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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평

아밀 외, 환상문학웹진 거울, 2011년 12월


투니즘



1. 과거

 수많은 사람을 통해 지겹도록 들은 뻔한 이야기겠지만, 한국 장르소설 시장의 흐름을 복기해 보자.
 90년대 중반, 소수 동호인의 모임에서 시작한 장르소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통신망에서 연재되던 소설들이 정식으로 출간되어 서점에서 독자들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우혁의 [퇴마록](들녘, 1994)과 김근우의 [바람의 마도사](무당미디어, 1996),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황금가지, 1998) 등이 이 대열을 이끌었다. 이들 작품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전민희, 김상현, 전동조, 홍정훈 등이 연이어 등장하여 장르소설의 황금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황금기는 길지 않았다. 장르소설이 돈이 되면서 많은 출판사가 생겨났고, 이에 따라 이전보다 더 많은 작품들이 출간되었다. 더 많이 생산되고 더 빠르게 소비되었다. 서점에서 구매하는 독자보다 대여점에서 빌려 보는 독자가 갈수록 많아졌고, 종국에는 극소수의 작품을 제외한 대부분의 장르소설이 대여점을 통해 유통되었다.
 대여점에서 유통되던 작품들은 그저 소비되기만 했다. 어떤 작품이 더 재미있고 잘 팔리는지가 장르소설의 지상과제인 듯했다. 그러면서 갈수록 독자들로부터 멀어졌다. 이들 작품은 주제의식도 버리고 문장의 멋도 버린 채 재미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이후 경기 침체의 여파로 수많은 대여점이 문을 닫았고, 대여점용 도서 시장은 급격히 축소되었다.
 서점에서 유통되던 작품들의 형편도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위축된 건 대여점용 시장만이 아니었다. 소설을 즐기는 건 사치인 사회가 되었다.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의 한켠에 마련된 SF 도서 전시/판매 부스에서 책을 고르던 어떤 이는 ‘이거 읽으면 뭐가 남는 거냐’라 물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실용적인 무언가’를 얻을 수 있어야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받아들였다.
 어쩌면 이는 장르소설 독자들의 탓일지도 모른다. 독자들은 이를 즐기기만 했을 뿐, 타인들에게 ‘이게 왜 읽을 만한 책인지, 실용적인 뭔가가 아니어도 왜 읽을 가치가 있는지’를 설명하지 못했다. 그런 시도가 잠시 있다가도 사라졌고, 이런 자료는 축적되지 못했다. PC통신 시절의 자료들이, 워터가이드나 정크SF 시절의 자료들이, 그리고 그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동호회들의 자료들이 후대로 계승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장르소설에 대해 논하려는 이들은 과거의 자료가 전혀 축적되지 않았다는 현실의 벽에 부딪치곤 했다.


2. 현재

 2011년 12월,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 [B평]을 출간하였다. [B평]을 포함해 거울에서 그간 출간한 책은 모두 18종인데, 이중 [B평]은 처음으로 출간되는 비소설이다. 비평선은 앞으로도 2~3년에 한 번씩 출간한 예정이라 한다.
 비평선 [B평]은 크게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에 대해 논하고, 다음으로는 책으로 묶인 장르소설에 대해서 다루며, 마지막으로는 장르소설 자체, 혹은 장르소설 시장에 대해 논한다. 불필요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 사족을 달자면, 이하의 글에서 언급하는 장르소설이라는 표현은 판타지와 SF 장르로 국한한다.

1) B평: 작가

REDfish Chronicles―赤魚 김주영, 14년 간의 궤적
 김주영을 출간작으로만 접했던 독자라면 이 글 {REDfish Chronicles}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그는 14년에 걸쳐 많은 작품을 발표했고, 이 중 상당수는 웹에서만 공개가 되었다. 종이책으로 정리된 작품은 그의 작품 세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워낙 단편이 많은 작가이니 그 작품을 모두 살펴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바, 이 글에서는 작가가 오랫동안 애정을 갖고 다룬 [나호] 연작을 시작으로 작가의 장기인 ‘동화 비틀기’를 전면에 내세운 [다시 쓰는 시리즈], 첫 장편 출간작인 [열 번째 세계]와 최근작인 [이카, 루즈] [여우와 둔갑 설계도]를 다룬다. 이들 작품에 대한 소개를 통해 작가의 활동 초기부터 최근까지의 작품 활동을 순차적으로 소개하며, 작가가 일관되게 다뤄온 주제는 어떤 것이었는지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이 글은 김주영의 오랜 독자가 차근차근 정리한 14년의 기록이다. 김주영의 작품을 단 한 편도 읽지 않은 독자라도 왠지 작가와, 혹은 그의 작품과 친숙해질 것 같다. 김주영이라는 작가에 대해 이보다 더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공허를 넘어 삶을 깨우는 소통의 흐름―박애진 소설에 대한 상념
 박애진의 작품은 쉬이 넘어가지 않는다. 이곳이 아닌 저곳에서 벌어지는 일인데도 독자는 이곳에서 갖고 있던 고민을 내려놓지 못한다. 저곳에서 벌어지는 일인데도 이곳을 배경으로 이야기할 때보다 오히려 독자의 감성을 자극한다.
 ‘소통’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박애진의 작품을 이야기하는 이 글은, 작가의 작품을 소개한다기보다는 소통이라는 주제를 다루기 위해 작품을 인용하는 듯 읽히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조금씩 생겨나는 거리와, 그 거리를 메우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박애진의 작품 인용과 어우러지면서 글은 비평문보다는 서정적인 수필을 닮아 간다. 수필 한 편을 읽듯이 편한 마음으로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읽다 보면, 작가와 나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느낌이 든다.

존재의 재발견―김보영 작가론
 김보영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전복(顚覆)을 다룬다. 뭔가 결핍되어 있던 등장인물이나 어딘가 이질적인 세계는 이야기가 끝날 무렵 뒤집어진다. 그럼으로써 등장인물의 결핍이 사실은 결핍이 아니었음을, 이질적인 세계는 새로운 세계로 다시 다가옴을 느끼게 된다.
 촉감만을 허락받은 클론이 인식하는 세상({촉각의 경험}), 혹은 네 개의 감각만 허용되는 공간에서 새로이 접하게 되는 다섯 번째의 감각({다섯 번째 감각}), 아무도 잠들지 않는 세상에서 홀로 잠드는 등장인물({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 이 글 {존재의 재발견}은 김보영의 작품이 결핍이 아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이질적인 세계가 아닌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들은 비정상이 아니라 다만 소수일 뿐이라는 것을, 따뜻한 시선을 담아 그려낸다고.

직선으로 질주하는 광기와 애정, 기묘한 이야기―하지은 작가론
 처음부터 모든 걸 잘 할 수는 없다. 제아무리 훌륭한 화가라도 처음에 붓을 잡았을 때는 선 긋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그 어떤 명의라도 처음에는 메스를 쥐는 법부터 배웠을 것이다. 반복되는 훈련 속에 자신의 뜻한 바를 계속해 되뇐 끝에 훌륭한 화가가, 명의가 되었을 게다.
 이 글은 하지은의 첫 출간작부터 가장 최근의 작품까지를 빠짐없이 다루며 작가의 발전에 대해 이야기한다. 피카레스크 형태의 단편 연작으로 이루어진 다섯 권짜리 첫 장편 [전설을 만들어 드립니다]부터 원숙한 구성으로 작가의 이름을 널리 알린 [얼음나무 숲], 그리고 이후의 작품들에서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는 작가의 모습을 소개한다. 나이가 들며 조금씩 장르소설에서 멀어지는 것 같다던 글쓴이는, 발전하는 작가와 함께 다시금 장르소설로 다가가려 한다.
 첫 장편 [전설을 만들어 드립니다]을 소개하면서 작가와 작품에 대한 애정을 마음껏 드러냈던 것과 달리, ‘작가의 발전’에 집중하다 보니 이후의 작품들에 대한 소개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 아쉽다.

하나의 환상, 두 개의 시선―정도경, 정세랑 작가론
 “정세랑은 근대소설의 연구실에 들어갔다 돌아온 연금술사다.” 정세랑의 작품은 근대소설의 형식을 비틀고 벗어나려 한다. 주류 문단에서 다루던 리얼리티를 버리고 환상으로 옮아가는 과정에서 선택한 방향이다.
 “(정도경은) 형이상학의 화형장에서 부활한 마녀다.” 정도경의 작품은 환상소설의 원류라 할 수 있는 낭만주의 소설에 가깝다. 등장인물의 현실이나 믿음 체계가 흔들리는 순간 이야기는 오롯이 환상소설로 치환된다.
 ‘리얼리티’의 문학에서 ‘환상’의 문학으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고 전제하는 이 글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정세랑과 정도경 두 작가의 서로 다른 움직임을 통해 논하고, 그 둘이 각각 한국 환상소설의 두 축으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기대한다.

임태운의 스토리 텔링 방식과 그 한계―인물론을 중심으로
 임태운의 작품에서는 등장인물의 행태를 이야기의 중심에 배치하고 이에 맞춰 사건을 전개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이 글은 등장인물의 행태를 작가가 어떻게 구축하고 묘사하는가를 중심으로 임태운의 작품을 논한다. 주인공에 집중된 그의 작품들은 작가가 의도한 대로 ‘인간적인 인물이 등장하는, 사람 냄새가 나는 글’이 되고, 독자들이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대중 친화적인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주인공에 집중하다 보니 그에 따른 부작용이 생긴다. 중심인물이 아닌 주변 인물의 역할이 미미해지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고, 인물과 사회(배경)의 교감/충돌이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인물의 행태를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임태운의 스토리 텔링 방식과 그 한계}에서는 임태운의 그런 모습을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임태운은 계속해서 발전하고 변화하는 작가이므로 앞으로도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곁에서 지켜보려 한다.

2) B평: 책

 앞의 {B평: 작가}에서 작가 한 명 한 명에 대해 심도 깊게 접근했다면 두 번째 장인 {B평: 책}에서는 책으로 묶인 장르소설에 대해서 다룬다. 여기서 다루는 책은 서점에서 접할 수 있는 정식 출간물 외에도 거울에서 출간한 책이나 독자가 직접 제작한 책을 포함한다.

거울 책 소개―거울은 무엇입니까?
 애초에 이 책 [B평]이 거울이라는 공간에서 출간된 책이기 때문인지 {B평: 책}에서 가장 먼저 소개하는 책은 거울에서 지난 8년간 출간한 16권의 책들이다. 이 글에서는 책에 실린 작품들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거울의 책이 (혹은 거울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를 말한다.

아빠의 우주여행―기술보다 사람이 먼저죠
U, ROBOT―한국인은 SF의 꿈을 꾸는가
다채로운 기담 세계로의 여정―『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를 읽고
 한두 작가로 묶이거나 특정 소재로 묶이는 게 아닌 이상 단편선의 평을 한다는 건 굉장히 미묘하다. 모든 단편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뜯어보는 방법은 분량의 문제도 있거니와 글의 흐름에 미칠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고 단편선의 편집 방향이나 출간의 의미를 중심으로 논하다 보면 각각의 단편에 대한 심도 깊은 고찰이 어려워진다.
 [B평]에 수록된 위의 글 세 편은 모두 장르소설 시장의 이야기로 시작해 단편선 출간의 의미와 수록 단편에 대한 짧은 평까지 담고 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잘 잡고 있긴 하지만, 어딘가 아쉽다는 느낌은 감출 수가 없다. 넉넉지 않은 공간 속에서 네 권이나 되는 단편선에 대한 평이 들어가다 보니 각각의 책에 대한 깊은 논의를 보기는 어렵다.
 지난 몇 해간 출간된 장르소설 단편선의 성과를 하나하나 짚어 보는 것도 의미가 크겠지만 한편으로는 ([B평]을 지속적으로 내놓을 것이라는 편집진의 뜻대로라면) 최근의 단편선 한두 권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곽재식이라는 소설을 만나다―곽재식 단편선 비평
 이런저런 단편선에 여러 편의 글을 싣기는 했지만 아직 정식 출간된 개인 단편선은 없다. 그러나 곽재식에게는 다른 작가들이 내지 못한 독특한 책이 있다. 작가에게 별도의 허락을 받은 한 독자가 직접 책을 묶어 [곽재식 단편선]이라는 이름으로 소량 제작, 배포한 것이다.
 곽재식은 이공계적 지식을 바탕으로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이야기를 마치 옆에서 이야기하는 듯한 친근한 문장으로 풀어낸다. 이 글에서는 곽재식의 이런 특징을 문체, 서사 구조, 주제의식으로 나누어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다. 작가가 얼마나 매력적인가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찬사를 보내며, 전집에 가까운 이 단편선이 정식 출간물이 아니라는 점을 안타까워 한다.
 이 글이 {B평: 작가}이 아닌 {B평: 책}에 들어간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곽재식 단편선]의 출간 경위는 매우 흥미롭지만 이 글은 그 지점을 중점적으로 논하는 글이 아니다. 책에 곽재식의 글 대다수가 수록된 것을 감안하면 이 글은 {B평: 작가}에 들어가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책’에 대한 글 중간에 ‘작가’에 대한 글이 들어가다 보니 전체적인 흐름이 깨어지는 듯하다.

문학의 주인은 누구인가?―최제훈의 『퀴르발 남작의 성』을 읽는 두 개의 시선 1
문학적 취재원으로서의 포스트모던―최제훈의 『퀴르발 남작의 성』을 읽는 두 개의 시선 2
 {최제훈의 『퀴르발 남작의 성』을 읽는 두 개의 시선}은 상당히 흥미로운 기획이다. 기획 의도를 밝히는 서문에서도 말하듯 [퀴르발 남작의 성](문학과지성사, 2010년 9월)은 기본적으로 문단문학이다(장르소설로 보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전제가 붙기는 하지만). [B평]에서 장르 작가가 아닌 이의 작품을 다루는 것은 [퀴르발 남작의 성]이 유일하다.
 이러한 장르-문단의 구분이 아니더라도, 이 기획은 상당히 재미있다. 수능시험에 나온 자신의 시에 대한 문제를 맞추지 못했다는 시인 이야기가 우스갯소리로 도는 것처럼, 소설을 비롯한 모든 문학은 정답이 없는 법이다. 열 명의 독자가 있다면 열 가지 해석이 나온다. 이 기획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문학의 주인은 누구인가?}는 이 작품이 19세기 유럽 문학을 재해석하고, 이 과정에서 ‘원저자의 권위를 뒤집는 각색자’를 작품에 등장시킴으로써 원본과 해석 중 독자가 어떤 것을 선택할지 판단을 맡기고, 창작자-작품-수용자 간의 경계를 뒤흔든다는 점에 주목한다. {문학적 취재원으로서의 포스트모던}은 1차 텍스트에 대한 반전과 전복을 통해서 작가는 독자에게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 하는가, 그리고 작가의 의도는 과연 어떤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끊임 없이 질문을 던진다.
 위의 두 해석 중 어떤 해석을 선택할 것인가, 혹은 이와는 또 다른 해석을 새로이 만들어낼 것인가는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3) B평: 일반

거울이라는 마을―외부에서 본 거울 1
거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외부에서 본 거울 2
 위의 두 글은 환상문학웹진 거울을 외부인에게 소개하는 글이다. 말하자면 거울에 대해 잘 모르거나 최소한 친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거울을 알리기 위한 홍보용 글이다. 하지만 (내가 책 앞에 수록된 ‘편집자의 말’을 잘못 이해한 게 아니라면) [B평]은 거울의 100호라든지 혹은 몇 주년이라든지 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출간한 책이 아니다. 거울을 홍보하는 글은 굳이 이 공간이 아니어도 다른 곳에서 충분히 실을 수 있지 않았을까. [B평]이라는 제목이나 출간 목적과는 거리가 있는 글이라 읽는 내내 위화감이 들었다.

15년 생존 표류기
 이 글은 작가 김주영이 15년간 직접 겪었던 장르소설 현장의 기록이자 작가 분투기이다.
 90년대 후반의 장르소설 팬덤의 분위기, PC통신 시절의 동호회에서 진행했던 한국 SF 컨벤션과 직지 프로젝트, 장르소설 작가에게는 커다란 기회였지만 5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사라진 수많은 장르문학상들, PC통신 이후의 새로운 연재공간이 된 장르소설 연재 포털사이트와 환상문학웹진 거울의 등장, 장르 전문 잡지 [판타스틱]과 [Happy SF]의 명멸, 창작 라이트노벨 시장까지, 뚜렷한 방향성을 얻지 못하고 성장한 장르소설 판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닌, 제목 그대로 작가의 ‘생존 표류기’인 것이다.
 어렴풋하게 독자가 알고 있던 장르소설의 역사를, 그 현장에서 직접 뛰어다닌 창작자가 하나하나 짚어 가며 생생하게 다시 풀어낸다. 결코 쉽지 않은 그 순간 순간을 고군분투하며 생존한 작가는, 앞으로도 쉽지 않을 장르소설 판에서 다같이 살아남자며 힘을 내자고 부르짖는다.

문단을, 그리고 독자를 거부한다―문학적 김예슬 선언
 이 글은 대학을 거부한 김예슬 선언 출판 기획의 일환으로 작성되었던 글이라고, 글쓴이는 첫머리에서 밝힌다. 이런 목적으로 쓴 글이 [B평]과 무슨 관련이 있기에 여기에 실린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이는 글을 다 읽고 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학벌만능주의를 비판하며 대학을 거부한 김예슬의 선언과 같이, 이 글은 작가가 그를 둘러싼 모든 기득권으로부터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작가는 문단을 거부해야 한다, 소위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 문단을 따르는 것은 무의미하다, 문단은 단지 권력일 뿐이니 그런 문단 권력에 영합하는 것은 단지 야합일 뿐이다. 작가는 독자를 거부해야 한다, 독자의 취향에 맞게 글을 쓰는 것은 결국 작가의 주체적인 창작을 저해할 뿐이다.
 이 글은 독자와 출판업자에게 보내는 서늘한 경고이자, 한편으로는 작가인 글쓴이 스스로의 자기 성찰이다.

한국 장르문학을 둘러싼 정황―장르 작가들이 문학상을 타기까지
 2000년대 후반 들어 장르소설이 꾸준히 문학상을 타고 있다. 구병모의 [위자드 베이커리]와 배미주의 [싱커]가 2007년과 2008년에 창비어린이문학상을,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와 김이환의 [너의 변신]이 2009년과 2010년에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것이다. 이렇든 최근 들어 문단과 장르 사이의 간극이 좁혀지고 장르소설의 저변이 넓어지는 모습이 조금씩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이런 현상이 발생한 것인가, 그리고 이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한국 장르문학을 둘러싼 정황}은 이 질문에 대답하는 글이다.
 문단과 장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논란거리가 되고, 그렇기에 이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리한 글은 찾기 쉽지 않다. 문단에 냉소하는 SF 팬덤, 인정투쟁을 하는 판타지 팬덤, 그리고 이들에 관심도 갖지 않다가 상업적인 목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한 문단에 대해 스스럼없이 논하는 이 글은, 이에 대해 언급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문단과 장르의 ‘결합’에 따른 명암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던지는 질문은 앞으로 두고두고 곱씹으며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3. 미래

 글 첫머리에서 말했듯, 장르소설 시장은 90년대 중반에 크게 흥하며 대중들의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출판사가 상업적 성공에 집중하고 독자가 자극적인 흥밋거리에 집중하는 사이 작품의 수준은 조금씩 후퇴했고, 결국 장르소설은 제 자리를 잡을 천금과도 같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장르소설이 제자리를 잡기 위해, 장르소설을 돌아볼 때라고 [B평]은 말한다. 제대로 된 작품 하나 읽지 않고 장르를 논했던 문단 평론가들에 기댈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장르를 논하자는 것이다. 그 행보의 첫 걸음은 [B평]의 출간이다.
 장르에 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90년대의 PC통신 시절 게시판에서, 혹은 워터가이드나 정크SF를 비롯한 수많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오가던 비평과 논쟁, 정보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정리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의 컴퓨터 속에는 그 모든 기록들이 저장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리되지 않은 자료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없다. 자료는 정리되었을 때 비로소 그 가치를 부여받는다. 장르에 대한 지난 시간의 수많은 논의들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지금에 와서는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B평]의 출간이 갖는 의미는 막대하다. ‘책’이라는 형태로 등장한 [B평]에 들어 있는 ‘정리된 자료’는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부디 편집진의 뜻이 이루어져 [B평]이 지속적으로 출간되기를 바란다.



투니즘
1인출판사 ‘기적의책’을 운영하는 한편 SF무크지 [미래경] 편집장을 맡고 있다.
SF&판타지 도서관에서는 컨텐츠 기획과 출판 부문을 담당하고 있다. (어쩌다 보니 공동 운영이라는 직책이 붙어 있다.)
서치 모임(장르소설 작가&편집자&독자들의 음주 모임)을 주최하고 있다.
...(설득력이 없는 주장일지도 모르지만) 평범한 SF 팬. 아직 읽지 못한 책이 책장에 쌓인 걸 보고 가슴 아파 하면서도 새 책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지르고야 마는 평범한 수집가이기도 하다.
댓글 1
  • No Profile
    as 12.02.27 13:58 댓글 수정 삭제
    B평 출간이 갖는 의미는 정말로 크지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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