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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궤도

배명훈, 문학동네, 2011년 8월



senyor (garleng@naver.com)



1. 들어가는 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쟁은 가장 많은 슬픔과 원한을 남기는 사건인 동시에 가장 활발하고 극단적인 형태로 문명의 교류가 이뤄지는 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근대 이전까지 그러한 ‘문명 교류의 결실’은 어디까지나 권력자들의 몫이었고, 일반 국민들에게는 돌아가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에는 나름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유럽의 경우에는, 비교적 큰 규모의 전쟁이 일어나도 중세까지는 그러한 전쟁으로 인해 국토 전체가 참화에 휩싸이고 평범한 민간인들이 대규모로 죽어나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중세까지 유럽의 일반 민간인들에게 있어 전쟁이란 가혹한 공출과 긴급 강제 징집, 흉흉한 민심을 의미하는 것이었지 자신들이 상시 전선에 서서 직접 검과 창, 화살 앞에 노출되어 죽어가고 가옥과 논밭이 불탄 것을 지켜봐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 시절의 전쟁은 왕과 기사 계급으로 대표되는 귀족들의 것이었고, 그 결과물 중 ‘긍정적인 것’들을 추려내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 역시 그들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화하며 기사 계급이 몰락하고 시민의식이 발달하며 이러한 현실도 변화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근대적인 국가 개념이 성립되고 중앙집권화가 이뤄지며 왕들은 봉건 영주를 축출하고 민간인들이 기간을 이루는 상비군 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다. 이것은 수많은 국민들 자신이 국가의 주체가 되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것은 기술의 발달과 맞물리며 전쟁이라는 재앙에 국민들이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후 일어난 산업 혁명이 촉발시킨 생산력의 급증은 국가에게 강력한 전쟁 수행 능력을 부여했고, 왕과 귀족들의 정치적 게임에 가까운 성격을 갖고 있던 전쟁은 국가의 모든 체제가 최대한의 역량을 동원해 오직 전쟁에서의 승리만을 위해 움직이게 되는, 지극히 소모적이고 비인간적인 양상으로 발전했다.

 소설 리뷰의 서두에서 왜 전쟁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느냐면, [신의 궤도]의 서사를 이끌어 나가는 가장 핵심적인 주인공은 나물과 은경이지만, 그러한 서사 자체를 성립시키는 커다란 틀은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소설이 약 15만 년 후라는 먼 시간적 간극, 지구에서도 한참 떨어진 휴양 행성 나니예라는 먼 공간적 간극을 가진 배경을 갖고 있는데도 여전히 인간과 전쟁은 떼 놓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의 중요한 전제이기 때문이다. 2.에서는, 이러한 전쟁과 두 주인공이 맺고 있는 관계를 중점으로 다뤄보도록 한다.

2. 작품에 관해

 이 작품의 두 주인공 중 하나인 나물은, 천문교 이론신학회 소속의 성직자다. 가톨릭을 모델로 한 것으로 추정되는, 작중에 등장하는 가상의 종교 단체인 천문교는 삼라만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에 깃드는 초월적인 존재인 ‘신’이 나니예의 위성 궤도 상에 존재하고 있다고 여기며, 초대 여섯 사도들이 후세에 남긴 복음서에 기록된 신의 관찰 기록을 토대로 신의 공전 궤도를 계산해 내고자 하는 이론신학회와 그 공식을 대입하여 성망원경(聖望遠鏡)으로 직접 신을 관측하고자 하는 관측신학회로 구성되어 있다. 복음서는 한 때 신이 누구나 볼 수 있는 빛을 발하며 하늘을 가로질렀다고 말하고 있지만 신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나니예에서도 수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비교적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 이론신학회는 신의 존재를 단지 관념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관측신학회는 원칙상으로는 신의 실존을 공식 교리로 지지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관측신학회 역시도 이론신학회의 영향 아래 들어가 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이론신학회의 수장인 문원식 대주교의 권력욕이 자리하고 있다. 천문교는 ‘내일 종말이 오더라도 나니예의 생존보다는 한 움큼의 권력을 더 탐낼 사람’인 문주교의 전횡을 더 이상 제어하지 못하고 있으며, 정말로 진지하게 신의 공전 궤도를 계산해 내려고 하는 성직자는 오직 나물 하나만 남아 있다. 나물은 정작 가장 중요한 신을 저 궤도 위에 혼자 남겨서 매장해 버리고 자신의 지상 권력만을 공고히 하려고 드는 천문교의 이러한 타락상을 경멸하지만, 내부로부터의 개혁을 외치기에는 그의 입장이 여의치 않다. 그는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열 두 예언자들 중 하나였고, 나이가 들고 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이후에는 성지 호위기사단에 들어가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으며, 호위 기사단을 나온 이후로는 시골 징검마을에서 신의 궤도 계산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이론신학회 입장에서는 나물의 존재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고, 나물을 둘러싼 그 모든 주변 상황은 그가 평범한 시골 성직자로만 남지 못하게 만들었다.

 다른 한 축을 담당하는 주인공인 은경은, 나니예가 휴양 행성으로 개발되기 한참 전 지구에서 태어나 자랐다. 인공위성 재벌의 서녀로 태어난 은경은 자신과 어머니에게 돈 외엔 아무 것도 주지 않은 아버지를 경멸하며, 유일하게 자신이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인 하늘에서 비행기를 몰고 춤추는 것을 꿈꾸었다. 아버지는 은경이 가장 좋아하는 행위인 비행을 돕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해 은경을 돕지만 은경에게 있어서는 그마저도 구속일 뿐이다. 은경의 배다른 언니인 경라는 그런 은경을 증오하며, 끝없이 은경을 파멸시키고자 한다. 은경은 경라의 음모에 말려들어 유일한 이해자였던 친구 바클라바를 잃고 대규모 테러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쓰지만, 그토록 경멸했던 아버지의 배려로 사형을 면하고는 냉동수면 상태에 들어간다. 그녀가 깨어난 곳은 그로부터 15만년 뒤, 아버지가 주도해 개발한 휴양행성 나니예였다. 나니예는 부자들과 은퇴한 정치가, 고위 공직자들을 위해 마련된 인공낙원이다. 높은 인구밀도와 환경파괴에 시달리던 지구와는 달리 처음부터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만을 받아들이고, 기술 개발을 제한하여 자연 환경을 보존하는 구조로 설계된 나니예는 아름답고 평온한 곳이지만 은경은 여기서도 안식을 찾지 못한다. 나니예의 북반구를 정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관리 사무소 인원들은, 원래 나중에 나니예에 도착할 ‘고객’들보다 앞서 나니예를 최적화하는 임무를 갖고 있었지만 모종의 이유로 인해 냉동수면 상태의 고객들을 태운 수송선이 나니예에 도착하지 못하고 많은 세월이 지나자 스스로를 나니예의 주인으로 자임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은경은 첫 번째 고객이었고, 거북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은경 역시 15만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안배에 따라 나니예라는 황금 새장에 갇혔다는 인식에 못 견뎌 한다. 이 별을 벗어날 것이다. 아버지가 준비하지 않은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 그렇게 생각한 은경은 우주왕복선을 통해 위성궤도 상에 있을 환승장치를 거쳐 나니예를 벗어나고자 한다. 권력 투쟁에 물든 지상을 벗어나 신이라는 거룩한 초월성을 추구하려고 하는 나물과, 아버지의 그늘과 자신을 증오했던 배다른 언니 경라에게서 벗어나 나니예 바깥, ‘신’이 궤도를 도는 공간으로 상징되는 자유의 기점으로 향하고자 하는 은경. 이 둘이 각자의 사정으로 인해 행성 관리사무소와 천문교의 영향권 밖인 나니예의 남반구로 넘어갔다가 재회하며 이야기는 본 궤도에 오르게 된다. 나니예를 향해 출발했지만 결국 도착하지 못한 고객들이 출발 전 계약 이행 보장 차원에서 마련해 둔 행성파괴 병기인 동시에 또한 은경에 대한 경라의 개인적인 원한의 상징이기도 한 세 개의 ‘악마의 별’이 나니예를 향해 다가오고, 그 외에도 7000개가 넘는 비교적 작은 행성파괴 병기들이 나니예를 노리고 있다. 그 불길한 빛 아래서 행성 관리사무소와 천문교 연합이 주도하는 북반구와 남반구의 유목민들을 통치하는 초원의 칸 지난 간의 전쟁이 발발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나물과 은경의 관계다. 나물에게 있어 궤도를 이탈하여 더 이상 눈으로 볼 수 없게 된 신의 현존을 밝혀내는 것은 단순히 경건한 성직자로서의 의무가 아니라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축복받은 아이라는 위치에서 떨어져 나가고 그 이후 몸담게 된 성지 수호기사단에서도 제명당한 후 스스로의 존재증명(Rason D‘etre)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나니예의 창조자를 아버지로 두고 있는 은경의 입장에서 나물의 ‘신’은 결코 초월적 존재가 아니며 별다른 관심의 대상도 아니다. 신의 정체는 나니예를 멸망시키기 위해 날아오는 행성 파괴병기를 요격하기 위해 고대에 위성 궤도 상에 설치된 ‘태초의 검’이며,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나물이 축복받은 아이라고 여기게 했던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재능’ 역시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이 작품에서 간간이 언급되는 객관적인 진실에 가깝다. 그러나 은경 역시도 반드시 나니예의 지상을 벗어나야만 할 이유가 있으며, 그 자유의 기점에 서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자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그렇게 단순히 설명할 수 있는 경계를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냉동수면 상태의 고객들을 싣고 나니예를 향해 날아오던 수송선 바이카스 타뮤론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밝혀지며 이 작품 속의 ‘신’은 단순한 초월적 존재도, 요격 병기도, 환승 장치도 아닌 독특한 아우라를 가진 그 무언가로 화한다. ‘신’에 대한 인식은 다르지만, 둘 모두에게 있어서 그것은 반드시 이뤄내야 할, 끝내 가닿아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둘이 서로에 대해 가진 감정은 ‘상실감이나 기대, 동료애, 무력감, 인내심, 반발, 신뢰, 감정이입, 존재의 고독’이 한데 어울린 복잡한 것으로 화한다. 그리고 그러한 둘을 둘러싼 것이 전쟁이다.

 이 작품을 전쟁소설이라는 맥락에서 보자면 지구의 역사에서도 숱하게 나타난 바 있는 유목민과 정주민 간의 갈등의 재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전쟁은 그보다 한층 더 높은 층위에 위치하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전쟁은 남반구와 북반구의 전쟁만이 아니다. 나물과 은경이 속해 있는, 그리고 그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나니예 위쪽에서 훨씬 더 이전부터 벌어지고 있던 진정한 전쟁이 따로 있다. 자세한 설명은 상당히 큰 스포일러라서 이 리뷰에서는 적지 못하겠지만, 그 전쟁의 양상은 15만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이후에도, 문명의 확장과 대변혁 이후에도 여전히 인류는 변하지 못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공격성은 ‘온 우주를 통틀어 가장 완전한 존재이자, 모든 변수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궁극의 변수’가 개입하지 않는 한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1.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인류의 전쟁 양상과 그것이 가져오는 모순들은 그 아득한 시간과 공간 이후에도 여전하며, 인간의 집착과 증오는 행성 파괴병기 ‘악마의 별’로 화하여 신에게 대적한다. 그리고 작품 말미 부분, 지금까지 슬프고 무익한 희생들로 여겨졌던 모든 제반 요소들이 한 점으로 모여 기적을 일으킨다. 이 ‘기적’은 일반적으로 종교에서 말하는 ‘위대한 초월자로서 신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비천한 인류에게 베푸는 은혜’가 아니다. 그리고 그 거대한 기적의 순간, 이 작품을 주도해 오던 패러다임이 바뀐다.

3. 나오는 글

 물론 이 작품도 결코 불멸의 대작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세히 뜯어보자면 상당히 흠이 많은 작품이다. 그 모든 것들이 미리 결정되어 있었다는 점은, 작중에서 ‘미리 정해져 있었다고 해서 그 의미가 우스워지는 건 아니다’고 아무리 강조한다고 해도 독자에 따라서는 받아들이기가 다소 불편할 수 있다. 혈통과 유전을 통해 구원자가 이미 정해져 있고 그를 지니지 못한 이들은 그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운명에 따라 살았을 뿐 수동적인 타자의 위치에 머물게 된다는 부분도 읽기에 따라서는 거북할 수 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 [붉은 돼지]를 연상케 하는, 수많은 비행기들이 오가는 나니예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남부 혁명군이나 새 목축을 비롯한 몇몇 매력적인 설정들이 그저 작품의 분위기를 살리고 인물의 행동 방향 결정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부차적인 요소에 머물며 다소 낭비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도 있을 만하다. 그런가하면 이런 의견도 있을 수 있다. 하난산 성지 대교구장 최신학 대주교는 은경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난은 비행기 유목을 할 운명이었을 거고,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고, 황문찬 소장은 전쟁을 일으킬 운명이었을 거고, 문원식 주교는 또 그 나름대로 할 일을 한 것일 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삶들이 다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라고. 하지만 이것은 그토록이나 다양하게 얽혀 있던 많은 이들의 운명을 관찰자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현자의 방식이다. 인간이 어디까지나 눈이 흐리고 귀가 어두울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그래서 전쟁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차라리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위해 모순을 감내해 가면서도 그 전장에 서는 게 평범한 인간의 방식이 아닐까. 그러한 삶들이 쌓이고 쌓인 끝에 큰 변화를 이끌어 내고, 세계를 보다 나은 곳으로  바꾸는 것. 그런 것이 ‘우습지 않은 것’의 수준을 넘어서 진정으로 ‘인간다운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러한 단점들을 덮을 만한 미점(美點)들도 충분히 많으며, 독자로 하여금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이 작품을 읽어낼 수 있을 만한 기회를 주는 재료들도 풍부하다. 그러나 이 작품이 가진 가장 큰 가치는, 배명훈이라는 작가가 아직도 더 성장할 여지가 있으며 지금까지 써온 작품들보다 더 좋은 작품들을 써낼 수 있다는 가능성이 큼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공백’이 있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의 경력과 명성, 간과할 수 없는 성취를 쌓고도 자신이 기존에 쌓아 올려왔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해 결국 잊혀진 작가들은 수없이 많다. 배명훈은 현재진행형으로 진화하는 작가다. 이 소설, [신의 궤도]는 그 자체로도 썩 훌륭한 작품이지만 바로 그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는 넘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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