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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퍼맨:시크릿 아이덴티티 | 커트 뷰식&스튜어트 이모넨, 시공사, 2011년 6월

슈퍼맨:시크릿 아이덴티티
커트 뷰식&스튜어트 이모넨, 시공사, 2011년 6월


1. 들어가는 글

 짧은 평화가 끝나고 2차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암운이 짙어가던 1938년, 미국의 잡지 『액션 코믹스』에는 제리 시걸과 조 슈스터라는 두 작가가 각각 글과 그림을 맡은 한 만화가 실렸다. 그 표지에는 가슴에 S자 문양이 붙은 푸른 옷에 붉은 망토를 두른 남자가 자동차를 들어 올려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해주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이후로 80여 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무수한 이들의 마음속에서 ‘인간을 초월한 특별한 힘을 갖고 있고’ ‘정의롭고 올곧으며’ ‘그 힘과 정의로서 약자를 구하고 악인을 벌하는’ 초영웅, 즉 ‘슈퍼 히어로(Super Hero)’ 상의 원형으로서의 위치를 지켜 온 존재, 슈퍼맨의 첫 등장이었다.

 그 이후 한 인간의 일평생에 해당하는 시간 속에서 많은 작가들이 저마다의 작품 속에서 슈퍼맨이라는 캐릭터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다. 악당과 싸우기보다는 사고나 재해로부터 사람들을 지키고 구해내는 메시아가 되기도 했고, 미국의 적과 싸우는 애국주의적인 영웅이 되기도 했고, 특유의 순수하기까지 한 정의감과 도덕성을 강조해 내일의 희망 그 자체의 상징이 되기도 했고, 숱하게 많은 슈퍼 히어로들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힘을 강조해 그토록 강한 존재가 만일 인류를 적으로 돌린다면 어떠할 것인가라는 공포심을 투영하기도 했다. 이러한 역할의 변화를 통해 슈퍼맨(과 그 본모습인 클라크 켄트)이라는 존재의 묘사도 다변화되었다. 어떨 때는 한없는 인류애를 가진 성자, 어떨 때는 악의는 없지만 순진하고 아둔한 보이스카웃, 어떨 때는 영원히 사라진 고향과 절대 만날 수 없을 동족을 그리워하는 고독한 이방인. 엄청나게 강하고 선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의 서스펜스도 인물로서의 매력도 잃어버리기 쉬운 존재인 슈퍼맨은 걸출한 작가들의 손을 거치면서 다양한 생명력을 얻었다.

 그리고 이 작품, 『슈퍼맨:시크릿 아이덴티티』는 그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작품이다.


2. 작품에 관해

 이 작품 속의 지구는, 현실의 지구와 거의 동일하다. 우주에서 온 침략자도 없고, 사악한 인공지능도 없고, 기묘한 초과학도 없고, 신비한 마법도 없다. 슈퍼맨은 유명한 인기 만화와 그를 원작으로 한 영화 속 주인공일 뿐이다. ‘켄트’라는 성을 가진 한 부부는 새로 태어난 아들에게 자신들이 좋아하는 바로 그 만화 속 주인공과 같은 ‘클라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그렇게 해서 크립톤 행성 출신의 외계인이 아니라 지구 미국의 평범한 시골 출신인 인간 아기 클라크 켄트는 어린 시절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하늘을 날아봐라’ ‘눈에서 히트비전을 쏴 봐라’ 라는 식으로 놀림을 받으면서 그로 인해 약간 소심하고 내성적인 소년으로 자라났다. 자신에게 만화 주인공의 이름을 붙여준 부모님을 약간 원망하기도 하고, 같은 반 불량학생에게 시달림 당하기도 하고, 짝사랑하는 여학생 앞에서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부모를 도와 밭일을 거들고 숙제를 하는 등의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갑자기, 우연히, 어떠한 극적인 전조나 계기도 없이 소년 클라크 켄트는 진짜 슈퍼맨의 능력을 얻는다.

 놀라움, 두려움, 그리고 환희를 거친 클라크 켄트가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부모님에게 뭐라고 말하지?’ 였다. 일단은 자신의 능력을 비밀로 묻어두고 그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을 괴롭히던 불량학생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다. 오히려 클라크 켄트는, 진짜 슈퍼맨처럼 괴력을 발휘해 보라는 상대방의 조롱을 웃어넘기는 쪽을 택한다. 겉으로는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 상황을 끝낼 수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유약하던 소년에게 관대한 마음을 주었다. 이 작품의 미덕은 여기서 드러난다. 이 작품은, 클라크 켄트의 영웅적 활약에 대한 찬양이나 역시 초월적인 힘을 갖고 악행을 저지르는 이른바 ‘슈퍼 빌런’과의 대결구도로 이야기를 끌고 가지 않는다. 그 대신 막강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근본적으로는 ‘선량한 개인’에 불과한 한 인간의 심리와 정신적 성장을 묘사하는데 집중한다.

 슈퍼맨의 능력을 얻고 나서 얼마 뒤, 클라크 켄트는 이웃 농장이 홍수로 물에 잠기고 사람들이 위험에 처한 걸 목격한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걸 막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대신, 그는 하늘을 날며 사람들을 구한다. 물론 아무도 자기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빠르게 날긴 했지만 여러 사람들이 그의 모습을 봤고, 사진에도 찍히게 된다. 클라크 켄트는 자신이 왜 갑자기 이런 능력을 갖게 되었는지, 혹시 자신과 동류인 다른 누군가가 있지 않을지 알고 싶다는 생각에 한 기자와 접촉해서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대신 그가 기자로서 그간 조사한 내용을 제공받는다는 거래를 제안한다. 하지만 그 기자는 슈퍼맨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다- 한 발 더 나아가 그를 통해 부와 성공을 얻고 싶다는 욕망으로 인해 클라크 켄트의 사진을 찍으려고 하고, 초감각으로 그를 눈치 챈 클라크 켄트는 실망하여 예의 거래를 단절한다. 하지만 거래와는 별개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자신의 힘을 마음껏 사용하고 싶었던 그는 결국 세상에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로 마음을 먹고, 핼로윈 축제가 있는 날 밤 고모가 선물로 사 주었던(하지만 본인은 싫어했던) 슈퍼맨 복장을 꺼내 입고 거리로 나간다. 그러나 ‘데뷔’ 타이밍을 잡고 있던 도중 마을 건물 하나가 폭발하고, 다친 사람들을 구하러 간 그가 본 것은 짝사랑하는 소녀가 위기에 처한 모습이었다. 그녀를 구해내고, 재치를 발휘해서는 자신이 진짜 슈퍼맨의 능력을 갖고 있는 것도 숨기는데 성공한다. 문제의 폭발은 자신과 거래했던 기자의 소행이었다는 게 밝혀지고, 클라크 켄트는 그 기자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한다. 그 역시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아니었을 거라고. 다만 명예와 출세에 대한 욕망에 눌린 나머지 저렇게 되어 버린 거라고. 그러한 성찰은 ‘자신이 슈퍼맨으로 데뷔한다면 자신을 쫓기 위해서 저런 일을 벌이는 사람들도 많아질 것’이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그는 결국 데뷔를 포기하고는 정체를 계속 숨긴 채 살아가며 보이지 않게 사람들을 돕는 걸로 만족하기로 결심한다.

 세월이 흐르고, 청년이 된 클라크 켄트는 기자가 되고 로이스라는 이름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존재를 확인한 정부 기관의 요원들이 그를 쫓기 시작한다.


3. 나오는 글

 이 작품이 끝날 때까지 클라크 켄트가 어쩌다가 슈퍼맨의 능력을 얻게 된 것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그를 위협하는 슈퍼 빌런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나마 가장 서스펜스가 강조되는 부분은 그를 붙잡아 능력의 정체를 확인하거나 적어도 미국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고 하는 정부와의 술래잡기 정도다. 클라크 켄트는 정부에서 보낸 요원들의 추적을 피하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일상을 유지하고, 가능하면 사람들을 구하려고 한다. 그 와중에서 가장 부각되는 것은 남편으로서의 그, 아버지로서의 그, 사회인으로서의 그- 즉 한 인간으로서의 그의 모습이다. 특별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어디까지나 가족을 사랑하는 선량한 일개인에 불과한 그는 정부의 추적을 피해 다니고 가끔 그들과 만나 거래할 때를 제외하면 대체로 심각한 갈등이나 굴곡 없는 일상 가운데에서 자신의 능력에 대해, 그리고 사람들을 구한다는 행위의 의미에 대해, 자신과 국가의 관계에 대해 거듭 성찰한다. 이 작품은 그러한, 초월적인 영웅 슈퍼맨이기 전에 한 명의 인간 클라크 켄트인 그의 모습을 잔잔하면서도 현실감 있게 묘사하며 담백한 감동을 준다.

 이 작품에서 묘사되는 그는 ‘가장 인간다운 슈퍼맨’이 아니라, ‘인간’이다. 작중에서 그가 하는 행동들은 ‘정의’라는 기준에서 비춰보자면 다소 아쉬울 때도 있고, 모든 걸 완벽하게 잘 해내지도 못한다. 클라크 켄트는 그러한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을 받아들인 채 살아가고, 사랑하며, 선함을 유지한다. 평소에는 인명 구조에 나름 신경을 쓰는 것 같다가도, 막상 ‘적’과 싸울 때에는 주변의 피해가 어떻건 신경 쓰지 않고 폐허 가운데에서 연인과 유유히 입을 맞추는 여유까지 부리는 어떤 오만한 메시아와는 달리.(*)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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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na 16.07.02 11:14 댓글

    앗. 이런 설정일 줄은 몰랐네요. 유명하고, 좋은 작품이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말이죠. 정말 힘든 테마인 것 같은데 한 번 봐야겠어요. 리뷰 감사합니다. 

  • 아이 16.07.10 21:57 댓글

    아 잘 읽었습니다. 제 취향에 맞는 슈퍼맨이네요. 사실 예전에 슈퍼 히어로물들은 거의 이런 분위기였는데요. 남들 안 볼 때 방 청소를 빛의 속도로 해버리는... 뭐 그런 정도. ;; 현실감이 있었죠. ;;; 그런데 요즘 슈퍼 히어로들은 너무 파괴적이라 오히려 매력이 없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