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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퀀텀 패밀리즈

2011.06.25 00:3106.25

퀀텀 패밀리즈

아즈마 히로키, 이영미 옮김, 자음과모음, 2011년 3월


잠본이 (zambony@hanmail.net)



 때는 2007년. 아시후네 유키토는 작가의 꿈을 접고 대학 부교수로 일하며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는 35세의 평범한 남자다. 담당 편집자였던 연상의 여인과 결혼하여 평온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으나 장인의 죽음 이후 부부 사이는 서먹해지고 아이가 생길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유키토의 계정으로 정체불명의 메일이 날아오기 시작한다. 이 세계에서는 태어나지도 않은 유키토의 딸이 2035년의 미래에서 보냈다고 하는 기묘한 내용의 편지였다. 유키토는 누군가의 장난이거나 혹은 정신병에 걸린 자기 자신이 보낸 편지일 거라 생각하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답장을 보낸다. 수 개월 후인 2008년 3월, 미지의 '딸'과 주고받는 편지 교류에 점점 빠져들던 유키토는 결국 편지의 인도에 따라 미국 애리조나 주의 사막으로 달려가는데...

 포스트모던 문화비평가이자 연구자로 잘 알려진 아즈마 히로키가 2009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양자역학에 기반을 둔 평행세계 설정에 필립 K. 딕의 '불안에 쫓기는 사나이' 컨셉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35세 문제' 등을 버무려 넣고 '가족의 해체'와 '대량 소비 사회의 무기력증' 같은 시사적인 소재를 풀어나감으로써 상당히 복잡하면서도 독특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주인공인 유키토를 축으로 각각 다른 평행세계에 존재하는(존재할 수도 있는) 그의 딸, 아들, 아내가 차례로 얽혀들면서 종국에는 이름만 놓고 보면 가족이지만 사실은 생판 남들의 집합이라는 기괴한 가족집단을 형성하는 과정이 기막힌다.

 본서에서의 평행우주는 양자회로 컴퓨터의 비약적인 발달로 인해 우연히 발견된 '네트워크상의 유령'으로 정의할 수 있다. 무수히 존재하는 다른 우주의 계산자원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양자회로가 여러 우주의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말로는 평행우주라고 해도 원래 물리적 실체를 갖지 않는 데이터의 집적체이자 시뮬레이션에 불과한 존재이지만, 네트워크가 점점 복잡해지면서 다른 우주의 네트워크끼리 서로 간섭을 일으키고, 급기야는 인터넷 상의 자료가 뒤죽박죽이 됨으로써 검색을 믿을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른다. 어떤 우주에서는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인간의 뇌를 네트워크로 사용하여 정신만을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타인의 육체로 전송하는 실험까지 이루어진다. 유키토와 그의 '양자가족'들이 만나는 것 역시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들은 끊임없이 바뀐 얼굴로 서로를 대면했다가 헤어졌다가 또 재회한다. 여기에 더하여 원래 이야기의 주축을 이루는 두 세계 사이에 약간의 시간차가 존재하는 바람에 일종의 시간여행 효과까지 나타난다.

 우주 A의 유키토는 사회문제에 전혀 관심없는 몽상가로 아내와 단 둘이 불안정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다가 순간적인 충동을 못이겨 그녀를 폭행하고 아들을 배게 하지만 결국 그녀에게 버림받고 자살한다. 우주 B의 유키토는 훨씬 건강한 아내와 귀여운 딸과 함께 단란하게 살지만 사실은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과격사상을 퍼뜨리는 혁명가로서 여객기 폭탄테러를 일으키려다 세상을 떠난다. 각각의 우주에서 세월이 지난 뒤 우주 B에서 성인이 된 딸 후코가 우연히 네트워크를 통해 우주 A(과거)의 아버지와 교신하게 되고 이를 알아챈 우주 A(미래)의 아들 리키가 어머니를 해방시키고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두 우주의 유키토를 (정신만) 바꿔치기하는 실험을 감행한다. 실험은 성공하여 우주 A에서는 유키토가 테러를 시도하다 체포당하여 아내를 괴롭힐 수 없게 되고 우주 B에서는 원래 테러계획 따위는 전혀 몰랐던 유키토가 가족과 단란하게 살게 된다. 하지만 우주 B에서 유키토를 도와 별도의 테러를 준비했던 추종자가 행동에 나서면서 사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고, 리키는 자기들의 행동을 또 다른 우주에서 조종하는 제4의 인물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 모든 소동의 중심에는 유키토의 머릿 속에 감춰져 있는 원죄의 기억과 모든 세계에 걸쳐 각각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수수께끼의 이름 '시오코'가 자리하고 있다. 저자는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짜여진 평행세계를 하나의 흐름 속에 솜씨 좋게 수습하면서 주변인물들의 행동을 정리하고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는 역할은 유키토에게 일임한다. 오타쿠 문화에도 조예가 깊은 저자답게 평행세계에 전송된 주인공의 행적을 '남의 세이브 데이터를 이어받아 게임을 계속하는 것'에 비유하면서 과연 그 게임을 제대로 이어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계속해서 고민하게 만든다. 이것이 게임이라는 것 자체를 잊고 몰입할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이것이 게임임을 확고하게 인식하고 언제라도 리셋할 수 있는 결의를 다져야 할 것인가? 구체적인 결론은 본서를 끝까지 읽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인 것만은 틀림없다. 인생은 게임과 달리 한 번뿐이고 리셋의 기회는 그리 자주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면 전자가 답일 것 같지만, 여기서의 '리셋'을 아예 인생 자체를 끝내는(목숨을 버리는) 것으로 생각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로 지금까지의 생활을 버리고 또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후자도 충분히 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양자역학이나 현대철학을 자주 인용하다보니 설정이 다소 사변적이고 억지스러운 면도 없지 않으나, 저자의 주전공인 포스트모던 비평과 연관지어 읽으면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얼개는 다세계SF의 틀을 빌리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볼품없는 청춘을 떠나보내고 다가오는 중년의 지평선에 곤혹스러워하는 한 남자의 초상이 숨어 있어, '인간'을 탐구하는 문학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하필이면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35세가 되어가는 시점에 이런 책을 읽다니 여러모로 복잡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귀중한 체험이었다. 본서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여겨지는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제대로 읽은 다음에 다시 읽는다면 또 다른 맛이 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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