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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개의 붓

구한나리, 문학수첩, 2012년 6월



赤魚 (http://redfish.pe.kr toredfish@hotmail.com)



‘아홉 개의 붓’은 소재에서 서구적인 판타지와 맥을 달리한다. 주인공 역시 서구적 인물이 아니라 관조적이고 수동적인, 은근과 끈기를 지닌 전통적인 여성이다. 단어 하나, 묘사 하나에도 공을 들인 치밀함이 엿보이는 ‘아홉 개의 붓’에는 차분하면서도 섬세한 문장이 빗어내는 정취가 가득하다. 그 정취를 따라가다 보면, “아무리 재촉해도 좁혀지지 않는 걸음을 걷고 또 걸으며” 이상을 쫓아가는 매력적인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자주 여행을 떠난다. 이들의 여행길에는 예측할 수 없는 사건과 인연이 도사리고 있다. 여행이 어떻게 끝날 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주인공은 기어이 길을 떠난다. 여행을 떠나는 사연도, 이유도 여러 가지다. 하지만 주인공의 여행이 끝나고 책장을 덮을 때, 독자는 이들이 무엇인가 되기 위해, 이루기 위해, 가지기 위해 쉬지 않고 걸어왔음을 깨닫게 된다.

‘아홉 개의 붓’에 등장하는 주인공 갈 역시 아홉 개의 붓을 모아서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길을 떠난다. 영웅담으로 흐르기 쉬운 설정이지만, 작가는 각 붓에 얽힌 이야기를 과장하거나 극적으로 몰아가는 대신 차근차근 풀어나간다. 싸움판이나 인물들의 갈등이 벌어지는 상황조차 차분한 질서를 부여받는다. 그래서 피리, 방울, 조각칼, 종, 약병, 샘, 현 등 주인의 사연에 따라 다양하게 등장하는 붓의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평온하게 이야기 아홉 고개가 지나가버린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아홉 고개를 넘어가는 주인공들의 삶은 그리 수월하지가 않다. 무엇보다 상인, 비인, 천인으로 신분이 나누어지는 차별적인 세상과 이들을 차별하는 사람들이 이들에게 장애가 된다.

주인공 갈은 천대받는 반비반상이다. 사건이나 갈등을 해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아리 역시 멸시 받는 비인이다. 이들과 동행하는 재찬은 천인이지만 날개가 완전하지 않다. 그래서 이들은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갈은 뿔이 없어지면서 자신의 정체성 반쪽을 숨기게 된다. 동시에 남장을 함으로서 여성인 자신도 감춰버린다. 아리는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처럼 자신이 불완전하여 불안할 때, 타인의 영향력이 극대화된다. 갈은 아홉 개의 붓을 모아서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지만 이는 갈 스스로의 염원이 아니라 어릴 때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류원의 이상에 가깝다. 아리는 넋업사니로서 죽은 이들에게 몸과 목소리를 내어주어야만 하는 운명이다. 신분차별 때문에 희생당할 뻔했던 갈과 아리가 이번에는 숙명이라는 미명하에 스스로의 이상과 주체성을 희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희생은 순수한 이타심과 맞닿아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이타(利他)는 자기가 얻은 공덕과 이익을 다른 이에게 베풀어 주며 중생을 구제하는 일이다. 이야기 아홉 고개를 넘는 동안 자신이 지닌 능력으로 타인을 구제하는 갈과 아리의 행위가 바로 이타이다. 이들의 이타는 불완전한 자신을 완전하게 만들고 싶은 개인적 차원의 욕망이 사회적 차원으로 승화된 것이다. 즉, 개인의 삶을 완성하는 대신 조화로운 세상을 완성하고자 한다. 천인, 상인, 비인이 함께 어우러지며 공존하는 조화로운 세상이 오면 갈과 아리 그리고 재찬을 불완전한 개인으로 만들던 조건들이 사라진다. 이들은 비로소 다시 개인적 차원으로 내려와 선입견 없이 스스로의 삶을 돌아볼 기회를 처음으로 맞게 될 것이다. 그리고 조화로운 세상, 언젠가―――거기를 향해 나아가는 대신 지금―――여기에 머물며 자신을 향한 개인적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아홉 개의 붓 이야기가 끝난 뒤에서 주인공들이 바라는 조화로운 세상, 천인, 상인, 비인이 함께 어우러지며 공존하는 세상을 쉽사리 내어주지 않는다. 이는 어쩌면 네 인물이 아홉 고개를 넘으며 쫓아온 조화로운 세상이 사실은 자신들의 이상이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화로운 세상은 아홉 감의 이상이었고, 전설 속의 이상이었으며, 류원의 이상이었다. 유일한 저항적 인물로 등장하는 금간 뿔의 사내―――갈의 아비―――는 갈이 품은 이상이 빌린 이상임을 깨우쳐주기 위해 나타났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들의 여행은 끝이 난 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인지도 모른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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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원경 12.07.30 03:58 댓글 수정 삭제
    심도 있는 리뷰 감사드립니다. 글은 글쓴이의 손을 떠난 순간 독자의 것아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깜짝 놀라면서 몇번을 다시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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