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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머 엘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

필립 K. 딕, 김상훈 옮김, 폴라북스, 2011년 11월



한별 (newshbx2@gmail.com)



필립 K. 딕에 도전해 보았다. 그리고 혼란에 빠지고 말았는데, 이 혼란이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아직도 확신이 안 선다. 해설을 보고 한층 더 깊은 혼란에 빠져들기도 했고. 음, 뭐지 이게.

인간의 창작활동은 크든 작든 자신이 인지하고 있는 세상을 재구축하는 행위이다. 그대로 재현하기도 하고 창작자의 관점에 따라 보정하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비틀고 뒤집어 나타내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의 기원이 창작자가 인식하고 있는 세상이라는 점은 변함없다. 각 창작자의 작품세계가 다른 건 개별 창작자가 인식하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고. 그런 의미에서 완전히 동일한 세상은 없다고 봐도 좋겠다. 차이점을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공통분모가 크기 때문에 의식하지 않고 넘어갈 뿐인지도 모른다. [파드 엘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에서 환각제 ‘캔-D’를 복용하는 화성인들이 하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퍼키 퍼펫' 세트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이유는 그 세트를 통해 지구의 환경을 재구축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표는 퍼키 퍼펫 세트를 최대한 '완벽'에 가깝게 세팅하는 것이다. 화성인들은 그렇게 만들어 놓은 세트를 캔-D와 병용함으로써 세트 속을 누비고 다니는 인형이 되는 '승천'효과를 볼 수 있다. 이때 화성인들은 세상을 만들어낸 신이자 자신이 만든 세상에 갇힌 피조물이다. 어떤 종류든 간에 창조자는 신의 성격을 가진다. 캔-D는 화성인들이 신으로 오래 남게 결코 놔두지 않지만.

그런데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다. 캔-D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환각제가 나타난 것이다. 이름도 비슷해서 츄-Z라고 한다. 츄-Z는 퍼키 퍼펫 세트 같은 보조제가 필요치 않고 더 긴 환각시간을 보장한다. 환각제의 주 기능인 '신 되기'에 관해서는, 꽤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원한다면 과거로 돌아가 역사를 바꿀 수도 있고 미래로 날아갈 수도 있다. 이런 시간이동 체험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는데, 츄-Z를 섭취하면 시간 이동이 '진짜로' 느껴지기 때문에 현재 경험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는 혼란스러움과 함께 묻어둘 수 있다. 객관적으로야 어떻든 간에 본인이 그렇게 생각해버리니까. 그 말인즉, 츄-Z를 섭취한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서 신으로 군림할 수 있고, 그러고 있는 동안은 모든 것들이 실제처럼 느껴진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현실인지도 모를 지경이니 더 말해 무엇 하리, 츄-Z는 캔-D보다 한층 더 강력한 신적 체험을 제공한다. 문제가 딱 하나 있다면, 누가 언제 어디서 츄-Z를 섭취하던지 그 사람의 세상에는 츄-Z의 발견자/개발자/판매자 파머 엘드리치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내가 신으로 군림하는 세상에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녀석이 하나 있다면 그 녀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녀석이 내가 먹은 츄-Z를 고안해 낸 녀석인데다가 나보다 훨씬 뛰어난 신적 능력을 보이면서 접근해 온다면? 편의상 그 신 위의 신을 ‘상위신’이라고 해보자. 상위신은 신보다 강력한 능력으로 신의 세상을 누비고 다닌다. 심지어 모든 신들의 세상에서 일관되게 목격되며, 그 모든 상위신은 딱 한 녀석이다. 파머 엘드리치! 이미 인간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수상쩍은 인물 파머 엘드리치는 진작 육신을 초월했다. 츄-Z를 통해서만 닿을 수 있는 신세계에 똬리를 틀고 새내기들을 기다리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츄-Z를 통해서만 갈 수 있는 신세계에서밖에 살 수 없다고도 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각기 다르게 인식하고 있는 세상을 마음대로 건너다닐 수 있는 파머 엘드리치는 그야말로 상위신이다. 츄-Z가 광범위하게 퍼질수록 파머 엘드리치의 영토는 넓어질 것이다. 전인류에게 츄-Z를 권하는 그를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레오 뷸레로의 추측이 맞을 수도 있다. 츄-Z는 결코 캔-D를 이길 수 없다고. 인간이 그렇게나 열성적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창조하고 재구축하는 건 그 과정에서 약간이나마 신이 되는 쾌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신이 되면 뭘 하나, 나보다 더 위에 상위신이 있는데. '신'이 되겠다는 건 내가 최고고 짱이고 탑이 되겠다는 거지, 결코 다른 사람 밑으로 들어가겠다는 뜻이 아니다. 상위신이란 존재만으로 신이라는 어휘를 대체할 어휘를 찾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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