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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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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김훈, 학고재

저만치 혼자서

김훈, 도서출판 아시아

한국소설들은 사회 이데올로기와 관념적 대결에서 어느 한편을 들라 그리고 그걸 쓰라 강요받았다. 그것을 벗어나 독자적인 미학 세계를 구축한다는 건 매우 비범한 일이다. 그렇기에 김훈 뒤에 붙는 수많은 찬사가 부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그의 문장은 한줄, 한줄 무겁고 진지하게 써진 시이다. 그래서 읽을 때마다 지친다는 평이 많다. 그러나 시적울림, 시적인 이미지를 통한 강렬한 체험을 하게 만든다. 김훈 문장은 다른 수많은 작가들의 문장을 벌거숭이산에 지게 짊어지고 도끼 들고 벌목하러 가는 것만큼 무익하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서사 면에서는 늘 듣는 비판이 읽어갈 때는 고전으로 기억될 명작, 다 읽고 나면 텅 빈 터널을 빠져나온 듯한 공허한 소품이다. 독자적인 미학 세계는 동시에 폐쇄적이기에 그의 서사는 다른 소설가들처럼 주제를 가지고 매섭고 집중적으로 찌르지 않는다. 시적인 울림으로 공감각적 회화를 그린다. 그걸 읽는 게 아니라 체험, 감상해야 한다. (유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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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박경리, 마로니에북스

저번에 1부를 읽었고 드디어 전권을 다 읽었다. 지금 티비에서 범람하는 퓨전사극과 달리 우리 조상님들은 빈부와 반상구별에도 무식하지 않고, 매우 논리적이었다. 현 시대에 억압한다 비난받는 유교는 당대에 생활지침이 되어 옳고, 그름을 가르며 신분의 상놈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를 어기는 상놈이 되지 않으려, 일상에서 선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그 선은 수많은 사람들이 정의를 행동할 수 있게 힘을 내주었다. 수십 권이 넘는 대하소설이다보니 할 말이 많지만 다 옮길 수 없다. 내 인생에서 분에 넘칠 정도로 복된 시간이었다. 만약에 자식을 낳는다면 어렸을 때는 만화 토지를, 크면 소설 전집을 선물할 생각이다. (유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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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 리자 오버드라이브

윌리엄 깁슨, 황금가지

사이버펑크는 SF 장르 중 가장 축복받았다. 선두주자가 영문학을 배웠기에 시작 조건이 매우 좋았다. 문장이 묘사는 보석함처럼 반짝이며 풍성했고, 시적인 이미지를 품고 있어 체험을 전달해 줬다. 캐릭터가 대사 표지판을 들고 서 있는 것 같았고, 서사가 아니라 자기주장을 담은 뻣뻣한 소설을 썼던 SF의 어떤 선구자보다 더 좋은 전통을 후배들에게 전달해줬다. 사이버펑크는 유독 섬세한 묘사와 이미지가 뚜렷하다. 사이버펑크 후배들 이를 잊지 않고, 기념비적인 작품 『뉴로맨서』를 원형으로 삼고 훌륭한 전통을 이어갔다. 이 전통은 괴랄하다 못해 이예에에!를 절로 외치기 만드는 『닌자 슬레이어』로까지 이어진다. 본 작품에 대해서라면… 당시에는 전설적인 작품이었지만… 시적인 묘사 문장과 이미지가 좋지만 서사가 따라가기 힘들다. 서사가 굵직해야 하는데 텅 비어 있는 튜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유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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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민음사

이 작품에 따라 다니는 평이 있다. 뭔 서사, 이야기가 있냐고? 어… 그게 회화적인 이미지가 풍성한 작품들은 서사에서 비판을 피해갈 수가 없다. 서브컬쳐 계열 수많은 작가들이 만화를 그리지 못해 뇌내망상을 글로 그리려 했지만 그 수준은 그림판으로 졸라맨 그리는 수준이었다. 좀 이런 고전을 읽으라 부탁하고 싶다. (유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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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쳐: 엘프의 피

안제이 사프콥스키, 제우미디어

장르물을 보면 먼저 엄격하게 장르를 정의하고 아는 체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다크&성인 판타지라 라벨 붙이면 이 작품을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구라파 버전 소설 『베르세르크』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성의 목소리와 운명의 검이 본격적인 스토리가 시작되기 전 프롤로그 였다면 엘프의 피로부터 본격적인 어른의 복잡한 사정이 시작된다. 현재 한국 판타지가 검과 마법을 흉기처럼 휘두르는, 유치하고 미친 어린 아이 수준의 정서가 대세인데 이제야 성인이 볼 수 있는 판타지가 출판된 것 같다. 개인적으로 제우미디어가 블리자드 소설로 돈을 많이 벌었다면… 흥행이 되지 않아도 시리즈 끝까지 출판해줬으면 한다. (유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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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 이동도서관

오드리 니페네거, 이숲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처럼 책 좋아하는 이야기를 보면 절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동지가 된다. 이 작품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절정에 이르러 무참히 잘려나가는 충격을 준다. 어 이게 아닌데 라는 회의가 든다. 그러나 꿈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설명을 보면 납득이 된다. 사람들의 꿈은 대개 비합리적이니까… 오히려 깔끔하게 다져지지 않고, 갑작스런 파격을 보이기에 꿈이 모티브였다는 개연성이 높아졌다. 책 좋아하는 사람에게 소설가 위화의 에세이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의 독서편을 추천한다. 같은 향수를 공유하고 싶다. 책을 좋아하는 우리는 축복받은 삶을 살고 있다. (유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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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

마리사 마이어, 북로드

『신더』, 『스칼렛』, 『크레스』에서 이어지는 루나 크로니클 완결작. 대표적인 동화를 미래 설정으로 옮겨서 잘 짜낸 SF 로맨스다. 커플이 꼭 탄생하기 때문에 로맨스라고 하지만 외연은 판타지 소설에 더 가까운 듯. 재미있고 흡입력 있는 소설이라 책 한 권 끝내기 어려운 내 연휴를 보장해줬다. (pena)

논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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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문학동네

문장에 대해 이야기 했으니 사유와 공부에 대해 써야겠다. 많은 나이에도 결코 쉬지 않고 끊임없이 공부하고 사물, 사건에서 벗어나 인간과의 연계성을 가지려 사유한다. 옛날에 대학에서 가르칠 수 있었던 학문은 문학, 역사, 철학이었다. 인간을 알 수 있는 학문들만 가르쳤다. 젊은 순문학 작가들은 그렇게 많이 배워서 자기 내부에 대해서만 파고들며 지적이고 시사적이게 보이려 노력한다. 라면 끓이는 법 이외에도 참으로 배울 게 많은 작가이다. (유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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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ve the Cat!: 모든 영화 시나리오에 숨겨진 비밀

블레이크 스나이더, 비즈앤비즈

이론편과 예제편으로 나누어진 『세이브 더 캣』의 예제편에 속한다. 이론편을 보지 않아도 본서를 읽으면 자연스레 이론을 체득할 수 있다. 요절한 저자가 안타까울 만큼 훌륭한 작법서이다. 이렇게 요점을 잘 정리한 작법서는 드물다. 훌륭한 작법서는 누군가를 작가로 만들어 준다. 나는 이 작법서가 그리 활용되리라 확신한다. 이론편과 예제(실전)편, 요점 정리를 쓰다 보니 한 인물이 떠오른다. 주목할 만한 우리의 훌륭한 작법술사 쏘오오오온! 지상님께서 세 번째 작법서 스토리 트레이닝 & 단편소설편을 출판하신다고 한다. 10월 2일날 와우북 페스티벌에 온우주 부스를 찾아가면 저자를 볼 수 있다니 모두 주목하시길. 10월 2일은 대한민국 모든 작가 지망생들이 세례 받는 날이 될 지어다! 폭발하는 매력을 감출 신비주의 망토를 찾는다면 10년 후에 듀나에 비견될 컬트적인 존재가 될 텐데… 아쉽게도 신비주의 망토는 헤비한 육체존재감을 감추기 힘들어 보인다. 한 사람은 미국에, 한 사람은 한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구성으로 된 작법서를 냈다는 게 흥미롭다. 큰 인물들이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나보다. (유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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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헨드릭스: 록스타의 삶

찰스 R. 크로스, 1984

본인(저번 리뷰에 등장한 구술과 인터뷰를 믹스한 자서전)은 선의로 도와주는 여자들이라 했지만, 본 평전에서는 기둥서방 짓을 했다. 자신이 인지한 일과 남이 보는 일은 역시 다르다. 그는 허세쟁이였고, 섬세하고 연약했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거짓말쟁이 기질도 다분했다. 그러나 엄청난 노력파였고, 존경할 만한 자세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입증하려 천착했다.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본 평전에 나오는 폴 매카트니에 대해 말하자면… 라이벌 의식 없이 지미를 동등하게 대하여 그가 크게 될 수 있도록 원조했다. 폴은 현재도 장르와 유명세를 가리지 않고 재능 있는 후배들을 발굴하여, 협업하고 있다. 한 때 이런 말이 나돌았다. 이소룡처럼 살래? 성룡처럼 살래? 요절하여 불멸이 된 비극의 이소룡이냐? 장수하여 부자가 된 희극의 성룡이냐? 였다. 이 말은 죽어서 박제된 전설 존 레논과 살아서 언제나 현역인 폴 매카트니로 변주할 수도 있다. 비틀즈의 다섯 번째 멤버라는 그래픽 노블에 비틀즈 매니저가 죽기 전에 폴 매카트니를 후계자로 선택하는 장면이 이해된다. 다시 지미에 집중하면 평생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치유되려 고향에 집착했지만 결국 벗어나지 못했다. 가장 힘없고, 가난하고, 못났을 때 겪은 상처는 어떤 성공을 맞이해도 치유할 수 없다는 게 애잔하다. (유이립)

댓글 2
  • No Profile
    pena 16.10.01 00:35 댓글

    위쳐에 관심이 가던 차였는데 반갑네요. 재미있게 읽으신 것 같아서 보관함에서 장바구니로 이동확률 상승. 

    Save the cat 도 관심이 가요. 작법서 마니아... 

     

    이번에도 좋은 책들 평 잘 봤습니다. 

  • pena님께
    No Profile
    유이립 16.10.30 01:06 댓글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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