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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이 제 자리에 이를 때

김성일, 도서출판 초여명, 2016년 10월(추정)

※이 작품은 아직 종이책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리뷰는 종이책 발간에 앞서 펀딩 참여자들에게 일종의 번외 선물로 배송된 PDF의 내용을 근거로 한 것이며, ‘구체적인 데이터를 언급하거나 캡처한 이미지를 첨부하지 않고, 매 챕터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는 선에서 그칠 것’을 전제로 하여 초여명 측으로부터 리뷰 작성을 허락받았음을 밝힙니다. 종이책은 2016년 10월 말부터 나올 것으로 예정되어 있으며, 편집 과정 중 내용 일부가 교체되거나 첨삭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1. 들어가는 글

 인간의 가장 강력한 감정은 공포다. 그리고 그 공포 중에서도 가장 원초적인 공포는 이해나 교감, 저항이 불가능한 ‘불가해한 대상’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의 인간은 왜 화산이 불꽃과 용암과 재를 뿜어내는지, 왜 태풍이 보이는 모든 것을 쓸어가는지, 왜 지진이 한 때 있었던 모든 걸 집어삼키는지, 그렇게 해서 사람이 죽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신과 종교를 만들어냈다.

 인간의 문명이 발전하고, 기술과 문물이 진보하고, 세계에 대한 앎의 지평이 확장됨에 따라서 그 공포의 상당 부분은 희석되었다. 그러한 ‘희석’이 본격화된 기점은 역시 19세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쇄 기술이 확립되고 국가에 의한 의무교육이 보편화되며 대중의 평균적인 지식수준이 높아졌고, 이성과 합리가 중세의 미망을 밝히리라는 계몽주의적 낙관은 이른바 ‘벨 에포크(Belle Epoque, 아름다운 시절)’에 이르러 정점에 달했다.

 그러나 그러한 평화와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국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이었고, 그마저도 상류층에 한정되었다. 런던에서 세계 최초의 만국박람회가 열리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신사 숙녀들이 비행선과 증기기관과 잠수함과 전신기와 인쇄기에 감탄하던 바로 그 순간에도, 공장에서는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아이들이 매일 15시간씩 일했고 뒷골목에서는 강도와 강간과 살인이 넘쳐났다. 독일과 미국, 일본은 그러한 열강의 반열에 드는 날을 꿈꾸면서 천천히 힘을 모으고 있었다. 중국은 아편 전쟁을 겪고서 가혹한 시기가 닥쳐올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인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에서는 독립 운동이 이어졌다. 결국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평화와 번영에 익숙해져 있던 유럽과 미국인들은 그제야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는 다시 모든 게 괜찮아 질 거라는 희망과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교차하는 가운데, 미국 로드 아일랜드 프로비던스 출신의 병약하고, 신경질적이고, 예민하던 한 남자는 그러한 희망과 두려움의 교차 속에서 바로 그 ‘불가해한 대상’에 대한 두려움을 재발견했다. 그 남자의 이름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라고 했다.

 경계심이 강하고 내성적인 인간이었던 러브크래프트는 자신에게 있어 불가해한 대상이었던 외국인과 유색인종을 불신하고 두려워했다. 그러한 피해망상적 인종주의는 역설적으로 당시 사회에 팽배하던 바로 그 희망과 두려움 속에서 살던 그의 통찰력과 상상력을 자극했고, ‘인류 탄생 이전의 아득한 과거부터 땅과 바다 밑에 잠들어 있던, 인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질적인 고대의 신들이 오지에서 미개한 원주민들의 숭배를 받고 있다’ ‘그 신들은 천천히 문명 세계로 자신의 광기를 퍼뜨리고 있으며, 인간이 신봉하는 이성과 합리주의는 그 신들의 초월적인 공포에 직면하는 순간 간단히 찢겨나갈 얇은 장막에 불과하다’는 구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큰 틀 아래 러브크래프트는 이름 모를 고대의 신들이 남긴 발자취를 접한 인간이, 모르는 쪽이 훨씬 좋았을 진실을 점차 깨달으며 그 절대적인 공포에 눌려 미쳐가는 과정을 묘사한 소설들을 쓰기 시작했으나 「크룰루의 부름」으로 대표되는 그러한 일군의 작품은 그의 생전에는 결국 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를 추앙했던 소수의 동료 작가와 편집자들은 그의 유산을 기억했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한 때 자신들을 황금빛 미래로 인도하리라고 믿었던 그 ‘인간의 이성과 합리’가 유래 없는 광기와 공포로 가득 찬 대파괴- 핵의 불길로 끝나는 걸 보았고, 이후 국제 질서가 냉전 체제로 이행하며 언제든지 세상이 끝장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러브크래프트가 남긴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모르는 쪽이 훨씬 더 좋았을 그 진실을 깨달아버린 사람들은 그가 남긴 이 ‘우주적 공포’에 열광했다. 이후로 수십 년 동안 숱한 소설과 영화, 음악 속에서 거듭 생명력을 얻어왔고 21세기에 이르러서까지 만화와 게임 속에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크툴루 신화의 도래였다.

 이 작품은 미국의 TRPG 회사인 카오지움 사에서 만든, 크툴루 신화를 TRPG로 즐기기 위한 룰인 『크툴루의 부름 TRPG』(이하 크툴루 TRPG)의 일곱 번째 판본이다. 기본적으로는 대부분의 다른 TRPG 진행 포맷과 마찬가지로, 배경을 제시하고 사회를 보는 마스터와 각자의 캐릭터를 통해서 배경과 상호작용하고 이야기의 흐름을 이끌어내는 플레이어들로 구성된다. 하지만 목적은 전혀 다르다. 대표적인 TRPG 룰 중 하나인 D&D에서는 ‘중세 유럽과 비슷한 판타지 세계에서 특별한 캐릭터들이 주로 괴물과의 전투를 통해 부와 명성을 얻어 영웅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즐기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크툴루 TRPG에서는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세계 속 지구에서 일반인 캐릭터들이 주로 수색과 조사, 추리를 통해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깨달아가며 점차 그 공포에 짓눌려 절망하고 미쳐가는 과정’을 즐기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가장 전형적인 시나리오 흐름은 대략 이런 식이다.

 ‘1920년대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한적한 소도시 아캄에 있는 사립 박물관 관장은 인간과 짐승이 합쳐진 듯한, 괴상하게 생긴 조각상을 한 탐험가에게서 사들인다. 탐험가는, 그 조각상이 아프리카의 어떤 원시 부족이 섬기는 신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흉측하면서도 섬세한 조각상의 모습에 매료된 관장은 전용 진열실을 마련해 조각상을 안치하고는 아캄의 유지와 부자들을 대상으로 한정 공개하지만, 그 조각상을 본 손님들이 악몽에 시달리다가 죽는 괴현상이 벌어지자 박물관의 평판이 나빠질 것을 우려하여 경찰보다 한 발 빨리 사건의 내막을 조사해 달라고 평소부터 알던 사이인 PC들을 고용한다. PC들은 점차 조각상이 묘사하고 있는 신이 아득히 먼 과거 우주에서 와 당시 원시인이던 인류에게 지식을 전해주고 그 대신 인신공양을 받았다는 것,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나 유태교 전설의 그리고리 이야기는 사실 이 신의 전설이 와전된 결과라는 것, 이 신은 로마 제국이 성립되고 기독교가 득세하면서 잊혀졌지만 지금도 광신도들이 세계 각지에 암약하고 있고 조각상이 이 박물관에 오게 된 것도 사람들에게 공포를 퍼뜨려서 신앙심을 끌어 모으려는 광신도들의 계획이었다는 것, 조각상 자체도 평범한 돌이 아니라 신의 살아있는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된다.

 PC들은 조각상을 파괴하려고 하지만 그를 눈치 챈 광신도들은 PC들을 붙잡아서 제물로 삼으려고 하고, PC들은 그들의 끔찍한 의식을 겨우 저지하고 조각상을 빼돌려서는 먼 바다에 던져버리는데 성공하지만 그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너무 충격적인 것을 봐 버리는 바람에 반쯤 정신이 나간 채 간신히 육지로 돌아온다. 한 발 늦게 출동한 경찰에 의해 광신도들은 잡혀 들어가고, 한 달 뒤 다시 모인 PC들은 그래도 조각상이 사라져서 다행이라고 안도하면서 가판대에서 파는 신문을 무심코 사 봤다가 아프리카의 한 고대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이라는 기사와 바로 그 조각상의 모습이 찍힌 사진, 그리고 전에는 무표정했던 그 조각상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져 있는 것을 보고 경악한다.’

 크툴루 TRPG는 1981년에 1판이 나온 이래, 이와 같은 기본 얼개가 다양하게 변주되며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하지만 오래된 룰이다 보니 일관성이 부족하거나 밸런스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판본을 거듭하며 다양한 측면에서 개선이 시도되었다. 특히 이번에 나온 7판은 기존 룰의 핵심을 답습하면서도 여러 측면에서 21세기의 트렌드에 걸맞는 신선한 변화가 이뤄져서 기존의 크툴루 TRPG 팬만이 아니라 새로이 TRPG에 입문해 보려고 하는 초심자들에게도 추천할 만하고, 굳이 TRPG를 할 생각이 없더라도 읽을거리로서의 재미도 풍부하다.

2. 작품에 관해

소개

 TRPG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초적인 개념 설명과 플레이 예시,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중 특히 추천할 만한 작품, 필요한 준비물 등이 제시되어 있는 챕터.

H.P. 러브크래프트와 크툴루 신화

 크툴루 신화를 창조한 작가 러브크래프트의 생애와 사후 다른 작가들에게 미친 그의 영향에 대해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크툴루 신화 체계의 정점에 있는 ‘이계신’들과, 이계신들에 비하면 다소 격이 떨어지지만 인간 입장에서는 역시 형언할 수 없이 두렵고 강대한 존재인 ‘위대한 옛 것’, 그들에게 창조되었거나 숭배 받는 인간 외 이종족이나 생명체, 외계 종족들을 묶어 부르는 ‘신화 종족’에 대한 간략한 개념이 설명되어 있는 챕터.

탐사자 만들기

 플레이어들이 움직이는 캐릭터(‘탐사자’라고 부른다)를 만들기 위한 룰이 나와 있는 챕터. 특성치를 정하고-직업을 결정하고-직업에 따라 어울리는 기능을 선택하고 기능에 점수를 배분하고-설정을 짜고-장비를 결정한다는 과정에 따라서 책을 읽어 나가며 자신만의 탐사자를 만들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참고용으로 나와 있는 하비 월터스라는 예시 캐릭터는 이후 다양한 플레이 예시에서 등장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캐릭터의 배경 설정을 하는 부분으로, 다른 TRPG 룰에서는 캐릭터의 설정을 구체적으로 플레이 상에서 어떻게 반영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진행자(크툴루 TRPG에서는 ‘수호자’라고 부른다)의 재량에 맡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크툴루 TRPG에서는 ‘이상한 사건이 일어나고, 캐릭터들이 그 사건과 연관되고, 조사에 나서게 된다’는 게 기본적인 흐름인데 캐릭터 입장에서는 자신의 개인적인 배경과 무관하다면 적극적으로 사건에 뛰어들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배경 설정 중 ‘사상 및 신념’ ‘중요한 사람’ ‘소중한 물건’ 등의 항목으로 구체화해서 분류하고 그를 어떻게 활용하면 될지 설명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히 유용하다. 추가로 탐사자를 만들 때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옵션(주사위를 굴려 특성치를 정하는 대신 정해진 수치를 배분한다거나, 탐사자가 나약한 인간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초기 특성치에 상한선을 둔다거나)도 있다.

기능

 탐사자 만들기 챕터에 나와 있는 ‘기능’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는지, 각 기능의 수치가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의 능력인지(예를 들어 기능 수치가 20~49면 재능 있는 초보자거나 기본적인 훈련을 받은 거고, 75~89 사이면 해당 분야의 전문가라는 식), 플레이 상에서 기능 판정을 해야 할 때 어떻게 하면 되는지에 대해 설명되어 있는 챕터. 이번 7판에서 새로이 도입된 개념인 ‘강행’(기능 판정에 실패했을 때, 어떻게 해서 그게 가능한지에 대해 설명을 한 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능 판정을 시도할 수 있게 해 주는 대신 그마저 실패했을 때 수호자가 통상의 실패 결과 이상으로 큰 페널티를 부여하는 룰)의 예시와 더불어 강행 시도마저 실패했을 때 수호자가 일으킬 수 있는 재앙의 예시에 대해서도 기능 별로 나와 있다.

시스템

 전반적인 룰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챕터. 탐사자 캐릭터건 신화 종족이건 평범한 짐승이건 신이건 같은 양식의 특성치와 기능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든 특성치와 기능에는 최소 1의 수치가 배정되어 있다. 100면체를 굴려서 해당 수치 이하로 나오면 성공하고 해당 수치의 절반 이하가 나오면 어려운 성공, 1/5에 해당하는 수치 이하가 나오면 극단적 성공, 해당 수치를 초과하면 실패, 100(단 특성치나 기능 수치가 50미만일 경우 95 이상)이 나오면 대실패이다. 특성치와 기능은 자주 사용하면 조금씩 상승한다. 이를 기본으로 해서 보너스 주사위와 페널티 주사위, 난이도 책정, 복합 판정 등을 통해 상당히 깊이 있는 표현이 가능하다. 캐릭터의 개인적인 능력만이 아니라 재력, 연줄과 같은 요소도 플레이 진행에 따라 증감이 이뤄지게 되어 있다. 행운을 일종의 소모 및 회복이 가능한 게이밍적 자산처럼 취급할 수 있게 하는 옵션 룰도 제시되어 있다.

전투

 기습, 엄폐물 활용, 화기의 고장 등 다양한 전투 상황에서의 룰의 적용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챕터. 전투의 흐름에 대해 플로우차트 형태로 정리되어 있어 초심자도 이해하기 쉽다. 근접전과 사격, 은엄폐, 부상과 기절, 치유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으며 블랙 위도우 거미 독, 광대버섯, 벨라도나, 비소 등 흔히 등장할 만한 독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추격

 크툴루 TRPG를 플레이하다 보면 경비행기를 몰고 하늘을 나는 신화 종족을 쫓거나, 사교도로 의심되는 지역 유지의 뒤를 밟게 될 일도 있다. 혹은 반대로 탐사자 캐릭터들이 그런 식으로 쫓길 수도 있다. 그러한 다양한 상황에 있어서의 추격과 미행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챕터. 추격이 진행되는 장소를 다양하게 구성하는 요령, 추격 장면에서 일어날 법한 여러 위험상황과 장애물의 예시, 추격 상황 도중의 전투와 은신 등에 대해 설명이 되어 있다. 도보 외의 승용물에 탑승한 상태에서 추격을 할 경우에도 별로 달라지는 부분 없이 일관성 있게 적용할 수 있는, 이해하기 쉽고 깔끔한 룰이 인상적이다. 「크툴루의 부름」 소설의 클라이맥스 부분의 묘사를 룰에 대입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백미.

이성

 크툴루 TRPG의 꽃이며 상징인 ‘이성’ 관련 룰을 다루고 있는 챕터. 크툴루 TRPG에서의 이성은 캐릭터가 세속적이고 보편적인 일반인의 사고방식에 얼마나 가까운지를 나타낼 뿐 아니라 세상과 우주의 끔찍한 진실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한지를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다. 플레이어들이 움직이는 캐릭터들은 기본적으로 전원 정상적인 상태에서 게임을 시작한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가 진행되며 신화 종족이 남긴 유산을 조사하거나, 크툴루 신화에 대해 서술된 책을 읽거나, 신화 종족과 직접 만나는 등의 경험이 많아질수록 점차 그의 ‘평범하고 정상적인 세상 속에서 인간들은 별 일 없이 살고 있다’는 확신은 흔들리게 된다. 그것은 점차 본격적인 공포로 변하고, 그의 영혼은 광기와 절망으로 얼룩진다.

 플레이 도중 제 정신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접하게 되면(굳이 세상의 초자연적 측면이 아니어도, 토막 난 시체를 목격한다거나 심한 고문을 당하는 등의 ‘평범하지만 여전히 끔찍한 경험’도 이에 포함된다) 이성 판정을 해 실패할 경우 발광하고, 이러한 발광이 반복될 경우 이성 자체가 낮아지면서 다양한 종류의 광기에 시달리게 된다. 어떤 상황에서 이성을 잃게 되는지의 예시와 더불어 광기에 빠졌을 때 캐릭터에게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그리고 탐사자 캐릭터가 그렇게 미쳐감으로서 ‘탐사자 만들기’ 단계에서 설정한 배경 항목이 어떤 식으로 바뀔 수 있는지(예를 들어, 중요한 물건을 몸에 지니고 있었는데 광기에 빠졌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곳에 와 있고 그 중요한 물건이 사라져 있다거나)에 대한 지침이 나와 있으며 각각 100종류의 공포증과 집착증의 목록도 나와 있다.

마법

 이계신과 위대한 옛 것들의 힘을 빌려서 행사하는, 원래는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삿되고 부정한 힘인 마법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챕터. 크툴루 TRPG에서의 마법은 어디까지나 ‘인간은 결코 그 원리나 작용 방식을 완전히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이며, 배우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사용자의 정신과 영혼을 좀 먹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에 대개는 적으로 등장하는 이계신의 사제나 흑마법사가 사용하지만(룰 상으로 ‘신화의 마법은 그것을 쓰고자 하는 인간을 현혹하고 경악시키고 혼란시키며 쇠약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인간이 알아서는 안 될 지식입니다. 마법을 사용하면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모순을 접하며 점점 이성을 잃게 됩니다’라고 확실히 규정되어 있다), PC 탐사자가 배워서 사용할 기회도 종종 있다.

 마법과 크툴루 신화에 대하여 나와 있는 ‘신화서’에 대한 소개, 신화서를 읽고 연구할 때 이성을 얼마나 잃어버리며 또한 크툴루 신화에 대해 얼마나 알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 신화서나 다른 사람에게서 마법 주문을 배우는 법, 주문 사용법 및 강행 실패 시의 부작용 등이 세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더불어 크툴루 신화와는 무관한 신앙이나 오컬트 전통에 기반한 마법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어떻게 적용할지, 마법 주문은 모르지만 크툴루 신화에 대한 지식을 활용해 즉석에서 마법에 준하는 효과(죽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거나, 괴물을 쫓아내는 등)를 내고 싶다면 어떻게 할지도 나와 있다.

플레이의 진행

 수호자를 위한 게임 운영 전반에의 조언을 다루고 있는 챕터. 플레이어를 모집하는 법부터 시작해서(‘플레이어가 될 사람과 처음 만날 장소는 카페와 같은 공개적인 장소로 정하는 게 좋습니다. 전화번호나 주소는 충분히 친해질 때까지 알려주지 마세요’ 같은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나와 있다) NPC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법, 주사위를 이용한 판정 결과를 다양하게 해석하는 요령(만일 중요한 판정에서 실패했더라도 수호자가 생각하기에 이 장면에서는 성공해야만 할 것 같다면 그냥 성공한 것으로 하되 그에 준하는 부작용을 일으키는 걸로 처리할 수 있다), 플레이어의 선언에 대응해 자연스럽게 상황을 그려내는 법, 플레이어의 의견을 수용하는 법,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단서를 제공하는 방식, 효과적으로 공포감을 줄 수 있도록 신화의 존재와 초자연적 현상을 묘사하는 방법, 게임의 ‘엔딩’을 내는 법, 러브크래프트적 코즈믹 호러 장르의 기반 정서에 대한 설명 등이 꼼꼼하게 나와 있다. 굳이 크툴루 TRPG만이 아니라 다른 룰로 게임을 할 때도 적용할 수 있는 유용한 조언이 많다.

무서운 비밀의 책들

 후술할 ‘유물과 외계의 장치들’ 챕터와 더불어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은 챕터 중 하나. 크툴루 신화 체계 내에서 존재하는 특별한 서적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세상의 부정한 신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마법 주문도 다수 수록되어 있는-그리고 러브크래프트 본인이나 후대의 작가들이 창조해 낸 가공의 서적들이 대부분인- ‘신화서’와 세상의 초자연적인 면모를 간접적이고 은유적으로 서술하는데 그치는-그리고 일부는 현실에서도 존재하는- ‘오컬트 서적’의 두 종류로 나눠서 설명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책의 제목과 간략한 내용, 읽으면 이성을 얼마나 잃게 되는지, 신화에 대해 얼마나 알게 되는지, 배울 수 있는 주문이 있는지, 어떤 마법 주문을 배울 수 있는지, 본격적으로 내용을 연구하는데 어느 정도나 시간이 걸리는지 등이 나와 있으며 이러한 책들의 존재 자체를 시나리오 소재 거리로 삼기 위한 조언도 담겨 있다. 이러한 책들 중에서도 정점에 있으며 가장 유명한 ‘네크로노미콘’ 같은 경우 책의 역사와 함께 5가지의 서로 다른 판본 별 차이점에 대해 일일이 설명되어 있는 등의 디테일을 자랑한다. 100여 종류에 달하는 신화서와 오컬트 서적의 목록이 챕터의 대미를 장식한다. 크툴루 신화의 팬이라면 이 챕터와 후술할 ‘유물과 외계의 장치들’ 두 챕터만으로도 사 볼 가치가 있다.

주문 목록

 ‘마법’ 챕터에서의 설명을 부연하여, 주문을 쓰는 방법과 개별 마법 주문들의 상세한 설명이 나와 있는 챕터. 크툴루 신화에서의 마법은 ‘온전한 정신을 가진 인간은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하고 끔찍한 힘’이라는 걸 꾸준히 강조하며, 그러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한 실용적 조언(수호자 임의로 주문을 변형하는 법, 이름 바꾸기 등)도 함께 나와 있다.

유물과 외계의 장치들

 상술한 ‘무서운 비밀의 책들’ 챕터와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은 챕터 중 하나. 크툴루 신화 체계 내에서 존재하는 특별한 물품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편의 상 ‘마법’과 구분하고는 있지만 크툴루 신화의 세계 속에서 마법과 기괴한 과학 기술(그리고 각자의 소산)은 어차피 인간의 인지를 초월한 무언가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인간에게는 마법이라고 여겨지는 게 이종족이나 괴물들의 입장에서는 나름의 논리를 따라 분석하고 체계화할 수 있는 과학일 수도 있고, 인간의 눈에는 기묘한 장치라고 여겨지는 게 이종족이나 괴물들의 입장에서는 신비한 마법의 도구일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 하에 러브크래프트와 그 유산을 계승한 후배 작가들의 작품들 속에서 등장한 다양한 종류의 괴이한 물품들 20개가 설명되어 있다.

괴물들, 짐승들, 외계의 신들

 크툴루 신화의 괴물들, 신들, 전통적 괴물(늑대인간 등)들, 평범한 짐승들의 설명과 데이터, 약간의 일러스트가 수록되어 있는 챕터. 그와 더불어 이런 존재들이 전투에서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어떻게 묘사해야 이런 존재들의 두려움을 잘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조언도 나와 있다.

시나리오

 TRPG에 있어서의 ‘시나리오’란 마스터(크툴루 TRPG에서는 수호자)가 플레이를 어떻게 진행할지에 대한 전반적 아이디어와 중요 NPC들, 일으킬 사건들, 캐릭터들에게 줄 정보들, 기타 데이터 따위를 정리해 둔 문서를 가리킨다. 처음부터 시나리오를 혼자 짜기 어려운 마스터를 위해 회사에서 이미 저런 내용들이 들어가 있는 상용 시나리오를 판매하거나 무료 공개하기도 한다. 최초의 TRPG였던 D&D의 첫 판본이 나온 이후 다양한 룰과 다양한 시나리오들이 나왔지만, 21세기 이후로 시나리오의 유형은 크게 봐서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은 마치 작가가 소설을 쓰기 전에 이야기의 흐름과 골격을 잡아두듯 언제 어디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어떤 정보를 줄지 전부 마스터가 사전에 결정해 두고는 플레이어들의 선언에 따라 리액션을 취하게 되어 있는 전통적 방식의 시나리오다. 레일로드 형 시나리오라고도 부른다. 두 번째 유형은 중요한 사건과 NPC들, 핵심 정보 같은 건 마스터가 결정할 수 있되 정보의 디테일을 어떻게 해석할지, 누가 악당인지, 사건의 진상은 무엇인지 등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중요 사건과 NPC 등은 애초에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나올 수 있도록 단편적으로만 제시된다) 플레이 과정을 통해 점차 결정되어 나가도록 하고 결말을 어떻게 지을지도 참가자들에게 맡기는 방식의 시나리오다. 샌드박스 형 시나리오라고도 부른다.

 이 챕터에서는 레일로드 형으로 구성되어 있는, 숲 속으로 납치된 지역 유지의 딸을 구출하러 간 캐릭터들이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끔찍한 존재와 마주치게 된다는 내용의 ‘오래된 숲 속에서’와 샌드박스 형으로 구성되어 있는, 아캄 시 미스카토닉 대학교에서 마녀재판 기록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상한 살인사건을 조사하게 된다는 내용의 ‘붉은 서류들’ 2개의 시나리오와 각 시나리오로 플레이를 하기 위한 조언이 수록되어 있다.

부록

 용어 설명, 구판 룰의 데이터를 7판에 맞춰 변형하는 법, 장비 및 무기의 목록과 데이터, 룰의 전반적 요약 등이 나와 있는 챕터.

3. 나오는 글

 러브크래프트가 남긴 크툴루 신화 계열 작품들은 그의 생전에는 끝내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오거스트 덜레스로 대표되는, 그를 아낀 동료 및 후배 작가들이 꾸준히 크툴루 신화의 세계를 계승하고 확장시켰고 냉전의 암운 속에서 비로소 사람들은 그가 제시한 ‘영원히 무심하고 차가운 우주와 그에 직면한 나약하고 무지한 인간’의 비전을 깨닫고 전율했다. 하지만 80년대의 세계적 경제 호황에 이어 냉전이 끝나고 나자 그 공포와 절망은 흐릿해졌다. 90년대에 접어들고 인터넷이 등장하며 더욱 좁아진 세상 각지에서 걸프전과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터졌고, 세기말 특유의 정체 모를 불안감은 여전히 일상의 틈새에서 도사리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어떻게든 적응하여 다시 바쁘게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어 머리를 가진 뚱뚱한 괴물이라는 기표가 아니라, 그 너머의 기의- 불가해한 대상에 대해 품는 인간의 근원적 두려움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현대인들은 이웃에 사는, 동남아인인지 인도인인지도 구분되지 않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신들끼리 뭐라고 대화를 나누는지 알지 못한다. 인터넷에 무심코 남긴 글 몇 줄을 통해 자신의 SNS 계정을 알아내어 그걸 검색해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알지 못한다. 토요일 밤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이름 모를 파트너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권한 피로회복제 드링크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에 대해 알지 못함을 알지 못한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속에서 신들과 괴물들은 먼 우주, 깊은 정글과 빙원 속, 지하와 바다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21세기를 맞은 지도 16년이 지나가고 있는 이제 그 신들과 괴물들은 대형 마트에 진열된 온갖 상품들과 그를 비추는 조명 뒤에 너울대는 그림자 속에서 깨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신화서를 읽고 크툴루 신화에 대해 안 인간의 경우처럼, 진정한 공포는 인간의 정신을 뒤흔드는 동시에 세상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혀준다. 물론 크툴루 신화의 세계는 러브크래프트로 시작해 여러 작가들의 손을 거치며 확장된 픽션일 뿐이지만 이 책은 그로 상징되는 ‘우주적 공포’의 끝자락을 비록 TRPG라는 유희의 형태 속에서나마 대리 체험할 수 있게 해 주는 훌륭한 안내서의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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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뇰 16.10.01 13:39 댓글

    헐퀴, 연도를 착각한 부분이 있네요. 1차 만국 박람회 때는 아직 전구가 발명되기 전입니다. 그리고 아캄 시는 로드 아일랜드가 아니라 매사추세츠 주에 있습니다. 러브크래프트 본인의 고향과 헛갈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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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수정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