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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의 현상금

필립 리브, 김희정 옮김, 부키, 2010년 6월



잠본이 (zambony@hanmail.net)



견인 도시 런던이 불길 속으로 사라지고 2년 뒤, 톰 내츠워디와 헤스터 쇼는 죽은 친구로부터 물려받은 비행선을 타고 세계 곳곳을 누비며 무역상 겸 모험가로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칭 역사학자라는 페니로얄 교수를 승객으로 태우고 날아가던 도중에 반 견인 도시 동맹의 과격파인 그린 스톰의 추격을 받는다. 일행이 천신만고 끝에 대피한 곳은 유서 깊은 견인 도시 앵커리지. 그러나 이곳은 얼마 전에 전염병이 돌아서 인구가 격감한 탓에 옛날의 활기를 잃은 상태였다. 어쨌거나 톰은 오랜만에 견인 도시에 체재하며 고향에 돌아온 기분을 맛보지만, 헤스터는 그럴수록 톰이 자기로부터 멀어지는 것만 같아 불안을 느끼는데…

필립 리브의 2003년 작 장편소설. 매력적인 세계관과 두근거리는 모험으로 독자들에게 전율을 안겨주었던 [모털 엔진]의 속편인 동시에 ‘견인 도시 연대기’ 시리즈의 제2부에 해당한다. 유럽대륙의 평원과 아시아의 산악지대를 배경으로 사악한 견인 도시 런던과 반 견인 도시 동맹의 대결을 묘사했던 전작과는 달리 눈과 얼음으로 덮인 극지방을 중심으로 선량한 주민들의 견인 도시 앵커리지가 사냥꾼 도시 아크에인절을 상대로 벌이는 추격전을 그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생 잠수함을 이용해서 견인 도시에 침투하여 도둑질을 벌이는 불량소년 집단 ‘로스트 보이’나 반 견인 도시 동맹 내부의 신흥 파벌로 피도 눈물도 없는 전투방식을 과시하는 ‘그린 스톰’ 등의 새로운 세력이 속속 등장하여 각자 자기들의 이익에 따라 물고 물리는 혼전을 보여준다.

전작 [모털 엔진]이 익숙한 세계에서 쫓겨나 험악하고 혼란한 바깥 세상에 적응하는 톰의 성장을 주로 그린 데 비해, 이번에는 반대로 헤스터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그녀가 어린 나이에 끔찍한 범죄에 희생되어 인생이 꼬일 대로 꼬였다는 사실은 이미 전작에서 설명된 바 있다. 톰과의 만남과 모험을 통하여 어느 정도 그 상처를 치유하고 인간다운 심성을 찾아가는가 싶었으나, 저자의 농간에 의해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갈등을 겪으면서 방황하게 되니 참 얄궂은 운명이 아닐 수 없다. 그 갈등의 원인도 톰과의 관계라는 외부적 문제와 자기 자신의 출생 비밀이라는 내부적 문제로 나뉘어져 있어 헤스터 혼자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양상을 보여준다.


▲ ‘견인 도시 연대기’ 한국어판, 총 4권.

일단 톰과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자.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이자 동반자인 톰에 대한 집착 때문에 앵커리지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혹시나 톰을 잃게 되는 건 아닐까 고민하고, 앵커리지의 여시장인 철부지 소녀 프레야가 톰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그 고민이 질투로 바뀌더니, 급기야 두 사람이 우발적으로 키스를 나누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고 절망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절망 때문에 헤스터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어떤 행동이 이야기의 행방을 결정하는 중요한 열쇠로 작용하는데, 다행히 후반부에 헤스터 본인의 손으로 어느 정도 그 여파를 수습하긴 하지만 진짜 중요한 부분은 해결되지 않고 넘어가기 때문에 앞으로도 갈등이 새로 생겨날 여지는 그대로 남아 있다.

헤스터 본인의 출생에 대한 문제도 그녀의 마음을 크게 뒤흔드는 기폭제로 작용한다. 여기서 헤스터의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그녀의 어린 시절을 빼앗아간 증오스러운 사나이 밸런타인이 다시 중요하게 떠오른다. 물론 본인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직접 나오는 건 아니고 이름만 언급되는 정도지만 이 아저씨가 저지른 죄가 워낙 크다 보니 이름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헤스터의 앞길에 상당히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다. 전작을 읽은 독자라면 이미 밸런타인이 헤스터의 생부일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알고 있겠지만 극중에서는 밸런타인과 그의 친딸 캐서린만이 그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다가 둘 다 사고로 죽어버렸기 때문에 헤스터 본인은 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린 스톰의 뒷조사에 의해 밸런타인의 과거가 폭로되면서 그 사실이 헤스터에게도 알려지고, 그러잖아도 톰을 잃기 싫어서 큰 사고를 친 직후였던 헤스터는 자기가 원수의 딸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에 큰 충격을 받아 더더욱 깊은 나락으로 빠져든다.

헤스터의 이러한 갈등은 내적으로는 그녀의 상처 입은 마음에 더욱 더 큰 상처를 남김으로써 그녀의 인물상을 더욱 입체적이고 역동적으로 변모하게 채찍질하고 있다. 속으로는 사랑하는 톰에게 버림받기 싫다는 연약한 마음을 감추고 있지만, 자기의 비참한 처지와 저주받은 출생에 자포자기한 나머지 겉으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적을 사정없이 해치우며 톰 이외의 사람들에겐 차갑게 대하는 위악적(僞惡的)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쯤 되면 헤로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안티히어로라고 불러야 할 판인데, 본래 히어로여야 할 톰이 비교적 수동적이고 믿음직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는지라 이러한 인상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분명히 중반에 헤스터를 구하러 뭔가 행동을 취하긴 하는데 형편이 여의치 않아 오히려 구원을 받고 ‘무언가’에 대한 트라우마까지 덤으로 얻는 바람에 주인공 입장이 참 말이 아니다.) 사실 이런 역할 분담은 전작에서도 폭력적인 징벌자 역할은 주로 헤스터가 담당하고 평화적인 구원자 역할은 주로 톰이 담당함으로써 이미 익숙해진 것이긴 한데, 이번에는 헤스터의 성격 변화가 상당히 극적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더욱 더 두드러진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톰과 헤스터의 입장에 대응하는 또 다른 남녀 한 쌍이 스토리를 동시에 이끌어가고 있지만 중반까지는 따로 떨어진 곳에서 서로 상관없이 각자의 역할만 하다가 결말에 가서야 제대로 만나서 커플이 될듯말듯한 분위기를 살짝 보여주는 정도에 그치기 때문에 전작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부모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하루아침에 앵커리지의 시장 노릇을 하게 된 프레야는 다소 세상 물정을 모르는 고지식함을 보여주지만 뒤로 갈수록 리더십과 판단력을 갖춘 지도자로서 성장하고, 로스트 보이의 일원으로서 앵커리지에 침투한 카울은 신출귀몰한 절도 및 스토킹 행각으로 유령이라는 오해를 받지만 어느 새 앵커리지 시민들에게 애착을 느끼고 결국 톰의 편으로 돌아선다. 각자의 처지나 성격의 변화 면에서 보면 전작의 캐서린과 포드 커플의 변주로도 볼 수 있으나 다행히 이번에는 둘 다 운 좋게 목숨을 건진다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라 하겠다. 동시에 프레야는 전작의 런던과 대조되는 착한 사람들의 마을인 앵커리지를, 카울은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연상케 하는 로스트 보이를 각각 대표함으로써 각 집단의 성격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작품의 세계관을 넓히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

하지만 본서에서 새로 등장한 캐릭터 중에 최강자를 꼽는다면 그 자리는 당연히 님로드 페니로얄 교수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최종전쟁 이전의 유물을 가지고 자기 맘대로 낭만에 가득한 헛소리를 지어내서 역사학계의 야유와 일반인들의 갈채를 동시에 받는 불세출의 사이비 학자인데, 천재적인 입담과 날카로운 생존본능, 그리고 형편에 따라 얼마든지 말을 바꾸고 편을 갈아타는 기막힌 처세술로 온갖 역경을 헤쳐 나가는 절대무적의 괴인이라 할 수 있다. 평소에 하는 짓을 보면 그냥 허풍으로 가득한 개그 캐릭터처럼 느껴지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주인공들의 뒤통수를 칠 수도 있고 (본의가 아니라고는 해도) 회복 불가능한 치명적인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웃고 넘어갈 캐릭터는 아니라는 점이 절묘하다. 이 사람의 허황된 저서를 믿고 신천지를 찾아서 앵커리지를 움직이던 프레야는 우연히도 페니로얄 본인이 방문한 것을 알고 칙사 대접을 하며 깍듯이 모시지만 정작 페니로얄 본인은 자신의 사기행각이 탄로날 까봐 전전긍긍한다. 잘못된 지식과 얄팍한 글재주로 대중을 호도하고 위정자를 미혹하는 곡학아세(曲學阿世)의 전형이라 할 만한데, 저자의 유머러스하면서도 통렬한 풍자 정신이 잘 드러나는 인물상이다.

결국 앵커리지는 사람들의 노력과 기막힌 행운에 힘입어 신천지에 도착하고 톰과 헤스터는 온갖 고난을 뚫고 사랑의 결실을 맺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나지만, 여전히 바깥 세계는 위험과 혼란으로 가득한 채로 남아있기 때문에 독자는 미래에 대한 일말의 불안을 느끼며 책을 덮을 수밖에 없다. 전작에서 사망한 ‘어느 영웅’을 스토커(일종의 사이보그)로 되살려 전력을 강화한 그린 스톰은 동맹을 완전히 장악하고 견인 도시들에 대한 전면전에 돌입한다. 그리고 주인공들에게 씻을 수 없는 타격을 안겨주고 도망간 페니로얄은 신간 [사냥꾼의 현상금](그렇다. 본서와 같은 제목이다.)을 팔아먹어 갑부가 된다. 주인공들 입장에서는 그나마 한숨 돌리고 평화를 되찾은 셈이지만 세계 전체로 보면 그야말로 압제와 부조리가 횡행하는 위기상황인 셈인데, 후속편 [악마의 무기]에서는 과연 이러한 요소들이 어떻게 발전되어 또 다른 이야기를 빚어낼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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