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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르 사전

밀로라드 파비치, 랜덤하우스코리아, 1998년 12월



pena (pena12@naver.com)



역사 속에 잊혀진 나라가 있다. 그 나라의 이름은 카자르. 카자르의 카간(몽골어로는 칸)은 어느 날 천사가 나타나 “주님은 당신의 행동에 기뻐하시지 않고 당신의 속마음에 기뻐하십니다.”라고 말하는 꿈을 꾸었다. 카간은 그 꿈을 꾸고 나서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교단에 사람을 보내어 자신의 꿈을 해석할 사절을 보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그 해몽이 가장 합당하다고 느껴지는 종교를 국교로 삼겠다고 하였다. 이것을 카자르 논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논쟁의 끝은 아무도 모른다. 유태교 쪽에서는 그래서 카간은 유태교로 개종하였다고 하고, 기독교와 이슬람교 쪽에서도 각기 자기 종교로 개종하였다고 하고 있다.

12세기쯤에 세 사람이 이 카자르 논쟁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책을 만들려고 한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은 각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각각 세 종교를 대표하는 사람들인 동시에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한 사람이 잠이 들면 다른 한 사람은 잠에서 깨어나고, 한 사람의 꿈이 다른 사람의 삶이기도 하다. 그리고 연결되어 있지 않은 나머지 한 사람은 꿈사냥꾼으로, 다른 사람들의 꿈에 등장하는 두 사람을 쫓아 여행을 하고 있다. 마지막 순간 세 사람은 전쟁터에서 끝내 마주치게 된다.

현대에 와서 또 다시 두 사람이 카자르 논쟁과, 12세기에 만들어진 카자르 사전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 두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서, 아주 특이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여자의 남편은 남자에게 상처를 입었고, 여자는 남편의 상처에서 그 남자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 게다가 그 남자의 존재는 점점 커져서, 남편을 안으려고 할 때에 그 남자를 안는 느낌이 들 정도가 된다. 여자는 괴로워하다가 우연히 그 남자를 실제로 만나게 되고, 그를 죽이려는 결심을 한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엄지손가락이 마주치는 순간 여자는 남자를 죽이려는 계획을 포기해버린다. 여자는 그냥 돌아가려 하지만, 여자와 헤어진 바로 다음 순간 남자는 누군가 알 수 없는 이에게 살해당하고, 여자는 용의자로서 재판에 회부된다.


사전에 대한 소설, 사전 소설

카자르 사전이라는 이 소설은, 구 유고 연방의 시인 밀로라드 파비치가 1988년에 낸 첫 장편소설이다. 일단 시인이 쓴 소설이며, 우리에게 익숙치 않은 동유럽의 소설이라는 데에서 이 책은 낯선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일단 가장 눈에 띄는 낯선 것은 구성방식이다.

물론 스토리에서도 나오듯이 이 소설은 카자르 논쟁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과, 카자르 논쟁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특히 그 중심은 12세기에 카자르 사전을 만들려고 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카자르 사전에 대한 소설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사전이기도 하다.

만약에 당신이 저 위의 이야기를 가지고 소설을 쓴다면 어떤 구성방식을 쓰겠는가? 시간 순서대로 주욱 나열한다면 가장 쉽겠지만 가장 재미가 없을 것이다. 간간히 플레쉬 백 기법을 써가면서 교차시킨다면 재미있겠지만 어려울 것이다. 플레쉬 백 기법을 극도로 활용해서, 과거와 현재를 교대로 오갈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시간대가 셋이며, 항상 등장인물이 셋이라는 점이고, 그 주위를 둘러싼 등장인물도 시간대에 따라 다르다는 점에서 이 모든 이야기를 모듬어서 하나의 전체를 만든다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 책의 작가 밀로라드 파비치가 쓴 방법은 위에도 나와있듯이 ‘사전’이다. 알파벳순으로 표제어를 놔두고, 각각의 단어에 대한 설명이 붙어있는 그 사전 말이다. 구성방식은 이러하다. 사전은 앞머리와 뒷머리를 빼고는 카간이 부른 세 종교에 따라서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레드북, 그린북, 옐로북. 각각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를 말한다.

일단 앞머리에서 작가는 카자르 사전의 역사에 대해서 서술을 한다. 필사본과 판본이 달라지면서도 계속해서 전해져 내려온 카자르 사전은, 중간에 독이 묻은 판본만 남아서 “말이 곧 육신이 된다Verbum carofactum east.”라는 부분에 가서는 호흡이 멈추어버리는 죽음의 책이 된다. 원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묘연한 책을, 사실인 양 역사까지 서술해놓은 것이나, 독이 묻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잠시 장미의 이름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 앞머리에서는 또한 사전을 읽는 방법과 사전의 구성에 대해서도 나와 있다. 표제어에 딸린 설명을 읽다 보면, 아무 설명없이 다른 고유명사가 나올 때가 있는데, 그 때 그 위에 십자가 표시가 있으면 레드북에서 그 단어가 표제어인 항목이 있다는 뜻이고, 초생달 표시가 있으면 그린북에, 다윗의 별 표시가 있으면 옐로북에 그 항목이 있다는 뜻이다. 세 책 모두에 나와있는 표제어 위에는 역삼각형 표시가 있다. 이런 식으로 항목과 항목 사이에 연결이 되어있고, 당연히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도 연결이 되어 있다. 독자는 이 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독할 수도 있고, 가다가 맘에 드는 표제어만 골라 읽어나가기 시작할 수도 있고, 어떤 항목을 읽다가 거기 나오는 다른 표제어가 궁금해지면 거기로 건너뛰면 된다. (책에서 인용하자면... “마음 상태가 정갈한 사람은 도입부를 완전히 무시한 채, 자기가 밥을 먹는 방식대로 이 책을 읽어나가면 된다. 오른쪽 눈을 포크로, 왼쪽 눈을 나이프로 삼아서 뼈는 어깨 너머로 내던지면 되는 것이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도 상관없다고 하는데, 과연 번역된 책에서도 그럴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예를 들어 필자는, 순서대로 레드북의 A 항목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하다가, 12세기의 세 사람 중 한 명인 “아브람 브란코비치” 항목에서 그의 꿈에서 삶을 살고 아브람의 삶 속에서 꿈을 꾸는 “퀼로스”, 표제어 “사무엘 코헨”이라는 인물이 너무나 궁금해져서 맨 뒤의 옐로북으로 휘릭 넘어가버렸었다. 그렇게 해도 어차피 항목별로는 완결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전혀 상관이 없다. 무엇을 먼저 읽든, 무엇을 나중에 읽든.

그러나 끝까지 읽는 것과 읽지 못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항목 하나하나에 담긴 이야기도 매력적이지만, 끝까지 읽지 않는 한 도대체 이것들이 왜 소설이라고 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스토리 라인을 밝혀놨어도 저렇게 이어진다는 기분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모든 것은 세 부분으로 나뉜 사전을 다 읽고 뒷머리까지 다 읽었을 때에야 완성된다. 이제까지 하나하나씩으로는 연관이 되어있는 것 같았지만, 도통 하나의 책으로 묶일 이유가 없어보였던 모든 항목들이 거대한 하나의 그림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느꼈을 때의 쾌감은 경험해봐야만 한다. 물론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완전히 다 읽지 않더라도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고생 뒤에는 단 열매가 있는 것이다.


시적인 이미지와 낯선 감성

앞서 작가가 시인이고 동유럽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했다. 이야기 또한 잊혀진 나라에 대한 것이다. 시인이어서인지 직유와 은유를 서술에 많이 쓰는데, 이 중에는 낯선 비유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에 대해서 말만 해서는 알 수 없을 테니, 몇 개의 예를 들어 보겠다.

첫 번째 예. 카자르의 공주 아테에 대한 이야기 끝에는 아테 공주가 영원히 죽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는데도 그 죽음에 대한 이야기 또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작가는, 아테 공주가 실제로 어떻게 죽었는가보다는 만약 공주가 죽을 수 있다면 이런 상황일 거라는 상상일 거라고 하면서, “포도주 때문에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아테 공주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해가 될 리도 없다.”고 말한다.

두 번째 예. 아브람은 계속해서 같은 사람을 꿈속에서 보고 있었으며, 이 꿈은 애초에 조바심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은 아브람 자신의 영혼 속에 던져진 돌처럼 낮 동안 그의 영혼을 따라서 떨어져 내리다가 오로지 밤에만 멈추었는데, 그것은 밤이면 그의 영혼이 돌과 함께 떨어져 내려갔기 때문이었다.” 아브람의 꿈에서는 새들이 형제들이 부모님이 차츰 사라져갔고, 마지막으로 아브람 자신조차 사라져갔다. 누이만이 남았는데, 누이도 아브람도 점점 모습이 바뀌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이었다. 그날 밤은 유난히 얇아서 화요일에 서 있는 사람과 수요일에 서 있는 사람이 서로 악수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날 누이는 완전히 바뀐 모습으로 아브람에게 왔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나머지 사람들이 겁에 질려 달아날 정도였다. / 누이는 엄지손가락이 두 개 달린 손으로 아브람의 목을 끌어안았다. 처음에 그는 누이를 피해 꿈에서 거의 깨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포기하고 마치 복숭아를 따듯이 누이의 가슴을 만졌다. 누이는 아브람에게 매번 다른 열매를 제공했고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나날을 따듯이 그 열매를 땄는데, 열매를 따보면 언제나 지난번보다 더욱 달콤했다. 그래서 다른 남자들이 밤이면 방을 빌려 정부와 함께 자듯이, 그는 낮 동안 다른 꿈을 꾸면서 누이와 함께 잤다.”

세 번째 예. 꿈 사냥꾼에 대한 항목.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꿈을 읽을 수 있고, 거기에 들어가서 살 수도 있고, 물건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 그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꿈사냥꾼은 알 사파르였는데, 그는 “비밀을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어갈 줄 알았으며 사람들의 꿈에 나오는 물고기를 길들이는 방법을 알았고 사람들의 환영에 나타나는 문을 열기도 하였다. / 알 사파르는 그 이전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욱 깊이 꿈속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곧장 신이 있는 곳으로 헤엄쳤다. 모든 꿈의 밑바닥에는 다름 아닌 신이 있기 때문이다.”

네번째 예. 아브람의 꿈에서 삶을 살던 이, 사무엘 코헨은 전쟁터의 막사에 있다가 적 병사들의 습격을 받았다. 그러나 어떤 공격도 받지 않았는데 코헨은 쓰러졌고, 그의 가방 속에서 종이들이 쓰러졌다. 그는 코헨이 살해당한 것인지 물어보았다. 막사 안에서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던 사람이 아랍어로 대답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만약 사무엘 코헨이라면, 그 사람은 총에 맞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힘없이 나가떨어진 것은 바로 잠 때문입니다.” / 그 말은 사실이었다. 주사위 놀이를 하던 사람은 이처럼 독특한 말을 한 덕분에 그날 하루 동안 목숨이 붙어있었다. 인간의 말이란 배고픔과 같아서 언제나 똑같은 힘을 갖는 것은 아니다.”

이외에도 소설이라기보다는 시라고 해야 할 이미지들로 모든 글들이 가득 차 있으며, 때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해도 전체적인 상을 만드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


카자르 제국은 역사상으로 실존했던 나라이고 카자르 논쟁 또한 실존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거기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시적인 상상력으로 빚어내어 훌륭한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이 책을 끝까지 읽는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쓴 소설일 뿐만 아니라 시이며, 꿈이다. 꿈이야말로 환상 중의 환상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 책에는 남성판과 여성판이 있다. 그러나 남성판과 여성판이 다른 것은 단지 한 문단이다. 어디가 다르며 그다름이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올까? 어디가 다른지에 대해서는 스토리 라인에 힌트가 있다. 그러나 얼마나 다를지는 직접 읽고 판단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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