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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딕
시릴 M. 콘블루스, 안태민 옮김, 불새, 2013년 11월


pilza2 (pilza2@gmail.com http://www.pilza2.com)



 찰스 오시노는 신딕의 젊은 간부다. 현재 미국은 무정부주의 범죄조직 신딕과 모브가 양분하여 차지하고 있고 정부는 북쪽 아이슬란드로 쫓겨난 후로 100년 정도 지난 상태. 암살 위험을 겪은 찰스는 미국 정부의 소행일 거라는 정보를 듣고 스스로 스파이에 지원, 정부로 침투를 개시한다.
 거짓말탐지기를 피하기 위해 최면술로 거짓 기억을 심어 맥스 와이먼이 된 찰스는 무사히 정부 조직에 가입하고 기억을 되찾는다. 순조롭게 활동하나 싶었는데 어느 날 자신에게 최면술을 썼던 마녀 리 팔카로와 만나게 되면서 사태가 꼬인다. 그녀는 정부가 신딕에 심은 스파이였던 것이다. 결국 그녀의 밀고로 찰스는 체포되고 마는데……

 미국의 다른 현실을 그린 대체 역사 스릴러물. 가상의 역사 속에서 한 인물의 모험담을 그렸다는 점에서 『유대인 경찰연합(중앙북스, 2009년)』을 연상시킨다. 물론 그만큼 SF색은 옅은데, 역사소설처럼 느껴지는 가상역사를 다룬 작품도 대체역사라면 SF로 분류를 하고 있으니 문제는 없을 것이다.

 본작은 빠른 진행이 장점이자 단점이라 볼 수 있다. 분량이 작아서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은 좋다. 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믿는다. 대신 사건 진행이 빨라서 중요하게 여겨졌던 인물이 너무 빨리 사망 등으로 퇴장하거나, 중요한 인물인줄 알았는데 잠깐 나오고 마는 조역에 불과해서 실망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마사와 켄 올리버 같은 중요인물의 심경 변화가 너무 빠른 것도 흠. 찰스와 그리넬이 최후에 맞부딪치는 것도 작극상으로는 필연적인 결과겠지만 역시 이야기를 서둘러 마무리 짓기 위한 적당주의로 느껴진다. 인물을 더 세밀히 그리고 신딕과 모브의 대립, 각 국가(국가라고 해야 할지 애매하지만) 내부의 생활상 등을 묘사하는 등 작가가 마음만 먹었다면 2배 정도의 분량으로도 만들 수 있을 풍성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미국을 둘러싼 세 개의 사회를 살펴보면 비중으로 보나 주인공의 위치로 보나 신딕 쪽을 좀 더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다. 신딕은 무정부주의자가 국가를 점유했을 때 일어날 법한 세상이다. 자유주의에 입각하여 세금, 억압, 통제가 없는 일종의 이상향이라고나 할까. 다만 지도자격 인물인 프랭크도 이런 체제가 영원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고 발언하여 한계를 인정하고 있다. 사회주의가 이론은 좋았으나 지구상 실제 국가에서 독재와 가난에 빠진 건 실행한 인간들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신딕 역시 도덕적이라 자부하는 소수 지도층이 존재하니까 그나마 유지하는 것뿐, 절대 권력이 절대 부패한다는 말처럼 오래 가지 못할 것이 뻔하며 프랭크도 이를 알고 있을 것이다.
 반대로 모브 쪽은 흔히 마피아가 지배하는 사회를 그렸다. 한 마디로 무력으로 지배하는 공포정치. 그리고 쫓겨난 미 정부는 군국주의, 파벌, 부패의 상징으로 그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고정관념(미국 정부가 정의롭고 무력 집단은 사악할 것이라는)에 도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비중은 적지만 마녀가 지배하는 부족이 있는데 신비, 주술, 미개함을 상징하고 있다. 딱히 미원주민을 연구한 것 같지는 않고(물론 그랬을 수도 있다) 그냥 원시부족의 한 전형으로 보인다. 많은 독자들이 비난하고 있듯이 작품 세계관에 잘 섞이지도 않은 데다가 치밀하게 짜인 설정도 아니어서 굳이 왜 넣었나 싶을 정도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극중 주요 인물인 테일러는 절대선이나 이상향은 존재할 수 없고 지금까지의 어떤 문명, 사회, 조직도 장단점을 남겼으니 역사를 바꾸거나 움직이거나 만들겠다는 시도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른다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며 결국 신딕이라는 위태로운 이상향을 지키는 수동적 태도를 보인다. 아마도 테일러는 작가의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이 아닐까 추측되는데, 찰스와 테일러의 대립과 이를 통해 변하는 신딕의 모습을 그린 속편이 궁금해지기도 하는 부분이다(물론 실제로 속편을 생각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작가가 이른 나이에 요절을 해서 속편은 나오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 중 누가 이기든, 찰스의 도전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게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폭도가 세운 나라 신딕이 정부가 있던 시절보다 더 좋은 황금시대를 구가하는 작품 속 미국을 보는 2015년 대한민국 독자의 감회는 남다를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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