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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세계를 모험하다
스테파노 만쿠소, 임희연 옮김, 더숲, 2020년 11월

유발 하라리는 그의 대중적인 저서 『사피엔스』에서 인간이 농업혁명으로 인류의 도약을 이루어냈다는 기존의 상식에 대해 '역사상 최대의 사기'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농업혁명 이후의 농부는 이전 시대의 수렵채집인에 비해 평균적으로 더 열심히 일했지만 그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인간은 왜 스스로 땅에 묶여 매일을 고단한 노동으로 채워야 하는 삶을 택했을까. 어쩌면 인간이 스스로 택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종의 번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농업혁명을 통해 결정적으로 이익을 취한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 식물이다. 이제 인간이 식물을 길들였다는 인본주의적 상식은 식물이 인간을 길들였다는 합리적 가설로 대체된다. 이 가설에 따르면 1만 년 전 농업혁명을 시작하기로 결심한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식물이었다.

인류는 이제야 유아기를 건너가고 있는 걸까. 인간의 시점에서 겨우 한 발 벗어나 대상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가려져 있던 세계의 장막을 걷어 올리듯 강한 호기심에 사로잡힌다. 식물이 긴 시간에 걸쳐 체계적으로 농부를 양성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생명체가 또 다른 놀라운 일을 벌이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겠는가. 이를테면 지구의 식물들이 그동안 동물처럼 생각하고 소통하며 전략적으로 행동해왔다면 어떻겠는가. 우리가 그동안 동·식물을 가를 때 편리하게 사용한 몇몇 기준이 실은 다분히 무성의한 이분법에 기대고 있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스테파노 만쿠소의 『식물, 세계를 모험하다』는 에피소드 형식으로 나열된 식물들의 여행기다. 식물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그리고 저자가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여기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서술 방식에서는 동물의 특성을 묘사할 때 쓰이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이 책에서 개척자, 전투원, 생존자, 도망자, 항해자, 시간여행자는 모두 식물을 지칭하는 말이다. 저자가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바, 식물은 그들 생애 동안 아주 먼 곳까지 원하는 만큼 이동할 수 있으며 환경을 민감하게 인지할 뿐만 아니라 주변 생명과 소통하며 사회적 유대 관계를 형성한다. 심지어 어떤 식물은 씨앗 안에 들어 있는 '배아'를 보호하고 어린 나무의 생존을 돕기 위해 '어버이양육'을 하기도 한다.

스테파노 만쿠소는 식물들의 모험에 얽힌 사연을 놀랍도록 흥미롭게 들려주지만, 그러면서도 기록과 실험에 기반하여 논리를 쌓는 치밀함을 놓치지 않는다. 사실 저자도 인정하듯 식물의 이동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연구가 활발하지 않고, 오래전 사건에 관한 사료나 실험기록을 찾아보는 것도 매우 어렵다. 때문에 이들 식물의 삶과 여행을 수천 년의 시간 위에서 조망하는 이런 이야기는 부분적으로 저자의 상상력에 기댈 수밖에 없고, 이는 또다시 합리적 가정에 근거한 추론을 요한다. 식물을 다룬 책으로선 눈에 띄게 스토리텔링 비중을 대폭 늘린 저자가 각별히 공을 들인 부분도 바로 이 지점이다. 합리적 가정에 근거하지 않은 상상은 자칫 흰소리로 간주될 우려가 있다.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간혹 이것이 ―현실적인 sf가 아니라― sf적인 현실을 일부 반영하고 있다는 공상에 잠기게 된다. 현실의 일부 조건을 비틀어 새로운 세계의 단면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 sf의 본령이라면, 스테파노 만쿠소는 이 책에서 고도로 sf적인 무언가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쉬르트세이 섬(1963년 북대서양 해저 화산의 분출로 생겨난 화산섬)은 그 자체가 식물의 정착 과정을 압축적으로 재현하는 훌륭한 실험실이다. 체르노빌과 히로시마의 압도적인 피폭에서 살아남은 식물을 언급할 때는 저자 자신의 외경심이 감정적으로 투명하게 드러나는데, 그런 환경에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다고 믿어왔던 독자라면 아마 비슷한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헤롯 왕궁에서 발굴되어 2천 년 만에 부활한 대추야자에 이르면 그 긴 시간 동안 씨앗 안에 고요히 잠들어 있던 생명의 깊이를 막막한 심정으로 헤아려보게 된다. 지구 상 어딘가에는 수천 년 동안 생명을 품고서 발아를 기다리는 또 다른 씨앗이 존재할 테니, 아득한 상상으로나마 이들과 만나게 하는 것이 이 책이 지닌 강력한 장점이고 매력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역작 『지상 최대의 쇼』에서 모든 생명의 기원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단 하나의 사건으로 귀결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지구 상 어딘가에 묻혀있을 또 다른 씨앗과 나, 그리고 당신이 역사적으로 하나의 기원을 공유한다는 뜻이다. 개념은 단순 명료하지만 이 말의 의미를 떠올리는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진화의 시간 동안 지구 위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쇼를 수천억 배속으로 시뮬레이션해보는 멋진 일이 일어난다. 특히 식물종의 여정은 인간의 입장에서 좀처럼 가늠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 시뮬레이션이 더욱 문학적이고, 또한 신화적이다. 우리 삶의 규모를 가볍게 초월하는 상상 속에서 그동안 몰랐거나 잘못 알고 있었던 식물의 모험담에 가까이 귀 기울여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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