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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심사단 B조 김보영, 앤윈입니다. A와 B는 매달 무작위로 바뀝니다.


10월 16일부터 11월 15일까지 올라온 단편 중에서, [심사제외]를 신청하신 니그라토님의 ‘인류 멸종의 기원’, ‘우리는 그의 SF에 산다’를 제외하고 다섯 작품을 심사했고, 가작으로 엄길윤님의 ‘광고’, 조나단님의 ‘소녀’를 선정했습니다.


 

 

그의 할로윈 - 별들의 대양


A : 단순하고 간결하지만 강한 인상이 있는 소설입니다. "당신이 죽었다"는 선언이 너무 일찍 이루어진 감이 있지만, 소재들의 배열이 안정적이어서 지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할로윈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죽은 자의 이야기를 불러낸다는 아이디어도 신선하고, 마무리도 자연스럽습니다. 원고가 마지막을 장식하는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었는데, 그에 비해서는 비중이 작은 것이 좀 아쉽습니다만 소설 전체의 분량이 길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인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그 점에 있어서는 반전에서 짜릿함을 느끼기에는 분량이 촉박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감안하였을 때 전반적으로 촘촘하게 잘 짜여진 소설입니다.


B :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도 왠지 묘하게 비켜가는 면이 있어서 반전에서 조금 놀라면서 웃고 말았네요. 그리고 전체를 다시 돌아보면서, 모든 부분이 어긋남 없이 자리를 잡는 것을 봅니다. 할로윈, 심령술사, 이게 다 무슨 의미인가 했던 복선들이 결말에서 제 역할을 합니다. 소재나 구성이 새롭고 신선하지 않더라도, 모든 부분이 제 역할을 하는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지요.
다소 아쉬운 면이 있다면 실제 사건이 어떤 사건이고 범인은 정확히 누구였는지 잘 드러나지 않은 점이네요. 이 구조에서 별로 중요하지는 않은 점이지만 궁금증을 남깁니다.

 

 

날개 - 나비바람


 A : 이 소설에는 붉은 비의 이미지와 새/비상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미지가 이미지만으로 존재합니다. 아버지가 고문 후유증을 겪고 있다는 서사가 있습니다만, 이 서사는 이미지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못합니다. 이미지를 강조하는 데에 너무 많은 힘을 쏟은 것일까요? 서사에도 많은 빈틈이 보입니다.


이렇게 끔찍한 고문을 겪은 아버지가 어떻게 희은을 지금과 같이 잘 키울 수 있었습니까? 어째서 이런 심각한 트라우마를 가진 아버지를 두고서도 부녀 관계에는 그다지 이상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물이 환경 속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 입니다. 이미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인물을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B : 아버지는 독재 시대에 빨갱이로 몰려 고문을 받다가 정신이 나가신 듯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그 설정은 단지 설정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구체적인 것이 없고, 신문기사만큼도 현장감이 없어요. ‘나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교과서적인 말은 현실성보다는 관념성을 더합니다.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다’는 아버지의 말도 관념적이기만 합니다.


이 정도로 관념적일 바에는 차라리 설정을 넣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겁니다. 깊이 파고들지 않는 이야기를 전면에 배치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소설은 청중들 앞에서 수만 단어의 말로 쏟아내는 거짓말과 같아요. 깊이 연구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 금방 드러납니다.
붉은 비의 환상과 새에 대한 동경이라는 주제가 좋은 것인가 하면 그것도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로 원초적인 환상이거든요. 날개에 대한 동경은 아마 사람이라면 대부분 갖고 있을 겁니다. 꿈속에 늘 등장하고 아이들의 환상에 언제나 등장하죠. 모든 사람이 하는 환상을 독특하게 그려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붉은 비와 새의 환상은 감각적이고 아름답습니다만,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는 것이 없어 공허하기만 합니다.

 

 

쥐의 몸, **의 뇌 – gock


A : 사건이 지나치게 설명적일 뿐더러, 진행과정이 선언적(!)입니다. 지능이 곧장 사고의 발전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요. 앵무와 쥐는 인간의 언어로 의사를 전달합니다. 인간의 지능과 사고력의 연결에 대해 서술하기 위해서는 사고의 도구인 언어에 대한 깊은 고찰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상황 자체에 대해 더 생각을 발전시켜 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단순한 사건 나열이 아니라, 사건을 보여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B : 사고가 전기적 신호의 집합체라는 선언으로 시작하여, 동물의 지능을 성장시키는 데에 열중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흥미로운 전개였지만 결말이 지나치게 예측 가능합니다.
예측 가능한 건 사실 상관없어요. 세상의 수많은 좋은 이야기들이 예측 가능한 결말을 내니까요. 하지만 이 소설은 서두에 80의 힘을 주었다면 결말은 10 정도의 힘으로 끝나버립니다. 결말에도 80을 배분했다면 아마 똑같은 결말이었어도 훨씬 흥미진진했을 겁니다.
어쩔 수 없이 조지 R. 마틴의 ‘샌드킹’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입니다. 지금 구할 수 있는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혹시 보지 못하셨다면, 그리고 찾아보실 수 있다면, 그 작가가 예측할 수 있는 결말을 향해 얼마나 많은 힘을 들이는지 보아 주세요.

 

 

피그말리온넷은 왜 다운되었나? - 유이립


A : SNS란 매우 사람들에게 밀착되어 있는 매체이며, 실제로 현대의 인간들은 스마트폰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 세계는 일종의 중독적 디스토피아 같고, 우리는 현실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죠. 이 소설은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안타깝게도 그 이야기 외에 다른 이야기가 별로 없습니다.


사실 이런 걱정은 10년 전, 20년 전에도 했던 것들입니다. 우리의 가상현실이 실제 현실을 대체해 버리지 않을까, 우리의 진정한 삶은 그렇다면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등등. 그래서 실제의 현실이 대체되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거든요. 소설 내부의 캐릭터는 매력적이며, 소설 속에서 창조주가 가진 역할을 표현하는 방식은 인내심있게 흥미롭습니다. 작가가 창조주에 대해 함부로 풀지 않으려고 애를 쓴 흔적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캐릭터에 공을 들인 것에 비해 SNS의 디스토피아적 측면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는 않은 듯 합니다. 이 소설에서 더욱 중요한 부분은 그 시스템인데도 말이지요. 존재하는 무언가를 과장해서 디스토피아를 만들기 위해서는 훨씬 더 깊은 고찰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기술이 그것을 과장하지 않은 데에는 분명 사회경제적 이유가 있을 것이니까요.


B : 작가는 디지털화가 극대화된 세상을 그려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성실하고 열심히 세계를 짰는데, 안타깝게도 그렇게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소설 내에 등장한 말을 그대로 인용하고 싶어요. 왜 미래에도 사람들은 스마트폰만 쓰나요.
제가 어렸을 때에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라고 했을 때에 저는 단지 현재 있는 것을 더 크게 만들기만 했어요. 왜냐하면 그 이상을 상상할 수 없었으니까요. 저는 그때 달걀만한 밥알이며 수박만한 토마토 같은 것을 잔뜩 늘어놓았지요.
 
이 소설의 사람들은 지금보다 약간 더 디지털과 스마트폰에 의지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지금 있는 것의 재생산과 확대에 불과해요. 설정은 길고 많고, 세밀하고 지엽적입니다. 물론 미래에 스마트폰만 써도 되고, 설정이 많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 설정들이 유기적이지 않아요. 유기적이지 않은 설정은 서로를 방해합니다. 이를테면 이 세계의 사람들은 잘 돌아다니거나 서로 잘 만나지 않는다는 설정이 있죠. 그렇다면 카페나 포장마차, 와인바 같은 곳은 장사가 안 돼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이 정도라면 현실을 그대로 썼어도 좋았다 싶어요. 약간만 평행세계로 만드는 거죠. 그랬으면 길고 의미 없는 설정나열은 넘어가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거예요.


서술과 사람들의 대화가 마치 신문 칼럼에 등장하는 논설 같은 면이 있어요. ‘게임 보급률이 높아지자 폭주족은 탈선 청소년이 아닌 매니아들이 대신했다.’ ‘노친네들이 현시대가 정이 없다고 푸념하지만 우리는 피그넷 상으로 정을 나눈다.’
이런 것은 독자가 소설에서 체험할 수 없는 말이고,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말들을 지워내고 보여줄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면 소설은 훨씬 압축적이고 감각적이 될 거예요.

 

 

광고 - 엄길윤


A : 재밌고 무섭습니다! 그냥 단순하게 서사만 정리하면 우스울 수도 있는 이야기를 공포로 몰고 가는 필력이 대단합니다. TV와 현실 사이가 구분되지 않는 데에서 오는 불분명함, 바다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분명함을 공포라는 한 가지의 감정으로 밀어붙이는 추진력에 감탄했습니다.


B : 공포와 웃음이 함께 하는 단편이군요. 어설프게 썼으면 피식 웃고 넘어갈 수도 있는 소재인데, 전반부에 몰아치는 해일의 살아 숨 쉬는 생생한 묘사 덕에 후반부의 부조리가 극대화되고, 사람들이 느낄법한 비현실적인 공포 역시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짧은 이야기인데도 충실하고 단단합니다.


: 11월 독자단편 가작으로 선정합니다. 축하드립니다.

 


소녀 – 조나단


A : 흥미진진한 소설입니다. 추리소설, 그 중에서도 하드보일드의 구성을 따 와 SF와 현실 속의 여러가지 불안 요소들을 결합시킨 솜씨가 세련됩니다. 주인공의 캐릭터를 드러내는 방식은 전형적이지만, 어떤 방식으로 전형성을 살려낼 지를 충분히 작가가 인지하고 있으며, 중국인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전지구적 시스템으로 드러내는 형태도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몰입하면서 읽었습니다.


몰입하면서 읽은 독자로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분량입니다. 분량이 적게 빠지면서 설명해 주어야 할 부분들을 적당한 장면들(장기가 모두 빠진 소녀/ 장기를 이식받은 소녀의 살해)을 드러내면서 눙쳐버린 느낌입니다.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조금 더 첨예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B : 시작부터 주인공을 납치시켜 의자에 묶어놓는 것으로 독자를 확 끌어당깁니다. 온 몸이 장기이식으로 팔린 듯한 소녀의 등장으로 두 번째로 독자를 붙들고요.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SF추리는 제가 알기로 정말 어려운 장르예요. 추리라는 것은 독자를 향한 일종의 게임이고, 좋은 추리소설은 어느 정도의 공정성을 요구합니다. 독자가 열심히 노력하면 작가보다 먼저 범인이나 사건의 실체를 맞출 수 있는 이야기인 것이 좋죠. 하지만 SF의 세계에서는 온갖 것들이 등장하죠. 뭐가 등장할 지 알 수 없는 세계에서 공정한 게임을 만든다는 건 쉬운 도전이 아닙니다.
사실 제가 SF 추리에서 기대하는 것은, 소설 전반에 등장한 현실에 없는 무엇인가가 후반에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 중대한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 세계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트릭이 나오는 거죠. 그게 아니라면 굳이 두 장르가 결합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굳이 추리소설이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고, 탐정이 폼 재면서 맞추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주인공도 사랑스럽고요.
다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창이 추리를 하는 장면이 의뢰인과 그 대리인의 정체를 맞추는 데에 다 쏠려 있다는 겁니다. 정작 소녀는 소문 한 번 내고 바로 찾아요. 그래서 초반에 독자를 확 끌어당긴 것에 비해 추리과정에서는 힘이 좀 빠지는 편입니다.


: 11월 독자단편 가작으로 선정합니다. 축하드립니다.


거울 독자 우수단편에 선정되신 분들께는 책을 한 권씩 보내드립니다.
엄길윤님과 조나단님은 pena12  @  gmail.com
으로 우편물 수령할 주소, 성함, 전화번호(택배 발송시 필요)를 보내주세요.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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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나단 13.12.01 16:32 댓글

    작은 지적에도 부끄럽고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것도 평을 들으며 감내해야할 부분이겠죠... 언제나, 감사합니다.  

  • No Profile
    엄길윤 13.12.02 01:40 댓글

    귀중한 시간을 내 평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쓰긴 했는데 좋게 평가해 주실 줄은 몰랐어요. 더 열심히 써야겠다는 각오를 다져봅니다!

  • No Profile
    별들의대양 13.12.09 15:55 댓글

    앗, 제가 너무 늦었군요. 평 감사합니다! 선정되신 두분들도 축하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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