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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8월 독자우수단편 선정단 박애진과 김이환입니다. (A와 B는 계속 바뀝니다.)

홀수달은 날개님과 김이환님이 심사를 하셨지만 박애진님이 홀수달로 옮기고 날개님은 그만두시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고생하신 날개님에게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짝수달은 이전처럼 앤윈님과 김보영님이 심사를 맡아주십니다.

폭염이 계속되는 여름이었으나 많은 수의 글이 등록되었고 모두 이번 여름의 열기 못지않게 뜨거운 에너지가 넘치는 흥미로운 글이었습니다. 독자 분들이 댓글로 의견도 주고받는 모습도 반가웠습니다. 선정단의 리뷰가 포괄하지 못하는 폭넓은 의견을 얻어가셨으면 합니다.

7월 16일부터 8월 15일까지 올라온 11편의 단편을 심사했습니다. 이번 달에는 깃님의 ‘발톱’을 가작으로 선정하였습니다.



모래 기도서 - 먼지비

A : 다른 작품을 인용하거나 패러디, 오마주하는 것 또한 창작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반 이상을, 그것도 가장 중심이 되는 소재와 갈등을 다른 작품에서 빌려온 것을 창작 작품으로 볼 수 있는지는 고민이 필요합니다.
창작에 대한 작가의 고민 또한 너무 상투적입니다. 고통을 제대로 그렸을 때에만 고통을 벗어난 희열이 빛나고, 그만한 희열이 있을 때에만 그 희열을 감당하지 못해 더 큰 고통을 맛보는 한 유한자의 절망 또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작위적이고 꾸민 문장을 주로 썼는데, 내용과 어울리는 방식이며, 사이사이 아름다운 구절들도 보였지만 자연스럽지 못한 문장도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장식적이고 과장된 문장을 쓸 때일수록 어색하지 않도록 신경 써서 퇴고하시기 바랍니다.

B : 보르헤스의 <모래의 책>을 읽었을 때 속편을 상상했습니다. 도서관에 숨긴 책을 다른 사람이 발견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상상했죠. <모래기도서>는 제가 상상한 속편을 만난 느낌입니다. 글은 주인공의 연극배우처럼 장황한 대화를 강조한 다소 코믹한 분위기로 출발합니다. 이 의도된 거창함은 주인공의 고뇌가 깊어진 다음에는 진짜 거창한 고뇌로 변합니다. <모래기도서>는 창작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작가들이 글을 쓰면서 겪는 다양한 감정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글이 잘 써질 때는 평범한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초월적인 것을 창조해낸 자신에게 도취되다가 능력이 창작욕을 따라가지 못하면 견딜 수 없어 고민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여러 권력을 굴복시킬만한 강렬한 창작물을 만드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거창한 문장에 담겨 있습니다. 글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내용은 간략합니다. 창작자들의 몽상을 이야기로 풀어내고 마지막에 단순한 교훈을 보여주는 것이죠. 이를 진지하게 파고든 흥미로운 글이었습니다.



기린麒麟 - 임재영

A : 신화나 우화로 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표현 하나하나 공들여 단어를 고르며 썼습니다. 아쉽게도 초점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기린을 통해 아이들, 그 중에서도 고아들의 눈물을 이야기하고 싶었나 했는데, 눈물을 다 담지 못하는 기린의 슬픔으로 이야기가 옮겨가나 싶더니, 마지막은 거북이 기린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끝납니다. 짧은 글일수록 꼭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집중해주시기 바랍니다.

B : 신화 같기도 하고 동화 같기도 한 글입니다. 눈물을 뿔에 담는 동물인 기린의 신화적인 이야기로 시작해서, 눈물을 담는 설정을 늘려가면서 동화로 변합니다. 인간들이 너무 많은 눈물을 흘리자 기린은 아이들의 눈물만을 담기로 결정하는데, ‘아이’가 선택되면서 글이 더 동화적으로 변하는 느낌입니다. 눈물을 담느라 고통스러워하는 기린의 눈물을 곁에 있는 거북이 담아주고 싶어 한다는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눈물을 담는 뿔’이나 ‘기린과 거북이의 대화’처럼 등장하는 이미지가 아름답습니다.



사소한 걸음 - 룽게

A :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우주인을 달에 보냅니다. 달에 가는 과정을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그리고자 노력한 점이 돋보입니다. 윤중의 부인인 정화가 준비한 대사 한 마디로 이야기에 긴장감을 주며, 정화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드러나는 부분도 인상 깊었습니다. 다만 중반이 넘어 갑자기 이혼 이야기가 나오며 이야기의 방향이 달라진 점이 걸립니다. 결말을 아내와 윤중의 이야기로 마무리 짓고자 했다면, 아내와 윤중 사이에 문제가 있다는 암시가 더 빨리 나왔어야 합니다. 공들여 달에 가는 과정과 과정 속에서 벌어지는 위기를 서술했는데, 갑작스럽게 개인사로 결말이 나면서 허탈해졌습니다. 마지막에 도망을 위한 사소한 걸음이었다고 서술한 것 역시 뜬금없었습니다. 시기도 맞지 않습니다. 달에 가는 우주인이 되기로 결심한 건, 분명 아내가 외도 사실을 알기 전이었으니까요.
달에 닿는 인류의 놀라운 발걸음도, 사실 알고 보면 한 인간의 사소한 도피행각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 초반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달에 발을 디딘 우주인이 될 윤중이라는 인물의 내면이 사실 작고 보잘 것 없는 인물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어 더 설득력을 주었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B : 주인공 윤중은 부인인 정화와 불륜관계인 명희 두 명의 여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주인으로서 한국 최초로 달 착륙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 두 사건은 윤중의 머릿속에서 고통스러운 생각들을 만들어내는데 그 상념이 글의 주요한 사건입니다. 글은 윤중이 겪는 어려움을 흔들리는 계기판의 바늘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윤중은 사고를 극복하고 달에 착륙하지만 불륜은 해결하지 못합니다.
이 글은 하드SF를 연상시킵니다. 글 속에 나열되는 여러 용어 때문이기도 하고, 불륜을 다루고 있지만 감정은 절제해 서술하는 건조한 분위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건조한 이야기의 결말에 불륜이 폭로될까봐 두려워 벌벌 떠는 어리석은 모습의 주인공을 배치한 것이 글의 유머러스한 반전입니다. 하지만 글을 읽다 보면 꼭 반전이 필요할까 싶습니다. 인물들이 모두 이성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전 세계에 불륜을 폭로하는 깜짝 쇼의 주인공이 될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또한 글은 윤중의 시선에서만 사건을 설명하는데 정화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 독자가 긴장할 단서가 부족합니다. 이 점을 반영해 결말을 수정했으면 합니다. ‘사소한 걸음’이라는 재치 있는 제목, 이에 잘 어울리는 재미있는 이야기,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단단한 문장과 구성이 돋보이는 글입니다만 결말은 다소 수정되었으면 합니다.



검은 구름 - 강민수

A : 검은 구름에서 내리는 눈을 맞으면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의지할 상대는 서로 밖에 남지 않은 남녀는 검은 구름을 피해, 감정을 잃지 않기 위해 서해안으로 달아납니다.
서해안으로 도망 온 다른 사람들도 감정을 잃지 않기 위해 달아난 사람답게 음악을 연주하고, 그림을 그리며 문학에 대해 토론합니다. 하지만 서해안에서는 더 달아날 곳이 없습니다. 감정의 결여는 결국 예술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분량 안에서 할 수 있는 만큼, 그려야 할 이야기만 그렸습니다. 좀 더 욕심을 내봤다면 어떨까 합니다. 인류가 감정과 예술을 잃어버릴 수 있는 상황을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주를 이루어 비극을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지나가다 화가를 스치고, 서해안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예술가로 보이는데, 예술가만 감정을 잃는 게 두렵진 않을 겁니다. 혹은 예술가라면 순응하듯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저항하거나 절망할 지도 모릅니다. 바다로 뛰어든 사람이 있기는 해도 서해안까지 도망쳐 온 인물들이, 감정을 잃어버리게 하는 치명적인 바이러스 앞에서 태도가 너무 비슷합니다.
어둠이 있어야 빛도 있습니다. 최선을 다 하나 어쩔 수 없다면 수용하는 사람을 그리고 싶었다면, 반대되는 사람, 하다못해 이건 말도 안 된다며 깽판을 치는 사람이라도 그려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서로 사이좋게 음식을 나누며 마지막까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절망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두 인물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초연할 수 있는지, 이 인물들에 대해서도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B : 사람들은 검은 구름을 피해 도망칩니다. 종말을 영원히 피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리고 종말을 마주하면서도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감정을 잃지 않으려 애씁니다. 글을 읽고 나서 곱씹어보면 아름다운 내용이지만 글을 읽는 중에는 몰입하기 힘듭니다. 설득이 되지 않는 설정 때문입니다. 구름에서 왜 눈이 내리는지 그리고 눈 속에 왜 바이러스가 있는지 의문을 가지다 보면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어렵게 됩니다. 차라리 검은 구름이 감정을 없애는 이유를 아예 설명하지 않으면 어떨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혹은 검은 구름이 감정을 없애는 것을 넘어서 더 극단적인 일을 만들면 어떨지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인물들이 느끼는 절망이 더 절실하게 독자에게 닿을 것입니다. 종말을 앞에 두면서도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타이타닉이 침몰하는 순간을 연상시키는데, 글에서 이를 직접 언급하니까 마치 타이타닉의 패러디를 보는 듯해져서 감정의 여운이 줄어드는 점도 아쉽습니다. 글 전체를 지배하는 절박하고 우울한 감정을 더 충실히 전달할 방법을 고민했으면 합니다.



찾아서 - 하루만 허세

A : 특별한 이유가 서술되지 않은 채로, 혹은 특별한 이유 없이 직장을 그만 둔 남자가 이틀 동안 떠돌며 여러 사람을 만나, 여러 인생을 짧게라도 들여다보며 다시 자기를 찾아 진정한 여행을 떠난다는 이야기입니다.
너무 멋을 부리느라 문장이 부자연스럽습니다. 동사로 간단하게 서술할 수 있는 문장을 명사로 쓰며 괜히 꼬았습니다. 예를 들어 “과감한 외침을 외쳤으며”는 “과감하게 외쳤으며”라고 하면 더 명확하고 읽기 편합니다.
주인공의 갈등이 너무 추상적이고, 객기어린 고민으로 보이고, 주인공의 행동이나 사고가 삶에 치인 직장인이 아니라 삶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다는 자체에 심취한 고등학생으로 보입니다. 다른 말로 이 글에는 진정성이 부족합니다. 원치 않는 성관계 후 자살한 여자 이야기가 비극으로 다가오지 않고, 그저 주인공이 얼마나 비극적인 짝사랑을 했는가 라는 도구로 쓰였을 뿐입니다. 첫 번째 남자와 두 번째 남자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초연하며 남도 돕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변별력이 떨어집니다. 가장 큰 아쉬움은 주인공이 어떤 인물인지, 왜, 무엇을 고민하는 지가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주인공이 누굴 만나고, 어떤 일을 겪든, 그저 남의 일처럼 보입니다. 너무 거창한 고민은 이상에 견주어 비루한 현실에 대한 도피이기도 합니다. 인물에게 좀 더 현실감을 부여해주세요. 다른 말로 인물이 진짜 발을 딛고 있는 곳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주세요.

B : 주인공은 누나를 시작으로 여러 사람을 만나고 또 찾아다닙니다. 글에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 대한 강한 분노가 있고 주인공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사회의 병폐를 드러내는 사연을 가진 인물이 배치됩니다. 이전에도 이런 평을 쓴 적 있는데, 한국 사회를 비판하는 이야기는 일종의 장르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런 글들에서 인물에게는 극단적으로 불행한 일이 일어나며 끝까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고 인물은 밑바닥으로 떨어져 좌절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찾아서>가 이와 같은 글들과 다르다면 주인공이 가지는 다양한 감정입니다. 여러 인물을 만나면서 현실에 분노하기도 하지만 위로나 희망을 얻기도 합니다. 마지막에는 뚜렷한 목표가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결심도 합니다. 글은 사회의 여러 어두운 문제를 반복해서 드러내는데, 도입부의 가난한 시골 아이들이 도시에도 존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순간 등은 나름 돋보입니다. 하지만 글이 단단한 구조를 가졌다기보다는 생각을 나열하는데 그치는 인상을 주는 점이 아쉽습니다. 주인공의 시선을 통해 되도록 많은 불행한 사연을 펼쳐놓으려는 글의 목표가 불러온 한계 같습니다. 글이 가진 강한 감정을 살리되 더 능숙하게 표출했으면 합니다.



세상의 끝 - SF델릭

A : 지구가 소행성과 충돌해 인류가 멸망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위기를 벗어날 방법은 하나, 타임머신을 타고 10년 전으로 달아나는 겁니다. 주인공에게는 친형제처럼 아끼는 이웃 동생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타임머신을 구해 동생과 함께 피하려 했으나 타임머신이 1회용입니다. 주인공은 고뇌하다 동생에게 연락하지 못하고, 동생은 자기를 버린다며 주인공을 찾아와 화를 냅니다. 그 속에서 평소 감춰져 있던 다른 면이 드러나고 이기적인 싸움이 오갑니다.
이야기에는 빈틈이 없어야 하는데, 이 이야기에는 빈틈이 너무 많습니다. 왜 타임머신이어야 하는가? 타임머신을 만들 만한 과학이 발달했다면, 유인 우주선은 개발되지 않았는가? 먼저 타임머신을 타고 달아난 사람들 중에 10년 후 사고를 예견하고, 막을 방법을 찾거나 유인 우주선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들은 없었나? 동생에게는 주인공 외에 다른 의지할 사람은 없나? 동생은 모아둔 돈이 없었나? 동생에게 먼저 타임머신을 타고 가 10년 동안 돈을 벌어 널 위해 타임머신을 하나 더 사겠다고 설득해볼 수는 없었나?
기본 상황도 설득력을 갖지 못하고, 욕설이나 싸움도 갑작스럽습니다. 사람이 변하는 계기와 과정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위기를 만나 본디 자기 모습대로 할 만큼 하다가 계속 벽에 부딪치고, 그러면서 조금씩 좋지 못한 모습이 드러나다가, 완전히 좌절하게 하는 계기를 만나며 폭발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다른 말로 독자들이 평소 그렇게 순하던 사람도 자기 목숨이 위태로우면 변하는구나, 라고 느낄 수 있도록 하려면 싸우면서 저런 사람이 아니었다고 설명하는 게 아니라 평소 동생과 어떻게 지냈는지, 동생이 어떤 사람인지는 싸우기 전에 분명히 드러났어야 합니다.

B : 글에서 지구 종말과 타임머신은 주인공이 혼자만 살 것인지 (친동생이 아닌)동생을 대신 구할 것인지, 결정을 내리기 곤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한 장치로만 사용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해결하기 어려울수록 독자는 문제의 빈틈을 살핍니다. 주인공은 정말 제대로 된 타임머신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인지, 성우는 왜 알아서 살길을 찾지 않았는지, 주인공과 성우가 싸우는 동안 독자는 의문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SF델릭님은 원래 영화를 염두에 두고 쓴 이야기라고 하셨는데, 적은 수의 인물이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시간동안 만들어가는 이야기로는 효과적인 설정입니다. 하지만 주인공과 성우의 감정싸움은 무척이나 격렬한데 싸움의 결과가 단순히 주인공이 잘못 판단을 드러내는 교훈극으로만 보이는 점이 아쉽습니다. 글을 다시 되짚어보면 ‘세상의 끝’이라는 제목은 주인공이 가지고 있던 세계, 이를테면 유년 시절의 행복한 기억, 혹은 동생과의 친밀한 관계의 끝으로 보입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은 이런 세계의 종말을 막는 도구로 사용하면 좋을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능성이 잘 드러나지 않고 그냥 우리가 알던 세상이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상황에만 집중하는 것도 좋으나 이야기의 다른 가능성도 더 탐구했으면 합니다.



세계대전:바퀴 - 마그토

A : 실제 경험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소설로 승화했습니다. 의도는 좋았습니다. 다만 서술이 약합니다. 작가는 독자들이 아무 것도 모른다고 가정하고 서술해야 합니다. 바퀴벌레가 도시를 덮고 한 지역을 장악했다는 서술만으로는 군대까지 출동해야 하는 이유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무수히 많은’은 어느 정도인지, 도로 가득 쌓이다 못해 자기들끼리 깔아죽일 정도고, 음식이며, 동물이며, 사람들을 다 달라붙어 잡아먹어도 모자라 굶어죽는 놈들까지 나올 정도인지, ‘일반적인 녀석들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건 어느 정도 크기인지, 생쥐 만한지, 고양이 만한지, 진돗개 만한지, 바퀴벌레에게 포위되면 어떻게 되는지, 발부터 기어오르는지, 천장에서 머리로 떨어지는지, 방독면 정도는 우습게 갉아먹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합니다. 특히 독자가 잘 아는 생물을 소재로 할수록, 독자의 일반적인 지식을 뛰어넘는 묘사와 서술이 필요합니다.

B : 마그토님이 끝에 덧붙이신 말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이야기의 결말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바퀴벌레와 전쟁을 벌인다는 이 글은 이상하게도 그냥 집 한 채를 무너뜨리는 소박한 결말을 맞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결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글은 바퀴벌레가 들끓는 집을 속 시원하게 부셔버리고 싶어서 쓴 글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바퀴벌레를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라서 결말이 마음에 들긴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결말이 갈등 없는 평범한 전개나 치밀하지 않은 설정을 보완할 만큼 훌륭하진 않습니다. 바퀴벌레를 싫어하는 마음을 더 강하게 글에 담아내보면 어떨까합니다.



호모 아르텍스의 기원 - 닐룽

A : 사피엔스 종과 소수 종 사이의 분쟁이 문제인 줄 알았는데, 마약으로 규정되어 금지된 음악이 문제였습니다. 이 세계에 음악이 없었다는 복선이나 암시가 전혀 없었기에, 소수 종끼리 싸운다는 이야기에서 음악으로 이야기가 변한 지점이 당황스럽습니다.
인물들의 이름을 명확하게 서술하지 않다가 갑자기 특징을 짚어 설명하니, 혼란스럽습니다.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이의 눈으로 설명해야 합니다. 누가 때리고, 누가 맞고, 누가 하는 대사인지 등등 사소한 서술에서 혼란을 주면 이야기에 집중하기 어렵습니다.
여자도 음악을 듣고, 하는 사람이라면 왜 남자에게 돈을 주면서까지 치즈케이크에 보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남자가 일원이 되길 바랐다면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겁니다.
결국 음악 이야기로 끝나며 종과 종 사이의 싸움은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집중하고, 서술을 좀 더 친절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B : 소설 속 배경은 여러 인종이 뒤섞여 사는 사회입니다. 주인공은 폐인처럼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돈을 벌 기회가 생기자 뛰어들고 곧 위험한 상황으로 말려듭니다. 주인공이 겪는 위험한 상황에는 금지된 예술 ‘음악’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두 소재는 잘 들어맞지 않는 느낌입니다. 서로 다른 인종이 뒤섞여 살고 있는 세계와 금지된 예술이라는 소재가 어떻게 충돌해서 큰일을 만드는지, 다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실패자로 살아가던 남자가 돈 때문에 위험한 휘말려 들면서 여러 액션을 선보이는 이야기는 독자에게 충분히 흥미를 주는 구조인데, 정작 소재가 구조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지금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야할 소재가 한 개의 이야기 안에서 헐겁게 엮여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 기록 - 티슬

A : 유령을 보는 사람, 1~2분 후 앞날을 보는 사람, 사람들의 감정을 색깔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감정을 색깔로 보는 사람 입장에서 회식자리로 옮겨갑니다. 이 중 정 주임이 유령을 보는 사람인 듯 하고, 색깔을 보는 사람인 소현, 리스너를 쓴다는 걸 보니 앞날을 읽는 사람인 박 과장이 한 자리에 있습니다. 인물 소개를 마치고 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였으니 이제 본격적인 사건이 전개되어야 할 것 같은데 이야기가 끝납니다. 허탈하고 당황스러웠습니다. 차근차근 다시 보니, 우리 주위에 있는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알고보면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들여다보면 모두 특별하고, 조금 거리를 두고 보면 결국 다 평범한 삶이기도 합니다.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서로 모르거나 말하지 않을 뿐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끝나는 걸로는 완결된 한 이야기로 보기 어렵습니다. 소설에 필요한 갈등, 위기 등이 없기 때문입니다. 좀 더 일상적이면서도 특별한 면을 찾았다면, 독자들이 자기에게도 하나쯤 있는 남과 다른 면을 떠올리며 공감할 수 있었겠으나 등장 인물들이 하나 같이 흔치 않은 능력을 가져 그러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도입부만 쓰다 만 글로 보입니다. 사건과 갈등을 만들어 이야기를 전개하시면 어떨까 합니다.

B: 글은 일기와 나레이션이 뒤섞인 재치 있는 형식으로 시작합니다. 도입부에 다양한 설정을 제시하고 있으며 귀신과 미래, 그리고 아마도 ‘기’를 보는 것 같은 인물의 등장은 흥미롭습니다. 이 인물들이 만나는 순간이 글에서 작은 반전을 이루고 결말을 만듭니다. 아쉬운 점은 이런 구조가 단편소설의 호흡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말이 반전의 기능을 갖고는 있습니다. 그래도 이 글은 장편소설의 도입부일 것 같고 앞으로 계속 이야기가 이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초반에 깔린 아이디어가 그만큼 재미있기 때문에 이런 흐름이 아쉽습니다.



아포토시스 포 세이스 - 빈테르만

A : 열심히 설정을 짜고, 공들여 쓴 글이었습니다. 다만 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명해주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설정이 나옵니다. 결말이 설득력이 있기 위해서는 과정이 치밀해야 합니다. 독자에게 충분한 사전 정보를 주지 않았기에 결말에 설득력이 없습니다. 팀원이 여럿일 경우, 호칭을 통일해야 합니다. 독자들은 ‘능력자’라는 말로, 인물의 생김새를 유추하지 못하기에, 갑작스레 ‘꼬마’라 지칭하니 누구를 말하는지 혼란스럽습니다. 인류가 왜 지상을 포기했는지도 모르겠고, 왜 보균자로 외인부대를 만들었는지도 명확하게 서술하지 않았습니다.
글을 쓸 때는 읽는 이가 아무런 사전정보가 없다는 전제하게 글을 써야 합니다. 하물며 글을 쓴 이가 만든 설정과 세계 속이라면 더 확실한 안내가 필요합니다. 지나친 설명은 글을 지루하게 하지만, 이 경우에는 좀 더 친절할 필요가 있습니다.

B : 전염병이 번지는 미래, 지하에 살아 있는 괴물들, 괴물과 싸우는 용병 등 SF와 컴퓨터 게임과 밀리터리 장르의 설정이 익숙하게 혼합된 배경의 이야기입니다. 글은 익숙한 형식에 잘 맞춰져 있습니다. 암울한 미래 사회 이미지, 캐릭터들이 들고 다니는 무기의 복잡한 설정, 징그러운 괴물, 영웅적인 주인공과 주변에서 균형을 맞추는 개성 있는 조연 캐릭터 등이 그렇습니다. 이미지는 강렬하고 액션은 근사합니다. 결말도 이런 구조에 어울리는 반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글이었습니다. 하지만 분량이 충분히 긴데도 여전히 이야기가 정신없게 느껴지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글의 설정이 단편 안에 담기 버거워 보입니다. 익혀야하는 정보의 밀도가 높고, 단편 보다는 중편에 어울릴 설정 같습니다. 만약 설정을 더 넉넉히 시간을 두어 서술하고 인물들의 과거를 추가한다면 장편 소설로도 충분히 가능할 듯합니다.



발톱 - 깃

A : 바람둥이 남자가 저주를 받습니다. 저주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예측하기 어렵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야기의 재미가 떨어질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지질한 남자가 직장에서 역공 당하는 모습, 바람피우던 상대에게 폭언을 퍼부었다가 당하는 모습 등등에 희열도 있었습니다. 다만 부인이 왜 이 남자를 저주했는지 짐작하지 못할 바는 아니나, 매일 웃는 얼굴로 잘 해주면서 한 편으로 그런 지독한 저주를 퍼붓게 된 상상 이상의 이유를 서술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남자가 바람피우는 여자에게 문자를 보낼 때까지가 평범하고 긴 점도 소소하지만 아쉬운 지점입니다.

B : 꿈에서 귀신을 본 남자는 불길한 느낌에 시달립니다. 언뜻 보기에 평범한 남자인 것 같지만 그의 속마음을 파고들수록 남자의 지저분한 죄가 드러납니다. 죄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남자가 별다른 죄책감 없이 산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꿈과 신체의 고통은 남자가 얻은 형벌인데, 남자는 이를 피하려 필사적으로 노력합니다. 정직한 테크닉으로 쓴 글입니다. 문제가 일어나고, 남자는 문제를 만든 사람을 찾아 돌아다니는데, 누가 남자를 본뜬 인형에 못을 박고 있는지 글 속에서 여러 단서를 흘리지만 마지막에 생각 외의 인물을 끌어들여 반전을 만듭니다. 글을 다시 읽어보면 아내가 범인이어야 하는 이유가 곳곳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글을 끌어가는 방식이 투박해서 글을 쉽게 읽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 단순하다는 느낌도 줍니다. 그러나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단순한 방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대신 소소한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만들어서 설득력을 부여하는 태도가 훌륭한 장점으로 살아난 글입니다.

8월 독자단편 가작에 선정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거울 독자우수단편에 선정되신 분들께는 책을 한 권씩 보내드립니다. 깃님은 pena12@gmail.com 으로 우편물을 수령할 주소, 성함, 전화번호(택배발송시 필요합니다)를 보내주세요. (상품인 책 발송은 1~2주 걸릴 수 있으니 양해 바랍니다.)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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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만허세 13.08.31 23:46 댓글

    정확히 찝으셧네요. 원래 캐릭터는 고등학생이 학교를 뛰쳐나와 겪은 이틀이 맞습니다. 그런데 요즘 소설들, 특히 라이트노벨식의 소설에 중고등학생이 너무 많이 나와서, 혹시 그런 가벼운 느낌이 날까봐 대뜸 캐릭터를 바꾼다는게, 더 이상하게 되버렸다는 걸 이제야 알겠네요. 평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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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테르만 13.09.01 05:23 댓글

    친절한 지적 감사드립니다. 무작정 써보고자 했던 글인데 이제 갈피가 잡힌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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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슬 13.09.02 12:20 댓글

    설정을 하다보니 여러 생각들이 떠올라 그 속에서 허덕이다가 쓴 글입니다. 중, 장편을 쓰기에는 부담스럽고 단편으로 쓰자니 서두가 너무 길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경험은 다른 사람이 인정해 주길 원하면서 타인의 경험은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자기중심적 사고에 대한 비판을 녹여내보고 싶었는데 제 생각에도 한참 모자랐습니다. 절실하지가 않았나 봅니다. 또 고민해 봐야겠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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