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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앰브로스 비어스 외, 오경희 옮김, 글읽는세상, 1999년 7월
pilza2 (pilza2@gmail.com http://www.pilza2.com)

 잘 알려지지 않은 채 절판된 도서를 소개한다는 미안함을 달래기 위해 우선 표지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아마도 이 책을 이 글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을 것 같은데, 마치 독자의 접근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듯한 조악한 표지가 지금 보면 역으로 신선하고 눈길을 끄는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든다.
 아무래도 책을 처음 볼 때는 표지와 제목에 눈길이 가기 마련이다. 외국, 특히 영미권 도서는 작가 이름을 표지에 크게 박아넣는 경우가 많은데(인기 작가의 경우 제목보다 더 크게 써놓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우리나라는 어지간한 유명 작가라고 해도 표지에 두드러지게 큰 글씨로 표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대신 띠지에 사진과 함께 크게 써놓는다). 일본도 기본적으론 작가 이름을 작게 쓰면서도 인기 작가인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크게 쓰는 걸 보면 한국 도서 디자인의 특징이라고 보든가, 아니면 문화적 특성(개인의 이름을 내세우는 걸 스스로 꺼리거나 반감을 우려하여 주저하는)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정확하게 시기를 나누긴 힘들겠지만 보통 2000년대 이전 도서들의 표지에서 종종 느껴지는 촌스러움이나 괴이함은 이해하고 감수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출판업이 영세하기도 했고 미술이나 디자인 전공자들의 참가도 지금과 비교할 정도는 아닐 테니까.
 다만 안타까운 것은 내용이 좋은 소설이 표지가 구리다는 이유로 외면받거나 평가절하를 받는 경우일 것이다. 대표적으로 지금이야 팬덤의 수요가 끊이질 않아 중고서점의 스테디 셀러(?)가 된 서울창작의 〈미스테리 시리즈〉도 당시에는 H.R. 기거나 알폰스 무하 등 거장의 그림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제목과 디자인의 미숙으로 인해 싸구려 저질본 취급을 받았던 게 사실이다. 『한밤의 지하철』, 『식인 달팽이』도 중고서점에서 고가에 거래될 정도로 작가 면모도 내용도 괜찮은 단편집인데 표지가 많이 아쉽다.
 미리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본작도 제목과 표지로 인해 놓치기에는 아까운, 잘 만들어진 호러 단편 앤솔로지다.
 그렇다면 원서 표지는 어떤가 싶어서 찾아본 결과 아마존 독일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아래와 같다. 살인자와 강도를 그린 살벌한 그림이긴 해도 특유의 화풍 덕분에 코믹한 느낌까지도 든다. 물론 표지 사용료가 별도로 발생할 테고 문화적 차이도 있으니 이 그림을 번역서에 그대로 쓰라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너무 심하게 비교가 된다는 생각은 떠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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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서 표지

 

 뜻밖에 표지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져서 여기서 끊겠다. 원서는 독일에서 출간된 앤솔로지로 원제는 『Grausen, Gruseln, Gänsehaut』이다. 독일어 사전을 빌려 해석하자면 ‘전율, 오싹함, 소름’이라는 뜻인데, 탁월한 제목은 아니지만 그래도 ‘괴담’이라는 역제보다는 낫다. 이건 그냥 김이 빠지는 제목이다. 원제는 그나마 공포라도 강조했건만 제목에서 ‘괴담’이라고 해버리면 ‘창작 공포소설 단편집’이라는 책 자체의 정체성마저 흐리게 만드는 꼴이 아닌가. PC통신, 인터넷의 괴담 글을 끌어모아 만든 조악한 책자를 연상시키기 십상이다. 차라리 황금가지식으로 ‘독일 공포 문학선’이라고 하면 독자들이 무슨 책인지 고민이나 혼동은 안 할 것 아닌가.
 참고로 본서는 삽화도 들어갔는데 없는 게 나을 정도로 조악하고 구리다. 원서에 삽화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있다면 이보다 훨씬 좋을 것은 분명하다.
 아무튼 『식인 달팽이』가 그랬듯 제목과 표지와 삽화의 압박(?)을 이겨내면 내용물은 의외로 깔끔하고 괜찮은 앤솔로지다. 작가진을 보면 대표로 내세운 앰브로스 비어스 이외엔 모두 독일 작가이고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수록 작가들의 다른 번역 출간작을 찾아봤지만 비어스 외에는 나오는 게 거의 없다.
 구성을 보면 총 11편을 세 개의 테마에 따라 분류해 묶었고 맨 앞과 뒤에는 짧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붙였다(저자가 표기되어 있지 않은데 원서 편집자가 쓴 것으로 추측된다).
 프롤로그는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을 소개하며 이 책을 읽는 것이 미궁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얘기한다. 에필로그에선 미궁의 끝에 이르렀으나 미궁도 미노타우로스도 실제로는 없는 게 아닐지, 사실 미궁은 이 세상이며 괴물은 독자 자신이 아닌지 묻는 공포물의 열린 결말스러운 마무리를 맺는다.
 앞뒤에 짧은 이야기를 넣어 개별 단편의 묶음일 단편집을 마치 하나의 장편처럼 묶는 이런 수법은 대표적으로 레이 브래드버리의 『일러스트레이티드 맨』에서 선보인 바 있다. 이는 한 작가가 쓴 단편집이고 본작은 여러 작가의 글을 모은 앤솔로지라는 차이가 있어도 의도나 기법은 비슷하다.
 또한 작은 테마별로 단편을 몇 개씩 묶는 것은 『토탈 호러』를 통해서도 접할 수 있는 익숙한 편집수법이다. 여러 모로 편집자 비르기트 라데볼트(Birgit Radebold 독일어에 미숙하여 표기가 틀려도 양해 바람)가 많은 참여를 하여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수록 단편들의 소재가 겹치질 않으며 전반적으로 수준이 고르다는 점을 봐도 편집자의 역량과 노력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후반부 수록작들은 전래동화 수준의 짧고 단순한 이야기들이라 전반에 비해 공포도 흥미도 떨어진다는 점이 아쉽다. 주로 앞쪽에 수록된 단편이 재미도 완성도도 더 낫다고 본다. 개중에서 뛰어나다고 판단한 작품을 아래에 개별적으로 소개한다.

지하의 집 / 마리오 조르다노
 작가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면 19세기 작품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고전적인 고딕 호러의 구조를 띠고 있다. 교양있는 인물의 전형인 주인공의 회고조 독백 → 스스로도 못 믿겠다고 운을 떼며 시작하는 도입부 → 우연히 만난 낯선 이에게서 듣는 이야기(액자 구성) → 믿지 못하다가도 증거와 마주하고 혼란스러워 하는 주인공 → 사라진 낯선 이와 그 뒤를 쫓는 주인공(열린 결말). 이 소설의 줄거리 전체가 이와 같은 고딕 호러에서 흔히 보이는 구조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이 작가의 『엉뚱한 알 도둑(웅진주니어, 2001)』이라는 그림책이 국내에 번역되었다.

늑대인간의 냅킨 / 아데라이데 네레프
 늑대인간은 흔한 소재라고 치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 등에서는 하나의 종족이나 괴물로 가벼이 취급되고 넘어가기 일쑤. 늑대인간이라는 소재 하나만을 집중해서 밀도있게 써낸 작품이 얼마나 되는지 떠올라보라. 그런 예를 찾지 못했다면 이 단편을 추천한다.
 저주로 늑대인간 혈통을 물려받은 인물이 변신 기간동안 스스로를 가두기 위해 철저히 준비한다는 설정도 꼼꼼하고 복선을 적절하게 깔아놓았다가 풀어낸 점도 좋았다.
 여담이지만 처음 읽었을 때 어쩐지 낯익어서 예전에 다른 곳에 번역 소개된 적이 있나 검색도 해봤지만 알아내지 못했다. 혹시 아는 분이 있다면 제보 바란다.

은을 자아내는 거미 / 귄터 잘만
 초반은 전형적인 전개처럼 보였으나 후반의 아이러니한 반전과 허탈한 결말이 매력적이었다. 괴물으로만 여겼던 거미는 인간의 탐욕과 공생하는 존재였고, 동굴에서 헤매다 극적으로 탈출한 주인공 요하네스는 왕질이나 립 밴 윙클처럼 되고 말았다.

완성하라! / 헤닝 파벨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저자에게 도전(?)한다는 이야기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다. 거울 리뷰에서 소개했던 단편집 『마법사의 소굴』에 수록된 「캐롤 오니르의 백 번째 꿈」도 이 단편과 비슷한 내용이다. 다만 이쪽은 작가의 복수로 웃기면서도 마음 찜찜한 결말을 맺는다는 점이 다르다.

폐쇄된 창 / 앰브로스 비어스
 비어스의 대표적인 단편으로 『세계 공포 문학 걸작선:고전편(황금가지, 2003)』에 「막아 놓은 창문」, 『아울크리크 다리에서 생긴 일(생각의나무, 2008)』에 「막힌 창」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초자연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해석이 가능한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데, 그러면서도 서스펜서와 공포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표현하고 있다. 후대에까지 대표적인 공포소설로 전해지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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