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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르베로스의 다섯 번째 머리
진 울프, 안태민 옮김, 불새, 2016년 6월

1) 그의 글을 절대적으로 믿어라. 답은 거기에 있다.
2) 그의 글을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믿지 마라.
─ 닐 게이먼, 「진 울프를 읽는 방법」 중에서


사실은 리뷰를 쓸지 망설였다. 워낙 난해하고 다양한 상징을 넣은 작품이라 전부 이해했는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왜 케르베로스인지, 왜 프랑스계와 영국계의 대립인지, 5호를 기른 진짜 목적은 무엇인지, 마쉬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지, 토착 종족은 실제로 어떻게 되었는지, 본작을 기억과 자아정체성의 이야기로 해석해도 되는지, 아니면 냉전과 매카시즘의 은유로 해석해도 되는지…… 수많은 의문에 답을 내리지 못한 채로 남았다.
그럼에도 쓰게 된 이유는 워낙 작가소개와 서지정보가 부실한 〈불새 과학소설 걸작선〉의 고질적 문제 때문이다. 이전 다른 작품을 다룰 때도 언급했듯, 불새 걸작선이 남긴 가장 큰 의미와 성과는 작품보다 작가에 있다. 진 울프의 단독 단행본이 처음으로 대한민국에 소개된 기념작이니 그에 걸맞게 작가소개라도 보충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선 결과가 이 리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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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울프는 미국의 환상·과학소설 작가로 1931년생이지만 아직도 활동하고 있는 장수 현역작가다. 625 전쟁에 참전했다는 이력이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눈길을 끄는 부분이다.
네뷸러상, 세계환상문학상, 존W.캠벨 기념상, 로커스상 등 각종 상을 중단편으로 두루 수상하고 1996년에 세계환상문학상 평생공로상, 2007년에 과학소설 명예의 전당, 2013년에는 SF작가협회 28대 그랜드마스터로 선정되었다.

대표작으로는 『새로운 태양의 서(The Book of the New Sun)』 및 그 속편들을 아우르는 〈Solar Cycle〉 시리즈를 들 수 있다. 먼 미래 태양이 식고 문명이 멸망한 후의 지구에서 펼쳐지는 판타지소설로, 다잉 어스(Dying Earth 문명이 사라졌거나 퇴보한 지구에서 펼쳐지는 환상소설 및 과학소설의 서브장르로 잭 밴스를 창시자로 본다) 분야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참고로 10년도 전에 모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한다고 예고한 이후로 소식이 없는 상태다. 그 출판사가 아직도 판권을 갖고 있을 가능성은 낮으니 관심있는 출판사가 있으면 나서주기를.
우리나라에서 현재(2019년 3월 기준) 진 울프의 출간작은 단편뿐으로 『오늘의 SF 걸작선』에 수록된 「화성의 수호자들」과 『종말 문학 걸작선 2』에 수록된 「음소거」가 있다(더 있으면 제보 바람).

본작은 진 울프의 두 번째 장편소설로 1972년 출간되었다. 정확히는 연작중편 3편이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는 구성인데, 첫 번째 중편이자 표제작이 데이먼 나이트가 편집한 인기 과학소설 앤솔러지 시리즈 『오빗(Orbit)』 10호에 수록되었고, 이후 중편 두 편을 추가하여 단행본으로 출간한 픽스업 방식의 장편소설이다.
무대는 지구에서 약 20광년 떨어진 이중행성 세인트 앤과 세인트 크로이. 처음에는 이곳에 프랑스계 지구인이 식민지를 건설했고 이후 영국계 지구인이 전쟁을 통해 프랑스계를 몰아내고 식민지를 차지한 이후 수백 년이 지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특히 세인트 크로이는 노예제도와 군사정부의 압제가 이어지며 세인트 앤과의 대립이 심해진 상태다.
한편 세인트 앤에는 토착 종족이 있었는데 프랑스계의 식민침략과 함께 멸종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문명의 흔적을 남기지 않아 어떤 존재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일부의 주장에 따르면 어떤 대상이든 모방하여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 인간과 똑같이 변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사실 그들은 멸종되지 않았고 오히려 인간을 멸종시킨 후 자신들이 인간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본작에서는 ‘베일의 가설’이라고 부르며 작품 전체에서 중요하게 취급하는 설정이다.
이후 수록작의 간단한 내용을 소개한다.


케르베로스의 다섯 번째 머리
세인트 크로이에 사는 과학자 겸 사창가 주인의 아들인 주인공은 진짜 이름이 없이 ‘5호’라고 불리며 동생인 데이비드와 함께 자란다. 5호는 가끔 아버지와 면담을 하며 약물을 투여당하고 기억을 잃는 등 알 수 없는 체험을 당한다. 이후 자신이 아버지의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리 큰 충격을 받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죽으면 그의 재산과 지위는 고스란히 자신의 것이 될 테니까.

존 V. 마쉬의 ‘이야기’
아마도 옛날 세인트 앤에서 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토착 종족의 이야기. 주인공 ‘모래 걸음’의 성장과 모험을 신화적이고 민담풍으로 그려냈다. 본문에서 언급은 없지만 제목을 볼 때 모래 걸음이 존 V. 마쉬가 되었으며 곧 1부에 등장하는 인류학자 마쉬인 것으로 보인다.

V. R. T.
냉전시대 공산국가를 연상시키는 세인트 크로이 군사정부의 군관이 체포된 마쉬 박사를 조사하며 각종 심문기록과 마쉬의 옥중일기 등을 살펴본다. 본문에서 이러한 여러 기록들이 교차편집되어 등장한다. 마쉬는 세인트 앤에서 온 간첩이라는 의심을 받고 체포되었고 혹독한 심문과 긴 수감생활을 통해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다 기억과 정체성에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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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표지 모음

책의 일러두기 항목에서 ‘독자에 따라 해석과 내용이 달라지는 난해한 작품’이라고 지레 겁을 주고 있을 정도로 만만치 않은 내용이기는 하다. 필자 역시 서두에 언급한 많은 수수께끼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좀처럼 잊기 힘든 강인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표면적으로는 외계인의 신체강탈을 다룬 서브장르로 구분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로 인한 의미는 기존의 대표작 「거기 누구냐?」, 『바디 스내처』와 정반대가 되어버린다. 언급한 두 작품이 ‘우리 안에 있는 적’에 대한 의심과 공포를 다룬다면 본작은 그런 의심으로 인한 오해와 폭력을 다룬다(매카시즘의 은유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습에 인간의 기억까지 가지고 있다면 인간이라 여겨도 되지 않는가?’라는 정체성의 문제로까지 확대되고 있어 해석의 여지는 커진다.
여기에 외국 독자들이 제기한 여러 수수께끼와 그에 대한 독자적인 고찰 및 해석까지 포함하면 더 복잡해진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겠다.

  • 서가에 버너 빈지의 단편집이 있다는 서술이 나오는데, 이 소설이 발표된 1972년에는 아직 버너 빈지의 단편집이 나오지 않았다(첫 단편집은 1986년 출간). 물론 미래에 나오리란 희망과 기대를 담았을 수 있지만, 당시 독자에게 화자를 믿기 어렵게 만드는 암시가 될 수 있다.
  • 별의 이름에도 의미가 담겼다. 세인트 앤(Sainte Anne)은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성 안나를 가리킨다. 가톨릭에서 안나는 마리아를 원죄 없이 잉태했고, 따라서 마리아가 예수를 처녀 잉태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곧 세인트 앤의 토착 종족에게 원죄 즉 죄의식이 없음을 의미할 수도 있고, 작중에서 등장한 복제인간 기술을 암시하기도 한다.
  • 세인트 크로이(Sainte Croix 프랑스어 표기법으로는 크루아가 맞는 듯하다)는 성십자가를 의미한다. 「존 V. 마쉬의 ‘이야기’」 서두에 인용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종교개혁 때 장기간 감금되었고 이때 신비한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존 V. 마쉬의 ‘이야기’」는 그런 계시의 기록일 수 있다. 남자에게 붙인다는 ‘존’ 자체가 ‘요한’에서 온 영어식 이름이기도 하고. 진 울프가 가톨릭 신자였다고 하니 여기서 모티프를 따왔을 가능성이 크다.
  • 존 V. 마쉬는 일반적으로 인류학자 마쉬를 가리킨다고 보지만 V를 로마숫자 5로 보고 5호를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다.
  • 그 외에 여기서는 생략하지만 『새로운 태양의 서』 등 작가의 후기작에서 보이는 설정이나 명칭의 유사점도 많이 발견된다고 한다.

한편 본작이 ‘믿을 수 없는 화자’ 작품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위키백과 Unreliable narrator 항목에서 본작을 예시목록에 포함시켰다). 「케르베로스의 다섯 번째 머리」는 주인공이 소년시절을 돌아보는 회고록 형식이고 「V. R. T.」는 심문기록과 옥중일기의 혼합 형식을 취한다. 「존 V. 마쉬의 ‘이야기’」 역시 제목을 보아 주인공이 과거의 기억을 기록한 형식으로 보인다. 즉 이들 세 중편 모두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정확히 기술한 것이 아니라는 암시를 담고 있다. 기억이 잘못 되었을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할 가능성도 있으며 심문기록은 조작되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V. R. T.」에서는 일부 기록을 은폐 혹은 무시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따라서 독자는 굳이 소설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나만 이상하게 느끼는 건가? 나만 이해 못했나?’ 라는 의문이 들 때는 조금 안심해도 좋다. 작가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의도했을 가능성이 크니까.
참고로 이런 믿을 수 없는 서술자를 내세우는 방식은 『새로운 태양의 서』 등 작가의 후기작에서도 종종 이용되었다고 하니, 진 울프 창작세계의 기초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물론 다른 작품들이 더 번역 소개된 다음에야 한국 독자에게도 중요해지겠지만.
이렇듯 〈불새 과학소설 걸작선〉의 사실상 마지막 작품은 크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 불새가 남긴 작은 불씨가 사라지지 말고 반 보그트, 잭 밴스, 킴 스탠리 로빈슨, 진 울프, 코드웨이너 스미스(예고했으나 출간하지 못했음) 등의 작품이 더 많이 번역 소개되기를 바란다. 그때가 되면 불새가 더욱 커다란 불길이 되어 부활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참고 문헌
위키백과 영문판 : Gene Wolfe, The Fifth Head of Cerberus, The Book of the New Sun, Unreliable narrator 항목
Encyclopedia of Science Fiction : Gene Wolfe 항목
위키백과 한국어판 : 원죄 없는 잉태 항목
How To Read Gene Wolfe by Neil Gaiman (Fantasy & Science Fiction)
Internet Possibilities, Gene Wolfe, and The Fifth Head of Cerberus (Matthew David Surridge)
"The Fifth Head of Cerberus" - 「ケルベロス第五の首」 (ultan.net)
십자가의 성 요한 (가르멜 한국 관구 성 요셉 수도회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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