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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해가 저문 이유

2012.06.30 00:0906.30

해가 저문 이후

스티븐 킹, 조영학 옮김, 황금가지, 2012년 5월



날개 (http://blog.aladdin.co.kr/twinpix revinchu@empal.com)



 스티븐 킹의 신작 단편집이 황금가지에서 출간되었다. 제목은 [해가 저문 이후]. 원서는 2008년도에 출간되었으며, 13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스티븐 킹의 신작 단편을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다. 완숙한 필력과 다채로운 발상, 자유로운 전개가 가득한 단편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쓰인 단편들 위주로 수록된 [해가 저문 이후]는 역시 거장의 필력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단편들로 채워져 있다. 물론 단편집인 만큼 취향에 맞는 작품이 있는 한편, 소품이나, 지루한 작품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흡족한 독서였다. 사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스티븐 킹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우리는 책을 사고 책장을 넘기게 될 텐데.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주의해 주세요.

 윌라

 첫 번째로 실린 단편 [윌라]는 스티븐 킹에게는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스티븐 킹이 다시 활력을 찾고 옛날 방식으로 글을 쓴 단편이라고 한다. 즉, 다시 단편을 활기차게 쓰이게 해 준 작품이다. 이 책에 실린 단편 대부분은 [윌라] 이후에 쓰여졌다고 한다. 과연 작가에게 사랑스러운 단편이 아닐 수 없다. 독자 입장에서는 마냥 즐거운 작품은 아니었다. 죽었는지 몰랐던 유령들이 정체성을 찾는 이야기라니. 아이디어는 단순했고, 새로운 발상이나 전개는 없었다. 도입부는 산만했고,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된 후에는 좀 식상한 느낌이 들었다. 놀라운 서사구조와 반전 같은 것을 기대한다면, 닳고 닳은 ‘유령’을 다룬 이 소설이 실망스러울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대감을 버리고, 가볍게 읽을 소품으로는 충분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큰 서사는 없지만 단편에 어울리는 거침없는 전개와 속도감이 있고, 이 소재를 암울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커플을 등장시켜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이미 죽은 상태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사후의 삶을 이어나가는 극복의 의지가 흥미롭다. 개인적인 취향 탓으로 이런 소재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나 스티븐 킹이 그리는 이 단편은 알 수 없는 활기가 흐르고 있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낭만적으로 그려낸다.

 진저브래드 걸

 한 여자가 우연찮게 살인마에게 쫓기게 되는 이야기. 이 단편을 한 줄로 간추리자면 이렇게 간단할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우리 삶이 그렇게 요약될 수 없듯이 말이다. 단편에서 이런 이야기를 쓰기란 쉽지 않다. 단순한 추격적에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주인공에게 독자가 감정을 이입할 여지를 주어야 하며, 배경에 대한 현실성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이 소설은 스티븐 킹의 능력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단편으로, 결코 긴 분량이 아님에도 이 모든 것을 성공했다. 따라서 독자가 몰입할 수 있고,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주인공인 ‘에밀리’는 아이가 죽은 후 달리기를 시작한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다. “아이가 죽은 후 에밀리는 달리기를 시작했다.”(55) 어떤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운동을 하는 경우는 주위에도 많이 있다. 또한, 소설 [열일곱, 364일] 같은 작품에서도 누군가의 죽음 이후로 달리기에 매진하는 소녀와 소년이 나온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Forest Gump, 1994)는 어떤가. 달리기는 우리가 피하고 싶은 것에서 계속 도망치는 이미지를 주면서도 마침내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달린다는 행위가 갖고 있는 의미와 사실성이 이 소설에서는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결국 달리기란 우리의 삶 그 자체다. 그리고 가끔 멈춰서서 싸워야 할 때도 있다. 스티븐 킹은 이런 인생을 소설 속에 압축해서 그려냈다. 어떤 은유를 자연스럽게 넣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 소설은 아이를 잃은 슬픔을 간직한 여자가 달리기를 하면서 도피 혹은 극복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여기에 살인마를 마주치게 하면서 달리는 것만이 아니라 싸워야 하는 상황을 제시한다. 이건 여자의 내면을 그려내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인생을 은유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진저브래드 걸]은 이를 현장감 있는 소설로 탁월하게 형상화해낸 작품이다.

 스티븐 킹은 책 뒤편에 ‘선셋노트’라고 각 작품마다 어떻게 발상을 했고 썼는지 일종의 창작노트를 덧붙여놓았다. 이 작품의 경우 플로리다, 멕시코만의 사주 군도 근처에 있는 그곳의 별장들을 보고 떠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텅 빈 해변에서 한 여자가 악당에게 쫓기는 이야기를. 그리고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해도 언젠가는 멈춰 서서 싸워야 하는 이야기를 썼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언제까지고 쫓기는 것들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거리를 벌릴 수는 있겠지만, 결국 마주쳐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에밀리가 계속 달려서 도망치기를 응원하지만, 진짜 그렇게 된다면 소설은 허무해지고 말 것이다.

 작가는 세세한 묘사에 천착하는 이야기를 선호하는데 이 단편은 그런 묘사들로 충만하다고 말한다. 사실이다. 사실 지나치게 길게 묘사된 장면들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작품 전체의 완성도를 생각할 때 이런 묘사는 필수가 아니었나 싶다. 생생한 현장감을 주는 묘사가 많을수록 소설은 박진감이 넘친다. 작가는 1년 대부분을 지낸 플로리다의 경험을 갖고 썼기 때문에 생동감 있는 묘사가 가능했고, 이는 독자들이 소설 속의 현실을 진짜처럼 느끼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해변 풍경의 묘사나 텅 빈 별장의 묘사, 멕시코인의 등장 같은 것은 전부 소설의 핍진성을 높인다. 멕시코인 같이 사실성을 높이기 위한 인물 배치를 가지고 인종차별의 해석 우려 때문에 다른 인물을 넣는다면 상세한 배경 설정이 더 필요할 것이며 소설의 구조를 무너뜨릴 것이다. 게다가 도구로 등장한 인물이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소설의 전체 구조와 핍진성 등을 생각하지 않고 작품 해석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글을 쓴다면 소설이 엉망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런 우를 범하지 않고 정해진 분량 안에서 작가의 통제 하에 높은 완성도를 가진 작품이다.


▲ [해가 저문 이후] 원서 페이퍼백 표지.

 하비의 꿈

 작가들은 때로는 꿈에서 영감을 얻는다. 스티븐 킹은 이 작품이 꿈을 적은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이 작품은 단편 소설의 구조적 완성도를 띄고 있는 것은 아니며, 가볍게 읽을 엽편처럼 느껴진다. 분량도 그만큼 작고 이야기도 탄탄한 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며,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기묘한 이야기 같은 느낌을 가진다. 가끔 우리는 꿈이 예지몽처럼 느껴지기는 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 예지몽이 불길한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를 그리고 있다. 예지몽 혹은 예언처럼 보이는 상황을 다양한 장치로 암시로써 보여주고 독자에게 서늘한 느낌을 주는데 성공한 소품이다.

 휴게소

 작가에게 필명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휴게소는 스티븐 킹이 직접 경험한 것을 토대로 쓴 단편이다. 어느날 휴게소에서 연인이 다투는 소리를 들었고, 스티븐 킹은 폭력 사태가 일어나면 리처드 바크만이라는 자신의 필명의 인격을 가지고 나서리라는 생각을 했다. 실제 폭력 사태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때 가진 생각을 바탕으로 소설을 써본 것이다.

 사실 소설가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에 이입해서 인격을 바꾸고 싸우는 이야기라면 좀 단순한 발상이고 식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흥미롭게도 작가의 필명을 통해서 용기를 내고 여자를 구하기 위해 개입한다. 작가가 사용하는 필명에 다른 인격이 부여되어 있다는 발상은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이름, 이름, 이름에 담긴 게 도대체 뭐길래?”(156)라는 부분은 이 소설에서 본명과 필명에 대해서 다루고 있음을 암시한다. 주인공인 존 다이크스트라는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였으나, 1994년 여름 강의를 포기하고 대신 서스펜스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다. 경험에서 나온 소설인 만큼 스티븐 킹과 유사한 인물인데, 그런 그가 만든 필명이 ‘릭 하딘’이다. 그는 자기 소설 속 인물인 투견으을 소환해내서 끼어들려 했지만, 지금은 현실이고 투견은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너무나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 그런 그가 깨달은 것은 투견은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이지만 ‘릭 하딘’은 자신의 필명으로 현실에 존재하는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릭 하딘’으로써 싸움에 나선다. 이런 생각은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소설 속 자신이 만든 인물은 허구라는 것을 인식하지만 자신의 필명은 또 다른 자아를 가진 현실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릭 하딘’이라는 작가는 그 현실에서 존재하며 책을 내고 인세를 벌고 유명세를 얻었으며 ‘존 다이크스트라’ 보다는 허영심도 있고 더 용기있고 강인한 인물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설정한 그 인물은 또 다른 해리성 자아일 수 있는데, 이는 소설 인물과 달리 현실에 실존한다고 인지한 것이다. 스티븐 킹은 현실에서 필명인 ‘리처드 바크만’이 더 과격하므로 그를 불러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하는데, 필명이 내면의 또 다른 자아로 다른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점은 실제로 필명을 가지고 다수의 작품을 발표한 스티븐 킹이기에 할 수 있었던 흥미로운 발상으로 보였다.

 헬스 자전거

 헬스 자전거는 여기에 실린 단편들 중에서 꽤나 환상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이다. 주인공 리처드 시프키츠는 신체검사를 했고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를 받는다. 브래디 박사는 왜 살을 빼야 하는지,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야 하는지 상세하게 설명한다. 나이가 들수록 신진대사 능력은 떨어질 것이고 지금처럼 먹으면 살이 점점 더 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신진대사 과정을 노동자로 비유한다. 주인공인 리처드는 집으로 돌아와서 브래디 박사의 설명에서 비유로 나온 신진대사 노동자를 그림으로 그린다. 그리고 헬스 자전거를 사서 그 그림 앞에서 자전거를 탄다. 신진대사를 노동자로 비유하고 주인공이 그림까지 그리는 장면까지 나오자 당연히 포탈사이트 ‘다음(Daum)’에서 인기리에 연재 중인 웹툰 [다이어터]를 떠올리게 된다. 웹툰 [다이어터]는 여자 주인공이 살을 빼는 과정을 그린 작품인데 중간중간 여자 주인공의 지방과 단백질이 의인화되어서 변화 과정을 우화처럼 보여주고 있다. 현실의 이야기와 내부의 이야기가 동일한 재미를 주고 있어서 작품 전체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단편, [헬스 자전거]는 바로 이 신진대사가 의인화된 존재들이 현실과 이어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은 헬스 자전거를 타면서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 속으로 빠져들고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되며, 나중에는 현실과 뒤섞이기까지 하는데 이런 상상력은 독특한 정서를 갖고 있다. 윤이형의 단편 [큰 늑대 파랑]에서도 주인공들이 마우스로 그린 ‘늑대’가 이후 좀비들이 출몰하자 현실에 나타나는 것과 비슷하다. 허구와 현실이 맞닿음으로써 재미있는 환상을 자아낸다. 여기에 실린 다른 단편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환상특급]이나 [기묘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단편이다.

 그들이 남긴 것들

 한국에서 ‘용산 참사’가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을 부정할 수 없듯이, 미국의 작가들에게는 ‘9․11’이 심각한 영향을 준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스티븐 킹이 자신이 받은 영향을 소재로 쓴 작품이다. 이야기는 ‘9․11’ 사태가 일어나고, 우연히 살아남은 사람의 죄책감과 상처를 다루고 있다. 작품 제목이 보여주듯이 ‘그들이 남긴 것들’은 주인공에게 죽은 사람들의 물건이 갑자기 나타나는 초현실적인 현상을 그린다. 환상적인 장치로 주인공이 어떤 상처를 갖고 있는지 작가는 다루고 있다. 단편에서는 ‘9․11’ 사태 전체를 조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편을 써도 부족할 것이다. 단편에서 그릴 수 있는 것은 결국 한 인간의 내면의 풍경 정도일 것이다. 이 작품은 욕심을 부리지 않고 단편이라는 장르 안에서 ‘9․11’ 사태를 환상적인 도구로 다루고 있다. 평론가들은 작가에게 때로 과제를 부여하거나, 자신의 욕심을 투영하기도 하지만, 작가에게는 어떤 소재를 써야한다든가, 특정한 소재나 구조, 전개 방식, 이데올로기를 써야할 어떤 의무도 없다. 작가들은 단지 자신이 다루고 싶은 것을 다룰 수 있는 역량으로 장르에 맞게 쓸 뿐이다. 어떤 의무감이나 책임감으로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티븐 킹은 사람들의 상처를 이해하려고 했고, 이 작품은 그런 시도의 일환이다. 소설을 인간을 그리는 것이고, 스티븐 킹은 큰 사건 자체가 아니라 한 사람을 그리고 있다. 인간이란 존재는 상처투성이다. 소설가는 그 상처를 치료할 수도 없고, 나을 방법을 제시할 수도 없다. 소설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이다.

 졸업식 오후

 작가가 [하비의 꿈]과 마찬가지로 소설이라기보다 꿈을 적은 구술에 가깝다고 말하는 짧은 글이다. 역시 단편이라기보다는 엽편처럼 느껴지는 글이다. 이미지가 주요한 소설인데, 한 젊은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일상에 갑작스런 대재앙이 일어나는 것을 묘사했다. 평범한 여자 주인공의 심리가 계속 묘사되다가 갑작스런 멸망의 이미지의 대비되는 지점이 흥미롭다. 스티븐 킹은 항우울제 약을 끊으면서 나타나는 패닝샷에서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작가는 쓰는 동안에는 무수히 많은 영화에서 사용된 이미지라는 것을 몰랐다고 하는데, 독자의 입장에서는 역시 영화에서 본 이미지들이 먼저 떠올라서 아쉬운 글이었다.

 N.

 [진저브래드 걸]과 [아주 비좁은 곳]과 비등한 이 소설집에서 긴 분량을 차지하는 글이다. 긴 분량 만큼 독특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편지글과 진료 기록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기이한 사건에 대한 위화감을 덜어주고 기록이라는 형식을 통해 독자가 있을 법한 사건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런 장치가 필요할 만큼 이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소재는 환상성이 강하다. 정신분석학의 강박증과 다른 우주의 존재라는 공포를 결합한 소설로 누구나 러브크래프트를 연상시킬 단편이다. 스티븐 킹이 쓴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의 팬픽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러브크래프트에게 보내는 오마쥬 같은 작품이기도 하다. 숫자 세기에 대한 강박증과 이 세상을 금방이라도 짓눌러버릴 것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공포를 세세한 서술로 풀어놓는다. 인간은 누구나 강박증을 가지고 있다. 그 강박증이 심화되어 정신을 붕괴시킨다. 그것이 세상의 멸망과 연결되어 있다면? 자칫 지루한 느낌이 들 수도 있는데, 러브크래프트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면서 다층적인 구성 방식이 진부한 감이 있기 때문에 전개나 결말의 예측이 쉽기 때문이다. 즉, 독자는 예견감이 드는 작품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 한다. 물론 그 결말에 이르는 과정에서 스티븐 킹의 필력이 자아내는 묘사와 분위기를 감상하는 맛이 있는 글이기도 하다.

 지옥에서 온 고양이

 이 작품집에 실린 글들 중 가장 오래 전에 쓰인 단편이다. 그만큼 다른 단편들과 달리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데, 새로운 요소가 적고 이야기가 단순한 면이 있다. 드로건이라는 노인은 한 고양이를 죽이기 위해서 주인공을 고용한다. 살인청부업자에게 고양이를 죽이라니? 황당한 시작이지만, 그 고양이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 드로건의 말로 밝혀진다. 이미 세 명을 죽게 만든 고양이인 것이다. 이 작품은 어떤 공포감을 느끼게 만든 글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위트를 섞은 느낌이다. 도입부부터 킬러에게 고양이 암살을 맡기는 상황부터가 블랙 코미디처럼 다가오고, 위험한 고양이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안이하게 있다가 고양이와 목숨을 건 혈투를 벌이게 되는 킬러의 모습도 진지하게 읽히기보다는 황당한 느낌을 받는다. 제목에서 연상되는 느낌을 그대로 약간은 우스꽝스럽게 그러면서도 잔인하게 그려낸 소품.

 ‘뉴욕 타임스’ 특별 구독 이벤트

 비행기 사고로 사랑하는 남편을 읽은 주인공. 그런데 죽은 남편에게 전화가 온다. 한없이 슬프고 낭만적인 이야기를 적절한 장난스런 대화와 따스한 감성으로 쓴 작품이다. 단순히 죽은 남편에게 사후에 전화가 왔다는 것만으로 작품을 이끌어갔다면 심심했겠지만, 남편은 사후세계의 시간은 현실과 다르게 흐르기 때문에 훗날 일어날 사건에 대한 암시를 한다. 이것은 이 전화가 여자의 환각이 아니며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는 증거도 된다. 주인공과 독자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사실에 안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안도감은 다시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을 하게 만들어 이야기가 더 와닿게 만든다. 진부할 수 있는 사후세계를 다루었지만 무난하게 잘 전개해나간 단편이었다.


▲ [해가 저문 이후] 원서 페이퍼백 표지.

 벙어리

 한 사내가 성당의 고해부스에서 죄를 고백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독자는 고해부스에 있는 신부처럼 사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건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다. 주인공은 길거리에서 벙어리를 태워준다. 그리고 벙어리에게 자기 아내의 불륜과 횡령을 토로한다. 그런데 벙어리는 휴게소에서 사라지고 아내를 죽인다. 주인공은 고해부스에게 이야기를 하듯, 벙어리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이중적인 구성이 흥미로운 작품이다. 그렇다면 벙어리는 고해부스 속 신부이면서 또는 그 너머에 있는 신을 은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벙어리가 아니라 처음부터 고해부스에서 신부에게 이야기를 했다면, 신은 과연 그를 불쌍히 여겨서 아내를 죽게 만들었을까? 그게 옳은가? 인간의 윤리와 신의 윤리는 어떻게 다른가? 인간의 의도가 신의 의지를 좌우할 수 있을까?

 여기서는 벙어리가 마치 신의 사자처럼, 혹은 소원을 접수한 악마처럼 주인공이 갖고 있던 고민을 해결해준다. 말을 할 수 없는 벙어리는,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건네지 않는 신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신이 실제로 인간사에 개입해서 기도나 고해에 응답하거나, 혹은 살해로 일을 해결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벙어리는 마치 주인공이 바라는 것을 성취시켰다는 점에서 외부의 악마 혹은 내면의 악을 연상시킨다. 흔한 해석으로는 주인공의 내면의 악의 실체화 같다. 주인공은 신부의 질문처럼 벙어리이지만 귀머거리는 아니다, 라는 것을 무의식 중에 인지하고 있을 수도 있다. 신부는 “당신을 속였다고? 귀머거리가 아닌 줄 알면서도 얘기한 건 아니었소? 내가 보기엔 그게 핵심인 것 같은데?”(437)라고 말하는데 이는 이 소설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핵심은 단순히 우연히 태운 벙어리가 사실은 귀머거리는 아니라는 반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누군가 자신을 대신해 살인을 저질러 줬으면 하는 인간의 은밀한 욕망을 드러내는 데 있다. 주인공은 누군가 대신해 아내를 벌해주기를 원했다. 그것이 신이든 악마든, 지나가는 히치하이커든 상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직접 하기는 싫지만 남이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도 살인이라는 중죄를 대신 해주기를 마음 속으로만 바라는 마음.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은 “아뇨, 신부님.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친구를 내 차에 태우셨을 가능성도 있나요?”(439)라고 묻는다. 여기에 신부의 속내와 대답은 갈린다. “사제는 마음속으로 ‘그렇다’고 대답했으나 실제로 나온 대답은 달랐다.”(439)라는 진술은 사제가 내면에는 주인공의 은밀한 욕망에 공감함을 보여주나, 나약한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는 인간적인 대답이 아니라 딱딱하고 인간이 따르기 힘들며 인간이 성취해야 하는 신학적인 대답을 내놓는다. 그러나 이 소설은 결국 인간이 신에게 바라는 것은 악에게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흔히 신자들이 기도를 하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응답받고 신이 모든 것을 이루어주기를 바라며 우연성이 아닌 신의 의도대로(혹은 자기 의도대로) 세상이 움직이기를 바라는 마음에 대한 문제를 훑는 글이다. ‘벙어리’는 주인공의 은밀한 욕망이면서 동시에 주인공이 바라는 신의 형상이기도 하다. 자신에게 직접 말을 하지 않더라도, 자기 말(기도)을 귀담아 듣고 소원을 성취해주는 숨은 신.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은 ‘벙어리’가 앞으로도 영원히 잡히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야나

 키스로 병을 치료하는 기적을 소재로 한 단편인데, 서사는 특별할 게 없고 회고조로 기적을 그리는 단편이다. 잔잔하고 따뜻한 글로 크게 인상에 남지는 않았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아야나라는 흑인 소녀의 키스를 받고 병이 치유된다. 그런데 주인공은 키스를 받지 않았는데도 이후에 마찬가지로 키스로 남을 치료하는 사람이 된다. 이 글은 스티븐 킹이 사고를 겪고 난 뒤에 왜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사는지, 기적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쓰게 된 작품이라고 한다. 그만큼 이 작품은 기적을 해부하거나 해석하지 않는다. 우리 삶에서 기적이란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기적이니까. 기적의 불가해한 면을 다루면서도 이 소설의 시선은 한없이 따뜻하다. 그건 우리 삶 자체가 기적이기 때문이고, 작가는 그러한 메시지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따뜻한 글이다. 그만큼 무난하고 달리 할 말이 없는 글이기도 하다.

 아주 비좁은 곳

 이 소설집에 실린 마지막 단편은 [아주 비좁은 곳]이라는 제목으로 간이 화장실에 갇혀 죽을 위기에 처한 남자를 다뤘다. 앞의 [아야나]가 따스하고 밝은 느낌의 글이라면, 이 작품은 아주 잔혹하고 어두운 글이다. 특히, 간이 화장실에 갇힌 남자를 다루기 때문에 똥통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는 글로 엄청나게 더러운 글이다. 이런 더러움을 견디지 못하는 독자라면 읽기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완성도는 상당히 높기 때문에 어차피 글자로 묘사된 더러움에 영향을 받지 않는 독자라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구성이 탄탄하고 전개가 안정적인 단편이다. 더러워서 읽기 힘들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묘사도 디테일이 살아있고 집요하다. 아주 비좁은 간이 화장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진저브래드 걸]에서 주인공이 살인마에게 쫓기는 것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아이를 잃은 슬픔을 달리기로 회피하다가 살인마를 만나고 맞서 싸우게 되며 극복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아주 비좁은 곳]은 화장실에서의 탈출이 17년간 친구로 지내온 개, 벳시를 잃은 것에 대한 극복과 복수의 과정 자체다. 내면의 감정과 동기를 주인공의 상황으로 형상화하고 서사의 힘을 불어넣는 거장의 실력이 제대로 발휘된 글이다. 그러나 역시 다 읽고 나서도 더러운 묘사에 질리기도 한다. 작가 자신도 쓰면서 약하게 토악질을 했다지 않은가. 좀 과잉되었다는 느낌이고, 묘사 실력을 뽐내는 듯한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런 치밀하고 집요한 더러운 묘사로 쓰인 작품 하나쯤은 있을 필요도 있지 않겠는가. 어떤 작가의 작품에서 이런 전개와 묘사를 볼 수 있을까? 스티븐 킹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경지의 글이기도 할 것이다.


 리뷰를 마치며

 열 세편의 단편이 실려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글이 길어졌다. 그렇지만 그만큼 다양한 색깔의 스티븐 킹의 단편들을 읽고 회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스티븐 킹의 독특한 개성 넘치는 단편을 읽는 시간은 언제나 즐겁다. 그만큼 그가 앞으로도 계속 장편 만이 아닌 단편을 써주기를 바랄 뿐이다. 흔히 단편보다 장편이 재미있고, 더 많이 팔리는 것이 사실이지만, 단편은 단편 나름대로의 미학과 재미를 가지고 있다. 서문을 읽으면서 스티븐 킹이 이 단편집을 통해 다시 단편 쓰기의 감을 되찾고 즐겁게 써내려갔다는 사실이 독자의 입장에서도 반갑고 즐거웠다.

 이 단편집은 예전과 달리 현실과 밀착된 단편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문체도 묘사가 늘어나고 내면 심리를 치열하게 드러낸다. 그 동안 작가의 신변에 많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며, (목숨을 잃을 뻔한 교통 사고와 9․11 사태 등등) 이런 변화하는 점들을 보는 것도 독자들에게는 또다른 재미이기도 하다.

 처음에도 말했지만, 분량에 따라 소재에 따라 개인적 취향에 따라 아무래도 마음에 드는 단편이 갈릴 수밖에 없다. 단편집은 대게 호불호가 많이 갈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 권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접한다는 것 자체가 단편집의 매력이며, 그것이 스티븐 킹의 이야기라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구입해서 읽을 가치가 있다. 스티븐 킹 같은 대중소설가가 있기에 우리는 책을 읽으며 이야기에 몰입하는 경험을 아직도 지속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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