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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소녀

로버트 F. 영, 조현진 옮김, 리젬, 2010년 11월



pilza2 (pilza2@gmail.com)



 작가인 영은 SF 황금시대인 1950년대에 활동했으나 발표한 작품 대다수가 단편이고 유명한 상을 받지도 못했으며 베스트 셀러를 낸 경험도 없어서 국내에 소개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작가이지만 뜻밖의(?) PPL 효과를 등에 업고 본 단편집이 출간되었다. 예전 인기 드라마에 나왔다는 이유로 일어난 [모모](미하엘 엔데, 비룡소, 1999년 2월)의 갑작스런 품절 소동(?)을 떠올려 보면 요즘은 TV를 비롯한 인기 미디어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가 되었음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실제로 생전 가난과 푸대접으로 점철된 불운한 인생을 산 필립 K. 딕의 책이 사후 그토록 고평가를 받고 우리나라에도 많이 출간된 것은 뒤늦은 헐리웃의 영화화 열풍 덕을 톡톡히 본 것임을 상기해도 그렇다. 오죽하면 SF팬들은 출간을 원하는 작품이 있으면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기를 학수고대할 정도다.

 본작에 수록된 단편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면 연상되는 작가가 떠오른다.
단편 위주의 작품 활동, 문명 비판적 시각, 서정적인 작풍, 로맨틱한 분위기, 시를 인용하거나 직접 창작하여 삽입하는 등의 여러 면모에서 레이 브래드버리와 잭 피니를 떠올리게 되는데 실제로 이들은 활동하고 있는 도중에도 비교되거나 비평의 대상으로 함께 다루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수록작을 그 성격에 따라서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어서 다루어본다(딱히 분류하기 힘든 몇 편은 제외했다).
 * 문명 비판 - 21세기 중고차 매장에서, 프라이팬 조종사, 팝콘 튀기는 TV, 시인과 사랑에 빠진 큐레이터
 * 시에 대한 사랑 - 별들이 부른다, 시인과 사랑에 빠진 큐레이터, 당신의 영혼이 머물 자리
 * 시간여행 로맨스 - 민들레 소녀, 시간을 되돌린 소녀
 * 외계인 유머 - 프라이팬 조종사, 파란 모래의 지구, 하늘에 새겨진 글자
 * 과거의 자신과의 조우 - 과거와 미래의 술, 붉은 학교, 화강암의 여인

1) 문명 비판
 사실 예시로 든 네 작품 외에도 영의 단편은 전체적으로 현대 문명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관적 시선을 갖고 있다. 특히 기계 문명, 산업화, 상업성에 찌든 사회에 대한 비판과 그에 대한 반대급부 혹은 대안으로 목가적 사회로의 회귀 소망을 그리고 있다.
 가령 기계 문명에 함몰된 사람들을 그린 {21세기 중고차 매장에서}의 주인공은 결국 문명사회에서 추방되지만, 이것을 박탈이나 추락으로 받아들일 독자는 없으리라고 본다. 이는 사실상 탈출 혹은 도피이며, 작가가 원하는 이상향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프라이팬 조종사}도 결말이 주는 메시지가 유사하다.
 한편 {시인과 사랑에 빠진 큐레이터}는 시와 시인이 홀대받는 기계와 상업성의 시대를 비판하면서도 마지막엔 대안 및 공존을 위한 길을 찾기도 한다. 이들 두 작품에서 기계 문명의 대표 격으로 자동차가 등장하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작품이 발표된 1950년대 미국은 그야말로 자동차의 천국으로,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주었으나 교통사고와 환경오염 등 새로운 고뇌를 안겨준 것도 사실이며 특히 영은 대량생산과 기계화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에 주목하여 이를 비판하고자 한 것이다. 작가 자신도 발전하는 현대 문명을 멈추거나 없앨 수 없음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공존의 방법을 생각해본 이 작품의 의미가 각별하다 할 수 있다.

2) 시에 대한 사랑
 시에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은 예이츠와 같은 고전 명시를 인용하거나 창작시를 중간에 넣는 경우가 있다. {시인과 사랑에 빠진 큐레이터}에서는 실존 했던 유명 시인을 모델로 한 로봇 마네킹이 시를 낭독하는 장면이 있는데, 작가에겐 미안하지만 실제로 만들어 선보인다고 해도 대중들에겐 외면받을 것 같다(문학과 출판 관련 행사가 아닌 다음에야).

3) 시간 여행 로맨스 작품
 시간 여행의 경우 기술적 근거(설정)나 패러독스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고 그저 로맨틱한 분위기나 연인의 시간을 초월한 사랑을 극적으로 그리기 위해서 쓰고 있다.
 특히 {민들레 소녀}는 영의 작품 중에서는 가장 유명하며, SF 역사상 길이 남을 명대사 한 줄로도 높은 가치를 가진 단편이다.
 “그제는 토끼를 보았어요. 어제는 사슴, 오늘은 당신을.”
 타임머신으로 홀로 과거에 온 소녀가 주인공과 만난 기쁨을 시적 감수성으로 아름답게 표현한 이 문장은 일본 게임 및 애니메이션 《클라나드》에 인용되었고(작중에 본 단편집이 직접 나온다고 한다), 그 덕분에 우리나라에까지 번역 출간되었으니 고맙다면 고마운 일이라고나 할까. 이 예상치 못한 PPL 효과로 영영 나올 가능성이 없을 책이 나왔으니 말이다.
 다만 본작에는 약간의 시간 여행 패러독스가 담겨 있는데, 두 연인이 제일 처음 만난 게 정확히 언제인지 혼란스럽다. 내용을 밝히면 재미가 덜하므로 이에 대해서는 독자 스스로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겠지만, 위에서 말했듯 타임 패러독스 자체는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므로 고민할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본다.

4) 외계인 유머
 외계인의 경우도 희극적인 소품으로 쓸 뿐 세부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무섭거나 사나운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해로 인해 덜떨어진 반응을 보이거나 인간과 다를 바 없는 감정을 가지는 등 친숙한 면모를 보여준다.

5) 과거의 자신과 조우
 이 부분은 넓게 보면 시간 여행과 합칠 수도 있으나 엄밀히 보면 직접적으로 시간 이동을 한 것이 아니므로 별도로 나누었다.
 {과거와 미래의 술}은 수록작 중에서 가장 판타지로 볼 수 있는데 몽환적이고 신화적인 구성을 통해 한 인물의 과거와 인생을 조망한다.
 {화강암의 여인}에서 주인공이 맞닥뜨리는 적은 자연적인 장애물이 아니라 결국 과거의 자기 자신이다. 그리고 결국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깨닫는 씁쓸한 결말을 맞는다. 이는 기계와 상업성에 찌든 문명을 비판했지만 결국 시대의 변화를 막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고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무력한 작가 자신의 모습과 겹쳐지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결코 무의미한 것도 무가치한 것도 아니다. 커트 보네거트는 작가가 탄광 속의 카나리아와 같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영은 그 누구보다 예민한 카나리아였던 것이다. 울음소리 또한 아름다웠음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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