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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시체답게 행동해!

페트르 헤테샤 외, 야로슬라프 올샤 jr. 엮음, 정보라 외 옮김, 행복한책읽기, 2011년 8월



잠본이 (zambony.egloos.com zambony@hanmail.net)



 현재까지 국내 SF독자들의 해외작품에 대한 선택지는 대부분 미국 작품에 국한되어 있으며, 약간의 일본이나 유럽, 호주(라고 해봐야 그렉 이건 정도지만) 작품이 간간이 소개되어 약간이나마 아쉬움을 달래주고 있는 형편이다. 애초에 국내 출판시장이 너무 협소한 탓도 있지만, 워낙 본류인 미국의 SF계열 작품들이 탄탄한 라인업을 자랑하고 있는데다가, 199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SF 전문출판 시장이 형성되면서 수용 가능한 양은 한도가 있는데 소개해야 할 작품은 지나치게 많은 탓에 미국 외의 다른 국가에까지 신경을 쓸 만큼 여유있는 편이 아니었다는 사정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길고 풍성한 역사를 보유하고 있으며 세계 SF문학계에서도 엄연히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체코 SF에 대한 소개가 미진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마저도 체코 SF라고 하면 당장 생각나는 게 카렐 차페크의 [R.U.R.]이나 [도롱뇽과의 전쟁] 정도이니 할 말이 없다.

 이번에 출간된 [체코SF걸작선 : 제대로 된 시체답게 행동해!]는 그러한 현실에 일침을 가하고 아직까지 우리 독자들에게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체코 SF의 세계를 개략적으로나마 소개해주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평소 체코 문화를 한국에 알리기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해 온 주한 체코 대사 야로슬라프 올샤, jr.와 전 오멜라스 대표 박상준의 공동기획으로 태어난 이 작품집은 저마다 다양한 영역에 종사하면서 작품활동을 해 온 걸출한 작가들의 중ㆍ단편을 모은 것으로, 다루는 소재도 우주탐사, 가상현실, 종말 후 세계, 사자(死者) 재생, 두뇌공학, UFO, 미래의 사법제도, 강화육체 등 매우 다채롭다.



 ■ 지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페트르 헤테샤 & 카렐 베베르카, 최세진 옮김
 정체불명의 괴질에 걸린 주인공은 비슷한 처지의 병자들과 함께 무리를 이루고 다른 공동체를 약탈하며 절망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사실 그의 정체는 모의실험기 안에서 작동하는 게임 속의 캐릭터였다. 그 캐릭터를 조종하는 것은 현실세계의 평범한 연구원. 하지만 통상의 모의실험과는 달리 캐릭터를 조종할 동안에는 플레이어가 현실의 기억을 잃고 게임 안에서 벌어지는 일만을 현실로 인식하기 때문에, 생각지도 못한 제약이 가득하다. 전혀 접점이 없을 것만 같았던 두 세계의 이야기는 어느 날 플레이 도중에 주인공이 우주 어디에선가 보내어 온 미지의 신호를 접수하면서 생각지도 못할 결말로 치닫게 되는데……
 두 개의 대조적인 세계를 무대로 펼쳐지는 가상현실 디스토피아 소설. 1980년대의 사이버펑크 조류에 해당하는 내용이지만 게임중독으로 인해 현실과 가상을 혼동하는 주인공의 정신적 문제나, 뒤로 갈수록 현실과 거의 동등한 비중을 갖고 일종의 평행세계로 승화되는 가상세계의 생생함 등을 잘 살려내어 온라인 게임에 익숙한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꽤 흥미로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건축가 겸 컴퓨터 디자이너인 페트르 헤테샤(1959~ )와 컴퓨터 전문가인 카렐 베베르카(1959~ )의 공동저작으로, 1986년 카렐 차페크 상 수상작. 두 사람은 주로 80년대에 팬진을 중심으로 열정적인 활동을 보여주었으나, 1990년대 공산정권 붕괴 이후에는 각자 생업에 종사하느라 집필활동이 뜸해졌다. 다만 헤테샤 쪽은 2001년에 SF작가로 복귀하여 현재까지 열 권 이상의 신작을 출간하였다.


 ■ 영원으로 향하는 네 번째 날 / 온드르제이 네프, 김창규 옮김
 철저히 봉쇄된 대저택에 혼자 살면서 시간의 비밀을 풀려고 노력하는 남자의 이야기. 하지만 나흘마다 정체불명의 적들이 자객을 보내어 연구를 방해하고 남자는 미리 구해 놓은 중화기들을 총동원하여 습격에 맞선다. 매번 돌아오는 네 번째 날의 긴장. 남자는 끝없는 전투를 되풀이하면서도 자기가 왜 의미도 모를 시간의 방정식을 풀어야 하는지, 자기를 노리는 적의 진짜 목적은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초조해한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네 번째 날이 돌아오는데……
 쳇바퀴 돌듯이 거듭되는 기괴한 일상(혹은 비일상)에 부품처럼 얽혀들어 자기의 존재의미를 고민하면서도 정작 목적이 달성되었을 때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해하는 인간의 처지를 그려낸 부조리계 액션 판타지. 주인공의 목적이나 되풀이되는 의식(儀式)의 의미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모호한 암시만을 남겨놓아서 한 번의 독서만으로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저자 온드르제이 네프(1945~ )는 저널리스트이자 사진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SF소설 외에 SF와 관련된 다수의 논픽션 저서를 남겼다. 최초의 [체코 SF 백과사전]을 공동집필하기도 했으며 라디오용 시나리오와 만화 각본의 집필, 쥘 베른 작품의 현대판 리메이크, 외국 SF소설의 번역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 아인슈타인 두뇌 / 요세프 네스바드바, 김창규 옮김
 기술과학의 발달로 생활은 편리해졌으나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근미래. 인공지능의 개발이 한계에 부딪혔다고 생각한 과학자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난관을 돌파하고자 계획을 세운다. 최근에 사망한 인간의 뇌 3개를 하나로 압축하여 인간적이면서도 지적인 신개념의 두뇌를 만든다는 계획이다. 그 두뇌에는 ‘아인슈타인 두뇌’라는 별명이 붙었고, 실험은 순조롭게 진행된다. 하지만 점차 과학자들이 예상치 못한 요소가 개입하면서……
 죽은 사람의 뇌를 재활용한다는 컨셉만 보면 혹시 커트 시오드막의 [도노반의 뇌Donovan's Brain(1942)]같은 공포 스릴러나 레이먼드 F. 존스의 [합성 뇌의 반란The Cybernetic Brains(1962)]처럼 과학의 오용으로 인한 비극을 그리는 작품이 아닐까 싶지만, 이 단편에 등장하는 합성 뇌는 이미 생전의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자기 자신의 역할에만 충실하기 때문에 그런 방향으로 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실제 내용은 ‘해답’에만 집착하여 정작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인간들에게 잔잔한 깨달음을 주는 현대 우화에 가깝다. 메시지를 주인공 딸의 대사를 통해 직설적으로 전해주기보다는 좀 더 우회적이면서도 공감이 가도록 전달하는 방법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저자 요세프 네스바드바(1926~2005)는 정신의학을 전공한 의사로, 1950년대 후반과 1960년 초반에 다수의 SF 단편을 통하여 체코 SF 역사에 큰 획을 그은 공로자로 평가받고 있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철학적이면서도 풍자적인 면모를 보이는 세련된 글쓰기가 특징.


 ■ 스틱스 / 이르지 네트르발, 신해경 옮김
 초문명을 지닌 이성인과의 조우를 꿈꾸며 목표로 삼은 항성계로부터 방사되는 신호를 해석하기 위해 미지의 행성으로 파견된 6인의 탐사대. 그러나 해석 결과가 점점 부정적으로 드러나면서 피로에 지친 대원들 사이에 실망스런 기운이 감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원 중 한 명이 외부 근무 도중 종적을 감추고, 남은 대원들이 그의 발자국을 따라간 결과 정체를 알 수 없는 5미터 가량의 늪을 발견한다. 순수한 증류수로 차 있고 바닥은 매끄러운 거울로 되어 있는 그 구조물을 앞에 두고 당황하는 대원들. 아무래도 늪의 바닥에는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은데……
 실종자를 찾는 수색 과정의 긴박감과 수수께끼의 늪에 대한 과학적 추리, 그리고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미지의 생명에 대한 궁금증까지 실로 다양한 요소를 한정된 분량 내에 솜씨 좋게 풀어낸 미스터리풍의 우주개척 SF. 결국 가장 중요한 해답은 밝혀내지 못한 채 인류의 한계를 인정하고 씁쓸하게 돌아서는 결말에서는 폴란드 작가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Solaris, 1961)]와도 통하는 면이 있다. 직접적인 묘사를 피하고 최소한의 단서와 그럴 듯한 추리만으로 미지의 생명체를 상상하게 함으로써 기괴함과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수법은 미국 작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공포 단편을 연상케 한다. 일견 황당해 보이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냉철하고 분석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본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들 중에서는 가장 하드SF에 가까운 작품이라 여겨진다.
 저자 이르지 네트르발(1945~ )은 미생물학자 출신으로 평생을 연구소에서 보냈다. 전체 작품 수는 많지 않으나 각각의 작품이 독자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 브래드버리의 그림자 / 프란티셰크 노보트니, 김창규 옮김
 화성 탐사대의 대원 한 사람이 지질 조사 도중에 무언가에 사로잡혀 귀환을 거부하는 사건이 생긴다. 즉시 구조대가 급파되지만 문제의 대원은 자신이 인류 사상 최대의 발견을 했다며 절대로 떠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어째서인지 그 ‘발견’을 ‘브래드버리의 그림자’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현장에 도착한 구조대가 거기서 목격한 것은……
 본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레이 브래드버리의 연작단편집 [화성 연대기(The Martian Chronicles, 1950)]에서 영감을 얻은 단편. 정확히는 제6장에 해당하는 {3차 탐험대The Third Expedition}를 오마주한 것으로 여겨진다. 화성에 내려선 지구인 탐사대원이 추억 속에만 존재하던 인물과 조우한다는 컨셉 자체는 동일하지만, 브래드버리의 경우는 선주민족인 화성인의 텔레파시 방어술로 인한 환각인 데 비해 여기서는 화성에 추락한 미지의 물질이 방출하는 에너지파의 효과라는 설정이다. 또한 브래드버리는 단순히 따스하고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에 중독되어 파멸하는 인간상을 그린 데 비해 여기에서는 인물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기억들(불행했던 것, 혹은 두려워했던 것까지 포함해서)이 출몰하여 대상자를 고뇌하게 만드는 것이 다르다. 브래드버리의 화성인이 어디까지나 자기방어를 위해 환각을 보여주는 데 비해 여기서는 환각의 근원인 운석이 어떤 의도로 그러는지, 혹은 지성체인지 단순한 기계적 존재인지도 확실하게 밝히지 않는다. 현란한 과학설비와 황량한 화성 풍경이 하드SF 분위기를 자아내는 초반부와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심리소설 풍의 후반부라는 대조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일관된 분위기를 유지하는 필력이 돋보인다.
 저자 프란티셰크 노보트니(1944~ )는 1980년대 초기에 데뷔하여 카렐 차페크 상을 수상하였는데, 다수의 SF 작품을 남긴 후 판타지 요소를 지닌 역사소설 쪽으로 방향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컴퓨터 관련 전문가이며 실력파 요트 선수이기도 하다.


 ■ 제대로 된 시체답게 행동해! / 야나 레치코바, 정보라 옮김
 소녀 마가렛의 집에는 밤만 되면 유령이 출몰한다. 아무래도 그 유령이 노리는 것은 마가렛 본인인 것 같다. 처음에는 히스테리성 발작으로 치부하던 어머니도, 마가렛을 혼자 가둬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을 알고 결국 해결사를 부른다.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건장한 콧수염 노인 울프와 홀쭉한 청년 허버트. 그들은 남들에게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준 뒤 재빠르게 돌아간다. 하지만 마가렛은 허버트의 슬픈 미소를 아무리 해도 잊을 수 없어서……
 제령 의식이나 폴터가이스트 현상, 더 나아가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악령과의 싸움까지 여러 가지 익숙한 요소가 들어있는 퇴마 판타지. 하지만 후반부에 가면 허버트의 정체나 그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울프의 노력, 그리고 허버트에 대한 연모 때문에 더 고약한 사건에 말려드는 마가렛의 고생 등 다이나믹한 이야기가 얼키고 설키는 캐릭터 중심의 소설로 발전한다. ‘되살아난 시체’라는 으스스한 소재를 ‘남과 다른 이들의 고독과 서로간의 유대’라는 훈훈한 테마로 엮어낸 현대판 고딕 로맨스라고도 할 만하다. 허버트라는 이름은 아무래도 러브크래프트의 연작소설 [허버트 웨스트, 시체를 되살리는 자(Herbert West - Reanimator, 1922)]에서 따온 듯하다. 또한 울프의 퍼스트 네임이나 그가 사용하는 특수물질의 이름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모 고전 호러소설의 향기가 느껴진다(그 제목 자체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천기누설이 되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직접 읽어보시길). 제목은 엄격한 상류층 출신으로 설정된 허버트의 어머니를 염두에 둔 반어법으로 생각된다.
 저자 야나 레치코바(1956~ )는 1990년대부터 꾸준히 활동 중인 의사 출신의 SF/판타지 호러 작가로, 해외 SF의 체코어 번역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 비범한 지식 / 루드비크 소우체크, 정성원 옮김
 같은 고속도로의 세 교차로 모두에서 대규모 교통사고가 일어나 수많은 사상자가 나온다. 현장을 조사하던 경찰관은 주변의 교통 표지판이 기둥 째 잘려나간 것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이 두 가지 비상식적인 사건 사이에는 과연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왠지 ‘아는게 병이라더니’라는 말이 딱 맞을듯한 부조리 외계인 문화충돌 SF. 지구 문화를 파악하려고 엉뚱한 짓을 벌인 미지의 존재들이 그 결과랍시고 발표하는 내용 하나하나가 다 개그다. 그 이면에는 한 문명이 고정관념을 넘어서서 다른 문명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설파하는 날카로운 풍자정신이 숨어 있다. 또한 그들의 악의 없는 조사활동이 지구인들에게 끼친 피해를 생각하면 ‘선의에 의한 행동이 반드시 좋은 결과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라는 교훈도 끌어낼 수 있다. 아이디어와 메시지는 괜찮았지만 결정적인 ‘한 방’이 모자라서 다소 아쉬운 느낌도 드는 작품.
 저자 루드비크 소우체크(1926~1978)는 치과의사, 공무원, TV 저널리스트, 출판사 편집자 등 다양한 경력을 가진 인물로, 1960~1970년대의 가장 영향력이 큰 SF작가로 손꼽힌다. 생전에도 빼어난 작품 활동으로 독자의 인기를 끌었지만, 사후 역시 갑작스런 죽음이나 미완성 원고의 의문스러운 분실 등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스타 작가였다.


 ■ 양배추를 파는 남자 / 스타니슬라프 슈바호우체크, 김창규 옮김
 방사능으로 토양이 오염된 황폐한 세계. 그런 가운데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도시를 이루고 철저한 농작물 관리와 인구 조절을 통해 삶을 이어간다. 주인공은 인구 3백 명의 대도시를 책임지는 치안 담당자로, 시의 역사를 기록하고 규칙 위반을 단속하며 침입자를 쫓아내는 일을 한다. 하지만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생활도 사실은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은데……
 분류상으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종말 이후의 세계)를 다룬 디스토피아 SF지만 실제 작품은 중세시대 수준으로 퇴화한 가운데서도 나름대로의 질서를 잡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공동체를 다루고 있어서 어찌보면 목가적인 구석도 있다. 기득권자인 동시에 체제를 수호하는 역할을 맡은 주인공의 1인칭 시점에서 느긋하게 전개되기 때문에 더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표면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여러 문제가 도사리고 있으며, 주인공의 위치도 의외로 상당히 불안하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어 여러모로 절망적인 여운을 남긴다.
 저자 스타니슬라프 슈바호우체크(1952~ )는 사이버네틱스를 전공한 기술자 출신으로, 장편에는 손대지 않고 단편 분야에서만 활약한 것으로 유명하다. 체코 국내 SF문학상을 여러 번 수상했으며 주요 장르문학 잡지들에 40편 이상의 SF 단편을 발표했다.


 ■ 집행유예 / 야로슬라프 바이스, 최세진 옮김
 극렬 이슬람 정권이 지배하고 있는 근미래의 남아시아 국가 뉴파키스탄. 갑작스런 사고로 부모를 잃은 뒤 맡겨진 시설에서 도망쳐 나와 길거리에서 연명하던 소년 아크바르는 행인들을 습격하여 재물과 혈액을 빼앗는 강도단에 들어간다. 어느 날 현행범으로 체포된 그는 동료들에 대한 진술을 거부하여 한 팔을 절단당하는 형벌을 선고받는다. 동료들에게도 버림받고 범죄자로서 어디에도 의지할 수 없게 된 그는 우연히 들어간 하층민 식당에서 한 남자를 만나는데……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범죄의 나락으로 빠져버린 소년과 범죄자였으나 당국의 손길을 피하기 위해 구도의 길을 택한 남자의 기묘한 만남과 잠시동안의 교류, 그리고 파국적인 결말을 담담하게 그리는 뒷골목 휴먼 드라마. 합성 석유의 개발로 에너지 판도가 바뀌어버린 세계 설정이나 범죄자의 사지를 절단하여 냉동보존했다가 형기를 마치면 재이식하는 형벌제도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현재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고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들을 다루고 있어서 SF라기보다는 약간 미래풍 설정이 가미된 현대 범죄물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오로지 비틀즈의 노래 가사만을 의지 삼아 인정사정 없는 험한 세상을 비틀거리며 헤쳐나가는 주인공의 애처로운 인생역정이 심금을 울린다. 현실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직접 제시하기보다는 그 문제 자체를 가감 없이 보여줌으로써 그 이면에 숨어있는 모순을 독자 스스로 깨닫게 하는 사회고발성 문학에 가깝다. 체코 작가가 인도계 국가를 배경으로 터키계 주인공과 게르만계 조연을 내세워 집필한 글로벌 스타일의 소설이라는 점도 이채롭다.
 저자 야로슬라프 바이스(1946~ )는 번역자, 잡지 편집인, 정치평론가, 체코 국회의장 고문 등으로 활동한 인물로,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여러 권의 SF작품을 발표했다. (그 중 일부분은 알렉산드르 크라메르와 공저 작품이지만, 크라메르가 공산정권 시절 반체제세력으로 지목되어 출간을 금지당했기 때문에 발표 당시에는 비밀로 되어 있었다.)


 ■ 소행성대에서 / 미로슬라프 잠보흐, 김창규 옮김
 전쟁 때 입은 부상으로 몸의 95%를 기계부품으로 대체한 사이보그 맥스. 그가 과거를 감추고 소행성대에서 광부 일을 하는 것은 재수술을 받아 생체비율을 높이기 위한 돈을 벌려는 목적에서였다. 사이보그는 기계비율이 70%를 넘으면 인권을 박탈당하며, 그보다 낮은 비율일 경우에도 대중의 광신에 휘말려 살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행성들 사이를 누비며 3개월 동안 치열한 수색 작업을 펼친 끝에 엄청난 가치를 지닌 거대 광석을 발견한 맥스. 하지만 누군가의 밀고를 받고 그를 추적하던 해적선이 불시에 공격을 가해오는데……
 기계 신체에 갇힌 채 인간성을 점차 잃어가며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주인공,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소행성대의 잔혹한 암투, 물리법칙과 각종 가제트를 적절하게 응용한 우주공간에서의 대결 등의 요소를 효과적으로 펼쳐 보이는 하드보일드 어드벤처 SF. 중반부의 추적이 자아내는 긴장감은 스릴러물로서도 즐길 만하다. 다만 클라이막스 부분의 묘사가 다수 두루뭉실하게 되어 있어서 어떤 식으로 일이 풀린 건지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이 옥의 티. 앞에 실린 작품들보다는 다소 평범한 인상을 주지만 나름대로 해피엔딩이라는 점에서는 책의 마지막을 상쾌하게 장식하기에 적당하다고 여겨진다.
 저자 미로슬라프 잠보흐(1972~ )는 핵과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자이며 각종 운동을 즐기는 스포츠맨이기도 하다. 2000년에 데뷔하여 SF와 판타지를 넘나드는 다양한 작품을 발표해 왔는데, 이 책에 실린 작가들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신세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수록작은 발표 시기상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사이의 시기를 커버하는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작품별로 어쩔 수 없는 수준 차이가 약간씩 느껴지며, 어떤 작품은 분량에 비해 임팩트가 그다지 크지 않아서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 현대의 세련된 SF 작품들에 익숙해져 있는 매니악한 독자들에게는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설정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무엇보다 「아인슈타인 두뇌」를 제외한 수록작 대부분이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라서, 가벼운 기분으로 책을 읽고 싶은 독자에게는 부담스러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같은 SF/판타지의 소재를 갖고 들려주는 이야기라도 외세 침략과 공산독재, 자유화 등으로 굴곡진 체코의 역사 때문인지 그 밑바탕에 흐르는 정서는 기존에 접하던 서구권 SF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독특한 향취를 띠고 있으며, 비슷한 상황에 대한 반응이나 해석에서도 고정관념을 깨는 신선함을 보여주어서 마음에 든다. 특히 수록작들 사이에서도 {스틱스}와 {브래드버리의 그림자}는 비슷한 소재(우주탐사 중 특수상황과 조우)에 대하여 전혀 다른 해법을 보여주고 있어서 흥미롭다.

 체코 SF가 세계 SF사에서 그렇게 유명한 이유가 무엇인지, 또한 카렐 차페크의 문학적 자손들이 어떻게 진화하여 스스로의 세계를 일구어 나가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망설임 없이 읽어보기를 권한다. (편집인인 야로슬라프 대사가 정리한 자료가치 만점의 체코 SF 약사도 놓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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