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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과의례

A. 반 겐넵, 전경수 옮김, 을유문화사, 2000년 3월


pena (pena12@gmail.com)


 의례는 사회적 종교행위와 개인적 종교행위를 모두 포함한, 규격화된 종교적 행동이라고 간단히 규정할 수 있다. 규격화되었다는 건 규칙에 따라 행동이 결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신화는 사색적인 측면이 있고 기존 세계 질서를 대체할 대안에 관해 언급할 수 있는 반면, 의례는 지금의 질서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의례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계 안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구술이 주요한 전달방식인 신화와 달리 의례는 행위이다. 따라서 의례는 시간, 공간, 참여자 그리고 물질적 수단이 필수요소이다. 풀어 말하자면, 의례를 행하는 데에는 일정한 시간이 걸리며, 다른 장소와 엄격하게 분리되고 성스럽게 준비된 공간이 필요하다.
 시간적 의례의 과정과 공간적 의례의 배치는 의례에 참여하는 자들이 지니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일반적 개념을 나타내준다. 그래서 의례는 참여자들의 세계관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해준다. 의례 자체도 시간과 공간의 구조에 매여 있다. 일년 중 중요한 계절의 변화에 따라, 인간 삶의 중요한 순간과 연관되어 의례는 치러진다. 흔히 이런 의례에는 삶과 죽음의 기본적 상징체계가 표현되어 있다.
 반 겐넵의 『통과의례』는 이런 의례의 구조를 분석하고 종교적 행위의 조직원리를 일부 명확하게 밝혀준, 인류학 연구에서 중요한 저작이다.

 

 

반 겐넵의 통과의례


분리, 전이, 통합(separation, transition, incorporation)
 반 겐넵은 이 책에서 인간의 연령, 신분, 상태, 장소 등의 변화나 이행 과정에서 실시하는 의례에 ‘통과’라는 개념을 부여한 후, 대체로 이 의례들에는 세 가지 단계이자 요소가 있다는 것을 분석했다.
 시간의 경과와 장소의 이동을 동반한 의례는 거의 모두, 지금까지의 위치에서 벗어나는 ‘분리의례(preliminal rites)’, 어정쩡한 중간의 경계 위에 있는 ‘전이의례(liminal rites)’, 새로운 위치로 나아가는 ‘통합의례(postliminal rites)’를 나타내는 하위의례로 이루어져 있다. 반 겐넵은 인생이라는 것을 해체와 재구성, 상황과 형태의 변화, 죽음과 재생의 끊임없는 연속으로, 그리고 공간적인 이동을 행동과 휴지, 기다리는 것, 휴식하는 것, 그리고 다른 행위양식으로 행동을 시작하는 것 등의 연속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의례상의 변화의 기승전결에는 넘어서야 할 새로운 경계가 있고, 거기에는 항상 상대적으로 ‘성’과 ‘속’이 나뉘는데 이 관념을 축으로 의례가 이루어진다고 본다.


영역의 통과
 영역의 통과는 반 겐넵이 이후부터 말할 의례에 관한 논의에 앞서 제시되는 기본적인 틀이다. 반 겐넵은, 국경이나 문을 넘나드는 것의 주술- 종교적 측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경계석 등의 지표를 통해 특정 영토에의 출입을 금지하는 것은, 특정 집단이 그 안에서만 자신의 권리와 특권을 가질 수 있음을 알고 낯선 자의 침입에 대해 경고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때로 이렇게 의식을 통해 경계를 그은 영토가 신성하다고 믿는 사고방식은 가끔 지모신으로서의 전체 대지가 신성하다고 하는 믿음과 혼합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런 출입금지는 본질적으로 주술-종교적이라는 것이다.
 겐넵은 또한 두 영토 사이에서 인간이 갖게 되는 혼란을 전이기로 파악하고, 이런 전이기의 의례가 좀 더 단순한 것으로 축소된 것으로서 문지방에서 행해지는 의례에 대해 다루고 있다. 문지방은 문의 일부로서, 문을 통과한다는 행위가 들어가고, 멈추고, 나가는 것을 모두 포함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문 자체가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의 전이지점인데, 문지방은 그중에서도 중립지대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전-외부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문지방을 넘어서 안으로 들어가 새로운-내부 세계에 통합된다. 때로는 문이 특정 신이 머무르는 곳이 되어, 문을 통과하는 것이 단순한 공간의 통과가 아닌 영적인 통과의례가 될 때도 있다.

 

 

삶의 고비에서의 의례

 

임신과 출산
 임신과 출산 의식은 보통 서로 결합되어 하나로 나타난다.
 첫 번째 의례는 사회로부터, 그녀의 가족으로부터, 그리고 때로는 그녀 자신의 성(性)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다. 여자는 임신하면 부정하고 위험스러운 것으로 또는 바로 그 임신으로 인하여 생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여자를 고립시키려 한다. (격리, 성행위나 음식의 규제, 경제 활동의 금지 등)
 그 다음은 일종의 전이기라고 볼 수 있는, 임신과 관련된 의례가 행해진다. 이 단계에서는 점진적으로 장애를 제거해 나간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이전에 속했던 집단에 다시 통합시키는, 또는 특히 그녀가 장자나 아들을 낳았을 때 사회 안에서 어머니로서의 새로운 지위를 규정해 주는 출산 의례(rite of childbirth)가 행해진다. 출산으로부터의 생리적 복귀보다는 사회적 복귀가 더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겐넵은, 보호의례나 출산을 촉진하기 위한 의례는 이차적인 통과의례의 범주에 집어넣고 있다.

 

출생과 아동기
 임신 의례는 산모뿐만 아니라 아이들과도 관련되어 있다. 임신한 여자를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민족들은 보통 부정이 아기에게 전이된다고 생각한다. 아이의 첫 번째 전이기는 산모가 출생으로부터의 사회적 복귀에 앞서 행하는 마지막 전이기와 일치한다. 새로이 출생한 아이는 신성하며, 현존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축복받은 이방인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며, 그래서 이방인과 같이 아이도 먼저 그 이전의 환경 - 아마도 어머니 -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상징적으로 쓰이는 것이 탯줄이다. 부정한 것에서 분리한다는 의미에서 정화의례의 범주에도 속하며, 씨족, 가족 사회로의 통합의례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서 아동기 의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탯줄의 절단, 물을 뿌리고 아이를 씻기는 것, 남은 탯줄을 없애는 것, 이름을 지어주는 것, 처음으로 머리를 자르는 것, 처음으로 가족과 음식을 먹는 것, 처음으로 치아가 나는 것, 처음으로 걷는 것, 처음으로 나가는 것, 할례식, 처음으로 옷을 입히는 것 등이다. 이후 아동기로부터의 분리의식도 행해지며, 이것은 입사의례로의 전이기이기도 하다.

 

입사의례
 임신, 출산, 결혼, 장례식 외에 어떤 사회조직에 들어가기 위해 치르는 의례들을 모두 합쳐 입사의례라고 반 겐넵은 분류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생리적인 변화가 아닌 사회적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 겐넵은 처음에 생리적 사춘기와 사회적 사춘기 중 입사 의례가 문제삼는 것은 사회적 사춘기라는 것을 몇몇 예를 들어서 보여주고 있다. 생리적 사춘기는 개인차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어떤 시기를 일괄적으로 잡아 의례를 행하기는 무리라는 것이다.
 모든 통과의례가 그렇듯 입사의례는 분리-전이-통합의 세 단계를 거쳐, 이전과는 다른 조직에 통합되는 것으로 끝난다. 이 때 통합되는 그 조직의 특성을 거칠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된다. 성(性)과 성(聖).
 우선 사회적 사춘기의 의례를 지내고 나면 性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이제까지 성의 구별이 모호하던 어린아이의 시절로부터 벗어나,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어진 성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남자아이라면 대개는 이전까지 있었던 여성과 아동의 세계로부터 폭력적으로 분리되는 과정이 맨 처음에 행해진다. 어떤 부족에서는 이렇게 분리된 이후 초입자를 사자로 취급하여 그가 아동기를 완전히 잊게 하려고 한다. 그러고 나서 부족의 법규, 토템의식, 신화의 낭송, 종교적 의식 등 그 부족의 일원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능동적으로 가르친다.
 주술사로서의 입문식이나 사제 서임식, 성녀 성자 서임식, 세례, 심지어는 일주일에 한 번 드리는 예배나 미사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종교적 입사 의례는 聖의 세계로 들어가는 역할을 한다. 예배를 드릴 때에 사람들은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세계로부터 벗어나 그 시간 동안 성의 세계에 머물기 때문이다. 앞에서 열거한 주술사, 사제, 성자, 성녀 등의 경우에는 그 자신의 삶을 세속이 아닌 성의 세계에 바치는 것이다. 캠벨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은 의례를 행함으로써 세속에서 분리되어 ‘일상보다 더 큰 것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된다. 때로는 어른이 된다는 것도 聖과 관련이 있기도 한데, 그런 경우에는 부족에서 신성시하는 성물이나 어린아이들이 무서워하는 도깨비들을 입사 의례 이후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게 된다. 즉 초자연적인 聖을 다룰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장례식에서 다루는 것이지만, 이 입사 의례를 치르지 못하고 죽은 어린아이들에게는 영혼이 없어 장례조차 치르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을 보면, 입사의례란 사회만이 아닌 영혼의 획득 면에서도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입사의 례만이 아닌 모든 통과의례에서 나타나는 양상이지만, 특히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삶과 죽음의 모티프이다. 출산, 장례 등은 실제로 물리적인 삶과 죽음에 닿아 있지만, 입사의례는 사회적인 의례임에도 불구하고 삶과 죽음의 모티프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입사의례를 치르는 사람은 의례 기간 동안 죽은 사람으로 여겨지거나 혹은 이름없는 자로 여겨진다. 반 겐넵은 그래서 입사 의례는 전이기간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다고 하였다. 어떤 때에는 의례 자체가 출산의 과정을 본따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또 앞에서 말한 장례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입사 의례를 치룸으로써 영혼을 얻는다는 말은 곧 죽음 혹은 무(無) 가운데 있던 삶이 진정한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뜻한다. 즉 여기에서 말하는 삶과 죽음이란 사회적 삶과 죽음, 혹은 영적 삶과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약혼과 결혼
 결혼은, 적어도 부부 중 한 사람에게 있어서 가족, 씨족, 촌락 또는 부족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때로는 둘 다 새로운 곳에 거주를 정하기도 하기 때문에, 한 사회적 범주로부터 다른 사회적 범주로 옮겨가는 아주 중요한 전이를 포함한다. 약혼은 이 과정 중 전이기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으며, 거주지의 변화는 분리의례를 포함한 의식과 특히 영역 통과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또한 결혼 의례에는 양측의 경제적 보상과 협상 같은 요소가 들어 있는 경우도 많다. ‘처음’의 결혼이 완전한 결혼으로 여겨져 그 이후의 결혼에서는 의례의 규모가 감소한다거나, 완전한 의례를 거치지 않은 결혼은 인정되지 않는 등의 모습도 보인다.
또한 성교와 결혼과의 관계는 항상 일정하지는 않다. 약혼기부터 이미 성교가 허용되는 곳도 있고, 그 시기에 성교를 해서 낳은 자식은 사생아 취급을 받는 곳도 있다.


장례식
 장례식은 단순히 죽은 자의 분리의례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좀 더 복합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장례식은 살아 있는 자에게도 의례를 요구한다. 살아 있는 자는 분리 의례를 통해서 전이기(산 자의 세계와 사자의 세계의 사이)에 들어가며 또한 사회에의 재통합 의례 (탈상의례)를 통해서 그곳에서 나오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살아 있는 자의 전이기는 죽은 자의 전이기와 대응되는 것으로서 살아 있는 전이기가 끝나면 망자가 사자의 세계로 통합되기도 한다. 상중에는 그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들의 사회 생활은 멈추게 되며 그 기간의 길이는 망자와의 사회적 유대의 정도, 망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서 달라진다.
 보통 전이기의 의례는 물리적이며 (관을 특정한 장소에 놓기 등) 그 후 사자는 죽음의 세계로 통합되기 위하여 여러 단계의 통과의례를 거치기도 한다. 가장 전형적인 예는 이집트이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영혼이 없다고 믿어진 어린아이 등으로서, 그들은 죽음의 세계로 통합될 영혼조차 없기 때문에 장례식 없이 그냥 묻히기도 한다. 또 무덤 저편의 세계가 아니라 무덤이나 묘지에 사자가 거주한다고 믿는 경우에는 매장이 그대로 통합의례이기도 하다. 영혼이 다른 사람의 몸을 입어 부활한다는 믿음은 출산의례와 이어지기도 한다.

 

 


 반 겐넵의 연구는 뿔뿔이 흩어져 있는 듯 보이는 의례를 ‘계기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고찰하고, 그 전체 구조를 명확하게 분석해내고자 했다. 즉 오늘날 인류학적인 관점의 기본인 ‘전체관(holism)’이라는 사상에 입각해 있었다.
 또한 인생을 분리, 과도, 통합의 다이내믹한 연속으로 파악했다. 사람이 위치하는 장소의 변화에 따라 ‘주술적 세계’도 그 장으로 이동하고, 거기에서 ‘성과 속’ ‘죽음과 재생’ 등의 가치 전환이 일어난다고 하는 관점은 오늘날의 문화연구에서 중요한 양의성(대조적인 두 의미를 같이 가지는 성질)의 문제를 일찍부터 올바르게 논의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통과의례의 가장 큰 특징인 3단계 모델의 두 번째 단계인 ‘전이기’의 경계성을 명확히 하여 오늘날의 인류학적인 연구에 커다란 비약을 가져온 빅터 터너의 ‘코뮤니타스’ 이론의 출발점을 제공했다. 『순수와 위험(Purity and Danger)』에서 인간의 문화에서 더러운 물건 내지는 추악하다는 개념이 본질적으로는 무질서의 문제라는 것, 더러움은 파괴로 연결되지만 그것은 동시에 재생과 신생의 상징이기도 하다는 것을 밝혀낸 메리 더글라스, “모든 인간사회에서 대다수 의례의 기회는 하나의 사회적 범주와 별도의 범주 사이의 경계선을 이동하는 것을 구분하는 통과의례이다”라는 것을 확인하고, 모든 통과의례는 분리, 전이, 통합이라는 세 가지 국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호론적으로 논한 에드문드 리치도 반 겐넵의 연구에 크게 힘입어 연구를 전개하거나, 그 깊이를 증명한 학자들이다.

 

 인류학에서는 의례를 왜 연구할까? 요는 이것이다. 의례를 통해 ‘개인’을 보는가, ‘사회’를 보는가. 그러나 어느 한쪽만을 분리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이기에, 개인을 보든 사회를 보든 그 시선은 다른 쪽에게까지 미치게 된다. 예를 들면, 조셉 캠벨의 의례에 대한 언급이 그렇다. 그는 카를로스 융의 분석심리학 방법을 신화에 적용하여, 신화에서 인간에 대한 메세지를 찾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개인과 사회 중 개인심리학적 입장에 속하는 사람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통과의례를 통해 개인이 온전히 사회에 통합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의례의 부족이 현대 사회와 같은 병폐를 낳는다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하면, 개인이 사회에서 분리되는 현상이 현대에 심한 것은, 그런 의례와 의례에 담긴 의미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캠벨은 분명 의례를 개인적 차원으로 보고 있지만, 의례의 결과는 사회에 미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개인과 사회가 아무리 분리되었다고는 해도 완전히 떼어놓을 수 없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일견 맞는 말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의 말이 맞다면 우리는 사회를 위해 몸과 마음을 갱신하고 어딘가를 깎고 그래서 사회에 알맞은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의례가 우리를 억압할 수 있는 (그것도 효과적이고 정당하게!) 기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회는 변했고, 사람도 변했으며, 가치관은 새로이 정립해야 하지만 그것은 학문의 역할은 아니다. 학문은 변해간 궤적을 추적하고 그것을 말로서 규정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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