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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전달자
로이스 로리, 장은수 옮김, 비룡소, 2007년 5월


세뇰 (garleng@naver.com)



1. 들어가는 글

 작품마다 디테일의 차이는 있지만 디스토피아를 다룬 작품은 대체로 그것이 억압적인 국가 정부가 되었건, 탐욕스런 대기업이 되었건, 광신적인 종교 집단이 되었건, 해당 사회의 권력 정점에 있는 소수 지배 계층의 기득권을 유지보수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피폐하고 암울한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그것은 개개인의 불행 수준을 넘어선 근본적인 사회 체제 전반의 문제라는 전제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 체제와 불화하는 개인의 이야기가 디스토피아 장르의 서사 핵심이다.
 토머스 모어의 에세이 『유토피아』에서 처음 제시된 유토피아라는 단어의 의미가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점에 주목하자면 그 반대 개념인 디스토피아는 ‘현존하는 모든 곳’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예프게니 자마친, 올더스 헉슬리, 조지 오웰의 세 명 이래로 수많은 작가들이 저마다의 작품 속에서 이러한 디스토피아적 세상을 그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 사회에 대한 비판, 풍자, 지적 유희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해왔다.   

 그러나 그러한 디스토피아 장르는 그것이 문학이 되었건 영상 매체가 되었건 벗어나기 힘든 태생 상의 한계가 있다. 예외가 없지는 않지만 그러한 작품들 중 대부분이 영미권과 유럽으로 대표되는 서방 세계에서 창작되었다는 점이 그것이다. 냉전 기간 동안 서방 세계는 구 소련을 필두로 한 동구권과 대립하면서 스스로가 중시해 왔다고 자임해 온 ‘개인의 자유’를 동구권이 중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집단’ 내지 ‘사회’라는 가치와 대립하는 요소로 규정하고서 후자를 ‘나쁜 것’으로 등식화하는데 익숙해져 왔으며, 창작자들 역시 디스토피아 장르의 작품 속에서 주인공과 불화하는 암울한 세상의 모델을 주로 이전에 싸운 바 있는 나치 독일이나 라이벌인 소련의 그것에서 차용해 오곤 했다.
 물론 파시즘과 인종주의의 광기가 범람하던 나치 독일이나 혹독한 감시와 억압이 일상화되어 있던 스탈린주의 소련은 충분히 디스토피아 세상의 모델이 될 만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실이 서방 세계를 그와는 대비되는 빛과 정의의 이상향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로이스 로리의 이 작품, 『기억 전달자』에서도 그러한 한계는 공히 드러난다. 2.에서는, 이 작품 내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별 요소들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2. 작품에 관해

 1) 가정
 이 작품의 주인공, 조너스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서는 결혼 제도가 없으며 아이도 일종의 공동 양육 방식을 통해 기른다.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개념 자체는 존재하며 양자는 배우자로서 현실의 그것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부부 간에 성관계를 갖는 일은 없으며 가정 자체도 혈연 기반 공동체가 아니다.
 별도로 존재하는 산모 직종에 속한 여자들이 3년 간 일하며 아기를 낳고, 보육사 직종을 맡고 있는 성인들이 아기들을 관리하며, 사회의 정치적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는 원로들로 구성된 ‘위원회’의 가족계획에 따라 부부에게 양육해야 할 아이가 할당된다(현재는 부모 한 쌍, 아이 2명이 표준 가정 기준이다). 생일 개념도 없고, 매 해 12월마다 열리는 기념식에서 일괄적으로 모든 아이들은 사회의 일원이 되어감을 의미하는 선물을 하나 받게 되어 있다(물론 선물도 모두 같은 것이다). 각 가정에서는 매일 저녁마다 그날 받은 느낌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고백의식이라는 시간이 있으며, 이를 통해 서로에 대한 신뢰와 유대의식을 키운다.
 작중에서 이러한 가정 구조는, 그러한 신뢰와 유대의식 역시 어디까지나 공적인 관계에 바탕을 둔 일종의 사무적인 협력의 일환일 뿐 개인적인 수준의 공감이나 애정은 거세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특성이 가장 강하게 부각되는 장면이, 조너스가 최고 원로이며 위원회의 자문역인 기억 보유자에게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배우고 난 뒤 아버지에게 자신을 사랑하냐고 묻는 장면이다. 아버지는 조너스에게 ‘너는 모두의 아이이며, 사랑이란 개념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적절한 질문은 자신을 사랑하냐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해서 즐겁냐, 또는 자신의 성과에 자부심을 느끼냐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장면은 얼핏 보기에는 사회의 비인간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작가의 의도 역시 그러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반대급부로 보자면 이러한 관계는 혈연에 기반한 배타적 의식이 없는, 평등하고 모순 없는 존중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작중에서 조너스의 부모는, 비록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애정’을 나누는 관계는 아니지만 대등한 파트너로서 서로 존중하며 협력하고 있고, 아이들에게도 거짓말을 하거나 권위로서 억누르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1).

 이러한 가정 내 관계에서는, 개인적인 수준에서의 애정을 비롯한 일체의 강한 감정이 배제되어 있다. 요는,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건 ‘부정적’인 것이건 ‘일체의 강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들로 구성된 사회에서는 다른 가정의 자녀와 자기 자녀를 비교하며 우열을 따질 일도 없고, ‘우월한 혈통’에 집착할 일도 없고, 가문과 혈연 내에서 한정된 부와 권력을 독점해 승계할 일도 없다. 자신과 혈연 상으로는 전혀 관계가 없는 타인의 아이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아낌과 보살핌을 주고받는 이러한 관계는, 부모가 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자신에게서 비롯한 소유물 취급하거나 자신의 좌절된 욕구를 대리충족하기 위한 물신의 대상으로 여길 여지가 적다는 측면에서 봤을 때, 꽤나 매력적인 가족상이다(*2). 초기 사회주의 사상에서 드러나는 공동 양육 체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물론 독자 입장에서는 아이 양육을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위원회가 정한 규칙 때문에 마지못해 아이를 입양해 키울 뿐 별 관심도 쏟지 않고 고백의식 시간 역시 대충 때워 버리는 부모도 있을 테고, 의미 없는 혈기와 반발심 때문에 부모에게 반항하고 또래들을 괴롭히는 아이도 없을 리가 만무하다고 생각되지만 일단 작중에서는 그런 묘사가 없으니 일단 그것이 작중 세상의 진실이라고 가정한다.                 
    
 2) 직업
 모든 아이들은 같은 학교에서 사회생활에 필요한 동일한 규율을 익히며(지역마다 규율의 세부 사항이 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적어도 일정 지역 내에서 자라나는 모두는 같은 교육을 받는다), 언제나 함께 행동하고 함께 논다. 학교가 끝나면 다양한 봉사활동을 통해 향후 진로를 탐색하고, 위원회를 구성하는 원로들이 그간 오락 시간과 자원봉사 시간 동안 곁에서 면밀히 관찰한 바를 토대로 그 아이에게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직업을 결정해 12살 기념식에서 할당한다. 조너스가 곧 다가올 12살 기념식에서 자신이 무슨 직업을 할당받을지 기대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장면이 이 작품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직업 선택의 자유가 없고 원로들이 정해준 일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얼핏 보기에는 이 사회가 끔찍하게 압제적으로 보이지만 텍스트를 꼼꼼히 읽어보면 그렇지만도 않다는 게 드러난다.
 현실에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그걸로 먹고 사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원하는 일이 전문적인 고도의 지식을 요구하거나, 너무 수입이 적거나, 사회적 인식이 나쁘다거나, 애초에 사회적 수요가 부족해서 자리가 나지 않는다거나 해서 결국 그 일은 취미의 일환이 되고 다른 일을 생업으로 삼는 경우가 절대적으로 많다. 한 발 더 나아가, 이른바 ‘고급 직종’의 종사자들끼리 인맥 및 학맥이나 종교, 지역의식 등 다양한 기준에 기반한 배타적인 커넥션을 구성해 능력과 열의가 모두 있다 해도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의 취업과 승진을 배제하고 그 기준에 부합하는 무능한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히기도 한다. 그 모든 난관을 뚫고 원하는 직종에 종사하게 되더라도, 경영자가 뛰어난 역량의 소유자를 자기 회사에 묶어 놓기 위해 계약서에 장난질을 하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같은 직종 종사자들 간에도 임금이나 휴가 가능 일수 등의 대우에 차등을 둠으로써 실질적으로 선택권을 무효화거나, 사실 별 의미 없는 거짓 선택권을 주고서 자신은 강요한 적 없다고 합리화하기도 한다.

 구 소련에서는, ‘실업의 불안에 떨어야 하는 서방의 자본주의 체제와는 달리, 소련에서는 모든 인민들이 노동권을 누릴 수 있다’는 선전을 하기 위해 공장에서 작업조를 나눠 한 조는 필요한 정도 이상으로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조립하는 일을 하고 다른 한 조는 그 중 일부를 다시 분해하는 일을 함으로써 완전 고용을 달성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기보다는 구 소련 경제 체제의 교조성과 경직성, 비효율성을 풍자하기 위한 블랙 유머라고 보는 쪽이 자연스럽고, 볼셰비키 치하에서의 소련 사회가 그만큼 기괴하고 불합리했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서방식 자본주의 하에서 “너는 범죄가 아닌 이상 원하는 무슨 직업이든 가질 자유가 있다(하지만 그로 인해 형편없는 박봉과 부실한 사회 복지와 연속되는 야근과 불안한 미래와 상위 거래처의 갑질과 오만 진상 고객들의 클레임에 시달리는 건 전부 네 자유에 따르는 정당한 책임이며 그걸 감수하기 싫다면 사회 탓 하지 말고 그런 제한이 없거나 적은 몇몇 직업을 갖기 위해 노력해라)”고 하는 말 역시도 그에 못지않게 기만적이다.
 직업 선택의 자유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공공의 필요가 인정되는 이상 어떤 직업에 종사하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경제적 여유와 인격적 대우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작중에서 묘사되는 사회는 평생의 직업을 위원회가 일방적으로 결정해 주며 그 자신의 의사는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는 거지, 그 두 가지 조건의 최소 기준은 확실히 만족하고 있다(기본적 의식주는 모두 같은 것을 사회에서 제공해주고, 조너스의 가정환경이나 주변 친구들과의 관계로 미뤄봤을 때 인간관계에 있어서 일방적인 모욕이나 폭력, 가학도 없거나 매우 적을 것으로 보인다).

 작중 서술로는 아이의 재능과 적성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위원회의 원로들이며, 모든 제반사항을 고려해서 신중하게 직업을 할당한다. 이들은 사회의 정치 엘리트 집단으로서, 전원이 사리사욕을 초월해서 사회 전체의 안전과 질서, 공공성을 위해 그러한 임무를 수행한다.
 원로들이 권력을 남용하지 않는지, 파벌을 만들어서는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공익적이고 정당한 명분을 내세워 자기들끼리 대립하지는 않는지, 대중들을 우민화시키지 않는지, 원로들끼리 은밀하게 일반 대중들에게는 금지 내지 존재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특권(음악을 듣거나, 반려 동물을 키우거나, 서로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멱살을 잡고 싸우는 등)을 누리지는 않는지 독자로서는 의구심이 들지만, 일단 작중 서술에서는 그를 의심할 만한 서술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것이 객관적 진실이라고 가정한다.
  
 3) 죽음
 작중에서는 ‘늘 같음 상태(Sameness)'라고 표현되는, 공동체의 질서와 안정, 예측 가능성을 위해 결국 일체의 개인적인 감정으로 귀결되는 모든 혼란스런 무작위 변수를 제거한 결과물이 조너스의 사회다. 이 정도는 매우 극단적인 것이라, 사람들은 색깔도 볼 수 없고 음악도 존재하지 않고, 코끼리나 토끼 같은 평범한 동물도 존재하지 않고, 날씨도 언제나 맑고, 심지어 사고가 생길 수 있는 언덕이나 절벽 같은 지형조차 없다. 자동차 같은 위험한 물건도 없고, 모두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이 사회에서는 이토록, 거의 맹목적이기까지 한 집착으로 감정을 통제하려고 한다.
 인간의 감정 중 가장 강하고 원초적인 것이 바로 ‘공포’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한 공포가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그러나 이 작품 속의 사회에서는 상당히 독특하면서도 과격한 방식으로 그를 최소화했다. 장애나 체중 미달 등의 문제가 있어 공동체의 일원으로 잘 성장할 가능성이 낮은 아기, 3번 이상 공동체의 규율을 깬 범죄자,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노인들에 대해 일괄적으로 내리는 ‘임무 해제’ 조치가 바로 그것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안락사라고 할 수 있는데, 위원회의 인구 정책에 의거한 영아에 대한 임무 해제나 범죄자에 대한 처벌적 성격의 임무 해제는 비밀리에 행해지지만 세 번째 경우는 좀 다르다.
 작중의 묘사에 의하면 이러한 방식의 임무 해제 전에, 그는 공동체를 위해 헌신해 온 세월들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공개적인 감사와 축복을 받는 시간을 가진다. 그를 통해 임무 해제는 나쁜 게 아니며 행복한 삶의 당연한 귀결이라는 인식을 대중과 그 자신에게 심어주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 자체를 완전히 박탈하지는 못해서, 작중인물들은 임무 해제를 여전히 두려워하긴 하지만 현실의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느끼는 것만큼은 아니다.

 작중에서 묘사되는, 원로들에 의해 주도되고 대중들이 별 불만 없이 충실히 수행하는 거의 완전한 상호 감시 및 통제가 현실적으로 가능하기 어렵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회의를 차지하고 보자면 이러한 임무 해제 절차는 얼핏 보자면 나치의 T-4 프로그램(*3)을 연상케 하는, 디스토피아 세계관에 걸맞는 전체주의적 만행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주목해야 할 요소는 지배계층인 원로들을 포함해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삶의 마지막을 맞이하며,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아낌없는 감사와 인정 속에서 육체적으로 평온하고 정신도 맑은 상태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즉, 이 사회는 그 누구도 곁에서 보살피거나 지켜보는 사람 없이 홀로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유산 상속 등의 문제로 인한 친족 간의 갈등과 소송도, 자신의 사후 남은 가족들이 지불해야 할 병원비 걱정도, 진통제로 인해 혼탁한 정신도, 생의 마지막 순간 그 누구도 자신을 지켜봐주지 않는다는 고독도 없다. 가장 존경받는 원로도 은근히 열등하다고 취급받는 육체노동자도 똑같이 사람들의 감사와 인정을 받으며 임무 해제를 거쳐 죽음을 맞이한다.
 이런 방식으로 죽음의 숙명성과 불가피성은 공공의 장에서 만인에게 드러나고, 그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과 자신 주변의 몇몇 친인척들과만 개인적인 수준의 감정을 주고받으며 깊은 관계를 맺고 그 바깥의 타인에 대해서는 테두리를 쳐 버리는 대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공통된 보편적 유대의식을 얻을 수 있다.


3. 나오는 글

 로이스 로리의 이 작품, 『기억 전달자』는 결말이 다소 불명확하긴 하지만 결국 조너스는 아기 가브리엘과 함께 자신의 사회에서 탈출했고 뒤에 남겨진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간 기억 보유자와 전달자를 통해 일자전승으로 이어져 나가던 ‘기억(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지난 시대와 역사, 문명에 대한 총체적 지식)’과 그간 억눌려 온 감정을 공유하며 변화하게 될 것임을, 그리고 새 기억 보유자가 된 조너스와 기억 전달자가 된 전 기억 보유자 간의 대화를 통해 그 변화가 엄청난 혼란과 희생을 동반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올바른 방향임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읽는 입장에서는 그러한 작가의 관점에 쉽게 동의하기가 어렵다. 일단 이 작품은, 납득하기 어려운 기본 전제나 설정이 너무 많다. 좀 더 구체적으로 부연하자면, 작중에서 묘사되는 형식의 획일화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다. 이런 세상을 독자가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사실 조너스의 사회는 사회학·심리학적 실험을 위해 외부 세상과 폐쇄되어 있는 일종의 바이오스피어이고 이러한 획일화도 외부의 실험자들이 의도적으로 조성한 결과라는 뒷설정 정도는 있어야 한다. 그러면 날씨 변화도 없고 언덕이나 절벽 같은 지형도 없고 동물도 없다는 자연계의 순환을 깡그리 무시한 비현실적 요소들을 정당화할 수 있다(그렇게 가정해도 여전히 너무 무리한 설정이라는 감은 있다).
 좋은 작품은 얼핏 보기엔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요소들도 작품 내에서 그런 요소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존재하는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되어 있거나, 아니면 작품의 성립을 위한 이야기적 장치의 일환이라고 전제한 뒤 그러한 요소들을 가능한 최소화한 상태에서 그 위에 개연성을 충실하게 쌓아 올린다. 아동 소설에서는 너무 상세한 설명을 할 수 없고 경우에 따라선 설명할 필요도 없다는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이 작품의 핵심 주제가 ‘감정과 기억이 최대한 억제 내지 박탈된 평온한 세상이 과연 옳은 세상인가’라는 부분에 있는 이상 그 주제에 관련된 조너스의 시선(즉, 독자가 같은 선상에서 일체화해 보게 되는 주인공의 눈높이)은 보다 객관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묘사되는 조너스의 사회는 평등하다기보다는 획일적이라는 표현이 훨씬 들어맞는 세상이며, 그러한 가치판단의 문제를 떠나 ‘과연 이러한 사회가 제대로 작동할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너무 많다. 결과적으로 읽는 입장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러한 주제의식이 흐트러지고 한 발 더 나아가 작품 내에서 묘사되는 세상의 모습을 신뢰하기 어렵게 만든다.

 더욱 아쉬운 점은, 2.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작중에서는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이 사회의 몇몇 특성들이, 작품 밖의 현실에서 수없이 발생하는 불의와 부조리, 불평등에 대한 즉각적인 대안은 될 수 없지만 그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고쳐가기 위한 충분히 유의미한 성찰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밑바탕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너스의 시선에서는 그저 ‘이 세상의 뒤틀림’으로만 묘사된다는 것이다. 이 작품 내에서 묘사되는 세상은 분명 잘못되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의 최고 지도층인 원로들 자신들에게마저 예외 없이 적용되는 일종의 집단적 우민화가 시행되고 있으며 어떤 변화의 여지도 없는 정체된 폐쇄사회이고 그런 사회는 결코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작중에서 묘사되는 조너스의 사회가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수적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 전체가 정체 끝에 고사하는 것을 막기 위한 현실적 필요 때문이지(*4) ‘사랑이 없어서’ ‘색깔을 볼 수 없어서’ ‘그러한 선택의 자유가 없어서’ 같은 이유들 때문이 아니다.
 개인의 자유보다 사회적 공익을 더 중시한다 해도 그 모든 게 배제된 억압적이고 비인간적인 세상이 된다는 법은 없다. 이 작품은 개인의 자유와 선택권과, 사회 구성원 전체의 공익과 공공선 양자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라는 보다 큰 주제에 대한 작가 나름의 답을 제시해 보이거나, 혹은 그에 대해 독자로 하여금 의미 있는 성찰을 가능케 하는 힘을 가질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뉴베리 상 수상작이라는 명성이 걸맞지 않게 ‘자유’와 ‘사회’를 대립되는 요소로 너무나 간단히 도식화해 버린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의 질서에 대항하는 조너스의 행보가 ‘올바른 것’임을 은연 중에 강조한다. 이것은, 지나치게 손쉽고 게으른 결론이다. 그 점이 너무도 아쉽다.


* 주석
1. 이러한 면모는 어디까지나 조너스의 가정이 일종의 긍정적 모범일 뿐 이 작품에서 제시되는 사회 상 내의 ‘가정’에 대한 표준적인 모델이 아닐 수도 있지만, 디스토피아 장르에서 주인공이 속한 초기 환경은 그 세상이 현실의 세상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독자들에게 기본 정보를 제공하며 그러한 기본 정보 위에 세상의 구조를 일차적으로 제시해 보이는 역할을 한다.
 만일 조너스의 가정이 작중 세상 속에서도 보기 드문, 특별히 긍정적인 모범이라면 간접적으로라도 그 사실이 독자에게 드러나야 한다. 이것은 독자가 작중 세상을 오해 없이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장르의 기본적인 법칙이다. 말하자면 정통파 추리 소설에서 독자는 탐정과 같은 입장에 놓여 작중에서 탐정이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모든 단서는 독자에게도 동등하게 제시되어야 하며 누가 범인이고 어떻게 범행을 저지른 것인지 스스로 추리하면서 읽을 기회가 있어야 공정한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작품 초반부터 내내 묘사되는 조너스의 가족에 대한 초상은 이 사회 내에서의 가족상에 대한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추론하는 것은 충분히 합리적이다.

2. 조너스의 아버지는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러한 수위 높은 표현이 금지되어 있고 약물을 통해 강한 감정과 욕망이 억제될 뿐 작중 인물들이 근본적으로는 여전히 그러한 감정들을 느낀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애초에 감정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합리적 진화의 소산이며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두뇌의 정상적인 작동이기에(지성이 높을수록 감정도 세분화되고, 두 종류 이상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기도 한다) 몇몇 대중 매체에서 종종 다뤄지는 것처럼 모든 감정을 완전히 제거하고 이성만 남긴 인간은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어렵다. 사이코패스조차도 ‘차갑고 무감정하다’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그 자신은 기쁨이나 슬픔, 즐거움, 좌절감, 분노 등을 고스란히 느낀다. 타인과 그러한 감정을 전혀 나눌 수 없을 뿐이다.  

3. 나치 독일에서 실시한, 우생학 기반의 선천적 장애인 학살 계획. 정확히는 장애인만이 아니라 그러한 장애를 유발하는 유전인자를 보유한 유전병 환자, 정신 질환자 등도 포함되었으며 해당 질환자에 대한 불임 시술 또한 동시에 강제되었다. 아리아 민족의 혈통적 우월성이라는 관념 하에서 보자면 그러한 요소들은 우월성을 열화 시키는 오점이었기 때문이다. 건전한 육체와 건전한 정신이라는 목적의식 하에, 나치는 ‘민족의 위생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특별 치료를 실시한다고 대외 발표를 한 뒤 가스실에서 15만 명이 넘는 자국민을 살해했다.

4. 단 한 명의 기억 보유자에게 모든 지난 시대의 지식과 억눌린 감정들을 몰아준다는 설정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서 나타나는 것과도 비슷한, ‘전체를 위한 희생양’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자면 사회의 정체와 부패를 막고 변혁에의 가능성을 보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보험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작중에서 기억 보유자는 금지된 지식과 감정을 홀로 모두 기억한다는 ‘특권’을 이용해 다른 원로들이 눈치채지 못하게끔 교묘히 전횡을 펼치는 독재자도, 따돌림 당하는 외로운 이단자도 아니며 엄연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존중받으며 다른 원로들에게도 경외의 대상이 된다고 분명히 서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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