 도구인 칼. 연아는 그 칼을 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었을까요.

5. 해방
 비결은 주인공들의 바깥쪽, 세상에 있습니다. 칼을 내려놓기 위한 명의 여정은 2세계를 떠나 3세계로 이어집니다. 사이비 도사 유도를 만나 지우라는 새 이름을 받고 새 자아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쩐지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3세계도 여전히 불완전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3세계는 1세계처럼 촘촘하게 짜여진 문명세계는 아닙니다. 서울처럼 계획적으로 건설된 도시권력체와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러나 이 3세계는, 도가적인 공간 혹은 자연 그대로의 공간은 아닙니다. 분명 누군가의 건설계획이 개입된 공간이거든요.
 일단 이 세계에는 위계가 있습니다. 화담과 소유, 만홍과 청운, 송암 장제 등의 인물들은 도사들의 서열 구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전혀 자유롭지 못합니다. 송암이 연아에게 늘어놓는 연습생들의 애환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게다가 이 공간에는 인위적인 건축물들이 있습니다. 도사들이 여기저기에 만들어 놓은 보통 사람들은 들어서지 못하는 공간, ‘막’이라는 디자인을 통해 만들어진 격리된 공간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막 안에는 무엇이 들어차 있을까요? 청운과 만홍이 그들을 만나러 온 연아와 영호에게 보여준 것은, 맛있는 음식, 향긋한 차, 부드러운 침구, 그리고 에로틱한 상상이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작가는 ‘욕망’에 해당하는 것들을 이 3세계 격리시설물 안에 입주시켜놓은 것입니다. 서울이 아니라 길바닥 어딘가에. 물론 그게 문제될 이유는 없습니다. 그 규칙 자체가 작가가 만든 3세계의 구조니까요. 작가에게는 그럴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세 번째 세계는 사실 첫 번째와 두 번째 세계의 연장입니다. 3세계의 저명한 도사들이 도술마저 봉쇄되어 있는 1세계인 서울에 가서 출세를 하려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1세계의 연아가 3세계로 가는 여정이 칼을 내려놓기 위한 여행이라면, 3세계의 도사들이 1세계로 가는 여정은 그 반대입니다. 떠나는 길만 있는 게 아니라 돌아오는 길도 있으니, 3세계는 완전한 낙원이 될 수 없습니다. 불안하게 발을 걸치는 것밖에 안 되거든요. 그래서 지우는, 그리고 연아는, 3세계에 놓여 있는 동안에도 3세계 사람들처럼 행동하기를 거부합니다. 좋은 음식을 마다하고 술과 고기를 거부합니다.
 3세계가 가만히 놔둘 리가 없겠죠. 세계에 속한 모든 인물을 세계의 규칙에 따라 움직여야만 하니까요. 도사 소유가 부하들을 이끌고 지우를 잡으러 오는 것도 당연합니다. 소유는 3세계의 보스지만, 마음만 1세계의 최상층, 왕의 바로 근처까지 갈 수 있는 1세계의 인물이기도 하거든요. 그가 대변하고 있는 1세계와 3세계의 잔소리는, 세계가 지우에게 가하는 스트레스는, “칼을 들어라”입니다. 칼을 들 때까지 생명의 위협을 가하겠다는 식이죠. 그러니까 소설의 갈등이 최고조로 이르는 대목에서, 그 갈등의 구체적인 내용은 칼을 놓으려는 지우와 다시 칼을 들게 만들려는 세계(소유를 대리인으로 한)의 갈등입니다. 액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액션은 이미 앞부분에서 정점을 지났거든요. 다시, 지우는 어떻게 칼을 내려놓았을까요?
 지우의 칼을, 명의 칼을 중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4세계입니다. 3세계처럼, 얼핏 도가적인 세계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공간과는 차원이 다른, 아무것도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원래 있던 그대로 놓여 있는 공간, 진짜 자연입니다. 은하의 중심이든, 붕이든, 용이든, 그 사물들이 지칭하는 상징성이나 환상성보다 훨씬 더 중요한 4세계의 규칙은, 그 물건들을 누가 그 자리에 놓았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원래부터 놓여있던 물건들이고 영원히 그렇게 놓여 있을 물건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공간은 거대합니다. 너무나 거대해서 앞서 말한 세 개의 세계를 모두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서울이든 시골이든 오대산 산채든, 모든 구체적인 세계는 4세계라는 이 거대한 전체집합의 부분집합으로만 존재합니다. 중첩된 상태로. “서울에 살고 있어요”와 “한국에 살아요”가 서로 모순된 진술이 아니듯, 이 두 세계의 정체성은 중첩될 수 있습니다. 다만 잊을 뿐이죠. 1세계에 사는 사람은 동시에 자신이 4세계에도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잊곤 합니다. 용산구에 사는 사람이 자신이 은하계의 어느 나선 팔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사는 것처럼 말이죠.
 지우는 자신이 발 디디고 있는 세상, 3세계를 부정합니다. 그리고 4세계로 떠납니다.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지점, 그러니까, 소유가 보낸 도사들을 피해 달아나던 중에 말이죠. 어차피 중첩되어 있으니 3세계를 완전히 떠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3세계를 무시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4세계, 즉 자연계에 살며시 내려놓습니다. 거기에서 지우는 자유를 발견합니다. 명이라는 이름의 칼, 그 공적 정체성에서 드디어 해방됩니다. 어떻게 해방됐냐고요? 4세계의 효과에 의해서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4세계, 즉 자연계의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규칙은, 모든 사물이 그냥 원래 있던 그대로 놓여 있어야 한다는 점이거든요. 어떤 계획도, 어떤 음모도, 어떤 디자인도 통하지 않는,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우는 그렇게 칼을 내려놓습니다.

6. 해방2
 그럼 연아는 어땠을까요? 지우와 비슷했을까요? 연아의 경우는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연아에게 구원은 4세계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서서 세계 자체를 초월하는 방식입니다.
 한국 장기에 마(馬)라는 기물이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말을 지칭하는데요, 사실 한국 장기에만 있는 기물은 아니고 차투랑가에서 발원한 세상 모든 장기에 있는 기물인 듯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체스에도 나이트라는 기물이 있는데요, 이름은 나이트인데 생긴 건 말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 걸 보면, 기사보다는 기사가 타고 있는 말이 더 중요한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마와 나이트는 행마법이 같습니다. 한 칸 직선으로 이동한 다음 좌우 대각선 45도 방향으로 한 칸. 4000년 전, 차투랑가라는 게임에서 지정된 그대로, 이 기물의 내면은 그 규칙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한 칸 직선, 그리고 대각선.
 하지만 마와 나이트가 놓인 세계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는 장기고 하나는 체스니까요. 그래서 각각의 세계는 이 말 형상의 기물에 각각 다른 특성을 부여합니다. 우선, 장기의 마는 선과 선이 만난 곳에 놓이고 체스의 나이트는 선과 선이 만들어 놓은 네모난 면 안에 놓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마는 직선으로 한 칸 이동할 곳에 다른 기물이 놓여 있으면 이동하지 못합니다. ‘멱이 막혔다’고 표현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나이트는 마지막에 놓일 곳만 비어 있다면 바로 옆에 뭐가 놓여 있든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이건 장기와 체스라는 세계가 각자의 말에게 부여한 규칙입니다.
 비유하자면, 연아는 원래 마였습니다. 앞에 벽이 놓여 있으면 넘지를 못했습니다. 아무리 수련해도 넘을 수 없는 한계. 어떻게 하면 그 벽을 넘을 수 있을지가 연아의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러니까 지우를 찾으러 1세계와 3세계 사이를 서너 번쯤 오가던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마처럼 움직이던 연아가 갑자기 나이트처럼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막을 가르고 땅을 접고, 물리적인 무기인 칼을 들어 혼령의 실체를 베어 버리기까지. 혼자 지우를 만나기 위해 지우의 스승 유도의 집을 찾아가던 날, 연아는 그만 스스로 당황하고 맙니다. 땅을 접는다는 의식조차 하지 않은 채 너무나 자연스럽게 땅을 접고 달려버렸거든요. 앞에 놓인 기물을 넘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벽이 막히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된 셈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연아가 놓여 있던 세상이 바뀝니다. 연아가 그런 능력을 습득했다는 사실보다 이 점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자아가 바뀐 게 아니라 세상이 바뀌었다는 사실.
 어떤 사람이 장기를 두다가 말을 마처럼 움직이지 않고 나이트처럼 움직였다고 생각해 보세요. 상대가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너 지금 체스 두냐?” 라고 묻지 않을까요? 연아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연아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지금 도대체 어디에 놓여 있는 거지? 1세계야, 3세계야, 아니면 4세계야?’ 행동규칙이 바뀌었다는 건 놓여 있는 세계가 바뀌었다는 뜻이거든요.
 어떤 대답을 얻었든, 혹은 아직 얻지 못했든, 아무튼 연아는 깨닫습니다. 자신은, 자기가 지금까지 쭉 속해 있다고 믿었던 그 세계에 속해 있는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자신이 바뀐 게 아니라 자신이 놓여 있는 세상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그래서 연아는 총사직을 사임하고 세자를 떠납니다. 그리고 엄마를 떠납니다. 오빠도 떠납니다. 그동안 자신을 얽어매던 모든 공적자아와 거기에 딸린 부록인 잔소리들로부터 연아는 드디어 해방됩니다. 아마도 영원히.
 연아는 처음 있던 자리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런 게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모를까, 한번 알게 된 이상 절대로 되돌릴 수 없는 길이거든요.

7. 만남
 그렇게 해방된 연아는 자연계에 슬며시 놓여 있는 지우를 만나러 갑니다. 깨달음을 얻은 순간 찾아갈 사람이 있다는 것은 연아에게는 아마도 엄청난 행운이었을 것입니다. 연아보다 조금 먼저 깨달음을 얻었던 지우의 경우만 봐도 그렇습니다. 홀로 4세계에 서 있던 인물. 그래서 지우는 외로웠습니다. 누구도 진정으로 지우에게 닿지 못했거든요. 그 누구의 세계도 지우의 세계에 가서 닿지 못했으니까요. 계향도, 금낭도, 지우가 사랑했던 그 누구도, 결국 지우의 세상에 가 닿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우는 고독했습니다. 늘 사랑하고 사랑받았지만 여전히 어딘가가 비어 있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연아의 경우는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 깨달음의 공간에서 단 한 순간도 혼자 고독할 필요가 없다는 게 말이죠.
 아무튼 두 사람은 그렇게 만납니다. 꽤 밋밋한 재회입니다. 전에도 여러 번 만나기는 했지만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만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가 다릅니다. 왜냐고요? 이번에는 그냥 두 사람이 만난 게 아니라, 두 사람이 놓인 세계가 만났거든요. “너는 뭐하는 녀석이냐?” “어느 별에서 왔냐?” 하는 질문 따위 던지지 않아도, 연아가 지우를, 지우가 연아를 해부하지 않고도,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건 사랑이었을까요? 안쪽 해부도를 그려서 분석했으면 그 비슷한 결론을 얻었겠지요. 하지만 여기서는 굳이 그렇게 부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마음, 그리고 그 형식은 우리가 속해 있는 어떤 구체적인 세계에서 부여한 행위규칙일지도 모르거든요. “사랑을 하려면 이렇게 이렇게 해야 돼” 하는 잔소리들이 부록으로 잔뜩 딸려 있는 세계의 규칙.
 그런 세계가 부여한 자아를 떨쳐낸 두 사람은, 이 책의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 “나란히 앉아 구름을, 산을, 나무를, 수없이 많은 존재를, 그들 앞에 놓인 생을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구름이나 산이나 나무 같은 사물들 중 하나인 듯 그냥 그 자리에 놓여 있었습니다. 서로의 기원을 물을 수도 없고 사실 그런 건 물을 필요도 없는 제4세계 자연계에,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놓인 것입니다. 사랑? 로맨스? 결혼? 그렇게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마음에 그런 거추장스러운 수식어가 더 필요했을까요? 이미 서로의 세계에 가서 닿은 사람들에게.

8. 퇴장
 의도적으로 세계에만 초점을 맞춘 반쪽짜리 리뷰는 여기에서 이렇게 끝납니다. 나머지 반쪽은 또 다른 사람들의 몫. 어차피 제가 다 채울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다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가 전혀 다르게 읽힐 수도 있다는 가설만 이것저것 흘려 놓고, 저는 이만 땅을 접어 제가 속한 세계로 돌아갑니다.
 이 세계에는 오늘도 비가 잔뜩 쏟아지는 모양입니다.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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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na 11.07.31 00:29 댓글 수정 삭제
    반쪽짜리라고 평하셨지만, 한 면으로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는 분석이라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배명훈님이 쓰신 기사는 오랜만에 뵙게 되는데,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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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s 11.07.31 11:38 댓글 수정 삭제
    오,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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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11.07.31 14:00 댓글 수정 삭제
    공감하신다니 다행이에요. 이렇게 써도 되나 싶었는데.. 도움되는 리뷰였으면 좋겠어요. 작가에게도, 다른 작가분들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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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영 11.07.31 21:12 댓글 수정 삭제
    저는 만약에 신기한 물건이 앞에 있다면 배명훈 작가님처럼 밖을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안을 파고 들여다보면 물건이 망가질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게 사람이라면 나와 내가 들여다볼 사람과의 관계가 나빠질 수 있죠. 하지만 꼭 들여다봐야 하는 경우라면 아주 조심스럽게 그 안으로 들어갈 거예요. 해부 또한 아주 신중해야 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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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연 11.08.01 02:35 댓글 수정 삭제
    반쪽자리 리뷰 아니었어요. 세계로 해석하시면서 인물들의 내면까지 깊이있게 읽어준 글이었습니다.
    지우전만이 아니라 지나간 글과 앞으로 쓸 글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 주었어요. 이런 분이 가까이에 있다는 게 너무 듬직하고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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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11.08.01 11:32 댓글 수정 삭제
    제가 하지 않은 나머지 반쪽에서도 얼마든지 좋은 관점의 좋은 리뷰가 나올 수 있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반쪽일 텐데, 최근에 제가 겪은 바로는 그 안쪽 반이 전부라고 여겨지는 것 같아서, 사람들이 다루지 않는 나머지 반을 써본 거예요.
    그리고 가연님, 도움이 되셨다니 정말정말 다행이에요. 그럼 된 거죠. 하하. 가연님 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 글을 위한 변론이기도 했으니까요. 다행이에요, 다행. 잘됐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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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아 11.08.04 01:07 댓글 수정 삭제
    설정, 다른 말로 세계관을 이해하는 게 장르 문학을 읽는데 중요한 요소니까... 명훈님께도 도움이 되는 글이었다니 기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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