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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소설 베오울프

2003.07.26 02:5207.26

베오울프

김석산 옮김, 탐구당 ,1976년 12월



hermod (german.banpo.or.krshiderk@yahoo.co.kr)



베오울프. 곰(bear)+늑대(wulf).

이 글에서는 두 가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우선은, 고대 영어로 기록된 가장 긴 서사시이자 고대 게르만 신화 전설 작품 중 가장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고대 영시 [베오울프]에 대해. 그리고, 1976년에 번역된 포켓 북 사이즈의 영-한 대역본 [베오울프]에 대해(여기서의 영어란 고대 영어, 또는 앵글로-색슨어를 말한다. J. R. 보르헤스의 단편 {매수}에 등장하는 고대 영문학 교수는, ‘앵글로-색슨’이라는 단어가 어설픈 합성어이기 때문에 이 단어를 기피하고 있다).

   고대 영어 작품 [베오울프]의 일반적인 사항을 알기 위해서는 [브리태니카 백과사전]과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를 참고하면 충분하다. 어쩐지 글을 쉽게 쓰려는 방법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에 실린 ‘베어울프’ 항목을 옮겨보자.

   베어울프(Beowulf)   고대영어로 쓴 영국의 영웅서사시.

   3,182행으로 되어 있다. 8세기 전반에 저작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작자는 미상이다. 게르만 민족의 영웅서사시 중에서 완전히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 된 작품이며 현존하는 유일의 사본(10세기 말의 것)이 런던의 대영박물관(大英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내용은 2부로 나누어져 있다. 제1부에서는 데네 국가(덴마크)의 왕(王) 흐로트가르의 궁전에, 근처 늪에 사는 괴물 그렌델이 밤마다 찾아와 신하들을 납치해다가 살해한다. 바다 건너 이웃나라 게아타스의 젊은 무사 베어울프는 이 이야기를 듣고 데네국으로 찾아와 용감무쌍하게 카인의 후예라고 하는 그렌델과 그의 모친을 타도한다. 제2부에서는 베어울프가 게아타스의 왕이 되어, 50년에 걸쳐 선정(善政)을 베푼다. 그 때 마침 한 사람의 죄인이 어느 동굴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여 훔쳐냈다. 보물을 지키던 화룡(火龍)이 노하여 복수하려고 게아타스의 국토를 어지럽혔다. 그래서 베어울프는 국민을 구하려고 이 화룡과 싸워 퇴치한다. 그러나 베어울프 자신도 화룡의 독기를 받아 사망한다.

   이와 같이 제1부에서는 신하로서의 베어울프를, 제2부에서는 왕으로서의 베어울프를 묘사하여 게르만 무인사회(武人社會)의 윤리관에 입각한 이상적 인물상을 표현하고 있다. 동시에 이 시의 제재(題材)는 이교도(異敎徒)인 게르만의 전설에서 취하고 있으나 그 내용은 그리스도교적 윤리에 조화시키고 있는 점이 이 시의 특징이다. 또한 인간의 영웅적 행위를 찬양하면서도 모든 인간적인 것은 초자연의 운명의 힘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것을 표현한 점은 모든 고대 영시에 공통되는 비극적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


   위의 문장에서도 말하듯이, [베오울프](현대 영어에서는 ‘베어울프’라고 하지만, 고대 영어 발음은 ‘베오울프’이다)는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두 부분의 공통점은 베오울프가 드래곤을 처치하여 두 왕국(덴마크와 예이츠)의 평화를 지킨다는 것이다. ‘예이츠족(Geats: 약 6세기 경까지 남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거주하던 민족명. 작품 속에서 베오울프는 예이츠족의 출신으로 나온다)’의 영웅 베오울프가 덴마크와 예이츠 영지의 두 마리 드래곤을 죽인다는 큰 줄거리만으로도 이 작품은 충분히 흥미롭다(이런 줄거리를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형 설화라고 한다던가……).

   그러나, 이 작품에서 단지 그러한 ‘드래곤과 왕자님’ 이야기만을 읽어낸다면 [베오울프] 독해의 진정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실로 [베오울프]는 고대 게르만 신화 전설의 보물창고이기 때문이다.
   [일리아드], [오뒤세우스] 등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들과 마찬가지로 [베오울프] 역시 고대 게르만족들 사이에서 음송되던 구전 서사시였다. 그런데, 구전 서사시의 특성상, 작품 안에는 주요한 줄거리 외에 수많은 ‘삽화(揷話: episode)’가 첨가된다. 근대 소설 이론에서야 작품 내의 긴밀한 구조와 특정한 시점에 의한 작품 전체의 장악도에 따라 작품의 완성도를 평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근대 이전의 서사시나 소설에서는 이와는 다른 측면에서 창작과 감상이 이루어졌다. 즉 작자(作者)=화자는, 작가와 작품의 엄격한 분리니 일관된 스토리의 전개니 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작품을 보고 들을 사람들이 현재 어떠한 것들을 즐거워하는지 그리고 그 집단에서 공통적으로 인기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늘 민감하게 캐치하고 있다가, 누군가의 앞에서 서사시를 읊을 때에는, 자신의 입에 늘 익어 왔던 ‘정형적인 어구들’을 적절히 재조합하면서 수많은 삽화들을 큰 줄거리 사이사이에 적절히 삽입해 나아갔던 것이다.
   [베오울프]도 이러한 구전 서사시의 전통에서 예외가 아니어서, 이 작품 안에는 수 많은 고대 게르만의 신화 전설이 삽화의 형태로 별처럼 박혀 있다. 불완전한 고대 영어 수사본(手寫本)으로 남아있는 [핀스부르흐 전투Finsburg Battle]가 이야기되는가 하면, [뵐숭아 사가Voelsungasaga] 나 [시 에다Poetic Edda], [산문 에다Prose Edda]에 등장하는 영웅 시구르드(Sigurd: 독일어명은 지그프리트Siegfried)도 등장한다. 또한 고대의 거인들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떠돌이 영웅 디트리히 폰 베른Dietrich von Bern 이야기가 튀어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서사시인은 베오울프의 모험이라는 줄거리에만 얽매이지 않고, 내용이 서로 연결되는 여러 가지 삽화들을 교묘하게 이어나가면서 서사시의 내용을 다채롭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크고 작은 삽화들을 읽으면서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고대 게르만 신화 전설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이해가 필요하지만, 반드시 고대 게르만 신화 전설에 대한 모든 지식을 숙지하고 있지 않더라도, 작품을 찬찬히 읽다보면 저절로 흥미가 느껴질 것이다. 단, [베오울프] 독서의 재미를 좀 더 많이 느끼기 위해서는, 위에서 말한 것들을 잘 정리한 책을 골라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석산 역 [베오울프]는 유용하다. 이 책의 장점을 들어보면, 우선 고대 영어-한국어 대역본이어서, 고대 영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한국어 번역 부분에 해당되는 고대 영어 부분을 찬찬히 훝어 보면 대강의 느낌이 오게 된다.
   다음은 “들어라! 우리 덴마크인들은……”으로 시작하는 [베오울프]의 유명한 첫 구절이다.

   Hwæt! We Gardena
   þeodcyninga,
   hu ða æþelingas
   Oft Scyld Scefing
   monegum mægþum,
   egsode eorlas.
in geardagum,
þrym gefrunon,
ellen fremedon.
sceaþena þreatum,
meodosetla ofteah,


   모르는 언어라고 겁먹지 말고, 한국어 번역과 찬찬히 비교해보면, 적어도 We(우리: we), dena(덴마크인: dane), cyninga(왕들: kinges), ða(정관사: the), æþelingas(왕자, 귀족 등 귀한 자들: athelinges), oft(자주: often), Scyld Scefing(덴마크의 전설적인 왕 쉴드 셰핑), eorlas(귀족들: earls) 정도는 알아챌 수 있다. 그리고

   geond þisne middangeard,
―――[Beowulf] 75.

라는 문장은 ‘beyond this middle-earth’라는 현대 영어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는 그 유명한 [반지의 제왕]의 무대인 ‘중간계middle-earth’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톨킨은 고대-중세 영문학 교수였다). 이렇게 한 줄 한 줄 읽어가다보면 쏠쏠한 재미를 느낄 수 있게 된다는 것이고, 내키면 고대 영어 공부에 돌입할 수도 있다(참고로 말하자면, 고대 게르만 신화 전설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약 열 가지의 언어를 알아야 하는데, 이 중 아이슬란드어와 고대 영어를 알고 있다면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언어를 익힌 셈이 된다)!
   또한, 위에서 말한 [베오울프] 독해의 진정한(!?) 재미인 ‘삽화’들에 대해서는 번역자 김석산 교수가 상세하게 주를 달아 놓았으며, 책의 첫머리에는 [베오울프] 및 고대 게르만 세계에 대한 중요한 정보들이 제공되어 있기도 하다. 이제까지 고대 게르만 신화 전설에 대해 거의 몰랐던 사람이라도, 적어도 이 번역본만 제대로 읽으면 많은 지식과 재미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어쩐지 점점 약장수의 말투가 되어간다). 본 필자가 게르만 신화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고등학생 때 이 책을 접한 이래로 지금까지 십 수년 간 애독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점은 보장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점도 매우 중요한데, 이 책에는 [베오울프] 외에도 [핀스부르흐 전투], [맬던 전투The Battle of Maldon], [나그네The Wanderer] 등, 고대 영어로 기록된 중요한 작품들이 함께 번역되어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핀스부르흐 전투]와 [맬던 전투]가 전쟁을 다룬 시라면, [나그네]는 어떤 뱃사람이 자신의 상황에 대해 명상하며 크리스트교의 진리로 다가간다는 내용의 종교시로, 황량한 북대서양이라는 거친 대자연 속에 내던져진 한 인간의 절대 고독과, 번성했다가는 멸망해버리는 역사의 무상함에 대한 관조가 작품을 이끌어가고 있다. 아무튼,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고대 영문학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들이며, 이 번역본을 읽는 것으로 고대 게르만 신화 전설의 주요한 한 흐름인 고대 영문학의 큰 흐름이 파악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관련 링크

   20세기에 부활한 안드바리의 반지: 톨킨과 게르만신화의 비교 (hermod)
   http://german.banpo.or.kr/

   고대 영시 원문 제공 사이트
   http://www.georgetown.edu/labyrinth/library/oe/o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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