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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폴라리스 랩소디

2003.11.01 01:4611.01





plluto@hitel.net

   자유와 복수에 대한 화두

   * 이 글은 필자의 매우 개인적인 감상글이며, 보편적인 분석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경고합니다.

   [폴라리스 랩소디]는 나온지 제법 오래 된 책이다. 하지만 필자가 여태까지 읽은 한국 환타지 소설 중 아마 이와 같은 책은 이전에 없었고 앞으로도 있기 힘들 것이라 생각한다(아직 자금 사정상 이영도씨의 신작인 [눈물을 마시는 새]는 읽지 못했으나, 어떤 의미에서 그것 역시 [폴라리스 랩소디]와는 전혀 같지 않으리라 확신하는 바이다).

   이 책은 간단하게 말하여 자유와 복수에 대한 일대 서사시이다. 아니,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키 드레이번 선장의 파란만장한 복수극이며 휘리 노이에스의 영웅 서사시이다.
   [폴라리스 랩소디]에는 주인공이 없다. 주인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또 그들의 위치 자체가 누군가 하나를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사방팔방으로 분파되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작가는 세상의 멸망과 관련된 하나의 거대한 줄기를 더듬어 나간다. 반왕. 정복. 그리고 하이 마스터.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관계들이 이 이야기를 하나의 서사시로 보이게 만들지만, 여기에 한 마디 덧붙여 이 소설을 정말로 간단히 표현하자면, 그것은 작가의 사기극이라는 것이다.

   언어의 본질과 유희

   기본 줄기는 세가지로 나뉘어 있다. 율리아나 공주와 오스발, 키 드레이번을 중심으로 한 추적 이야기. 휘리 노이에스를 중심으로한 정복 이야기. 파킨슨 신부를 중심으로 한 순례 이야기.
   이 세가지는 각각 복수, 자유, 그리고 사랑을 따라간다. 하지만 그것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세 가지가 각각 어느 하나만을 나타낸다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세 줄기의 길은 계속해서 연결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과연 그것이 ‘보이는 그대로의’ 것이냐 하는 점이다.
   원래 하나의 글에 대해 감상을 쓸 때는, 단순히 그 글에 대한 내용만이 아니라 작가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했을 때 더 깊은 감상을 끌어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이다(그것이 독자의 편견이던 아니던). 그리고 작가 이영도의 여태까지의 경향을 종합해 보았을 때 [폴라리스 랩소디]는 그의 버릇이 극대화 된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본질에 대한 탐색과 언어를 가지고 하는 유희라는 점이다.

   존재(存在). 본질에 대한 탐색은 우선 어떠한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둔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색이나 물체의 본질에 대한 탐색등이 인문학자나 심리학자 과학자 등을 만들어낸다면, 자기가 쓰는 도구이자 자신의 무기이기도 한 언어에 대한 탐색은 자연스럽게 소설가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의외롭게도, 실제로 한국 환타지 소설에서 이러한 본질에 대한 탐색을 추구한 자는 드물다 할 수 있으니, 그 중에서도 특히 이영도씨는 언어의 본질에 대한 탐색에 있어서는 하나의 분야를 이루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언어의 본질에 대한 탐색은 말로 쓰면 어렵지만, 단순한 것이다. “장미는 왜 장미라고 불리울까?” “장미의 이름이 장미가 아니어도 여전히 장미는 향기로울까?” [어스시의 마법사]나 기타 그러한 부류의 ‘진명(眞名)’에 대한 소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접해보았을 의문이다. 그것은 과연 실재하는 존재와 그것을 가리키는 언어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으며, 그 언어 자체는 무슨 의미를 지니느냐 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언어는 존재를 표현해내기 위한 기호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인류의 지성이 발달하고 추상적인 개념들이 표현되어감에 따라, 사고(思考)는 언어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언어 그 자체가 단순한 기호라고 말할 수 없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극단적인 예로, 장미라는 단어를 그저 ‘장’자와 ‘미’자의 결합이라고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그 단어가 단순히 ‘붉은 색 겹꽃잎을 가진 꽃의 종류’를 가리키는 기호라고 보는 사람 역시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어에 의해서 연상을 하도록 훈련되어 있고, 연상에 의해 감정을 느끼거나 사고를 떠올리도록 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사기극

   그런 의미에서, 이영도씨의 언어유희는 단순한 농담따먹기 수준을 지난지 오래이다. 그의 단편 연작에서도 특히 재치있는 것으로 알려진 괴팍한 마법사 시리즈(특히 {골렘})를 보면 그가 언어를 어떤 식으로 가지고 노는가가 잘 보여지는데, 실은 이러한 언어적 유희는 오히려 추리소설 쪽에서는 보편적으로 등장하는 소재이다. 즉 어디까지가 거짓말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하는 상황에서, 그 단어가 가지는 진짜 의미나 중간에 생략된 함축적 의미가 커다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은 실제로 그 사람이 누군가를 죽이지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고, 그 뒤에 “(구급차를 부르지 못하도록) 그저 전화 코드를 뽑아놓았을 뿐이다.” 라는 말이 생략된 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폴라리스 랩소디]에서의 작가의 사기극은 이러한 뜻의 언어유희에 플러스 본질을 탐색하기 위한 언어유희가 처절하게 복합되어 있다. 패스파인더 데스필드의 ‘나’와 ‘당신’ 문제는 빼놓고도 [폴라리스 랩소디]를 관통하는 하나의 수단은 그것이다.
   ‘전혀 보편적이지 않은 새로운 뜻을 기호에 부여함으로서 그것의 본질에 대해 논하는 것.’
   [폴라리스 랩소디]의 화두이기도 한 복수와 자유(개인적으로 그곳에 사랑도 추가하지만)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것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복수와 자유를 대입했다간 커다란 혼란에 빠지게 된다. [폴라리스 랩소디]에서의 복수는 실은 보답이며(정확히 말하면 ‘cause and effect’의 ‘effect’에 가깝다. 이런 행동을 했기에, 당연하게 그에 대해 돌아가는 반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는 실은 방종 혹은 방치이다. 그러나 작가 이영도는 이것들을 솔직하게 보답이나 방치라고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단어(즉 기호)는 인간의 선입관에 의해서 일정한 반응을 유도해내기 때문이다. “키 드레이번 선장은 복수하는 사람입니다”라는 말과 “키 드레이번 선장은 보답하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비교해보자. 비록 그 진정한 뜻이 후자라고 할 지라도, 표현히 전자와 같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게 되는가? 분명히 작가가 수없이 소설 내에서 복수의 진정한 뜻을 설명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이미 가지고 있는 기호에 대한 선입관에 농락되고 만다. 그리고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보이는 모든 허를 찌르는 내용들은 그러한 작가의 사기극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작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언어유희이자, 작가로서는 약간 비겁한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이 화두나 자신의 방식을 정직하게 앞으로 내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자유라던가 복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듯 보이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유라던가 복수라던가 사랑이라던가 하는 것을 언어 유희로 농락함에 의해 존재의 본질을―――다시 말하자면 기호를 정하고 그것에 뜻을 부여한 뒤 그에 묶여 버리는 인간이라는 것의 본질에 대해 파헤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독자들은, 끝까지도 그가 어떠한 언어유희로 독자를 희롱했는지 파악하지 못한 채 정신없이 그의 이야기에 끌려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폴라리스 랩소디]의 마지막을 보고 “어째서 끝이 나지 않은 이야기를 끝냈느냐!”라고 항의하는 것은 바로 그런 작가의 유희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미 그러한 유희에 의해 본질에 대한 파헤침을 끝냈고, 이 소설의 목적은 거기에서 이미 달성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이후의 스토리는 아무 필요가 없는 것이며, 굳이 넣는다면 사족에 지나지 않는―――20개들이 두루마리 휴지에 붙어오는 크리넥스 통이랄까―――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크리넥스 통에 눈이 멀어 두루마리 휴지를 보지 못한 것일 뿐. 작가 이영도는 영악하게도, “크리넥스 한 통에 만원이라면 좀 비싸지만, 이건 매우 훌륭하고 질이 높은 크리넥스입니다. 게다가 덤으로 두루마리 휴지도 붙어 있는데 어떻습니까?”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스발과 키 드레이번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던 작가에겐 상관이 없다. 그들이 벌여온 왜곡된 의미의 단어 놀이에 의해 휘둘렸던 독자들의 반응―――그것이 이 소설의 진정한 목적이니까.

   주인공 없는 소설의 주인공

   비록 본인이 대단히 이러한 지적 유희를 즐기기에 작가의 사기극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했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소설에 주인공이란 없다. [폴라리스 랩소디] 그 자체가 하나의 cause이며, 그에 대한 effect는 독자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한 언어 유희 만으로는 책이 완성되지 않으며, 단순한 본질에 대한 탐구로서는 소설이 아니라 논문이나 철학서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소설적 기능’을 크게 사로잡고 있는―――혹은 보완하고 있는 인물이 둘이 있으니, 그것은 휘리 노이에스와 파킨슨 신부이다.
   실제로 키 드레이번과 오스발, 그리고 율리아나 공주에 대한 스토리가 폴라리스 랩소디 전체에서 가장 육중한 무게를 가지고 있다고(혹은 그 존재 의의라고) 할 수 있겠지만, 휘리 노이에스는 폴라리스 랩소디에 소설적인 화려함을 부여했고, 파킨슨 신부는 이영도 작품에서 언제나 보이는 ‘작가의 대변인’ 노릇을 톡톡히 했다. 그리고 조금 뒤에 언급하겠지만, 휘리 노이에스와 파킨슨 신부에 관련된 커다란 공통점은 그들이 ‘사랑’에 대해 깨달았으며 유일한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적인 기능을 보완해준다는 면에서는 노스윈드 함대에 속해있는 일곱 함장들 역시 손꼽을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인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거대한 줄기에서 보았을 때 프롭(prop; 배경장치, 소품)에 가까우니 그들은 제외하겠다.

   인간에 대한 회의

   어떠한 담론을 펴낼 때에 화자는 그에 대한 결론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폴라리스 랩소디]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보이는 결론(에 가까운 느낌)은 안타깝게도 상당히 회의적이다.
   실제로 [드래곤 라자] 이래로 계속해서 표현되어 온 작가 이영도의 결론은 대부분이 인간에 대한 회의로 귀결된다. ‘어차피’라던가 ‘해봤자’라던가 ‘결국은’이라는 뜻이 깊이 담겨있는 것이다. [드래곤 라자]나 [퓨처 워커]의 마지막에서도 그랬듯이, 결국은 어리석은 대다수의 인간을 어찌할 도리가 없기에 진실은 숨겨지거나 도망가거나 죽거나 멀리 떠나게 되며, [폴라리스 랩소디]에선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폴라리스는 망했고, 휘리 노이에스는 죽었으며, 하이마스터들은 복수를 선택했다. 그것은 지울 수 없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작가의 회한이나 한탄처럼도 들린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것이 ‘인간’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작가 이영도는 인간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고찰한 적도 없고, 다뤄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가 환타지를 쓰기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이종족’은 결국 따져보면 인간의 다른 일면 혹은 인간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드러난 안티테제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 자신이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뛰어난 분석력만을 지니고 있지 상상력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도 느끼게 한다. 더욱이 그것은 [폴라리스 랩소디]에서 극한적으로 드러나있다. 하이마스터를 제외한 이종족이 등장하지 않고, 철저하게 시점은 인간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이 점에 있어서는,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어느 정도 극복이 되었다는 의견도 있는데, 읽어보지 못했으므로 자세한 코멘트는 피하도록 하겠다).
   즉, [폴라리스 랩소디]에서는 “산다”의 반대가 “죽는다”가 아니라 “살지 않는다”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지만(일반 사람들은 그것조차도 보통 생각하지 못하지만), 또한 그것이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상호 관계에 의해 정해진다고(심지어 ‘자유’ 조차도 독립된 기호가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 이상은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산다”도 “죽는다”도 “살지 않는다”도 실은 전부 논리적인 결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논리적 결론이 아닌 전혀 다른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은 독자로서의 욕심일까?

   정반합―――그래도~ 의 결론

   그러나, 그러한 회의 가운데에서도 계속해서 [폴라리스 랩소디]를 ‘좋은 책’으로 남게 하는 것은 역시 주인공 없는 이 소설의 두 주인공 덕이 아닌가 한다. 바로 휘리 노이에스와 파킨슨 신부다. 특히나, 본 필자는 파킨슨 신부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드래곤 라자에서의 후치의 역할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자유와 복수가 [폴라리스 랩소디]에서의 드러난 화두라면, 사랑은 그 속에 숨겨져있는 화두이다. 물론 여기에서의 사랑은 복수나 자유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단어뜻으로 받아들였다간 큰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여기에서의 사랑은 ‘보편적인 선’이며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위치에 있는 것’이며 ‘있는 것을 있다고 받아들임’ 이며 ‘존재가 있음에 대한 믿음’ 이며, ‘복수도 자유도 아닌 제 3의 status’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폴라리스 랩소디]에서의 테제가 복수, 안티테제가 자유라면 진테제가 바로 사랑이다.
   복수는 상대방이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 status이며, 반대로 자유는 상대방이 있어서는 불가능한 status이다(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즉 모든 것의 방치는 상대방조차도 풀어주어야 한다는 폴라리스 내의 논리에 의해). 그에 비해 사랑은, 상대방의 존재 유무에 아무런 관련도 되지 않는다. 있는 것이 있는 그대로 없으면 없는 그대로.
   휘리 노이에스가 그러한 사랑의 파괴력(이 역시 선입관이 없는 단어로서)을 보여주는 일례였다면 파킨슨 신부는 치유력, 혹은 희망없는 세계에 제시될 수 있는 인간의 희망으로서의 존재를 보여주고 있다.
   “그저, 사랑할 수 있을까요?”라는 율리아나 공주의 질문에 “저는 그러고자 합니다”라는 파킨슨 신부의 대답은 폴라리스에서의 사랑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테제인 복수도 안티 테제인 자유도 I와 You의 존재가 없이는 성립할 수 없으나, 진 테제인 사랑은 그저 I만으로 족하다. 그것은 어찌보면 데스필드의 사상과도 유사할지 모르나, 데스필드의 I와 You 는 완전한 자유로 있기 위해 I와 You의 구분이 필요하기 때문에 규정지어 진 것이라면, 사랑에는 오로지 I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것은 방치하기 때문도 아니고 속박하기 때문도 아닌, 전혀 다른 세상, 다른 차원의 status이기도 하다.
   오스발이 복수의 세상에 대해 언급할 때, 키 드레이번은 언급하지만 파킨슨 신부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파킨슨 신부가 이미 테제와 안티 테제의 관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키 드레이번은 테제였고, 오스발은 그에 대한 안티 테제이지만, 진정한 결론은 언제나 진 테제가 아니던가?
   ‘그저’ 사랑한다는 말이 지닌 의미는 매우 크다. 그러므로, 매우 큰 회의의 결론을 맞이하는 [폴라리스 랩소디]라고 할지라도, 또한 이제부터의 세상이 부조리하게 될 운명이라 할지라도(키가 이기던 오스발이 이기던 간에) 파킨슨 신부는 ‘그저’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마지막의 임팩트한 장면에 놓지 않고 물흘러가듯 슬그머니 사라지게 하는 것이 역시 작가의 사기극을 완벽하게 하기 위한 장치였다고 생각한다. 사기극은 어디까지나 사기극으로 끝나야 하는 것이니까.

   그가 쓴 랩소디

   랩소디란 광시곡을 일컫는다. 광시곡이란 되는 대로 미친 듯이 쳐내려가는―――형식과 기준에 있어서 자유로운 피아노의 변주곡을 말한다. 그러나 [폴라리스 랩소디]는 그 세계의 혼란상에 비해 완벽할 정도의 정돈된 내용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소재가 인간이라는 테제와 그에 대한 안티 테제에서 그쳤다면, 최소한 주제만큼은 완벽한 정반합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완벽성, 혹은 계획성은 이영도씨의 글에서 언제나 엿보이는 것지만, [폴라리스 랩소디]에 와서는 거의 정점을 이루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그에 의한 반작용인지 인물의 매력은 예전의 시리즈에 비해 반감되었다고 느끼는 건 필자만의 착각일까.
   키 드레이번에 대해 “그는 인간입니다”라고 말하는 오스발. 하지만 그것은 a man이 아니라 the man이었음이 분명하다. 독자에게 자신의 시점을 강요하지 않는 것은 미덕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분명히 인간에 대한 고찰은 the man이 아닌 a man으로부터 일어나야 보편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폴라리스는 그 the man의 회오리속에 모든 것을 끌어넣고 있으니, “보지 말아도 돼. 따라오지 않아도 돼. 넌 자유고 넌 복수니까” 라는 (독자에 대한) 작가의 말은 얄미운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굳이 바래보자면 (이미 눈물을 마시는 새가 나온 시점에서 의미없는 바램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추후 작품이 이러한 얄미움에서 벗어나 보다 큰 관용을 손에 넣기를 기원한다.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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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venant 03.11.05 23:28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첫 줄에 나오는 말 '이 글은 필자의 매우 개인적인~' 이런 말은 안 쓰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모든 감상문이 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작품을 바라보는 거지, 읽는 사람을 다 만족시키는 보편적인 감상문이 있다는 말 들어보셨나요? ^_^ 오히려 이런 말은 '나는 내 주장에 별로 자신이 없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에 그리 좋지 않아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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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루토 03.11.10 15:21 댓글 수정 삭제
    내 주장에 자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상당히 편파적인 시각에서 쓰여진 글이므로 이걸 보편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모든 감상문이 개인적이라고 하더라도 일반적이다 아니다의 차이는 분명히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경고'를 한 겁니다. (자기 주장에 자신이 없는 사람이라면 아마 '경고'를 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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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rwin 04.09.09 08:42 댓글 수정 삭제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약간 공감하기 힘든 부분이 있어서...좀 정리해보았는데 나중에라도 오셔서 의견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corwin.egloos.com/307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