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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A 1

이토 케이카쿠 외, 오오모리 노조미 편집, 카와데쇼보, 2009년 12월



pilza2 (pilza2@gmail.com)



 우리나라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SF가 널리 퍼진 일본에서도 일본 작가만의 SF 신작 단편집은 의외로 거의 없다. 우리나라보다 낫긴 하지만 영미권과 비교할 수준은 안 된다. 라이트노벨을 포함할 경우 장편 SF가 꾸준히 나오고 있는 걸 감안하면 단편의 비중이 무척이나 낮은 셈이다. 그래서 SF 번역가이자 평론가인 오오모리 노조미가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만든 단편집이 NOVA 시리즈인데 ‘1’이 붙은 것에서 알 수 있듯 매년 1권 이상 내는 것을 목표로 이미 5권까지 나온 상태이다.

 츠츠이 야스타카가 ‘SF의 침투와 확산’이라는 테마를 내세우며 일본SF대회를 창설한지 30년이 지난 지금 컴퓨터와 인터넷, 스마트폰으로 대변되는 현대 문명은 과거 SF가 그려낸 미래상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SF가 현실화된 시대에선 현대를 그린 픽션은 필연적으로 SF가 될 수밖에 없으니, 이를 가리켜 굳이 SF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 닌텐도DS나 아이폰에 들어 있는 컴퓨터를 사용자가 컴퓨터라고 의식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SF도 다양한 이야기 속에 침투하여 투명화 되었다. (서문에서 인용)

 그러나 편집자도 의식하고 있듯, SF가 퍼지는 반면 그 상상력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소설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일본의 경우 슬립스트림 계열의 단편은 주류문단을 비롯하여 다양한 지면을 통해 소개되고 인정받으며, 영미권 SF는 여전히 활발하게 번역 소개되고 있으나 일본 작가들의 신작 단편을 선보일 매체가 부족하다는 것이 이 단편집의 출간 이유라고 한다. 그래서 참여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1권은 SF만 쓰는 작가의 비중이 높지만 2권부터는 미야베 미유키를 비롯해 다양한 장르와 분야의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그만큼 SF의 농도는 옅어질지 모르지만 대신 얼마나 SF가 일본 문학 전반에 ‘침투와 확산’을 이루었는지를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본작의 경우 역자가 SF에 중점을 두었다고 하지만 필자의 분류에 따르면 이렇게 나눌 수 있겠다(본서에는 11편이 실려 있으나 추모의 뜻을 담아 특별히 실은 이토 케이카쿠의 미완성 원고는 제외한다. 장편의 초반부이면서도 분량은 어지간한 단편보다도 짧기 때문이다).
* 하드SF - 앤젤 프렌치, 자생(自生)의 꿈
* SF(일반적으로 SF) - 망각의 침략, 일곱 걸음 내딛은 남자, 비버 위버
* 광의의 SF - 사원들, 유리 지구를 지켜라!, 새벽의 편의점 피칠갑 실화SP
* 기타(SF로 부르기 힘들거나 판타지로 분류될 글) - 이웃사람, 골곤다

 단편집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수록 작품 간의 수준차가 크고, 우리 정서에 낯선 글이 많아서 선뜻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이 기회에 혹시나 번역 출간을 검토하는 출판사가 있다면 만류하고 싶은 심정이다. 아직 읽어보진 않았으나 온다 리쿠나 이사카 코타로 등 인기작가의 글이 실린 2권 이후가 더 기대할 만하지 않을까.
 [아빠의 우주여행] 같은 우리나라의 SF단편집들과 비교해보면, 특출 난 걸작이 없는 대신 ‘꽝’도 없이 고른 작품 수준과 한국인이 받아들이기 쉬운 정서적인 측면을 고려해도 후자가 더 낫지 않을까. 우리나라도 일본과 같이 장기적인 안목으로 자국의 SF를 소개하기를 바란다.

망각의 침략 / 코바야시 야스미

 보이지 않는 투명한 존재에 의해 세계 각지의 CCTV가 파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주인공은 외계인에 의한 공격임을 간파하고 반격에 나선다. 마침내 인적 없는 학교에서 외계인과의 싸움에 돌입하지만, 그 순간이 기억에 나지 않는다? 보이지도 않고, 조우한 순간이 기억에 남지도 않는 미지의 적에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양자역학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외계침략물. 모습이 고정되지 않은 파동 상태의 외계인은 상대방(지구인)의 관측에 의해서만이 그 존재가 고정된다, 라는 설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은 가볍게 무시하는 대신 ‘통통 튀는’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고백에 대한 응답을 듣기 전까지 두 사람의 관계는 연인도 타인도 아니다’라는 고등학생다운(?) 풋풋하고 기발한 양자역학적 연애 이야기도 곁들여져 있어 재미있다.

앤젤 프렌치 / 후지타 마사야

 신체조건이 맞지 않아 포기했던 우주비행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다이치는 자신의 두뇌 정보를 스캔하여 인공지능 컴퓨터를 만드는 실험에 참가한다. 불운하게도 귀국길의 비행기 사고로 다이치는 사망하지만, 컴퓨터는 완성되어 보이저 3호에 탑재되어 SETI 신호를 보낸 고래자리의 별을 향해 떠난다. 지구에 남은 연인 스바루는 태양계를 벗어나며 보이저가 보낸 메시지 “안녕, 스바루.”를 들은 후 전공을 천문학으로 바꿔 전파망원경을 통해 보이저의 모습을 좇는다.
 마침내 30년 후 웜홀 항법이 개발되자 스바루도 자신의 기억과 인격을 옮긴 우주선으로 웜홀을 통과해 다이치와 재회하게 된다. 두 사람은 SETI 신호의 발신지를 찾는데, 그것은 바로 스바루가 이곳에서 과거를 향해 보낸 신호였음을 알아낸다. 다이치는 긴 세월동안 과거로의 통신 방법을 찾아낸 것이었다.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하드하면서도 고전적인 우주SF. 참고로 위의 요약문에서는 연인이라고 썼지만, 스바루와 다이치의 관계는 명확하게 연인이라고 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소설 내에서는 대학 동창이자 오랜 친구처럼 표현되어 있으나, 수십 년 이상 서로를 그리워하다가 재회한 후에도 둘이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전체적 맥락을 보고 그리 적었음을 밝힌다.

일곱 걸음 내딛은 남자 / 야마모토 히로시

 월면기지 바깥에서 우주복도 안 입은 채 죽은 시체가 발견된다.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기지 견학 중에 이상한 질문과 주장을 했었다는 증언이 들어온다. 과연 그는 ‘달에는 공기가 있는데 은폐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믿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우주복을 입지 않고 기지 밖으로 나간 것일까?

 미스터리 단편집에 실려도 좋을 정도로 추리색이 짙은 단편. ‘시체 발견-현장 검증-증언 수집-자살로 결론을 내리기 직전 깨달은 진상-용의자가 모인 가운데 범인 지정-밝혀진 동기’라는 플롯의 흐름이 완전히 추리소설 그 자체이기 때문. 하지만 자살이 아니라 살인임을 밝혀낸 증거가 과학적이기도 하고, 무대가 월면기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라는 점도 고려하면 SF라고 하기에 손색은 없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수록작 중에서 가장 재미있고 완성도도 높다고 평가한다.

유리 지구를 지켜라! / 타나카 히로후미

 2199년. 일본이 거액을 들여 만든 우주 테마 파크 ‘사이파이 랜드’를 방문한 관광 우주선이 돌연 멈추고, 기장에게 테즈카 오사무의 혼령이 빙의되어 “유리 지구를 지켜라!”라는 말을 남긴다. 거의 동시에 외계인의 비행선단이 돌연 나타나서 지구를 향해 선전포고를 하는데, 음양사인 주인공은 테즈카를 비롯한 SF거장들의 영혼을 불러내어 조언을 듣고 사이파이 랜드에 있는 모조 야마토가 진짜 우주전함 야마토와 같은 능력을 갖고 있음을 알아낸다. 마침내 인류는 야마토의 힘으로 외계인을 물리치고 평화를 되찾는다.

 내용은 한 마디로 유치하지만, 일본다운 만화적 발상과 고전SF에 대한 패러디가 가득하기 때문에 주목할 가치가 있는 단편. 제목인 ‘유리 지구를 지켜라’는 테즈카 오사무가 환경보호를 주제로 쓴 동명의 에세이에서 따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본작 자체가 테즈카를 비롯한 일본의 SF 소설과 만화에 대한 패러디 그 자체다. “과학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냐. 과학을 초월한 것, 그게 바로 SF다…….”라는 말미의 독백은 본작의 주제이자 모든 SF에 바치는 헌사라고 할 수 있겠다.

비버 위버 / 엔조 토

 ‘나’는 천년 후 깨어나는 꿈을 꾸고 백년 후에 깨어난다. 천년 후 세계에서 나는 논리전함(論理戰艦)이 되어 외계의 적과 싸우고 있었다. 이 우주는 초광속비행법을 발견하면서 공리(公理)로 구축된 수학적 세계였다. 백년 후 만난 ‘그녀’는 비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비버는 시간과 논리의 나무를 갉아서 쓰러뜨리는 상징적 존재이다. 나는 비버를 만들어내고, 비버가 천년 후를 만든다. 따라서 미래는 비버가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일본 신세대 SF작가의 대표자라 해도 과언이 아닌 엔조 토의 하드 스페이스 오페라. 수학적 스페이스 오페라라 해야 할지, 요약문(지나치게 줄인 감이 있지만)을 봐도 알겠지만 실은 필자도 다 이해를 하지 못했을 정도로 난해한 글이기도 하다. 물론 필자의 일천한 일본어 실력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으므로 그 점은 양해를 부탁드린다.
 작중에는 초광속이동법, 강제기관, 논리전투함, 선택공리, 튜링 점프, 수리논리학, 초광속공리계, 티플러 주의자, 공리논적 관측계층, 다중사고 등의 용어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빈번하게 등장하지만 일부러 난해하게 보이려고 이것저것 갖다 붙인 티가 확연히 나기도 하므로 굳이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는 것 같다(작가의 의도도 그럴 거라 생각한다). 다만 비버가 시간이라는 나무를 갉아 쓰러뜨려 하나의 방향으로 향하는 미래를 만들어낸다, 라는 대목이 인상깊이 남는다.

자생(自生)의 꿈 / 토비 히로타카

 ‘나’는 지하 감옥에 수감된 마미야 준도를 만난다. 소설가이자 시인인 그는 73인을 죽였다고 자백한 후 이 감옥에 자기 스스로 갇혀 있는 상태. 나는 준도에게 시커멓게 된 책과 내용이 바뀐 영화 디스크를 보여준다. 이는 이마지카[忌字禍] 현상이라 불리는데, 정보가 늘어나고 뒤섞여서 이렇게 된 것이다. 사실 나와 준도는 현실의 존재가 아닌데, 나는 Gödel의 프로그램이고 준도는 생전의 자료와 정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존재인 것이다. 검색 엔진 Gödel이 책, 영화, 음악 등 세상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여 거대한 가상 세계 GEB를 만들어내었는데, 이마지카에 의해 정보들이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가상세계에선 석화로 표현됨).
 준도는 처음 이마지카가 발생할 때 희생된 시인 앨리스(그 역시 실제로는 죽었고 가상 세계에 존재)와 만난다. 준도는 자신을 불러낸(검색한) 것이 이마지카임을 알게 되는데, 이마지카는 준도를 읽고(만나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라는 이야기를 나눈다.

 세상의 모든 정보가 담긴 미래의 가상세계에 이변이 일어나 서서히 멸망하기 시작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를 막아낼 방법은 없고 굳이 그러려고 하지도 않는다. 세계의 멸망을 관조한다는 점에서 ‘J.G.발라드 풍 세계멸망 이야기’라 불리는 본작도 비교적 난해하긴 하지만 {비버 위버}에 비하면 용어에 대한 해설이 상세하여 받아들이기에 무리는 없다. 구글을 패러디한 것이 분명한 검색 엔진 Gödel을 비롯, GEB(Gödel Entalgled Bookshelf), LEBAB, Cassy 등의 용어가 나오지만 이를 각기 구글, 데이터베이스(혹은 클라우드 컴퓨팅), 다국어 검색, 자동 수집 및 검색 프로그램으로 치환해도 된다.
 작중 준도가 살인마가 된 이유는 그가 직접 상대를 죽인 것이 아니라 대화만 나눈 결과 상대방이 자살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한다. 준도의 프로파일링 능력, 상대방의 감정을 사로잡는 뛰어난 표현력과 화술로 인한 결과인데, 이런 그의 능력이 세상의 정보를 파괴하는 이마지카의 호기심을 부른 이유는 타인을 간파하는, 즉 정보의 의미를 파악하는 준도의 능력을 원했기 때문이 아닌가, 혹은 자기 자신도 파악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 아닌가 하고 추측할 수 있다.
 현재 컴퓨터와 인공지능은 정보를 모으고 분석하고 분류하고 찾고 있으나 그 내용을 정말로 ‘이해’하고 ‘공감’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준도의 능력은 인공지능이 갖지 못한 혹은 갖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검색 엔진도 관련 검색어와 같이 검색자의 의도를 이해하고 추측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나 완전하지는 않다. 상대가 충격과 자학으로 죽음에 이를 정도로 속을 꿰뚫어보는 준도의 능력은 어쩌면 인공지능이 원하는 이상형일지도 모른다.

 한편 후반부에 위치한 세 작품 {새벽의 편의점 피칠갑 실화SP}, {비버 위버}, {자생(自生)의 꿈}에는 일관되게 느껴지는 유사성이 보인다. 편자는 이를 ‘미묘한 싱크로’라고 자처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픽션에 대한 픽션’, ‘서술과 묘사를 소재(혹은 주제 자체)로 다룬 소설’이라는 점이다.
 {편의점 피칠갑 실화SP}는 서술을 고쳐 씀으로써 실제 현상을 바꾸는 능력을 소재로 하고 있다(편집자는 이를 ‘텍스트에 의한 현실 개변(改變)’이라 부른다). {비버 위버}는 수학과 논리로 구축된 일종의 가상 우주를 무대로 한 스페이스 오페라이고, {자생의 꿈}은 수집, 검색된 정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가상세계를 무대로 한 이야기이다.

 후기에선 편집자 자신이 본작을 2010년대 일본SF를 대표하는 시리즈로 만들고 싶다는 야망을 피력하기도 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이러한 메타 픽션적인 이야기가 일본SF의 주류가 될지도 모른다. 비슷한 예로 우리나라에선 배명훈의 {스윙바이}, {고양이 플롯}, 김이환의 {커피잔을 들고 재채기}, 본 필자의 {소설을 쓰는 사람에 대한…} 과 같은 단편에서도 이와 흡사한 요소를 보이고 있는데, 즉 현실과 픽션의 혼재, 서술에 의해 생겨나고 변하는 현실, 그리고 이러한 ‘서술을 서술하는’ 메타적인 소설은 현실과 SF의 세계를 구별하기 어려운 지금이기에 가능한 소설의 한 양태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일본SF가 그토록 바랐던 ‘SF의 침투와 확산’이 낳은 결과로써의 소설의 미래상이 아닐까. 정답이라 말하기엔 섣부를지 모르지만 적어도 하나의 방향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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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본이 11.10.02 21:17 댓글 수정 삭제
    흥미로운 시도로군요. 저 동네도 단편은 그렇게나 불모지였다니...

    유리 지구를 지켜라! 의 모티브가 된 그 수필집은 '아톰의 슬픔'이란 제목으로 국내 출간되었죠. 개인적으론 손상익씨의 '약한 지구를 살리자'라는 해석이 더 와닿지만...(저 '유리의'라는 게 건드리면 깨질 것처럼 가냘픈 상태를 뜻하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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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lza2 11.10.05 00:25 댓글 수정 삭제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나온 줄 몰랐네요. 아톰의 슬픔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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