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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 위의 불길
버너 빈지, 김상훈 옮김, 행복한책읽기, 2011년 1월(1권) 2012년 9월(2권)


pilza2 (pilza2@gmail.com http://www.pilza2.com)



 SF만이 아니고 점점 여러 분야에서 폭넓게 인용되고 있는 〈스터전의 법칙〉. 그러다 보니 얼마 전에는 자기개발서에까지 등장하면서 원래 뜻을 훼손하는 경우도 생겼다. 시어도어 스터전이 이 말을 하게 된 동기는 ‘SF는 전부 다 쓰레기다’라는 편견 및 비하에 대한 반박이었다(위키백과에서는 파레토의 법칙과 관련지어서 설명한다). 그런데 자기개발서류에서는 90%의 쓰레기엔 신경 쓰지 마라(즉 시간 낭비하지 말고 10%의 걸작만 취해라)는 식으로 인용한다. 스터전의 의도는 90%를 버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쓰레기까지 다 포함해서 하나의 장르 혹은 개념이라 할 수 있으니 100%를 다 차별이나 비하하지 말라는 뜻이었으니 거의 반대로 해석한 셈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는 외국 SF, 추리 등의 장르소설에는 스터전의 법칙을 대입하기 어려워진다. 각기 자기 나라에서 10% 안에 드는 걸작, 문학상 수상작, 베스트셀러 등이 엄선되어 소개되기 때문이다. 덕분에 한국에서 장르소설, 특히 SF를 쓰는 작가는 불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는 셈이다. 헤비급 선수들과 싸워야 하는 라이트급 권투선수 같다고 할까.
 그래서 저질, 양산품, 유치함의 상징인 스페이스 오페라 분야에서도 국내 출간작은 고르고 고른 최상품만이 소개되고 있다. 컬처 시리즈, 히페리온, 일리움&올림포스, 노인의 전쟁 시리즈, 보르코시건 시리즈, 은하영웅전설, 링월드 시리즈, 아너 해링턴 시리즈 등 스페이스 오페라의 최고로 손꼽히는 작품들만 나오고 있으니 어디를 봐서 저질이고 유치하다고 해야 하는지 난감해진다.
 물론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스페이스 오페라 작품은 영화와 TV드라마인 〈스타워즈〉와 〈스타트렉〉이며 과학 고증 등에서 비난을 받고 있음은 감안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여기서는 소설만 다루고 있으니 제외하겠다. 데스스토커 시리즈가 그나마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스페이스 오페라에 가까울까? 오히려 우리나라에서만 따지자면 이런 작품이 소수의 예외가 될 정도다.
 그리고 여기 소개하는 [심연 위의 불길]도 스페이스 오페라의 대표작이자 장르의 위상을 높여주는 작품의 하나로 손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우선 시작부터 화려하고 복잡하게 쏟아지는 용어와 꽤 낯선 세계로의 강제 진입은 장르의 팬이 아니라면 꽤 고전하게 만들 것 같다. 오죽하면 용어사전을 역자가 직접 만들 정도겠냐만, 그 중에서도 주목하게 만드는 부분은 신선, 다인족 등 SF답지 않은(?) 역어다.
 얼핏 거부감을 가질 독자도 있을 것 같은데 호기심에 인터넷 서점 리뷰를 훑어보니 반감보다 호평이 더 많아 보였다. 사실 SF라고 영어투성이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영어권 작가가 해당 독자들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영어로 쓴 것일 뿐. 비슷한 예로 별의 위치나 이름을 지구의 별자리에서 따서 부르는 SF의 관행 역시 지구인의 편의주의일 뿐이다. 별자리란 지구에서 본 시각정보를 기준으로 만들어졌기에 같은 별자리라도 실제 우주에서는 가까운 위치에 있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는 건 상식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최신 SF에도 이런 관행이 이어지고 있다.
 아무튼 필자 역시 이러한 역어, 가령 ‘신선’이 적합한 번역인지 아닌지는 의견이 나뉠 수 있겠지만, 이런 식의 한자어나 고유어 역어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미 판타지 쪽에서는 신기한 일도 아니다. 이쪽에서는 판타지와 무협이 섞이고 게임 판타지 분야로 넘어가면서 현대 사회와도 섞이기 때문에 온갖 과거와 현재의 용어를 함께 쓰는 게 당연시 된 것도 이유 중의 하나다. 물론 ‘드래곤’과 ‘용’을 구분해서 써야 한다든지 하는 깐깐한 의견도 있긴 하지만 적어도 독자들 다수의 반응을 볼 때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여담이지만 신선, 필경자, 장호 공화국 같은 역어를 보면 아무래도 [신들의 사회] 이후로 변하지 않은 역자의 취향으로 붙여진 것 같다. 특히 다인족처럼 음과 뜻을 모두 살린 역어에 대해서 은근히 자랑까지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진입이 힘든 편이지만 일단 낯선 용어와 설정에 익숙해지고 나면 이야기 자체는 복잡하지 않다. 크게 다인족에게 붙잡힌 생존자 남매와 우주선에 실린 중요한 보물, 즉 은하계의 위기를 구할 아이템을 찾아 떠난 라브나와 팸의 모험담이 번갈아 펼쳐지는데, 원형적인 모험담 플롯을 기둥으로 삼고 아이디어와 하드한 기술 스펙을 장식으로 꾸몄기 때문에 굉장히 뻑뻑하고 속독을 방해하고는 있지만 핵심 줄거리만 뽑아보면 꽤 단순한 편이다.
 이상과 탐욕으로 대립하는 다인족 세계, 남용하는 기술의 위험을 상징하는 신선과 역병, 헛소문으로 넘치는 은하계의 통신망은 각자 인류의 과거와 현재, 미래 모습을 은유하는 듯하다. 출생의 의문을 품고 운명에 저항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목적을 완수한 팸 누웬은 고대 신화 속 영웅의 일대기를 고스란히 재현한다.
 더 나아가 하필이면 생존자이며 이야기의 주된 인물이 어린아이라는 점은 낯선 세계의 진입을 독자와 함께 하는 감정이입의 대상으로 알맞다는 점 외에도 이 작품이 인물만이 아니라 한 종족의 세계와 은하계 전체의 성장을 상징하기 때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은하계 성장소설’이라고나 할까. 그야말로 우주적 상상력만이 표현해낼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스페이스 오페라의 한 방향을 보여줬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 참고 문서
스터전의 법칙에 대한 위키백과 항목(정확히는 ‘스터전의 폭로’가 맞다고 하지만 이미 ‘법칙’으로 널리 알려졌기에 본문에서도 그대로 썼다)
http://ko.wikipedia.org/wiki/스터전의_법칙
스터전의 법칙을 오용한 예시
http://newspeppermint.com/2013/05/21/dennett/
〈데스스토커〉를 평하며 낡은 스페이스 오페라를 비판한 고장원의 글
http://sfblog.tistory.com/1539
〈데스스토커〉도 나름의 재미와 의미를 갖고 있다는 alt. SF의 반박문
https://altsf.wordpress.com/2012/06/01/re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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