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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불사판매주식회사

2003.11.01 01:4811.01





cybragon@freechal.com처음 제목을 보았을 때, 뭔가 유머러스한 위트가 넘치는 글이라고 짐작했다. 마치 검은 선글래스를 쓴 양복쟁이 외판원들이 진지한 얼굴로 ‘당신도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이 팜플렛을……’이라고 늘어놓을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실제로 읽어보니 유머러스한 것은 거의 없고, 위트가 넘치기는 하지만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작가적 재치’가 빛날 뿐이다. 순발력있는 농담따먹기 같은 것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책을 읽고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내가 늙었다’였다. 꽤 매력적인 제재(나 자신도 고교시절 이 비슷한 제재로 습작을 쓴 바 있다)에, 글 전체의 리듬 상 꼭 필요한 곳에 활극이 흘러넘치며, SF 특유의 철학적 주제가 딱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을 정도로 깔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에 먼저 와닿은 것은 ‘번역이 그다지 매끄럽지 않군’이나 ‘등장인물들이 지나치게 설명조로군’ 같은 시덥잖은 감상이었다.
   글이 나빴으면 그런 반응이 나와도 당연하겠지만, 불행히도 [불사판매주식회사]는 어느 면으로 따져봐도 빼어난 작품이었다는게 슬픈 것이다. 이제 이런 글을 보아도 감탄하고 감상에 젖기보다는 궁시렁대며 불평거리부터 찾게 되다니……. 이래서야 예전에 경멸해 마지 않았던 매사에 시니컬한 평론가 무리하고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하여튼 각설하고, 이 책의 테마는 제목([불사판매주식회사]가 아닌 원제 그대로 직역한 [불사주식회사])에 다 드러나 있다. 뜬금없는 소리라고 하겠지만, 그만큼 제목을 잘 지었다는 얘기다.
   어쨌거나 좀 더 얘기하기 전에 약간의 경고문 삽입부터 하기로 하자.


   늘 그렇듯 까발리기(spoil, 혹은 ねたばれ)를 싫어하는 분은 다음 문단부터는 더이상 읽지 말기 바란다.
   ‘한국 SF 영화의 발전을 위하여’ 120억이나 꿀꺽 말아 잡수신 모 영화감독 같은 말이라 미안하지만, 내 리뷰는 독자를 가린다. 책 내용을 미리 알기 싫은 사람은 지금 바로 여기에 써놓은 ‘아주 좋더라’라는 두 단어짜리 평 하나만 믿고 그냥 사서 보시라. 내 리뷰는 언제나 ‘두 번째 읽을 때 더 재미를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소개서이고, ‘싫어싫어’를 외치며 귀를 막는 사람들을 위한 것은 아니니까.
   아, 한가지 덧붙이자면, 번역하신 송경아씨의 역자 서문에도 이것 못지 않은 까발리기가 들어 있다. 모처럼 귀를 막고 있다가 신나게 처음부터 책을 읽는 사람들, 부디 마지막 함정을 무사히 통과하시길.

   (매번 이렇게 까발리기 경고문 삽입하는 거 귀찮지만, 별 수 있나. 언제나 새로 쓴 글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인걸.)

   자, 그럼 진짜로 시작하겠다.


   말단 요트 설계사라는 평범한 직업인으로서 안정된 생활을 하던 블레인은, 어느날 갑자기 자동차 사고를 당하고, 죽었다고 생각했다가 깨어나 보니 몸통은 물론 팔다리도 멀쩡하다. 병실 침대 옆에서는 뭔가 기록을 하느라 분주히 돌아가고, 사람들은 상황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주지도 않고 자기 일 하느라 바쁘고…….

   어렵사리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현재는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150년 후이며, 내세를 보장해주는 회사가 광고용으로 자신을 되살려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광고 계획이 취소되면서 졸지에 애매한 위치로 전락해버린다.
   회사가 새로운 입장을 결정할 때까지 주어진 짧은 시간 동안 블레인은 몇가지 일을 겪으며 겨우 22세기에 적응하지만, 곧 아슬아슬한 비합법 작업을 벌였다는 법적 분쟁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자신을 ‘지워’ 버리려는 기업을 피해 달아나게 된다.

   결국 블레인은 여러 인물들의 도움을 통해 무사히 ‘법적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을’ 정도로 먼 남태평양까지 달아나고 사태는 일단락되는 듯이 보이지만, 결국 찾아온 자신의 ‘업’을 되값기 위해 죽음을―――그리고 내세를―――택하게 된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지만, 그 안에 채워져 있는 내용은 완벽한 SF에 가깝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독자들은(아무것도 모르고 갑자기 미래로 내던져진 주인공과 똑같이) 점차로 22세기라는 미래에 ‘내세’라는게 어떻게 죽음을 넘어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게 어떻게 과학적으로 정리되어 내세 장비를 사용할 돈을 지불할 부자들의 ‘정신’을 연명하는데 사용되는지 등등을 배우게 되고, 더 이상 자살이 죽음이 아님으로써 생겨나는 여러가지 사회 현상들 겪게 된다. 곁들여서 ‘감각 이식’이라는, 다른 사람의 감각을 기록해 놓았다가 비디오로 영화 보듯이 체험해 보는 새로운 유희도 나오고…….

   ‘내세’, 즉 단순히 정신만 남은 상태가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이자 과학적인 접근이라든가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역량 있는 SF 작가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풀어낼 수 있는 주제지만, 가정용 비디오조차 개발되지 않았던 1959년에 이미 21세기 초의 인터넷 환경에 익숙해진 우리들이 흔히 상상하는 ‘전자 제품을 이용한 감각 공유’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는 점은 놀랍다.
   더군다나 그런 흥미로운 소재들이 단순히 ‘이러이러한게 있다면 폼나겠다’라는 식으로 나열된 것이 아니라, 작품 전반에 걸쳐 가로놓여지는 탄탄한 복선과 암시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에는 저절로 감탄이 나올 수 밖에 없다.
   [불사판매주식회사]는 SF란 과학적 상상력 놀이 이전에 하나의 갖춰진 문학임을, ‘이봐이봐, 나 이런거 생각해냈어. 재밌지? 신기하지?’ 하는 얼치기들의 지적 자위행위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공통적인 감성 코드에 호소하는 예술가의 진지한 작품임을 확실히 보여준다.

   이렇게 좋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아쉬운 것은 있다.
   SF나 판타지에서 생소한 소재들을 작품에 넣을 때 흔히(보통은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실수인 ‘등장인물을 통해 나불나불 설명하기’가 여기에도 어김없이 적용되어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것과(장장 한 페이지 반에 걸친 설명을 말대꾸 한마디 없이 일방적으로 듣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연상해보라),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아닌 꽤 흥미있는 미래상을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피부에 와닿게 묘사하지 못하고 스토리(혹은 활극) 위주로 흐른다는 것이다. 어차피 책 분량도 그다지 길지 않은 편이므로, 독자들에게 신기할 수 밖에 없는 미래 세계는 좀 더 세밀하게 묘사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오해할까 봐 덧붙이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삼류 SF/판타지보다는 300%쯤 더 묘사가 섬세하다. 작품 자체의 수준을 볼때 상대적으로 묘사가 미흡하다고 말하는 것이지 결코 다른 책들에 비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여주인공(이라고 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활약이나 등장 장면이 적다)인 마리가 너무 매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쉽다. 처음에 ‘감정에 철갑을 두른 이지적인 미녀’로 나오는 그녀는 중초반 이후 그런 모습이 갑작스레 사라져버리고, 더 이상 특색없는 전형적인 히로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게다가 마지막에 별다른 이유없이 갑작스레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당황스럽게까지 느껴진다.
   책을 찬찬히 씹어서 읽다 보면 그 맥락 없는 변신 사이에 아주 정교한 심리적 요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이래서 2번째 읽는게 더 재미있다), 그걸 보다 명확하고 재치있게 풀어내지 못한 것은 역시 작가의 역량 한계를 보여준다. 로버트 셰클리의 다른 작품을 안 봐서 모르겠는데, 아마 작가는 여자를 사귀는 데는 능숙했을지 몰라도 여자를 묘사하는 데는 상당히 서툴렀을 것이다.

   그 외에, 번역도 아주 잘 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어순이나 단어가 우리말로 어색한 문장이라든가 전체적인 ‘번역도’에 맞지 않게 튀어나오는 영어 음역 어휘 등이 상당히 거슬린다. 예컨데 ‘공항 2레벨’같은 것이 그것인데, 처음에 나는 ‘레벨’이 뭔가 일반 용법과는 다른 의미(RPG의 레벨 같은)로 쓰인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냥 ‘층’인 것이다. ‘공항 2층’, ‘호텔 3층’, ‘30미터 층’ 등. 그런데 이걸 발음 그대로 음역해놓아 혹시 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만큼 쓸데없이 강조되어 버렸다.

   번역이라는게 원래, 한두 문장도 아니고 책 전체를 번역하다 보면 효율성을 위해서 작업 중에는 사고 체계도 영어식으로 좀 개편될 수밖에 없다. 그 덕분에 번역 중에는 자신도 모르게 문법 파괴형 문장, 쓸데 없이 남용된 영어 단어(혹은 그 반대로 외래어가 적절함에도 지나치게 한글로 번역해놓은 단어) 등이 만들어질 수 밖에 없게 된다. 작업 구조 자체가 그런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것은 1차 번역된 초벌을 시간을 두고 몇 번 퇴고하며 다듬는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지만, 시간이 돈인 요즘 세상에 서너 번 퇴고는 좀 무리한 요구니까 역자를 탓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역시 완벽이 아닌 것은 분명하고, 리뷰란 건 원래 공급자가 아니라 소비자 입장에서 바라봐야 하는 것이니 한번쯤 짚고 넘어가기는 해야 할 것이다.


   이미 서두에서 말했지만, 이 책은 완벽까지는 아니더라도 훌륭한 SF로 분류함에 부족함이 없다. 주제가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으고, 소재가 너무 생소하지도 진부하지도 않고, 평이한 서술과 활극의 안배 또한 적절하고, 무엇보다도 작품 전체에 걸쳐 꽉 짜여진 플롯과 복선이 기가 막히다.
   하지만 그렇게 멋지게 짜여진 덕분에 좀 향취가 약하고 스토리의 뒷면에 얽힌 배경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것은 좀 아쉽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봐서 ‘소장하고 싶은 목록 1순위’에 들어갈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니 SF(혹은 판타지도!)에 관심있는 분들은 한 권씩 구입해 보시길 권해드린다(이 말을 빼먹었는데, 여기서는 버서커부터 폴터가이스트까지 ‘동화적 단어’를 어떻게 미래의 현실 생활로 재정의하는지 하는 재미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참고로, 나의 ‘소장하고 싶은 목록’은 ‘두 번째 읽었을(보았을/행했을) 때 더 재미있는 것 목록’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일러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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