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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궤도

배명훈, 문학동네, 2011년 8월



날개 (revinchu@empal.com)



1. 배명훈 소설 조사 보고서

 67447년 74월 257일부터 258일 사이에 ○○(문자 표기 불가) 성단 및 인근 지역 항성 742개가 일시에 연락이 두절되는 상태가 발생했다.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재난이었다. (5쪽)

 2011년 8월 24일부터 25일 사이에 한국에 지금까지 없었던 소설이 출현했다. 역사상 가장 새로운 면모를 가진 소설이었다. 사람들이 재해가 아닌 사고로 규정하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직 사람들이 배명훈이라는 작가의 진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명훈의 소설이 어떤 파급력을 가졌는지 깨닫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누구나 배명훈의 첫 장편소설 [신의 궤도]를 읽는 순간, 배명훈이 펼쳐 보이는 세계에 매료될 것이기 때문이다.

 배명훈의 첫 소설집인 [안녕, 인공존재!]에 실린 해설에서 신형철 평론가는 제목을 “그는 상상력이다”라고 규정짓는다. 배명훈 소설이 가장 먼저 선보인 충격은 상상력 자체인 것이다. 신형철은 2005년부터 환상문학웹진 거울(mirror.pe.kr)에서 활발히 활동해온 배명훈 작가의 존재를 늦게 알게 된 것은 문단의 게으름을 입증하는 사례라고 말한다. 배명훈은 존재했으나, 소수에게만 인식되고 열광하던 작가였다. 2007년 [누군가를 만났어](행복한책읽기, 2007)로 공동 단편집 형태로 정식 출간을 하고 이후에도 여러 단편집에 단편을 실었지만, 대중들에게 첫 인식된 것은 웅진의 SF 임프린트인 오멜라스에서 출간된 연작소설집 [타워]를 통해서다. [타워]가 출간되자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는 ‘제2회 블로거 문학 대상 주목할만한 시선 3위’를 차지하며 독자들의 호평을 받는다. [타워]는 출간과 동시에 수많은 신문에 전부 기사화되면서 많은 주목을 받으며 여러 독자들과 소통했다. 배명훈이라는 작가를 만방에 알리는 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같은 해인 2009년 문학동네 겨울호에 배명훈의 단편 {안녕, 인공존재!}가 실린다. 이 작품은 곧바로 문학동네에서 만든 제1회 젊은작가상의 대상 후보작 중 한편으로 우수상을 수상하면서 작가가 정식으로 문단에 소개되는 기회를 만든다. [문예중앙]과 [창작과 비평] 같은 문예지에 잇다라 단편을 발표하고, 문학동네의 임프린트인 북하우스에서 단편집 [안녕, 인공존재!](북하우스, 2010)를 출간하며 작가로서 존재감을 키워나간다. 젊은작가상 심사평에서 소설가 박완서는 “풍부한 우주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미처 표현되어지지 않은 인간 존재의 답답함을 무한한 우주공간에서 폭발시키는 데 성공한 작품도 있었다.”면서 {안녕, 인공존재!}의 성취를 말한다. 소설가 신경숙은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처럼 다른 별에서 써가지고 온 것 같은 작가의 전문가에 육박하는 지식과 문학 텍스트 안에서 흔히 접하지 못한 서사의 신선함”으로 평했다.

 이렇게 일찍이 SF 독자들에게 인정받던 작가가 문예지에 작품을 선보이면서 SF 독자가 아닌 문학평론가와 문단 소설가들에게 인정받으며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인지도를 얻고 작품을 소개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독자의 외연을 넓히는 데 성공한 배명훈은 마침내 첫 장편소설을 출간하면서 갖고 있는 진정한 역량을 드러낼 기회를 얻는다. 그 동안 장르문화잡지 [판타스틱], 환상문학웹진 거울, 그 외 SF, 판타지 단편집에서 단편을 개제하면서 배명훈 작가가 쓴 단편은 서른 세 편이 넘는다. 그러나 대중에게 곳곳에 흩어진 이 서른 편이 넘는 단편을 전부 찾아 읽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편으로는 서른 편이 넘는 단편들을 읽음으로써 느낄 수 있는 배명훈 소설의 온전한 재미와 감동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타워]와 [안녕, 인공존재!] 두 권만으로는 배명훈 작가의 모든 색채를 봤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권의 책에서 보여준 배명훈의 모습은 일부분이었다. 마치, 달의 뒷면처럼 볼 수 없었던 배명훈 소설의 진가는 이번에 출간된 [신의 궤도]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의 궤도]는 그 동안 배명훈 작가가 선보였던 단편들의 편린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배명훈 작가의 정수가 모인 책이라고 할까. {안녕, 인공존재!}에서 보였던 사유와 인공 존재라는 소재 역시 더욱 깊고 넓은 모습으로 장편 [신의 궤도] 안에서 펼쳐지며, 그 동안 배명훈 작가의 단편에서 자주 나오던 예언자, 인공위성, 신, 냉동수면 등 여러 소재가 한데 뒤섞여 나온다. 그야말로 이 장편소설은 그 동안 배명훈 작가가 여러 단편에서 보여주었던 통찰력과 상상력이 응집된 형태로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상상력은 기발한데 문장은 단정하고, 박학다식이 어지간한데 스토리는 명쾌하다. 특히 이 대목은 한 번 더 강조해도 좋을 것 같다. 그의 소설은 유난이 명쾌하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그가 대개 하나의 개념으로 요약될 만한 이론/입장을 소설적 장치로 활용하면서 서사를 끌고 나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안녕, 인공존재!]. 해설-그는 상상력이다, 신형철, 303쪽.)

 신형철의 말대로 배명훈 작가의 특징은 단정한 문장과 박학다식에서 나오는 소재들을 명쾌한 서사로 이끌어가는 힘이다. 특히 이 단정하고 명쾌한 모습이 다른 소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세계관도, 인물들도, 사건도 모두 암울하지 않고 명랑하게 펼쳐지는 느낌이다. 분명 어둡고 씁쓸한 내용인데도 밝은 분위기처럼 느껴진다. 이 대비가 소설의 묘한 동력으로 작용한다. 때로 우리 삶의 일면을 닮았다는 점에서 흥미를 느끼고 이 배명훈표 소설을 웃으며 따라가는 게 아닐까. 모호한 삶 속에서 명징한 소설을 읽을 때 느껴지는 희열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자, 이제 책을 펼치자. 그러면 배명훈의 소설은 어느새 십 오만년 뒤의 낯선 행성에 당신을 데려다 놓을 것이다. 어리둥절할 필요는 없다. 배명훈의 소설은 또 세계는 명징하며 유쾌하다.

2. 15만년 뒤의 인간들

 “정보만 날아가. 빛의 속도로.”
 “어디로 날아가는데?”
 “빛으로. 그러니까 항성을 향해서 말이야. 거기로 날아가서 거기에 머무는 거야. 빛을 타고 날아가서 빛 속에 저장되는 거지. 그래서 저런 패턴이 나타나는 거야. 어떤 별들은 그냥 자연상태의 별이지만, 어떤 별들은 그 안에 생명의 정보를 담고 있는 거야. 그래서 저런 식으로 빛을 내는 거고.” (2권 60쪽)

 15만년 뒤에도 인간은 존재할까? 그렇다. 혹은 아니다. 인류는 존재하지만 지금과 같은 형태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라고 불러도 될까? 우리의 후손이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을지 혹은 모두 전멸할지는 지금으로써는 알 수 없다. 다만 상상해볼 수 있는데, 배명훈 소설에서의 인류는 우리와 전혀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육신을 버리고 정신체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위화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만약, 전혀 다른 형태와 사고로 살아가는 생명체의 이야기만을 주구장창 다루었다면 이 소설은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배명훈은 비록 시공간은 전혀 다른 곳을 준비해두었지만, 그 안에는 지금 우리와 같은 인류를 데려다 놓았다. 냉동수면의 형태로 15만년의 간극을 뛰어넘은 것이다. 덕분에 소설에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었고, 이들이 펼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하고, 같은 감정을 느끼는 똑같은 인류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습이고 미래이기 때문에 감정이입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 무렵에, 드디어 우리를 둘러싼 항성들이 이상한 패턴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만 개의 항성들이 똑같은 패턴의 복잡한 전파를 발산했다. 그런데 그게 두 종류였다. 항성들이 두 편으로 갈라선 것이다. 전쟁이었다. (2권 65-66쪽)

 흥미로운 것은 아무리 과학이 발달되고, 다른 행성에 살아도, 그 행성이 게다가 먹고 사는 데 큰 무리가 없는 휴양행성일지라도 인간들은 권력 다툼을 벌이고 전쟁을 하며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육신을 벗어나 항성에 정신이 기거한 신인류가 되더라도 전쟁을 벌인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변함없는 인류의 모습에 씁쓸함과 안도감이 동시에 든다. 15만년 뒤에도 어리석은 짓을 벌이는 인간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느낌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랑스럽다는 감정을 가진다. 배명훈 작가의 소설 속 인물들은 구질구질한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단정한 문장으로 쓰인 인묻들은 대사나 사고 역시 깔끔하며 확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인물들에게든 동일하게 애정어린 눈길로 바라볼 수 있다. 인물의 내면을 깊이 들어가지 않음에도 오히려 그것이 장점으로 작용한다. 독자가 얼마든지 그 공백을 추측하고 채워넣을 수 있는 여지를 만든 것이다. 물론 관점에 따라서 신형철의 지적처럼 “인물들이 하나의 ‘실존’이라기보다는 ‘기능’에 가까워서, 다 읽고 나면 이야기는 선명하게 남아도 인물들은 흐릿해진다.”(322쪽)라는 말도 가능하다. 그러나 단편집에서 각 단편마다 지적된 이런 부분을 작가는 영리하게 장편에서는 장점으로 역이용한다. 긴 호흡을 가지고 인물들을 직조하자 너무 쉽게 인물들을 죽이고 그 파문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단점은 사라지고 인물들의 죽음마다 그 의미를 독자가 직접 음미하고 생각할 시간이 충분하다. 게다가 인물들의 ‘기능’에 대한 지적은 오히려 소설의 핵심 주제로 사용하면서 작품 내적 구조로 체화시킨다. 즉, 신의 의지 또는 휴양행성을 만든 사람들의 계획에 따라 진짜 물리적인 의미로 기능적인 역할을 하는 주인공들을 등장시켰고, 그 의미에 대해서 다시 사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소설의 허구 세계 속 인물들이 역할을 부여받는 것에 대한 은유로, 메타픽션의 대한 사유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복잡한 장치로 작용하기도 한다.

 사실 예언자의 역할을 부여받은 인물을 등장시키고 그 예언이 어떻게 성립되는지, 예언자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배명훈은 이미 몇 차례 단편에서 드러낸 적이 있다. 그러나 장편으로 예언자를 옮겨놓자, 그 의미는 더욱 증폭되어 독자에게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초록 연필}, {예언자의 겨울}, {마탄강 유역}, {매뉴얼} 등에 나타난 예언자들의 모습과 역할에 대한 사유는 장편에서 더욱 핵심에 다가선 모습으로 드러난다. 나물과 지난 두 명의 예언자들을 보여주며 예언자의 의미에 대해서 역할에 대해서 다시금 보여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게다가 또 다른 예언자라고 할 수도 있는, 인간이면서 동시에 매뉴얼이기도 한,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은경’은 더욱 복잡한 인물이다. 이 복잡성이 이 소설의 다양한 층위를 생성하고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은경’이 모든 사건의 핵심이자, ‘은경’을 중심으로 소설 속 세계가 움직이는 느낌을 받는다. 휴양행성 ‘나니예’조차 은경을 위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경은 자신이 좋아할 만한 행성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벗어나려고 하고, 여기에서 갈등이 생성되며 이야기가 파생된다. 이야기가 후반부에 이를수록 은경의 역할은 단순한 히로인이 아니라 세상을 구할 구세주이자 그 때문에 세상을 구하고 희생해야 할 역할로 바뀐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히 복제되어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기능적인 장치, 매뉴얼에 불과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며, 누군가에게는 친구이고, 누군가에게는 연적이며, 또한 작가에게는 여러 차례 등장시킨 주연배우이고, 독자들에게는 자주 만나는 친근한 소설 속 캐릭터이기도 하다. 은경은 배명훈의 정갈한 문장 속에서 단순하고 직선적인 성격의 인물로 비칠 수도 있지만, 사실은 복잡한 내면과 다양한 상징성을 지니고, 여러 역할을 부여받은 누구보다도 입체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이는 단편에서는 쉽게 표현할 수 없이 오직 장편에서 부여할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1) 신의 궤도 진입 매뉴얼 – 은경

 ‘은경’은 이 소설 속 주인공이라고 간단히 명명되고 지나갈 존재가 아니다. 작가가 여러 차례 수많은 단편에서 주인공으로 내세운 전력이 있기 때문에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단막극에서 다양한 연기를 펼치다가 첫 장편영화에 모습을 드러낸 여배우 같은 ‘은경’은 환상문학웹진 거울 84호 기획 기사 {김은경 인터뷰: 그의 여주인공이 된다는 것은}에서 “글쎄. 남의 영업비밀을 이런 데서 이야기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가의 여자 캐릭터나 여성 서술자는 사실 그다지 여성적이지 않다. 그러니까 핑크색이 아니라는 의미로. 다만 남자여도 좋고 여자여도 좋은 역할에 늘 여자주인공을 캐스팅해 놓고, 여성이 아니라 그냥 ‘인간’의 감성으로 연기를 시킨다.”라며 ‘은경’의 캐릭터를 소개한다. 작가의 말대로 ‘은경’의 캐릭터는 여성/남성의 구분은 의미가 없는 듯한 느낌이다. ‘사람’이라고 지칭할 때 가장 잘 들어맞는 인물인 것이다. 배명훈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이 다른 소설들과 다른 담백하고 자유롭고 거침없는 느낌을 주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에 속박되지 않고, 사람으로 인물을 내세우기 때문에 독특한 느낌을 독자에게 전해준다. 이들은 내면의 심리를 절절하고 깊이 되새김질하며 몸부림치지 않는다. 사람이란 당연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은경은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불행한 가정사를 가지고, 원치 않는 증오에 노출되며 끝내는 냉동되고 십 오만년 뒤에 깨어나지만 절대 절망에 빠져 있지 않는다. 상황을 파악하고 증오를 받아넘기며 세계를 탈출하려는데 집중한다. 마치 탈출구를 찾는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기라도 하는 듯이 엄청난 집념으로 움직인다. 그 모든 행동들이 사실은 정해진 것이었고, 부여된 사명이라고 해도 개의치 않는다. 자기가 끊임없이 ‘발행’되는 매뉴얼에 불과하다고,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들어도 크게 동요하고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것이 은경의 정체성이다. 우리가 매 단편마다 마주쳤던 은경의 모습이다. 강단 있고 화끈하고 끈기와 의지가 강한 사람. 어떤 사건 속에서도 침착하게 자기 할 일을 꿋꿋이 해낼 것 같은 인물. 그런 인물이기에 사람을 넘어서 구세주까지 될 수 있는 것이다.(창조주의 딸이면서 결국 세계를 구하고 희생된다는 것은 예수 같은 전형적인 구세주의 모습이다. 나니예 행성에서도 시간이 지나면 천문교의 교리 속에 이야기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 점은 이미 수사들 사이에 퍼지는 나물 수사의 예언자 소문에서 짐작할 수 있다. 나물 수사는 요한의 입장에 있다) 은경은 이 소설의 시작이자 끝이며 사람이자 동시에 매뉴얼이며 저주의 대상이자 사랑을 하는 주체다. 은경은 이야기다. 십 오만년, 지구와 나니예를 잇는 새로운 서사의 창조자다. 그런데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이 은경이 한 명이 아니라 ‘발행’ 된다는 사실이다. 즉, 궤도 진입을 하기 위한 매뉴얼로써 지능이 달린 부품처럼 나오는 것이다. 작가는 1권에서는 이런 사실을 숨긴 다음, 2권 초입에 이 사실을 알리면서 독자의 머리를 강타한다. 여기서 반전의 재미와 함께 은경의 존재에 대한 총체적인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경은 진짜 사람인가? 기억이 항상 제멋대로라면 그 기억의 진위는 누가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계속 오래 잡고 있는 주제 하나가, 서술자를 어떻게 믿어? 예요. 지금 말하는 서술자라는 게 누군가가 100년 전에 뚱당뚱당 만든 서술자를 다 가져다 쓰는 걸 텐데, 되게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정답을 말하는 사람인 것처럼 해서 그러는 걸 텐데 그걸 어떻게 믿어?”
 ―환상문학웹진 거울 73호, 배명훈 특집 기획 ① 독점 인터뷰 – 작가 배명훈을 만나다 1/2, 중에서

 위의 인터뷰처럼 작가는 단편에서 한 실험을 토대로 서술자를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독자가 서술자를 맹신하지 못 하고 의심하게 만들었다. 보고서 형식을 빌려 2권 분량의 장편임에도 다양한 서술자를 등장시키고 이 서술자들의 진술을 모두 반만 신뢰하도록 만든 것이다.1) 따라서 독자는 사건의 내막을 서술자들을 의심하면서 조심스럽게 퍼즐을 맞춰나가고 서술자들의 내면이나 행동의 이유까지 추측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이 은경의 존재인 것이다. 은경은 태생적으로 ‘발행’되는 매뉴얼이다. 복제인간에 기억을 주입하는 방식처럼 보이는데 그 기억은 제각기 차이를 보인다. 1권에서는 이미 암시가 깔려 있지만 위화감을 느끼는 부분을 2권에서는 다시 해설해준다. 2권은 1권에서 제시된 상황을 다시 과학적으로 풀어주는 면이 많아 구성적으로 독자가 잘 짜인 장편소설을 읽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 삶에는 신이 개입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서 바클라바의 신께 기도했다. 신께서 나무라시자 영사기 앞에서 장난치던 거대한 손은 재빨리 스크린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마음에 드리워졌던 심란한 그림자도 순식간에 기억 저편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스크린 위를 평화롭게 날아가는 빨간 내가 보였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는 사이 마음이 다시 조바심으로 기울었다.
 “묘사가 왜 이래?” (1권 39쪽)

 1권에서 은경이 한 서술은 2권에서 최주교가 다시 살펴보게 된다. 여기서 이 은경의 서술은 10번째로 발행된 은경의 서술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최주교는 “묘사가 왜 이래?”라는 말에 가슴이 울컥했다고 진술한다.

 그는 그 문장을 다시 한번 속으로 되뇌었다. 분명히 다른 누군가에게 한 말을 옮겨적은 것이 아니었다. 서술자가 한 말도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김은경의 목소리였다. 김은경이 서술자에게 하는 말이었다. 문장 사이에 실수처럼 슬쩍 끼어 있는 것도 아니고, 따옴표로 튼튼하게 울타리를 쳐놓은 열 번째 구세주의 진짜 목소리였다.
 최주교는 자술서를 작성하던 김은경이 그 순간 서술자와 자기 자신을 분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의 궤도 진입 매뉴얼이라는 이름이 붙은 태초의 공장을, 그 매뉴얼대로 살도록 계획된 자신의 운명을, 그리고 보나 마나 비극으로 끝날 자기 몫의 플롯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떼내려 한 흔적 같았다. (2권 28쪽)

 주술사들이 어떤 식으로 세상을 서술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서술해 주지 않으면 세상은 단 한 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오로지 주술사들이 서술해 줄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 감각도, 인식도, 존재도, 나도. 그 사실을 깨달은 날, 나는 허무와 비탄에 잠겨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바르무사 사원의 그 높은 첨탑을 향해 하염없이 올라갔다. ({수이}, 환상문학웹진 거울 64호)

 배명훈은 {수이}를 쓰고 나서 장편에서도 서술자를 무너뜨리는 작업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시도가 [신의 궤도] 곳곳에서 보인다. [신의 궤도]는 항성들이 조직한 나니예 사고조사위원회가 조사한 문건들이 주를 이룬 형태인데, 따라서 모든 진술들이 다 서술자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배명훈은 그 동안 {연애편지}(환상문학웹진 거울 31호), {고양이 플롯}(소재 앤솔러지 [달과 아홉 냥] 수록작), 등에서 꾸준히 서술 실험을 해왔다.
 여기서 서술자의 존재, 즉 소설 속 세계인 허구 세계에 살아가는 서술된 존재와 따라서 서술에 의해서 플롯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운명의 비극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은경은 이미 신의 궤도 진입 매뉴얼이라는 운명에 따라 비극으로 가는 플롯, 궤도 안에 놓인 상태였다.

 하지만 김은경은, 신의 궤도 진입 매뉴얼은, 자신의 운명을 뛰어넘을 수도 있었다. 충분한 시간이 허락됐다면, 그저 좀더 기다려주기만 했다면, 열 번째 김은경은 어쩌면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껍질을 깨고 다음 세상으로 나갔을지도 모른다. (2권, 28-29쪽)

 그러나 최주교는 1권 내내 생각하고 움직였던 10번째 은경은 그 플롯을 너머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안타까워한다. 독자 역시 1권에서 감정이입을 하고 움직였던 은경이기 때문에 같은 감정을 느낀다. 이 소설은 2003년에 미국에서 발사한 우주왕복선 콜롬비아호가 폭발하는 사고 보고서를 읽고 구상되었다고 한다. 계속 발행되고 또 죽고 그럼에도 우주왕복선을 타고 우주로 나가는 은경의 모습은, 메타픽션의 소설 속 주인공을 상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류 또는 개개인의 맹목적인 삶을 은유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은경은 숭고하게까지 보이지는 않지만 응원하고 싶게 만들고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보게 만드는 그런 감정으로 지켜보는 인물인 것이다.

2) 예언자 – 나물과 지난

 은경이 ‘나니예’ 행성에서 깨어난 뒤에 만나야 하게 예정되어 있는 ‘나물’ 수사. 그는 예언자다. 예언자는 파멸을 대비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파멸을 이루는 자이다. 적어도 배명훈의 소설에 나타나는 예언자들은 그렇다. 배명훈의 단편 {매뉴얼}에서 배명훈은 아주 어린 예언자를 등장시킨다. 핸드폰 매뉴얼을 보면서 예언을 하는 아이. 아이가 말하는 것은 쉽게 지나칠 수 있지만, 거기에는 세상의 위기에 대한 아주 중요한 예언이 담겨 있다. 예언자는 세상의 위기에 대한 신의 대비책과도 같다. 동시에 예언자가 반드시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결말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예언자는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초록 연필}에서 예언자는 초록 연필로 권력의 중심에 선 예언에 나타난 악마의 위치를 찾아내고 미리 구입해둔 인공위성 무기로 악마와 수 천만의 사람들을 한 번에 소멸시킨다. 예언자는 결국 악마를 물리치지만 죄 없이 죽어간 인간들을 생각할 때 사람들에게 악마로 기억되는 것은 예언자일 것이다. 악을 막기 위해서는 악이 자행될 수밖에 없으며 예언은 결코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명훈은 짚고 있다. [신의 궤도] 역시 마찬가지다. 예언자는 휴양행성 나니예의 사람들을 구했지만, 반대로 주변 항성에 깃든 정신체들을 몰살시켰다. 그러나 배명훈은 인물 개개인의 고뇌에 집중하지 않고, 죽음의 파문을 그리지 않기 때문에 {초록 연필}과 [신의 궤도] 그리고 다른 단편들에서 나타난 사람들의 죽음은 암울하고 절망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행동에서 희노애락은 표백된 것처럼 적게 느껴진다. 이들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러나 ‘나물’은 [신의 궤도]에서 가장 많은 감정을 표출하고 독자와 공감대를 형성하며 정체성을 고민한다. 어떻게 보면 ‘발행’ 되었다는 은경이 더욱 정체성을 고민해야겠지만 은경은 고민에 걸려 넘어지는 인물이 아니다. 앞으로 시원하게 나아가고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물’은 주저하고 고민한다. 방황한다. 따라서 더욱 정감이 가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를 응원하게 된다. 신의 궤도를 찾는 인물이기에 그런 모습은 더욱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신을 갈구하는 자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이다. ‘지난’ 역시 예언자다. 그는 40년간 신의 흔적들, 세계의 비밀을 찾아 헤맸다. 그가 모은 정보들은 예언과 값어치를 하며 은경과 나물을 모두 돕는 조력자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 또한 그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지략가다. 나니예 행성에서 그만큼 뛰어난 지략가는 찾아볼 수 없다. 예전에 은경이 바클라바로 ‘지난’을 착각했을 때, 은경의 기억 속 바클라바는 지구에서 뛰어난 지략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궤도에 잠든 신을 깨워 항성파괴무기로 나니예를 구한 것은 은경과 나물이었다. 그러나 나물이라는 예언자가 있기 전에 있었던 10명의 은경과 지난을 비롯한 과거 예언자들이 있었기에, 그들이 쌓아온 예언들이 이어졌기에 가능했던 결과이기도 하다. 누구나 역할을 부여받고 플롯 안에서 살아간다. 그 사실에 절망하거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 그대로 멈춰설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은경이 그러했던 것처럼, 지난이 그랬던 것처럼, 나물이 그랬던 것처럼,

 배명훈의 {마탄강 유역}에서의 전쟁 장면이나, {청혼}에서 우주 전쟁을 보듯이 배명훈의 관심사에서 전쟁은 빼놓을 수 없는 소재이다. 실제로 1차 대전 전쟁사에 관해 학위 논문을 썼을 만큼, 전쟁에 대한 관심과 지식은 높다. [신의 궤도]는 배명훈 작가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집합한 만큼 전쟁이 주가 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배명훈이 공군 장교 출신이라는 점과 전쟁사를 연구한 학자라는 점이 결합된 만큼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아니 세계로 시선을 넓혀도 보기 드문 어마어마한 공중전이 계속 등장한다. [신의 궤도]에 등장하는 긴박감 넘치며, 지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대규모 항공전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밝혔다.

 “비행 훈련 교본도 읽었고, 2차 세계대전 당시 벌어진 공중전에 대한 회고록이나 조종사들이 쓴 전기도 읽었죠. 특히 전투 장면을 한 개인에게 밀착해서 쓰지 않고 멀리서 바라보는 시점으로 썼는데, 그건 제가 대학원에서 전공한 전쟁사를 참고한 거예요. 이 책에 나오는 항공전이 실제로 일어난 적은 없었을 거예요. 지상에서 일어난 다른 전쟁에서 그 양상을 유추해서 썼죠.”
 ― SF, 빛나는 상상력과 통찰력이 만나다, 인터파크 도서 북& 인터뷰

 평소에 전쟁소설을 좋아하는 독자, 또는 밀리터리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이 소설을 특히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스스로도 [신의 궤도]는 전쟁소설로 규정할 만큼, 전쟁의 비중이 높으며 또한 재미있는 부분이다. 지난의 전략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깔끔하고 뛰어나며, 나물 수사의 돌격하는 비행술은 미은의 보조를 받아가며 과학적인 논리와 결합해 적들을 맨 앞에서 격파해나간다. 그 모습은 마치 나물 수사의 신을 추구하는 마음과 닮았다. 나물 수사의 인생, 가치관을 비행 기술로 보여주는 것이다. 은경이 비행술은 춤이다. 비행기로 그런 예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감탄스럽게 묘사되었으며, 그럴 때마다 궤도에 떠 있는 인공위성이 지상에 공격을 한다. 복잡하고 정교한 춤을 추는 은경은 그만큼 나물과 달리 복잡한 사정과 내면을 갖고 있다. 소설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다양한 함의를 가지는 존재인 것이다.

3. 인공존재

 ※ 주의사항
 Cogito™는 대규모 존재폭발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존재폭발은 Dubito™ 회로 시뮬레이션 과정에서 150만 분의 1 이하의 확률로 발생한 고농축 Cogito™ 폭발현상으로, 아직은 확률적/이론적으로만 나타난 현상이지만 차후에 실험적으로 입증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현상은 위의 두 가지 활용과정(신의 증명, 깨달음)에서 Cogito™ 순도가 특정 임계점에 도달하는 순간, Cogito™가 어떤 외부적 환경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은 채 사라지면서 발생합니다. 이는 Cogito™의 순도가 대단히 높아 어떤 외부자극과도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으로, 고체상태의 물체가 기체로 변하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상태변화가 아니라, 극미량이나마 물질의 일부가 어떤 잔류물이나 잔류 에너지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순수한 형태의 소멸현상입니다. ({안녕, 인공존재!}, 119~120쪽.)

 배명훈이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작품은 단편 {안녕, 인공존재!}다. 이 작품에서는 ‘인공존재’라는 배명훈 작가의 독특한 개념이 등장한다. ‘인공존재’는 겉보기에는 아무런 기능도 없는 물건처럼 보인다. 상품가치가 전혀 없는 실패한 상품. 그러나 소설은 반전처럼 ‘인공존재’가 우주로 나가 모두에게 잊힌 시점에서 스스로 사라짐으로써 증명을 해낸다. 단편을 읽을 때는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서로의 존재에 대한 다양한 은유를 내포한 상징으로도 읽을 수 있고, 과학적 사고 실험으로 인공존재를 작가가 어떻게 그려내는지 관찰하는 재미도 있다. 그러나 단편은 거기에서 그칠 수밖에 없지만, 이 ‘인공존재’와 ‘존재폭발’이라는 개념은 장편소설인 [신의 궤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이 소설의 핵심축이자 제목에서 나타나는 ‘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인공존재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 비움으로써 우주, 물질을 왜곡하는 무기이자 신이 된다. 인공적일수록 존재가 순수하고 강하며 깨달음을 얻을 가능성, 열반에 이를 가능성에 대한 발상과 탐구는 제1회 과학기술 창작문예를 수상한 박성환의 {레디메이드 보살}에서도 볼 수 있으며 배명훈 작가가 인공지능체를 다룬 {방해하지 마세요}나 {예비군 로봇} 등에서도 엿볼 수 있다.

 [신의 궤도]의 구성은 퍼즐처럼 정교하게 짜여 있다. 처음에 등장한 이야기가 마지막까지 이어지며 중간중간 세계의 비밀이 사람들의 대사나 행동 등에 의해 암시되거나 복선으로 깔린 뒤에 차츰 밝혀진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일들이, 나중에 해석되면서 독자들은 세계를 온전히 머릿속에 그려내며 희열을 맛볼 수 있다.

 대개의 문단에서 발표되는 소설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그리기 때문에, 세계보다는 인간 관계에 집중한다. 그러나 반대로 SF 소설은 인간을 다루지만 중점은 세계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일반적인 소설과 SF는 전혀 다른 독법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 만약, [신의 궤도]를 단순히 인간 관계만을 집중해서 본다면, 이 소설은 그리 대단한 소설이 아니며 쓸데없이 길다고 느낄 수도 있다. 결국은 인간의 증오에 초점을 맞춰서 본다면 다른 이야기들은 집중이 되지 않고 흥미도 못 느낄뿐더러 사족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신의 궤도]는 제대로 된 서사를 갖춘 소설이 아니며, 오히려 1권 정도로 압축했다면 훨씬 나았으리라고 판단한다. 반대로 SF를 주로 읽은 독자들은 말 그대로 ‘세계관’을 주인공으로 읽는 독법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물 관계보다 작가가 외삽으로 구축한 세계관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한다. 배명훈은 가축 비행기, 인공존재, 다양한 인간들, 항성화 된 존재들 등 행동과 말로 세계를 조금씩 구축해 나간다. 캔버스에 붓터치를 하며 몇 시간 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15만 년의 우주를, 새로운 세계관이 독자들 머릿속에 완성되어 있다. 이 소설은 상당히 전개 속도가 빠른 편이라 15만년의 우주를 전부 다 머릿속에 그리다보면 아찔한 현기증을 느낄 수밖에 없다. 따라가기 벅찬 세계이고, 이를 2권 안에 다 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아직 더 세계에 대한 할 이야기가 많은 것처럼 보이며, 너무 급하게 세계를 순식간에 소개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따라서 세계관을 주인공으로 읽는 독자들에게는 오히려 3권이나 4권 정도로 분량이 훨씬 늘어나서 천천히 이 세계를 더 정밀하게 다양한 시각으로 묘사했으면 더 멋진 우주와 경이를 맛보게 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하게 된다.

 [신의 궤도]를 경라 언니에게 고통을 당하고 죽음에 이르다가 냉동된 채 15만 년 뒤에 깨어나서 15만 년 전 연인과 닮은, 신의 궤도를 계산하는 나물 수사와 함께 나니예 행성을 구하는 이야기로 보는 것은 가장 단순하게 읽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은경이 진짜 은경인지, 발행될 때마다 바뀌는 기억들은 모든 서술을 의심하게 만든다. 세계관에 집중하면 나니예 행성은 우주의 긴 역사에서 지구와 마찬가지로 티끌에 불과하며 항성화된 존재들에게 더 시선이 간다. 항성과 하나가 되어 불멸을 취한 그들은 어떻게 또다시 전쟁을 벌이는가. 그들의 사고는 인간과 어떻게 다른가. 그런 우주 속에 ‘발행’된 은경이 우주로 나아가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주 왕복선을 타고 우주로 날아간다는 건 그런 거예요. 다시 바닥에 내려놓을 역기를 들어올리는 것. 절대로 쉽게 올라가는 게 아니거든요. 그리고 저한테는 그게 바로 탈출이에요. 행선지는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몰라요. 그 자리에 서는 순간 이미 탈출한 게 되니까요.” (1권, 244쪽.)

 은경에게 행선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비행하는 순간이 이미 은경에게는 탈출한 순간인 것이다. 은경은 나니예 행성을 구하는 것에 목숨을 걸 마음이 없었다. 이 행성을 반드시 구해내야 한다는 사명감은 찾아볼 수 없다. 은경에게는 비행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며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삶 속에서 은경에게 단 하나, 진짜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매 순간, 탈출하는 그 행위에 있을 것이다.

 문단문학에서 나오는 사실주의 기반의 소설들을 읽는 독자들이라면 [신의 궤도]는 상당히 낯선 소설이며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다. 15만 년의 우주를 가로지르는 것도, 그 시간의 간극 뒤에 펼쳐지는 이야기에도 집중하기 어렵고 읽기 힘들 수 있다. 15만년 이라는 시간의 흐름이 소설 초반에 밝혀지는 순간, 기존 SF 독자층은 그 간극에서 희열을 느낀다. 작가가 어떤 식으로 다른 SF와 차별화 된 우주를 구상했을지 궁금하기 때문이고 15만년 사이에 벌어진 과정에 대해서도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는 아예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단문학을 읽어온 독자라면 소설 속에서 아포리즘(aphorism)이 느껴지는 문장들을 음미하고 인간 혹은 인간적인 것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SF를 읽는 독자들이라면 일부 문장보다 작가가 시공간을 채우는 방식과 모습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런 눈으로 볼 때, 이 소설의 핵심이자 기둥은 {두 번째 냉장고} 챕터다. 2권에 실린 이 챕터는 이 소설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째서 나니예 행성이 실제로 휴양 행성이 될 수 없는지, 이 세계는 어떻게 변해갔는지, 15만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신’의 정체까지. [신의 궤도] 전체를 통틀어 가장 흡인력이 있고, 인상적인 부분이며, SF의 풍부한 사고실험이 농축되어 있는 지점이다. 이 챕터만 따로 단편으로 발표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고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제로 이 챕터에서는 왜 두 번째 우주선에 손님들이 모두 사망에 이르게 되었는지 상세히 밝히고 있고, 인간들은 어떤 존재로 진화했는지 알려준다. 15만년 동안 일어난 일들을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중요한 부분들을 짚어줌으로써 지구를 떠나기 전, 근미래인 2070년의 은경과 15만년 뒤 낙원 행성 나니예 사이를 잇는 이 소설의 등뼈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등뼈가 없다면 이 소설은 지탱되지 않을 것이다.

 항성화된 존재는 자칫 이 소설의 모든 이야기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너무나도 스케일이 큰 설정이다. 그런데도 항성화된 존재들끼리도 전쟁을 하여 문제를 발생시키고 나아가 그게 다시 되돌아와 수많은 항성화된 존재를 ‘신’이 소멸시킨다는 점은 흥미로우면서도 이 소설의 이야기들이 존재 의의를 가지고 오롯이 설 수 있게 만드는 요소이다. 이 소설은 결국 항성화 된 존재들이 사태를 파악하고자 모아놓은 사건 보고서이며 그들의 잘못된 행위로 인해 발발한 재앙이자, 그들이 결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며 아주 작아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물리적인 궤도를 도는 무기가 신일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전해준다.

 제목이 [신의 궤도]인 만큼 ‘신’의 존재는 이 소설에서 가장 빈번히 등장하며 많은 이야기를 생성하는 요소다. 나물 수사가 바라보는 신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모습은 일반적인 우리 주변의 신도들의 모습으로 상징적으로 볼 수 있으며, 실상은 그보다 더 거대하고 인지하기 힘든 세계가 있다는 것은 SF에서 맛볼 수 있는 재미다. 올해 기적의 책에서 출간된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조던의 아이들](Orphans of the Sky, 로버트 A. 하인라인, 기적의 책, 2011년 4월)은 세대우주선 SF의 고전이다.2) 픽사의 애니메이션 [월-E] 역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조던의 아이들]은 초반에 자신들이 우주선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신의 궤도]에서 ‘나니예’ 행성 주민들이 ‘지구’나 많은 것들을 모르는 채 궤도를 떠도는 물건을 신으로 섬기는 것을 연상케 한다. [조던의 아이들]에서는 우주선이 움직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물리 교과서 등을 실제적인 의미가 아니라 다른 은유나 상징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마치 [신의 궤도]에서 천문교가 이론신학회와 관측신학회로 나누어진 모습과 비슷하다. 이렇듯 SF에서 과학적 지식이 전승되지 않아, 과학적인 것들이 상징이나 종교로 변하고 주인공이 이런 세계의 진상을 밝혀내는 구조가 많다. [신의 궤도]는 비슷한 방식으로 풀면서도 최근에 출간된 SF답게 관리사무소에서는 모든 진상을 알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며 독자에게 천문교와 관리사무소의 정보를 교차적으로 전달한다. 단순히 세계의 과학적인 일면만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항성화된 존재들, 경라기금의 행성파괴무기, 그리고 궤도에 잠든 신을 깨워 존재폭발로 나니예 행성을 구하는 것까지. 다양한 관점과 인식의 모습을 여러 서술자를 통해 보여주면서 입체적으로 세계를 구현하는 것이다.

 아서 클라크의 [도시와 별]을 비롯한 많은 SF에서는 이러한 소재는 자주 등장했다. 놀라운 과학 문명으로 만들어진 도시나 행성 또는 세대우주선이 인위적이나 혹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과학 지식을 잃고 미개한 문명으로 퇴화되었고, 다양한 과학 지식이 종교로 탈바꿈한 것은 일종의 클리셰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한 주인공이 수많은 방해 요소들을 물리치고 세계에 진실을 밝히는 과정은 일정한 재미를 주는 패턴이나 [신의 궤도]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러한 과정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인물들도 함께 등장시켜서 독자에게 한 번에 더 많은 정보를 주는 제공하고 있다. 이는 소설의 플롯을 더욱 정교하고 서사를 압축할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 또한, 이렇게 현실 세계에서 버젓이 운영되는 ‘종교’를 과학적인 방식으로 치환함으로써 종교 그 자체를 풍자하거나 혹은 낯설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은 SF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의 궤도] 역시 이러한 재미를 가지고 있는데, 행성의 궤도를 돌고 있는 신이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점이나, 소설 속에 물리적인 신을 배치시켰음에도 관측되지 않기 때문에 개념과 물리적 신으로 나누어지는 모습들은 현재 종교 교리들과 유사한 면이 있다. 이 때문에 현재 우리 세계가 갖고 있는 종교와 신성, 교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하며, 신과 존재에 대한 사유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여기에 인공존재, 인공지능 또는 기계지성이 깨달음을 얻는 모습은 재미를 주면서 SF의 사고 실험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앞에서도 언급한 배명훈의 단편 {예비군 로봇}에서도 특히 기계 지성이 사고를 거듭한 끝에 깨달음에 이르는 지점과 {안녕, 인공존재!}에서 인공존재가 존재 폭발을 일으키는 지점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소설 속 ‘신’은 마지막에는 배명훈의 단편 {초록 연필}이나 {예언자의 겨울}의 끝처럼 폭발을 일으키는 매개로 작용한다. 인공적인 존재가 비존재와 존재의 사이에서 우주의 왜곡을 일으키는 부존재가 되고 따라서 불교 사상 등과 맞물린다는 점은 흥미롭다. 신성을 획득하는 지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예정하고 신을 높은 선반 위에 배치시켰다는 암시 등은 플롯의 정교함을 보여준다.

4. 나니예

 나그네. 사람은 누구나 이 우주에 들렸다 가는 나그네다. 항성에 정신을 기거한 다른 존재가 된 생명들은 더 이상 인류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들은 더 이상 나그네가 아니라, 우주인이다. 우주에 기거하며 우주와 한 몸이 된 존재들. 그러나 인류는 십 오 만년이 지나도 살아남았다. 냉동 상태로 다른 성단으로 간 그들은 나니예라는 휴양 행성에 뿌리를 내리고 오지 않는 손님들을 기다린다. 그러면서 인생을 보내다가 끝내 생을 마감한다. 나그네들이 머무는 행성. 휴양행성의 이름이 나그네를 뜻하는 ‘나니예’인 것은 그만큼 적절하다.

 소설의 배경은 [타워]처럼 지구위에 고층으로 들어선 빈스토크가 아니다. 지구도 아니다. 십 오 만년 뒤에 전혀 다른 행성이다. 먼 은하. 십 오 만년 뒤의 다른 행성을 상상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런 공간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치는 것은 과학소설에서 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쉽게 가능한 것은 아니다. 과학적으로 가능한 행성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아무리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행성이나 우주일지라도 독자가 납득할 수 있는 개연성을 작가가 부여하면 된다. 즉, 독자를 설득시키는 작업이 가장 중요하며, [신의 궤도]는 충분히 성공했다.

 휴양행성이자 낙원인 ‘나니예’는 마치 사후세계의 은유처럼 보이기도 한다.(한편, 배명훈의 단편 {Bicentennial Chancellor}에서 총통과 사람들이 떠난 그 낙원 행성이 연상된다. ‘인공존재’도 {안녕, 인공존재!} 단편 시점 이후 거듭된 실험으로 완성된 것처럼 보이듯이 하나의 배명훈 세계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들은 또 다른 재미를 준다.) 그곳은 은경이 사형을 선고받고 눈을 감자마자 깨어난 곳이다. 그리고 펼쳐진 곳은 섬으로 나누어져 있어 비행기를 타고 돌아다니는 곳이다. 누구보다 비행을 좋아하는 은경에게는 정말 천국인 셈이다. 그러나 천국인 동시에 지옥이기도 하다. ‘나니예’의 창조주는 은경이 좋아할 수 없는 아버지가 만든 곳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증오하는 경라 언니와 멋대로 자기를 위해 만든 곳이기 때문에 은경은 그곳에 머물 수 없다. 은경이 원하는 곳은 누가 지레짐작으로 자기가 좋아할 만한 곳을 인위적으로 꾸며준 곳이 아니다. 휴양행성은 결국 잠시 휴양을 할 수 있을 뿐, 거주할 만한 행성은 아닌 것이다. 은경은 어쩌면 이미 사라졌을 지도 모를 지구를 은연 중에 그리워했을지도 모르며, 만약 지구가 아직도 존재한다면 그곳으로 향했을 지도 모른다. 혹은 제2의 지구를 찾아 나섰을 지도 모른다. 먼 미래를 그리는 과학소설들에서 항상 ‘지구’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지구는 인류에게 언제나 근원이자 고향으로 자리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를 떠나 낯선 행성에 눈을 떤 은경이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욕망은 매뉴얼로써 주어진 강박관념 외에도 스스로 갇혀 있지 않으려는 인간의 본성에 기인한 것이다. 은경은 살아있기에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은경은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가장 구속된 인물이자, 가장 자유로운 인물이라는 아이러니를 갖고 있다.(아서 클라크의 [도시와 별]을 비롯해서 만화 [아마겟돈]이나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까지 SF에서 창조주의 의지로 유전자에 목적이 심어진 인간이라는 장치는 흔하게 쓰인다. 은경은 이렇듯 목적을 갖고 태어났다. 그러나 한 명의 인간으로도 독자에게 다가온다.) 강박관념이 심어진 매뉴얼인 동시에 남들이 보기에는 자기 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나니예 사람들은 모두 위험에 처한 낙원을 지키기를 원한다. 그들에게는 낙원인 동시에 인생을 살아가는 터전이다. 집이다. 그러나 은경에게는 잠시 지나칠 곳에 불과하다. 따라서 애정도 많지 않다. 자기 마음에 드는 만큼 더 거부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휴양지에는 누구도 영원히 살지 않는다. 은경은 휴양지에서 떠나려고 안달이 나 있다. 이전에 지구도, 아는 사람도 심지어는 인간조차 남아 있지 않더라도, 그 뒤에 끝없는 허공만이 있을 지라도, 인지할 수 없는 항성화된 존재들만이 있을지라도 은경에게는 개의치 않은 것이다. 그런 은경이 오히려 나니예를 구하고, 신을 깨우는 존재라는 것은 흥미롭다.

 또한, 목표를 이루자마자, 우주왕복선이 터지고 다시는 발행되지 못하며 안식을 맞는 것까지도. 은경은 탈출을 이뤘다. 더 이상 무간지옥을 반복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 은경이 우주왕복선을 타고 왕복하지 못할 비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미은, 지난, 그리고 나물 등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에 닿기 위해서는 많은 죽음이 필요했고, 전쟁이 일어났다. 종말을 맞기 직전까지도 세계가 송두리째 파괴되기 전까지도 인간들은 오해를 하고 전쟁을 벌인다. 그게 인간의 본성 중 하나다. 나니예 행성은 정말 다른 소설에서 찾아보기 힘든 매력적인 배경을 가진 행성이다. 비행기를 주로 타고 다니는 세계. 인공지능으로 움직이는 비행기들이 가축 비행기로 불리는 곳. 비행기가 화폐가 되는 곳.(가축 비행기들은 마치 배명훈의 단편 {초록연필}에서 움직임이 살아있는 것처럼 상상되던 초록연필, [타워]에서 화폐로써 추적되던 ‘술병’들을 떠올리게 하는 면도 있다) 배명훈이 만든 세계는 뇌리에 쉽게 지워지지 않는 각인을 새겼다.

5. 배명훈의 궤적

 배명훈 소설의 궤적은 [신의 궤도]로 정점을 찍은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궤도가 어떤 좌표를 가지고 있는지 계산해낼 나물 수사가 아직 없기에 우리는 이 궤적이 정점에 이르렀는지 혹은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갈지 알 수 없다. 한국 소설에서 정형화된 인물들과는 다른 ‘사람’을 조형하고 소설 속에 배치함은 물론, 지금껏 한국 소설이 다루지 않는 배경을 도입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불러일으키기에 무리가 없다. 물론 기존 SF 독자층에게는 이미 여러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설정들과 구도가 등장하지만, 그것을 배명훈 식으로 새롭게 재편한 것은 놀라운 성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수십 년 동안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기틀이 쌓인 장르를 한국 작가가 능수능란하게 다룬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화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며, 여기에 독자에게 재미와 감동, 경이를 선사하는 것은 역시 쉽지 않다.

 십 오만 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고 다시 시선을 돌려 십 오만년의 간극을 보여주면서 소설의 뼈대를 튼튼히 한다. 촘촘한 구성 속에 계속 유머를 넣어 능청스럽게 이 모든 이야기를 독자가 납득할 수 있게 만들어버린다. 전략이 뛰어난 작가고, 주제의식과 세계관, 인물 등을 효과적으로 장악하고 있다. 그러나 [신의 궤도]는 구성이나 인물이 지나치게 짜맞춰진 느낌이 오히려 인위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소설 전체에서 흐르는 인공적인 분위기는 너무 깔끔하고 단정하다는 인상을 준다. 장점인 동시에 단점으로도 느껴지는 부분인 것이다. 장편소설은 때로는 그 풍부한 분량을 바탕으로 플롯에서 벗어난 부분이나, 에피소드를 보는 재미도 있을 뿐만 아니라, 조연들이 펼치는 서브 플롯이 함께 긴박하게 돌아가야 하나, 미은을 말고는 눈에 띄는 이야기와 인물이 적은 것이 아쉬웠다. 보고서 형식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구성을 벗어난 연출이 적었고 의외성도 적은 편이었다. 너무 딱 맞는 듯한 구성이 오히려 답답한 아쉬움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동시에 신형철이 [안녕, 인공존재!]의 해설에서 언급한 대로 인물들의 내면 심리 묘사가 제한적인 것 또한, 작가 특유의 스타일이면서도 아쉬움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것은 형식과 분량의 한계상 나타나는 면이기도 하고 작가 고유의 스타일에서 나타나는 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소설은 고작 처음으로 발표한 장편소설에 불과하다. 배명훈 소설의 궤적은 현재까지 발표한 소설 중 가장 높은 지점에 있을지 모르나, 얼마든지 더 높은 궤적을 그릴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앞으로 꾸준히 발표될 다른 장편소설들은 분명 지금과는 또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SF에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 아니라 통찰력이라고 믿는 작가인만큼, 수많은 독자들에게 얼마든지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줄 준비가 된 작가이다.

 기발한 상상력을 탄탄한 논리와 통찰력으로 뒷받침하며, 투명한 인물들과 낯설고 기이한 세계를 선보이는 작가. 여태껏 한국에서 발표된 적이 없는 신선한 감각을 선보이는 작가가 배명훈일 것이다. 리얼리즘이나 일상성에 기댄 작품들, 역사주의적인 거대 담론을 이야기하는 작품과는 차별화된 설정과 이야기가 [신의 궤도]라고 할 수 있다. 공격적이 아니면서도 자연스럽게 이 사회와 세계를 낯설게 이야기하며, 잔잔한 웃음과 두근거림을 준다. 전 인류적, 우주적 상상력으로 무장한 세계를 경험케 하면서 지금-여기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배명훈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적이며 태연하고 나아가 초월해버리는 지점은 배명훈 세계에서 독자가 위안을 얻는 지점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행성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도 구상되고 있고 앞으로 쓰일 배명훈의 소설들이 있다는 사실이 안도와 기대를 갖게 한다.






1)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는 자신이 말하는 이야기의 내용에 한 명의 등장인물로 등장한다. 신뢰할 수 없는 ‘전지적인’ 서술자(제2장 참조)는 거의 논리적인 모순으로 오직 특수한 실험적인 텍스트에만 예외적으로 존재한다. 심지어 인물-서술자라도 해도, 100퍼센트 완벽하게 신뢰하지 않을 수는 없다. 만일 그 인물이 말하는 것이 완벽하게 거짓이라면, 그것은 소설이란 허구의 산물이라는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을 재인식시켜주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이야기가 우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현실 세계와 마찬가지로 소설 내부에서의 진실과 허구가 분간될 수 있어야 한다.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를 이용하는 핵심은 외관과 실제 사이의 간격을 흥미롭게 드러내고, 등장인물들이 실제를 어떻게 왜곡하고 감추는가를 보여주는 데에 있다. 이런 요구가 반드시 의식적이거나 악의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 데이비드 로지, [소설의 기교], 역락, 250쪽.
2) ‘세대우주선generation ship’이란 광속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항성 사이의 머나먼 거리를 항행하는 가상의 대형우주선이다. 다음 세대의 생명을 항성계에서 항성계로 운반한다는 성질 때문에 ‘성간 방주interstellar ark’라고 불리기도 한다. - 조던의 아이들, 부록1 – 세대우주선 총론, 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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