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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을 파는 가게
스티븐 킹, 이은선 옮김, 황금가지, 2017년 11월

 

고령임에도 꾸준히 좋은 수준의 작품을 써내는 작가는 흔치 않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아는 많은 유명 작가들은 이른바 전성기 때 발표한 대표작 몇 편으로 부와 명성을 얻은 뒤 말년에는 그로 인한 이름값과 인세에 기대 살아가기 마련이다.
평생 높은 수준의 작품을 쓴 작가의 예를 들자면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어슐러 K. 르 귄이 떠오르는데, 생존 작가로는 단연 스티븐 킹을 빼놓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원서가 2015년에 출간된 이 단편집은 수록작 대부분이 예순 넘은 나이에 쓴 작품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날카로움과 반짝임을 유지하고 있어 안 그래도 언제가 전성기인지 가늠할 수 없는 ─왜냐하면 지금을 비롯하여 작가생활 내내 다른 작가의 전성기를 능가하는 필력과 명성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킹의 작가인생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임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간혹 느긋하고 세세하게 불필요한 듯한 묘사에 공을 들이는 부분을 보면 할아버지의 지루한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젊은 신예작가의 주특기로 강요되는 ‘통통 튀는’ ‘발칙한’ 상상력이 곳곳에 들어 있다. 가령 사람을 잡아먹는 자동차, 모래 위에 써진 글자, 우리 세상에는 없는 평행세계의 책을 다운로드하는 킨들, 부고를 써서 실제로 상대를 죽이는 능력 등등.
앞에서 세세한 묘사를 불필요한 것처럼 언급했으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일상의 세밀한 묘사로 독자를 몰입시킨 다음 중반 이후부터 환상적인 사건으로 공포에 사로잡은 다음 반전이나 여운을 주는 결말로 맺는 수법은 킹이 자주 쓰면서 다른 어느 작가보다도 뛰어난 주특기다. 어떻게 보면 스타일을 이미 확립시킨 작가가 다양한 소재를 넣어가며 만들어낸 변주들을 모은 단편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중에서 특히 인상에 남았던 단편을 골라 소개해본다.


 130킬로미터
사람을 습격하는 괴물 이야기지만, 습격당해 금방 퇴장할 조연의 인생사를 시시콜콜할 정도로 꼼꼼하게 소개했다. 속편을 만들 수도 있는 결말도 인상적.

모래 언덕
스티븐 킹 버전 데스노트? 초반을 읽다 보면 전체 이야기와 반전을 예측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거장다운 노련한 솜씨는 여전하다.

어느 못된 꼬맹이
호러이되 독자에 따라 판타지로도 스릴러로도 읽힐 수 있는 단편.
핼러스가 죽인 아이가 정말 그를 괴롭힌 초현실적인 존재인지 평범한 아이를 오인한 것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진 않는다. 변호사에게 옮겨진 이유도 핼러스가 죽어서 주인 잃은 존재가 찾아간 것인지, 다른 사연이나 이유가 있는지 알 수 없다. 내부 개연성보다 분위기를 중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죽음
다른 작가가 쓴다 해도 앞부분 90%까지는 똑같겠지만 스티븐 킹답게 남은 10% 결말부에서 이를 뒤집는다. 일반적인 문학이라면 억울한 죽음으로 그려야 할 사건에 흥미로운 반전을 제시한다.

우르
킨들로 발표한 소설에서 킨들을 소재로 한 점이 재미있다. 우연히 사게 된 킨들에서 다른 평행세계의 작품을 읽게 되고 미래에 일어날 비극적인 사건까지 알게 되어 이를 막고 미래를 바꾸려는 이야기다.
유명 작가들이 더 오래 생존하여 혹은 활동의 제약을 극복하고 더 많은 작품을 썼다면 어떨까, 라는 상상은 독자들을 즐겁게 해준다. 특히 에드거 앨런 포처럼 요절한 천재라면 더욱더. 그래픽노블 〈샌드맨 시리즈〉에도 유명 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소설이라는 소재를 다룬 적이 있어 생각이 났다.

컨디션 난조
일상 속에 숨겨놓은 비밀이 아찔한 스릴을 만들어내는 심리 공포물.
스포일러라 구체적으로 밝히기 어렵지만 이와 내용이 흡사한 단편이 있다. 다만 그쪽은 처음에는 그저 상상이었다가 어느 순간부터 현실이 되었는데 아직도 상상이라고만 여기며 지내는 이야기고, 이쪽은 현실을 상상으로 감추며 지내는 이야기라는 차이점이 있지만 소재나 분위기가 꽤 비슷하여 흥미로웠다.

철벽 빌리
사실 야구에 대한 지식과 흥미가 없는 데다가 단편집 수록작 중에서도 분량이 많은 편이라, 책장을 설렁설렁 넘기며 재미없게 읽었다. 그러다 마지막 몇 쪽을 남기고 분위기가 급변하여 엄청나게 재미와 몰입도가 증가했다가 그대로 끝난다.
출처는 기억 안 나지만, 스티븐 킹은 자신이 드라마를 제작한다면 마지막회 전까지는 평범하고 소소한 이야기를 그릴 거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물론 그 마지막회가 얼마나 오싹하고 공포물스러운지는 이전까지 쌓아놓은 평범한 이야기가 얼마나 처절하게 뒤집히고 무너지느냐에 달렸을 것이다. 이 단편이 그런 킹의 생각을 잘 표현한 것 같다.

부고
이것도 또 다른 형태의 킹 버전 데스노트인가? 이번에는 부고를 쓰면 그 대상인물이 실제로 죽는 능력의 소유자가 등장한다. 좀 더 데스노트와 비슷해진 셈인데, 부고 내용 그대로는 아니라는 점에서 후반의 내용을 암시한다. 결말에 불만을 품을 독자도 있을 듯하지만 킹은 이것을 최선의 해결책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여름 천둥
핵전쟁으로 인한 문명 멸망과 소수 생존자의 죽어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그린 포스트 아포칼립스 단편. 킹은 이전 출간된 『종말 문학 걸작선』에 단편 「폭력의 종말」을 실은 적이 있는데, 종말의 독특한 원인을 담은 그 단편보다 이쪽이 더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전형적이고 익숙한 종말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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