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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 징크스

김주영, 기적의책,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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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절과 불안


 모든 존재는 세계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단절을 경험한다. 완전하게 연결되어 있던 어미로부터 가혹하게 내쳐지며, 스스로 먹고 걷고 사고하기를 강제당한다. 『보름달 징크스』속에 실린 모든 소설들에서 단절은 매우 강력한 이미지로 소설 전체를 압도하고 있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타인에게 이해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애초에 포기한 채 절망하고 있거나(「마지막 티타임」), 서로의 계급적 기반을 수용하지 못하고(「파리에서」), 자신과 상대의 감정이 어긋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기도 하며(「다른 방식의 진화」), 보호자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속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찬란한 눈동자들의 강림」).

 단절은 원초적인 불안감을 야기한다. 단순하게는 누군가와 물리적으로 떨어지는 것에서 출발하여, 조금 더 나아가서는 정신적인 단절에서까지도, 우리는 커다란 불안을 경험한다. 내가 지극히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존재라고 하더라도 그가 나를 그렇게 여길 것이라고는 결코 장담할 수 없다. 친밀하다고 느껴왔던 사람이 일순간에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불안하다.

 그 불안은 표면적으로는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에서 비롯하는 것처럼 보인다. 「몽환의 끝은 제자리」에서 ‘고객’들은 그 불안감에서 해방되기 위해 주인공을 비롯한 ‘상품’들을 구매한다. 상품들은 호르몬제를 맞으며 도파민, 페닐에틸아민, 옥시토신 등의 호르몬들을 통해 의심할 여지없는 ‘사랑’을 구가해낸다. 사랑이라는 것이 결국 호르몬의 화학 작용일 뿐이라는 자명한 진리 앞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불분명한 타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인공인 ‘나’는 그 호르몬의 파도에 끊임없이 노출되어서도 그 파도를 거스르는 일정한 감정을 느낀다. 그는 “사랑이 치명적인 거짓임을 잘” 알며, “감히 진짜 사랑을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시작도 끝도 모호”한 사랑을 어쩔 수 없이 경험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인 ‘그’에게서도,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인 사랑에서도 괴리되어 있다. 그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주인공은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으나, ‘나’의 불안은 그런 곳에서 오지 않는다. 내가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타인 역시도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속을 자연스럽게 읽어낼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는 말은 ‘너는 나를 알지 못한다’는 말로 치환된다. 이 불안은 이제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한다는 쓸쓸한 고백이다. 누구도 나를 이해해주지 못할 것이며, 누구도 내 삶에 의지가 되어주지 못할 것이며, 단지 나는 나로서 이 외로운 세계를 헤쳐 나가야 한다는 두려운 진실이 불안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


2. 상실과 그리움


 이런 불안은 우리가 서로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외로운 존재라는 원인뿐만 아니라, 언제 서로를 상실할지조차 알 수 없는 멍청한 존재라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까지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결코 한날한시에 태어나 진정한 우정을 나누다 한날한시에 죽지는 않는다. 심지어 유비·관우·장비처럼 한날한시에 죽자고 약속까지 해도 쉬이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불안은 대상을 온전하게 이해하지도, 대상에게 온전히 이해받지도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넘어서, 언제 그 대상을 잃어버릴지 알 수조차 없다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실제로 그 상실이 발생하였을 때, 불안은 현실을 잠식하여 절망이 된다.

 그러므로 작가는 끊임없이 죽음이라는 주제에 천착한다. 죽는 자와 남겨진 자의 대비는 소설 내내 지속된다. 「다른 방식의 진화」와 「찬란한 눈동자들의 강림」, 「웃음소리」처럼 분명한 죽음의 대비로 드러날 때도 있고, 「걸어다니는 화석」이나 「모르탈」처럼 강력한 상징으로 드러날 때도 있다.

 「다른 방식의 진화」에서 이미 죽음은 선제되어 있는 조건이다. 사람들은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기에 죽은 늙은 엘마의 여동생과 똑같이 생긴 클론을 입양하였다. 엘마는 클론에게 심술을 부려, 결국 클론이 스스로 자결을 하는 상황으로 클론을 몰아간다. 핫산은 “죽은 이는 비탄 속에 살아 있고 마음 속에서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늙은 엘마에게는 그것이 실질적인 현실으로 존재한다. 늙은 엘마에게는 젊은 엘마라는 가능태도 있지만, 엘마의 유령이라는 미래의 결정태도 있다. 유령은 엘마의 죄를 밝혀주기라도 하듯, 평생을 엘마와 함께 살아간다. 유령은 언제라도 우리가 이렇게 서로를 상실하여 아무런 영향조차 미칠 수 없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계속해서 증명하고 있다.

 그렇게 떠나간 자리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상실한 상대방을 그리워 하는 것뿐이다. 단절과 상실을 가장 기초적인 배경으로 끌어안고 있기에, 소설 속 주인공들은 그리움이라는 감정에 깊이 사로잡혀 있다. 시간은 결코 다시 돌아올 수 없다. 「분실의 시간」에 나오는 사람들은 잃어버린 시간의 대체제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 시간은 결코 잃어버린 시간이 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대체제로 삼고 싶어하는 그 모든 시간들을 환각하며 도시의 이름을 〈그리움의 도시〉라고 명명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기억만이라도 애타게 붙들려고 노력하면서.

 「걸어다니는 화석」의 경우, 죽음과 삶에 대한 대비는 더욱 극명하다. 이 소설에는 외로워 한 끝에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했을 때 화석처럼 굳어가다가 어떤 기억도 세상에 남기지 못하고 증발해 버리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누군가를 완전히 잃어버릴 것이라는 두려움은 이 소설에 와서 극대화된다. 심지어 그에 대한 기억조차도 우리는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사라져 버린 첫사랑과 남편을 모두 기억하지 못하는 주인공 초희를 지켜보며 중국인 의사 타이푸는 “바람처럼 불어오는 시간이 우리를 깎아먹고, 물처럼 흘러가는 시간이 우리를 훔쳐간다”고 말한다. 시간의 영향력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진실로 미약하다. 우리의 기억은 불완전하며, 그렇기에 우리의 그리움이 아무리 강렬할지라도 그 그리움조차 분명하게 확신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불안하며, 상실하고, 그 상실을 그리워하는 외로운 것으로만 존재한다.


3. 수용과 전복


 그 사실은 당연하게도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 아니다. 단절과 상실이 버거운 것은, 불안과 그리움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끊임없이 온전하게 이해되는 세계를 꿈꾸기 때문이다.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생의 매 순간마다 느끼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매우 완전한 순간을 기다리면서 살아간다. 

 김주영의 단편들은 이 양가적인 감정들에 매우 흥미로운 태도를 취한다. 작가 김보영은 『보름달 징크스』의 추천사에서 “김주영의 작품은 강하고 따사롭다. 고결한 야생성과 원시성을 지닌 고독한 영웅상은 포복절도하는 유머와 쓸쓸한 허무함을 거쳐 따듯한 시선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듯한 큰 어른에 이른다” 라고 서술한다. 우리가 주목할 지점은 “큰 어른”이다. 실제로 아이와 어른이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른도 아이와 마찬가지로 상실을 두려워하며 불안과 그리움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그 고독에서 탈출할 수가 없다. 다만 어른은, 자신의 필연적 고독을 받아들인다.

 「찬란한 눈동자들의 강림」에서 미켈은 자신을 지극히 사랑했으며, 자신이 모든 것을 기대고 의지했고, 자신의 부모이자 꿈이었던 셀라가 자신을 죽이려했던 존재라는 사실을 끝끝내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꿈과 사랑을 내팽개치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는다. “셀라리오 아르시마케도가 어떤 자이든 간에, 나는 셀라와의 동반이 영원할 수 있다면 우주의 기본 법칙도 간단히 무시했을” 사람이라는 것을, 미켈은 고통스럽게 수용한다.

 그 고통은 단순히 고통에서 머물지 않는다. “셀라와 나 둘만이 존재했던 우주는 점점 무한히 팽창하며 그 안에 수백, 수천, 수만의 존재를 담아 나간다”. 미켈은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상실과 그리움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며 그를 통해서 자신의 동족을 다시 규합할 힘을 얻는다. 외로운 존재로서의 모두가 계속해서 살아나가야 할 이유를,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을 통해 획득하는 것이다.

 「백만 년의 배」에서 대를 이어 웬디와 함께 “우주의 섭리”를 기다리는 피터팬의 경우도 그러하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는 웬디와, 그런 웬디를 지키며 기다려야만 했던 피터팬은, 자신 스스로를 상실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문을 연다. 의지하던 존재가 삶에서 사라졌을 때, 그제야 웬디는 우주를 위한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되었다. 웬디의 독립은 사랑하는 자를 먹어치우는 의식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를 잃어버렸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를 기억하고 이해하며,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분명하게 만드는 의식이다. 그리고 작가는 걸어나가는 웬디에 대해 “그녀 속에는 생명이 있었고, 별이 함께 흐르고 있었다” 라고 묘사한다. 홀로 서서 완전해지며, 우주 그 자체가 되어 가는 웬디의 모습은 가슴이 저리도록 장엄하다.


 탄생은 분명 끊임없이 결핍을 확인해야 하는 고통의 과정이다. 우리는 그 고통을 끊임없이 겪어가며 각자가 하나같이 외로운 이 세계를 유영하고 있다. 이해받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며, 언제든 서로를 잃을 수 있다는 불안에 시달리면서. 그러나 김주영의 소설 속에서 그 끊겨진 모든 관계의 끝에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할 커다란 세계가, 찬란하게 우리를 끌어안고 있는 것을 목도한다. 그 어느 순간은 우리가 세상을 수용하게 되었을 때, 불쑥 얼굴을 들이민다. 굳이 그것을 명명하자면 신의 섭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며,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어느 밤의 〈보름달 징크스〉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보름달 징크스」의 무령은 환한 보름달 아래에서 세하의 상실을 확인하고, 그것을 솔직하게 수용한다. 보름달에게 가장 명백한 것은 내일이면 조금 줄어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보름달은 그 줄어든 시기를 넘어서서 언젠가 다시는 만월의 세상을 맞을 것이다. 하현달의 세상 속에서 김주영의 소설들은 하현을 말하는 척, 만월의 시기를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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