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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치드

앨리 콘디, 송경아 지음, 솟을북, 2012년 1월



한별 (newshbx2@gmail.com)



 그녀는 사람이 별로 없는 카페에서 넓은 자리를 혼자 차지하고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머그잔에 담긴 커피는 큰 관심을 끌지 못하고 한 구석으로 밀려나 있다. 근처까지 다가가도 반응이 없다. 시계를 슬쩍 확인했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도 삼십 분 넘게 늦었다. 소란을 피우는 것보다는 얌전히 자리에 앉는 게 낫겠군.
 “나 왔어.”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제야 깜짝 놀라며 반쯤 책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든다.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내가 온 줄 몰랐나보다.
 “어, 왔어?”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어?”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의 표지에는 스노볼 같은 둥그런 유리벽에 갇힌 녹색 드레스 차림의 여자가 손으로 유리벽을 딛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유리벽이 아니라 비눗방울처럼 보이기도 한다. [매치드]라는 제목이다.


▲ 매치드

 “뭐 보시다시피.”
 봐도 모르겠는데.
 “일단 가서 마실 것 좀 사올 테니까 있어봐.”
 “응, 달콤한 것도 추가로 부탁해.”
 왜- 까지 발음했을 때 그녀가 한 손으로 핸드폰을 달랑달랑 흔들어 보였다. 턱을 괴고 있는 다른 한 손이 입가를 가리고 있긴 하지만 웃는 낯을 가리지는 못한다.
 “삼십 분 늦었잖아.”
 입이 열 개라면 열 배로 사과나 하지. 항복의 표시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잠시 후. 그녀가 따뜻한 브라우니를 한 입 가득 베어 물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당분 때문에 풀리는 얼굴 근육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일단 이걸로 지각 건은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좋아?”
 “응? 아니, 좋긴 좋은데, 그렇게 물어보면 부끄럽다고.”
 헛기침을 하면서 간신히 표정을 가다듬는다. 부끄러움을 덜기 위해선지 브라우니를 잘라 먹던 포크를 바로 쥐더니 내 손등을 찌른다. 쿡쿡.
 “야, 잠깐.”
 찍어 먹을 셈이냐. 이대로 내버려두면 손등이 남아나질 않겠다.
 “그나저나, 아까 읽고 있던 건 뭐야?”
 “응? 내가 뭐 읽는지 그게 그렇게 궁금해?”
 “궁금하지. 책 읽는 걸 처음 봤는데. 애당초 책을 읽기는 하냐?”
 테이블 밑으로 정강이를 걷어 차였다. 포크를 들고 있는 손만 신경 쓰고 있었는데, 허를 찔렸다.
 “로맨스 소설이야.”
 그래도 대답은 해주네. 로맨스 소설이었냐.
 “…어, 로맨스 소설이라고?”
 “응. 배경은 미래인데, 열일곱 살짜리 주인공이 거기서 콩닥콩닥하는 이야기야.”
 “SF풍 하이틴 로맨스?”
 “SF?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는 걸 보면서 커피를 한 입 마셨다. 전혀 신경 쓰지 않았나보다.
 “도대체 뭘 읽은 거야?”
 “어? 아까 말 한 그대로인데. 미래세계에서 연애질하는 이야기.”
 전혀 설명이 안 되고 있다고.
 “아니, 그렇게 말해도 나는 책을 안 읽었잖아. 조금 더 앞뒤 사정을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그, 미래가 배경이면 미래세계가 나올 거 아냐? 어떤 미래인지, 그런 거나, 뭐 많잖아.”
 멀뚱멀뚱한 얼굴로 브라우니를 한 조각 더 베어 물더니 갑자기 씩 웃는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하이틴 로맨스에 관심 보이는 남자가 흔한 건 아니잖아.”
 사실 나도 썩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 아무튼. 조금 더 네 관심을 끌 만한 이야기를 하자면, 모든 것이 통제되는 통제사회에서 온갖 사회적 장애물을 뚫고 자라나는 사랑 이야기라고 할까나?”
 살살 애간장을 태우기로 마음먹었나보다. 문제는 그게 어느 정도 먹히고 있다는 건데, 이럴 땐 그냥 모르는 척 하고 넘어가는 게 상책이다.
 “통제사회? 뭘 얼마나 대단하게 통제하기에 통제사회야?”
 “음, [매치드]의 세상에서는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 죽을 때까지 '소사이어티'라고 하는 조직에 의해 통제 받아. 내가 무슨 취미를 가질지, 뭘 얼마나 먹을지, 쓰고 읽고 듣고 움직이는 것 하나하나까지 전부 소사이어티가 통제하거든.”
 “파놉티콘이냐 무슨. 하루에 네 시간씩 몬스터를 썰어대는 내 게임 캐릭터도 그보다는 비밀이 많을 걸?”
 “파놉티콘보다 심할 수도 있어. 결혼하게 될 남녀를 소사이어티가 중계해 주거든. 그걸 ‘매칭’이라고 하는데, 소사이어티의 프로그램이 중매를 서는 거야. 누구나 17살이 되면 '매칭 파티'에 가게 되는데 여기서 누구랑 '매칭'될 지 알려줘. 그 전까지는 누구랑 매칭될 지 아무도 모르고.”
 “결혼할 사람을 정해준다고? 그게 통일교가 하는 짓이랑 다를 게 뭐야?”
 순수한 호기심이었지만 질문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정강이를 걷어 차였다.
 “아무튼. 주인공인 카시아는 17살이 막 되어서 매칭 파티에 가거든. 거기서 매칭 파트너를 보는데 와! 동네에 살고 있는 소꿉친구인 젠더인 거야. 얘가 좀 킹카거든. 경사 난 거지.”
 “그렇게 카시아랑 젠더랑 콩닥콩닥하게 되는 거야?”
 “맞아. 근데 모든 일이 그렇게 쉽고 편하게 흘러가진 않잖아?”
 “어? 좋게 흘러가면 안 되는 거야?”
 “재미없잖아. 빵빵 잘 나가는 남의 연애가 듬뿍 담긴 그런 기분 나쁜 책을 내가 왜 읽어야 하는데? 배알 꼴리잖아.”
 여기 취미가 나쁜 여자가 있다. 표정을 읽혔는지 다시 한 번 걷어 차였다.
 “젠더와 매칭된 게 너무 기쁜 카시아가 나중에 다시 한 번 자기 매칭 파트너를 확인하는데, 에러가 나면서 젠더가 아닌 다른 남자애가 매칭 파트너로 떠올라.”
 “…혹시 화면에 나타났다는 다른 남자애도 같은 동네에 살고 있어? 세 명이 서로 다 아는 사이고?”
 “어떻게 알았어?”
 “우리 엄마가 보는 드라마가 꼭 그렇더라고.”
 묘한 표정으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수긍하는 모양이다.
 “다른 남자애는 카이인데, 얘는 좀 신비하고 속을 알 수 없고 어딘지 혼자 다닐 것 같은 그런 애 있잖아? 딱 그런 스타일이야. 그래, 위험한 냄새가 나는 남자다.”
 “위험한 냄새가 나는 남자 같은 소리 한다. 현실에 그런 남자는 없다고. 아무튼 그래서, 그 세 명이 주인공이야?”
 “응. 젠더와 카이 두 남자 사이를 카시아가 왔다갔다하면서 밀고 당기고 애간장 태우고 할딱거리게 만들어.”
 어쩐지 수상해 보이는 어휘가 지나갔지만 일단 모르는 척 해두자.
 “그런데, 꼭 삼각관계일 필요가 있어?”
 “로맨스잖아. 삼각관계는 기본이라고. 생각해 봐, [트와일라잇]에서도 여자 하나 남자 둘이잖아.”
 “왜 그렇게 삼각관계에 집착하는지 알 수가 없네. 닳고 닳은 삼각관계보다는 통제사회라는 미래 배경이 더 흥미롭지 않아? 너 왠지 그쪽은 너무 설렁설렁 넘어간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니까 어쩔 수 없잖아. 애매하게 말하느니 안 하는 게 낫지.”
 넘어갔다는 것 자체는 부정하지 않네.
 “‘통제사회’보다는 ‘온갖 사회적 장애물을 뚫고 자라나는 사랑 이야기’가 더 재미있잖아!”
 “사람 따라 다르거든? 결혼 상대까지 정해주는 정신 나간 통제사회에서 양다리를 하고 있다는데 통제사회 이야기를 쏙 빼먹으면 어쩌자는 거냐?”
 “로맨스는 쥐뿔도 모르면서 아는 척은. 그렇게 궁금하면 빌려줄 테니까 직접 읽어보던가. 이 사람을 좋아하긴 하는데 저 사람도 좋고, 그 마음을 남들한테 설명할 수도 없어. 억지로 둘 중 하나를 고르려고 해도 매칭이니 뭐니 하는 사회적 제약 때문에 할 수가 없고, 그런데도 계속 고민해야만 하는 그런 가슴 뛰는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는 거야? 그러면서 사회가 사람들을 어떻게 통제하는지 그거나 더 알아보자고? 불쌍하네, 감성이 메말랐구나. 너 그러다가 평생 연애 못 한다?”
 “야, 멋대로 그렇게 정리하지 마. 그리고 연애는 이미 하고 있거든? 너랑 하고 있다고, 너.”
 “네가 울며불며 매달리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줬지. 나도 참 착하단 말이야.”
 “아니라고, 제대로 기억해봐 좀. 네가 고백했잖아.”
 “…그땐 나도 어렸지.”
 “그런 말로 도망가려고?”
 말문이 막히니까 다시 정강이를 걷어찬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지금까지 한 곳만 계속 차고 있다.
 “응? 왜 그래? 어디 아파? 식은땀을 다 흘리네?”
 “…아냐 괜찮아. 그래,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지?”
 그녀가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손뼉을 딱! 치더니 천연덕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아 그래서 말이야, 너는 소설적 배경에 관심이 있는 것 같지만 나는 인물 사이의 관계에 더 관심이 있다고. 서로 관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니까, 응. 그럴 수도 있지.”
 난 그렇게 논리적인 절충안을 합의해낸 기억은 없는데. 그녀야말로 통제사회를 꿈꾸는 게 아닐까?
 “하아. 그래서 결국 엔딩이 어떻게 되는데?”
 “말 안 해줄 거야.”
 내 말이 끝나자마자 받아치더니 마지막 브라우니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이만큼 이야기를 해 놓고 마지막 이야기는 안 한다니.
 “왜? 왜 말 안 해주는데?”
 “끝까지 다 말해주면 너 이 책 안 읽을 거잖아.”
 진심으로 빌려줄 셈이었냐.
 “빌려줄 셈이었냐고.”
 아차, 실수로 생각이 그대로 입 밖으로 나왔다.
 “관심 있어서 계속 물어본 거 아니었어? 빌려줄 테니까 한 번 봐봐.”
 “아니, 이제 와서 말하긴 그렇지만 난 하이틴 로맨스는 취향이….”
 운이 좋았는지 어땠는지. 그녀가 다리를 들어 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볼게. 빌려줘. 꼭 봐야 할 것 같은데? 젠장, 보면 되잖아.”
 테이블 밑에서 정강이를 차려고 다리를 들어 올리는 게 보일 리가 없잖아. 이건 대놓고 협박하는 거다.
 “좋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너도 읽는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좋아졌어.”
 “야, 그렇게 말하면 대충 보고 넘길 수도 없잖아.”
 “그러라고 한 말이야.”
 생각보다 꽤 그럴싸한 이유를 덧붙이는 바람에 할 말을 잃었다.
 “하아, 어쩌다 이런 여자를 만났을까.”
 “그렇지? 과분하지? 넌 운 좋은 줄 알아야 해.”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다는데. 말 못 하는 꼴을 한 번도 못 봐서 모르겠다.
 “슬슬 일어나자. 배 안 고파? 밥 먹으러 가자, 전에 친구들하고 이 근처의 맛집에 가봤는데 괜찮더라고!”
 워낙 능수능란하게 대화를 쥐락펴락하는 바람에 할 말을 잃었다. 졌다. 얄짤 없이 책이나 읽어야 할 팔자인가 보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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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na 12.02.02 02:03 댓글 수정 삭제
    신선하고 알콩달콩하고 왠지 주먹을 부르는 듯한 이야기 리뷰 잘 봤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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