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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보며 : 2000년에 1887년을

에드워드 벨러미, 김혜진 옮김, 아고라, 2014년 8월


pilza2 (pilza2@gmail.com http://www.pilza2.com)



 필자의 일화로 글을 시작하는 것에 양해를 바란다.
 아마도 2011년으로 기억하는데, 환상소설 및 추리소설 고전의 목록을 작성한 적이 있다. 저작권 시효가 만료되어 번역 및 출간에 제약이 없는 작품 중에서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았지만 가치나 재미가 있는 작품을 골라보려는 시도였다. 물론 축약본, 중역, 아동용 판본으로 출간된 경우도 포함시켰다.
 목록이 얼추 쌓이자 1년에 장편 1권, 단편집 2권 정도 낸다면 10년은 문제없겠다 싶어서 페가나라는 1인 출판사를 세웠다. 편집과 제작을 혼자서 하고 유통은 전자책으로만 하며 물류나 사무실 등의 유지비가 들지 않기 때문에 내고 싶을 때, 여력이 있을 때만 책을 내면 되는 취미생활 비슷한 출판 활동이었다.
 이때는 목록에 있는 작품들이 다른 출판사에서 나올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부분 50년에서 100년 이상 된 작품인데 지금까지도 안 나왔으니 앞으로라도 딱히 나올 일이 있겠냐 싶었던 것.
 하지만 의외로 예상과 달리 목록에 기재된 작품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예를 들면 대실 해밋 단편집, H.G. 웰스 단편집, 펠루시다 시리즈, 클라크 애슈턴 스미스 단편집 등이 있고, 2014년에 런칭한 아고라 출판사의 〈재발견총서〉 시리즈에서 『최후의 인간』, 그리고 여기 소개할 『뒤돌아보며』가 나왔다.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고 추측된다. 하나는 우리나라 출판물도 종수가 꽤 늘어서, 외국소설 같은 경우 과거에는 베스트셀러, 유명 작가, 문학상 수상작만 내도 얼마든지 낼 것이 많았다. 그런데 이제는 속된 말로 ‘나올 게 다 나온’ 상황이기 때문에 최신 인기작을 발 빠르게 선점하지 못하면 묻힌 고전을 발굴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영미권, 일본, 프랑스, 독일 등을 벗어나 다양한 국가와 작가의 숨겨진 명작을 찾아낸다면 얼마든지 ‘나올 것’이 있겠지만 그걸 찾아낼 기획력과 안목을 갖춘 기획자, 편집자, 번역가가 있을지가 문제다.
 또 하나의 이유는 출판계의 불황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서, 90년대에 정점을 찍은 이후로 출판업은 늘 하락세요 위기였다. 해서 기존의 출판사마저 계약을 맺고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퍼블릭 도메인에 눈을 돌리게 되는 건 사업적으로도 틀린 판단은 아니다. 다만 그 대상이 오래된 작품이기에 명작을 제대로 선별해내는 능력이 없으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고라에서 『최후의 인간』과 『뒤돌아보며』를 낸 것은 상업적 성과를 떠나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본다. 특히 본작 『뒤돌아보며』는 축약본으로 나온 적이 있을 뿐 실체가 번역 소개된 적이 없어서 수많은 논문과 사회학, 경제학, 정치 서적 등에서 언급 및 인용만 되는 환상의 작품으로 남아 있었다. 특히 SF를 소개하거나 역사를 살펴보는 서적에서도 최초의 미국 SF로 언급만 되어 있어서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게 사실이다.
 이러한 외적인 의미가 많은 작품이지만 여기서는 매체의 성격상 정치, 사회, 경제 분야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오직 고전 SF라는 기준으로만 다루도록 하겠다.
 그 전에 이렇게 출간이 늦게 된 아쉬움에 한 마디만 더 보태자면, 출간이 늦어진 이유에는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도 있다고 여겨진다. 오랜 시간 냉전과 분단을 겪으며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악’과 동일시했던 국가에서 이른바 ‘사회주의 천국’을 그린 이 작품이 금기시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
 그렇지만 이 작품에는 19세기 자본주의 미국이 21세기에 그토록 많이 변모할 수 있었던 과정을 생략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 내용은 19세 부르주아 줄리언 웨스트와 21세기 지식인(은퇴한 의사로 나온다) 리브 박사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어떻게 국가 체제가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는 무혈 혁명이며 선거 등으로 자연스레 바뀌었다고 말하는데 설득력이 떨어지는 부분이다. 소설에서도 중요한 내용이 아니라 지나가는 말로 잠깐 언급할 정도다.

 물론 허점을 지적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고 최면술로 100년 넘게 잠들었다가 멀쩡하게 깨어난다든지 하는 부분은 굳이 비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화성의 공주』에서 뜬금없이 화성으로 순간 이동한다든지, 펠루시다 시리즈에서 드릴처럼 생긴 탐사선을 타고 땅을 뚫고 지저세계로 간다든지 하는 걸 일일이 과학 이론으로 비판하는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작가가 원하는 건 새로운 무대, 새로운 배경이고 여기로 이동하는 과정이 길고 복잡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과학소설의 선조라 불리는 베르느나 웰스도 등장인물을 달로 보내기 위해 거대한 대포로 우주선을 쏘아 올리거나 마법 같은 반중력 물질을 뚝딱 발명하는 식으로 간단히 해결해버렸으니 말이다.
 실제로 SF에서 다른 행성으로 이동하는 수단과 방법이 과학적 사실과 개연성을 중시하게 되는 때는 실제 우주 진출이 시작된 시기와 거의 겹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사람을 100년 넘게 보존하려면 최소한 냉동이라도 시켜야 할 것이다. 우주선이 우주공간에서 우렁찬 굉음을 내며 날아다니는 〈스타워즈〉에서조차도 사람을 장시간 가둘 때 탄소냉동이라는 기술을 동원할 줄 아는 시대인 것이다(실제 가능한지는 고려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다만 벨러미는 버로즈와 마찬가지로 SF를 쓸 생각은 전혀 없었고 그저 자신이 원하는 무대로 등장인물을 빠르고 간편하게 이동시키려는 의도이므로 방법이야 최면술이든 강령술이든 상관이 없는 것이다(비슷한 얘기를 C. S. 루이스의 우주 3부작을 다루면서도 했으므로 여기서 줄이겠다).

 그럼 소설 내용으로 들어가서, 고전 SF로서 재밌냐고 물으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전술했듯 19세기 인물과 21세기 인물의 대화가 전부인데 미스터리 기법이나 복선, 반전 등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길고 지루한 인터뷰에 다름 아니다.
 미래 세계를 직접 체험하고 오해가 생겨 모험도 펼치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체득하는 편이 세계를 보여주는 방식으로도 효과적이고 주인공도 적응이 빨라질 것이며 독자 입장에서도 소설 읽는 재미가 있을 텐데, 여러 모로 아쉽다. 주인공의 외출이라고 해봐야 신세지는 집의 미혼 여성인 이디스랑 쇼핑하고 식사하고 잠깐 주변 산책한 게 전부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인 가상의 21세기 사회는 매력적인가, 라고 묻는다면 허점투성이인 사회지만 진지하게 고찰해볼 가치와 매력은 충분하다고 답할 수 있겠다.
 허점이란 전술했듯 선거로 쉽게 사회가 변했다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 사회주의 유토피아가 유지되려면 구성원이 도덕적이고 성실하며 국가에 충성해야 가능하다는 문제가 있다.
 사회주의도 그렇지만 국가의 문제는 제도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공산주의 국가가 무너지고 북한이 사실상 군벌 왕국(국가명에는 ‘민주주의’와 ‘인민의 공화국’이라는 좋은 낱말은 다 갖다 쓰고 있지만)이 되어 무력 통제와 사상 억압(주체사상은 김씨 왕조를 뒷받침하는 종교다)으로 억지로 버티고 있는 현실은 제도 때문이 아니라 통치하는 인간의 문제다. 중국의 경우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겉으로는 번영하는 듯이 보이나 정치적으론 여전히 일당독재 사회주의 체제이고 언론을 비롯하여 사상의 통제가 극심하니 머지않은 미래에 큰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아니 천안문 항쟁, 류샤오보 노벨상 수상, 홍콩 우산 혁명 등 현재진행형이다.
 사회주의가 가장 이상적이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론 그대로 실현된다면 본작에 나오는 낙원이 펼쳐질지도 모르지만, 인터넷 유행어를 인용하자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므로 이 사회주의 낙원은 한 세대도 못 넘기고 붕괴될 것이 뻔하다. 도둑과 강도가 판을 칠 것이고, 편한 일을 하려고 몰리며 힘든 3D 업종 기피 현상이 문제가 될 것이며, 물론 이 세계는 이론적으로 완전고용을 실현하고 있으므로 강제적으로 젊은이들을 3D 업종으로 보낼 것이고, 이로 인해 파업이나 태업 등이 속출할 것이며 결국 혁명이든 쿠데타든 일어나 붕괴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SF의 관점에서 생각하자면 이 사회를 건설하고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정과 욕심이 없는, 혹은 이를 초월한 존재가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즉 컴퓨터나 로봇, 혹은 외계인이나 신을 동원해야 한다는 소리다.
 실제 아시모프는 〈로봇 시리즈〉 중에서 인간으로 변장한 로봇이 가장 이상적인 정치인으로 활동하여 결국 대통령에 당선된다는 이야기를 선보인 바 있다. 인간의 감정이 없으므로 탐욕도 없고 실수도 안 하며 부정부패, 뇌물수수 등에도 빠지지 않는다면 로봇이 최고의 지도자가 될 거란 주장이다.
 본작의 국가를 유지하는 지도층과 고위관리들도 도덕과 충성심과 헌신이 없이는 존재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급여 및 재산은 전 국민이 동일하므로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능력을 발휘해도 결국 더 얻을 수 있는 건 명예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부정부패의 유혹에 빠지거나 ‘일을 안 해도 어차피 돈은 똑같이 받아’라는 생각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을까? 실제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시장경제 국가들과의 경쟁에서 뒤쳐진 큰 이유가 이와 같으니, 결국 국가를 유지하려면 최소한 지도층은 인간의 욕심과 나약함과 이기심에 빠지지 않아야만 한다. 그러니 로봇과 외계인이 이상적인 대안으로 거론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컴퓨터나 로봇이 국가를 지배한다는 이야기는 수많은 SF에서 다루고 있는데 아쉽게도 인간이 억압당하거나 가축처럼 관리되는 디스토피아로 그려지는 경우가 더 많다.
 외계인의 경우라면 아서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이 대표작이다. 인간의 선악관 따윈 초월하며 훨씬 압도적인 능력을 가진 외계인이라면 인류를 공정하게 다스리는 게 가능하다. 이런 세계는 오히려 인류에게 유토피아를 불러올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후반에 가면 진짜 이유가 드러나긴 하지만 적어도 초반을 보면 외계인의 개입 덕분에 인류가 물질적, 정신적 행복을 누리는 세상이 그려진다.
 비인간의 경우라면 역시 동물을 들 수 있겠다. 계급사회지만 완전한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한 개미 왕국이나 협동과 자립으로 유지되는 토끼들의 나라 등 인간 아닌 존재들의 국가에서 특히 사회주의 낙원에 가까운 모습이 그려진다. 판타지에서는 엘프나 드워프의 나라가 주로 이런 성향을 그린다. 특히 개발과 개척 대신 자연과 동화되는 원주민 같은 이미지가 강조되는데 『유토피아에서 온 편지』 등은 이런 자연친화 사회주의 이상향을 그린다.
 여기에 신이나 종교까지 대입시키면 사회주의 국가라고 부르기 힘들어지므로 이쪽은 빼는 게 좋겠다. 『아틀라스』 같은 경우가 좋은 예시라고 할 수 있겠다. 거의 종교에 가까운 추종자들이 생겼고 소설 속 이상향을 실제로 구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부분이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서는 유토피아를 실제로 구현하려다 실패한 여러 사례들을 소개해놓고 있는데 모두 전술했듯 의도(이론 및 제도)는 좋았으나 구성원(인간)이 문제였음이 드러나 있다.
 결국 벨러미의 낙원이 오늘날 실현되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그러기 힘든 이유는 인간 종족의 한계 때문으로 보인다. 개미처럼 지능이 뛰어나지 않아 무조건 사회제도에 복종하지 못하고, 컴퓨터처럼 인간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존재도 아니며, 그렇다고 외계인 같은 외부 존재의 다스림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도 않을 욕심 많고 자존심도 세며 이기적인 인간 종족에게 지상낙원은 소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개념인 것이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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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na 16.03.07 04:44 댓글

    예전 소설의 전개방식을 보고, 소설이 처음 나타났을 때의 비평들을 보면 지금의 소설들도 고도로 발전해온 결과물이고 소설에 대한 시각도 정말 많이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죠. 주제의식이나 그리고 있는 세계는 볼 가치가 있는데 재미가 없다고 하니까 왠지 웃음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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