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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고리골

2003.06.26 23:0006.26





essensia78@hotmail.com필자는 성별이 여자이고 나이는 20대 중반이다. 결코 규칙적이거나 성실하지는 않았지만 이전에 통신망에 판타지 장편 소설을 연재하였고, 약소한 동호회에서 활동을 하다가 현재는 출판사에 취직해서 초짜 편집자로 각종 원고들에 손을 대어 망치고 있다. 왜 이렇게 신상 정보를 늘어놓느냐고? 현대는 진리가 실종된 시대다. 진리는 상대적이고 보는 관점에 따라서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음이 현대의 진리이다. 그러므로 요즈음 비평에 임하는 가장 진지하고 솔직한 것은 자신의 입장과 보는 시점을 밝히고 그 안에서밖에 볼 수 없었음을 먼저 고한 후에 평하는 것이라 한다. 즉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는 한때 아마추어 판타지 소설가였으며 현재는 편집자로서 판타지 소설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된 한 여자가 본 고리골이란 작품과, 고리골이란 작품을 통해 보이는 여성 작가가 쓴 판타지의 특성에 대한 고찰이다.

사라져 가는 신들의 세계를 노래한 소설
고리골은 출판사 북하우스에서 주최하는 제 3회 한국 판타지 문학상(현재는 와이즈진 문학상으로 바뀌었다) 대상 수상작으로, 중국 명나라 때를 배경으로 했으며 도교의 신화를 근간으로 한 매우 색다른 작품이다. 고리골이란 제목을 한글로만 보면 무슨 괴기스러운 마을인가 보다 생각부터 들지만, 한자를 풀어 보면 '오래된 이무기의 뼈'라는 매력적인 뜻이 숨어 있다. 사실 제목을 풀어서 썼으면 더 눈길을 끌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일단 이 단락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므로 넘어가고. 고리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간에게서 잊혀져 가기 때문에 멸망의 위기에 놓인 곤륜의 천신들은 자기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인간과 소통하게 해 줄 무사의 종족 고리골을 원하고, 지상의 제왕이자 천제의 아들인 동악대제는 본래는 자기 것이었던 지하 세계를 넘기는 언약이 적힌 돌판을 찾아다닌다. 이 시기에 고리골의 후손이자 뛰어난 무사인 원제강은 자신의 운명과 천랑호에 가라앉아 있다는 잃어버린 서판을 찾아 도홍경 정백 선생, 친우 진진부와 함께 길을 떠난다. 천신에 대적하는 동악대제의 행동은 신들 사이에 전쟁으로 치닫게 만들고, 알 수 없는 자의 공격을 계속해서 받으면서 제강은 신들의 세계가 사라지지 않게 할 힘이 있다는 그 서판을 찾아 천랑호까지 도달한다. 그리고 고리골이 멸망했던 이유와 서판의 정체, 제강의 본 모습이 마침내 드러난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서양의 신화들과 달리, 인간도 신도 그저 언젠가부터 존재하기 시작했으며 오히려 인간의 믿음이 신을 만들고 유지시켜 준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사고를 투영한 소설이다. 필자는 서양 쪽에 더 익숙한 사람이라서 오히려 이런 면에서 이국적인 맛을 느꼈지만 말이다. 천제, 서왕모, 태산, 성황당, 염라대왕, 신선……. 우리나라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옛날 이야기들로 친숙한 이런 개념들과, 잘 알 수 없는 마이너한 도교의 귀신, 신, 반신들이 골고루 등장한다. 이는 작가가 중국사를 제대로 전공한, 시쳇말로 '전문가'이기 때문에, 그리고 도교가 그 나름대로 체계화된 신화를 가지고 있기에 가능하다. 적어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원래는 신화적 괴물이었다가 게임적 데이터로 바뀐 것을, 원래부터 그랬다고 믿으면서 자랑스럽게 지식을 늘어놓는 꼴을 볼 일은 없다. 그 반대로 원래 신과 귀신에 얽힌 이야기들을 잘 살리면서 하나의 세계로 얽어 놓은 솜씨가 뛰어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장르와 소설 사이에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소설은 잘 쓴 소설이다. 대사에 너무 느낌표가 많아서 거슬리긴 하지만 대체로 깨끗한 문장을 구사하고 있으며, 이야기 속에 담긴 주제나 철학이 명확하다. 주제나 철학이 명확하기 때문에 인물들이 내뱉는 대사, 묘사 중에 의미심장하며 주제와 연결될 것들이 많고, 단순히 격언 같은 부분에는 줄을 치면서 읽는 사람이라면 꽤 줄 칠 거리를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의미심장한 말들을 내뱉다 보면 모든 인물들이 다 철학자에 작가의 꼭두각시가 될 위험이 높은데, 그런 위험도 제법 잘 피해 가고 있다. 도홍경 정백 선생과 진진부가 대화를 한다면 어디까지나 선생인 도홍경이 말을 하고 진진부가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화를 낸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때로 자신만의 진리를 말하고, 책으로 배운 진리보다 그런 것이 빛나듯이, 조연도 그렇게 꼭 알맞을 때에 진리의 한 조각을 내뱉는다.
그러면서도 매사 진지하고 재미없는 주제학습식 소설은 아니다. 오히려 필자는 이색적인 소재에 비해서 인물형과 이야기 구조는 상당히 패턴을 따르고 있어 놀랐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구태의연하다는 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패턴을 따르고 있다는 말은 그만큼 친숙한 이야기 구조를 선택했다는 것이고 독자의 공감을 얻기 쉽다는 말이기도 하다. 냉철하고 사람을 끄는 기이한 매력을 가지고 있으며 상처를 많이 받은 제강과 활달하고 되는 대로 사는 것 같고 신을 믿지 않는 서글서글한 청년 진진부, 모든 것을 아는 것 같고 얄미울 정도로 깔끔한 자태를 유지하지만 몹시 아픈 과거를 숨기고 있는 정백 선생 도홍경, 제왕으로 태어났으며 고압적이고 제멋대로지만 그만 한 카리스마와 위엄, 자비를 갖춘 동악대제, 자신보다 뛰어난 무사는 없어야 한다며 열등감과 복수심에 불타는 흑휘도, 그리고 그 외에도 충성과 의리, 사랑에 목숨을 건 많은 반신, 천신, 인간들과, 본디 악하지는 않았지만 약하기 때문에 걸림돌이 되거나 주인공 일행을 해코지하게 되는 그야말로 보통 인간들. 모두 우리가 장르 소설에서 흔히 접하는 인간형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친숙하면서도, 너무 천박하지 않게 적당히 품격을 지키면서 성격을 드러내는 작가의 솜씨 덕에 그럭저럭 독창성도 획득하고 있다.
다시 한번 결론지어 말하자면, 고리골은 소재의 참신성, 서술의 정확성과 미감, 주제의 명확함, 인물의 형상화 등 어느 면에서도 빠지지 않으며 모든 요소가 조화롭게 맞물려 돌아가는 소설이다.

그러나 눈에 띄지 않는 이유는?
처음 이 작품을 접했을 당시에는 어째서 이렇게 잘 쓴 소설이 독자의 외면을 받고 있는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잘 썼지만 주제학습식으로 어려운 이야기만 늘어놓는 소설이야 그렇다 치지만 그것도 아니고. 빠지는 데가 없는 데다가 다 읽고 나면 가슴을 벅차게 만들어 주는, 그야말로 깔끔하게 마무리를 하는 소설이 어째서 외면을 받는가. 게다가 필자는, 시작은 재미있는 소설이 많지만 마무리를 잘하는 소설은 (이것은 만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 드물며, 마무리가 좋아야만 진정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터라 그 안타까움이 더했다. 그래서 표지 탓을 했다. 고리골이란 제목도 탓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오래된 이무기의 뼈라는 원래의 뜻보다는 그저 괴기스러운 마을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출판 편집자로 약간이나마 일한 지금은, 표지를 바꾸고 제목을 바꾸고 마케팅을 늘렸어도 아마도 이 작품은 베스트셀러가 되지는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지금보다 좀더 많은 사람이 알고, 더 많은 사람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았을 테지만 일반 독자에게 크게 어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서 곰곰히 고찰했을 때 연결된 생각은, 고리골이 잘 쓴 여성적 판타지 소설의 전형을 보여 주며, 일반 독자에게 어필하지 못하는 것은 고리골이란 작품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적 판타지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부류들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일단 필자가 여기에서 여성적 판타지 소설이라고 한 작품들의 정의를 잠시 밝히고 넘어가기로 하자. 일단 당연하게도 여성 작가가 쓴 소설을 말한다. 서술에서는 평균적인 남성 작가들보다 유려한 편이다. 이야기 진행은 대개 매끄럽다. 인물들에게는 숨겨진 사연이 많고, 사연은 사연을 낳고 인연은 인연을 낳아서 어느 하나도 소홀히할 수 없다. 주제의 스케일이 작지는 않지만 실질적으로 주인공이 일을 하거나 하지 않는 동기는 개인적인 경우가 많다. 개인적인 동기에서 으뜸은 사랑이다. 세상 모든 이야기의 핵심은 사랑, 로맨스이지만 여성 작가가 쓴 작품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앞부분을 읽을 때에는 무언가 암시만 주고 지나가기 때문에 좀이 쑤시고 간지럽고 심지어 재미도 없지만, 그래도 잘 마무리한 작품을 읽고 나면 끊기지 않고 얽힌 거미줄 레이스를 본 듯 감탄하게 된다. 그래서 끝까지 읽어나가는 데에 익숙한 독자, 영어로 소위 "Advanced Reader"라고 할 만한 사람들 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므로 이 특징들은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단점이기도 하다.
여성적 판타지 소설을 소개할 때 필자가 가장 고심하는 부분은 줄거리 요약이다. 주제가 명확하고 인물도 재미있으니까 그 이야기는 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줄거리를 요약할 때 언제나 끙끙댄다. 거미줄처럼 얽힌 구조이기 때문에 이것도 빼면 안 될 것 같고, 저것도 빼면 안 될 것 같고……. 그렇게 망설이면서 하나하나 넣다 보면 줄거리는 엄청나게 길어지고……. 그것은 이야기 전체가 유기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말이지만, 또한 중심 줄기가 약하다는 말, 스토리에서 중요한 사항과 안 중요한 사항 사이의 우열이 크지 않다는 말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어드밴스드 리더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꽤 중요한 사항이다. 일반 독자란 기본적으로 소비자다. 필자나 이 웹진을 들르는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일반 독자들이 보기에 책은 읽으면 삶에 보탬이 되고 교양을 살찌우지만 안 읽어도 먹고 사는 데에 그리 지장은 없다. 책이란 기본적으로 기호품이며 그중에서도 문학은 더욱 그렇고 그 문학 내에서도 장르 문학은 더욱더 그렇다. 소설을 읽지 않았을 때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물론 누군가는 많다고 하면서 이유를 열거할 것이다. 그러나 불이익이 도대체 뭐냐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이유일 가능성이 높다.) 심성이 메마른다고? 그렇다면 메마르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읽어 주면 되지. 그런데 무엇을 읽을까, 저 많은 책 중에서? 다시 말하지만 독자는 소비자다. 소비자란 최저비용으로 최고효율을 내길 원한다. 그래서 생산자 측에서는 자기네 제품이 그렇다는 환상을 불러일으키고자 노력하며 그것이 마케팅이고 광고이다. 책으로 돌아가자면, 세상에는 참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다. 문학이란, 이야기 껍질을 들춰내서 하나하나 해체하고 나면 다 거기서 거기다. 그 껍질들이 중요한 게 문학이기 때문에 이것은 문학에 접근하는 올바른 방식이 아니라는 것은 필자도 안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은 모른다. 또는 알아도 효율을 선택한다. 그렇다면 이 하고많은 거기서 거기인 것들 중에서 선택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을 드러내는 굵은 선, 누군가 소개해달라고 했을 때 자신있게 단 하나 내세울 게 있는 작품, 모든 것을 다 읽고 났을 때 단 한 마디 명제로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는 그 '무언가'인 것이다. 책의 홍수 속에서, 또한 결국은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남을, 빛나는 한 조각. 여성적 판타지에 부족한 것은 빛나는 한 조각이 아니라 그 조각을 부각시키는 기술, 그리고 그 조각을 위해서 다른 것을 포기하는 대범함이 아닐까.



여기까지 이야기가 흘러오면 이것은 여성적 판타지의 문제점이 아니라 모든 작품에 필자가 바라는 것이 되어 버린다. 사실 그렇다. 필자는 고리골을 매개로 여성적 판타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서 이야기, 소설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이야기로 자기도 모르게 범위를 넓혀 버렸다. 솔직히 말해서 이 이야기에 동의하지 못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고리골에서 나타난 문제점은 단순히 그것이 여성적 판타지이기 때문만은 아니고 연재작이었다는 특수한 상황 등에도 많이 기대고 있다. 즉 어떤 작품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다각도로 그 작품의 성격, 작가, 연재될 상황 등등을 살펴야 하는데 필자는 이 글에서 그중 많은 것을 무시했다. 여성적 판타지에 대한 정의에서도 많은 것을 폭력적으로 가지쳤다. 그렇게 해야만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전달이 되었을까? 이렇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실천하는 것은 언제나 다른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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