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춘곤증

2013.10.31 22:3910.31



 

1.

   봄은 늙은 창녀를 위한 계절이다.

   창틀에 깎인 햇살이 눈을 스치고, 순식간에 방울져 눈동자 언저리에 머물렀다, 섬 전체에 번지기 시작한 연두 빛이, 모든 걸 일렁이게 만드는 바닷바람이, 아직 기운 없이 따라 떠는 꽃잎들이 모두 뭉개져, 더 갈 곳 없는 그녀의 삶에 작은 위안을 주고는 흘렀다.

   여자는 오랜만에 빨래 통을 들고 좁은 방을 나섰다. 낡은 여관 건물 뒤편에 위치한 야트막한 언덕은 멀리 지평선이 보이는 탁-트인 전망에, 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곳이라, 이 섬에 혼자 남은 이후로 날만 좋으면, 그녀가 하루에 몇 번씩 들르는 장소였다.

   작년에 외지인들이 조잡하게 만든 임시 안테나는 녹이 심해, 전선을 잘라내 새로 빨래 줄을 매달아야 했다. 오랜만의 빨래라 빈집을 돌며 모은 집게로도 수가 모자라, 결국 몇몇 옷은 겹쳐서 널었다. 그래도 볕이 좋아 상관없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어깨에 걸친 소총을 잠시 내려놨다. 날 듯, 잠시만 눈을 감아도 바람에 섞여 도는 미세한 온기에 기분이 들떠 오른다. 왠지 또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

   다시 시야에 들어온 세상은 여전히 눈부시고, -비어있다. 아니, 금세 알아봤다. 분명, 이젠 엉망이 된 포구의 가장자리.. 쓰러진 군함 옆, 낯선 배 한 척. 여자는 소총을 움켜쥐고, 몸을 후드득 떨었다.

   소년이 돌아온 것이다.

 

 

2.

   그 아이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벌렁 누웠다. 칭얼거리는 것도 여전했다.

   “잠이 와.”

   난 약간 귀찮아졌다.

   “봄이라 그래.”

 

 

3.

   사실 철구는 그녀를 그다지 원치 않았다. 친구들이 가장 숙맥이던 녀석을 낡은 건물 입구로 밀어 넣고는 등 뒤에서 낄낄댔을 때, 왠지 자존심이 상했어도 녀석이 다시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건 일단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가격을 흥정하던 친구들 사이로 언뜻 보였던 여자의 얼굴에는 그런 일을 하는 여성 특유의 그늘진 분위기마저 어떤 후광처럼 느껴지게 하는 기품같은 것이 있었다. 철구는 곧 허물어질듯 삐걱대는 계단을 올라 여자의 방 앞에 섰다.

   그녀는 발가벗고 있었다. 녀석이 준비했던 말들은 모두 뱃속으로 밀려들어 갔다. 침묵과 무방비의 긴장에 그의 온 몸이 바싹 굳던 순간, 여자의 입술에서 비웃음 같은 것이 잠깐 비어져 나오더니, 흐릿하던 눈동자에 슬며시 생기가 돌았다. 그리고 소년은 곧 어떤 법칙처럼 자신을 휘감는 열락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순간, 세상은 뒤집혀졌다. 녀석이 허무함과 죄책감에 두 발 사이로 팬티를 밀어 올릴 때, 그 즈음..

 

   친구들을 태운 배는 섬에서 꽤 멀어져 있었다. 철구는 전력질주로 그들을 쫓았지만 놈들은 뱃전에서 그의 지갑과 가방을 흔들어대며 녀석을 실컷 놀려대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철구는 바보가 된 기분에 분통이 터졌다.

   “이 개새끼들아!”

   녀석과 육지를 잇던 모든 것들이 장난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곧,

 

   갑자기 포구 전체에 귀를 거스르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곧 모든 운항이 중단됐다는 짤막한 안내 방송이 나왔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철구 앞을 순찰차 한 대가 지나쳐가 부둣가 중앙에서 멈췄다.

   철구는 전화라도 얻어 쓸 요량으로 경찰들에게 다가갔다. 그 사이 의경 몇을 태운 차량 한 대가 더 포구로 들어왔다. 먼저 도착했던 경찰들은 배를 기다리던 관광객들에게 머물었던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강압적으로 내뱉고는 다시 차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철구는 차창을 두드리다 경찰들의 절박한 표정에 흠칫 놀랐다. 그들은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자신들의 핸드폰만을 연신 눌러대고 있었다. 철구 등 뒤로는 의경들이 소장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지시에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달려드는 무리를 무시한 채, 포구 한가운데 테이블을 놓고, 그 위에 tv를 올려놓은 후, 전원을 잇고는 역시 차량에 올라탔다. 그리고 섬의 경찰소장이 차에 오르자 먼저 온 차량을 두고 부둣가에서 빠져나갔다. 사람들은 어느새 입을 다물고는 방송에 집중했다. 철구도 그들의 꽁지에 붙어 그들이 바라보는 것을 봤다.

   다급한 기자들의 목소리. 우연히 찍힌 혼돈들. 동물사체에 달려든 개미떼들이 살을 발라내는 것을 찍듯, 멀리 도망쳐 찍은 화면들. 다양한 언어들의 탄식들.. tv에선 뭍에서 벌어지고 있는 도무지 믿기 힘든 상황이 계속해서 방송되고 있었다.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죽은 자들이 다시 일어난 것이다.

 

   원인불명. 명동 한복판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서로의 살을 물어뜯고 있으며, 심지어 사람의 살을 먹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충격적인 첫 보도가 나간 이후, 7~8시간 정도 더 지속되던 방송은 동족의 살을 탐하는 그 파괴적 행위엔 전염성이 있다는 것, 그래서 이 현상에 희생된 사상자들은 곧바로 다시 일어나 산자를 문다는 것, 그리고 육지 전체가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포식자들의 공격에 초토화됐다는 것을 순차적으로 알리고는 스스로 그걸 입증하듯 뚝 끊겼다.

 

 

4. 

   탁, - 지지직..

   낡은 tv는 몇 번을 쥐어 팬 후에야 제대로 된 소리를 토해냈다. 난 곧바로 소파로 가 쏟아지는 볕 속에 몸을 묻었다. tv에선 연예인들의 잡담이 작은 볼륨으로 흘러나와 겨우겨우 방을 채워갔다. 녀석은 여전히 나른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운 채 내가 방을 치우고, 간식을 만들고, tv를 손보는 동안 손가락 하나를 까닥하지 않았다. 나는 심술이 나 커튼이 바람에 나풀거리는 것만 계속 쳐다봤다.

   “. 이상하게 계속 졸리네?”

   “봄바람이 부니까 몸만 퍼지지? tv보기도 귀찮을 만큼?”

   그래도 결국 소년에게 다가가 그의 볼을 꼬집는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등을 보였다. 새근거리는 그의 숨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5.

   몇 시간 사이, 섬은 완벽히 고립되었고, 또 같은 이유로 일단 안전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겁에 질려 집 문 꼬리만 붙들고 있던 섬사람들은 이 사실을 깨닫자마자 포구로 모여 들었다. 해는 일찍이 저문 후였고, 공포가 본능을 지배해 마땅한 때었다. 사방의 험준한 지형이 관광객을 끌던 섬이라, 그 포구가 배가 상륙이 가능한 유일한 장소였다. 육지에서 오는 어떤 배도 여기 내려선 안 된다! 사람들은 점차 모였고 무리를 이루었다.

   관광차 이 섬에 들어왔던 외지인들도 충격과 비감 속에서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운 좋았다는 것과 이제 돌아갈 곳은 없다는 것. 철구도 그 중 하나였다. 그가 숙소로 머물던 민박은 포화상태였다. 철구는 점차 불어나는 섬사람들과 울부짖는 관광객들을 피해 몇 시간을 길에서 서성거린 후에야 그녀의 방이 생각이 났다.

   그 상황에 손님으로 온 사람은 없었다. 여자는 tv앞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철구가 사정을 설명하기도 전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눈치껏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tv에선 계속해서 문명의 마지막이 기록되고 있었다. 거대한 트럭바퀴에 짓이겨져 딸려가는 벌레 마냥, 그의 가족, 친구, 지인들 심지어 각자 삶들의 꽤 비극적인 부분들까지도 다 저 알 수 없는 현상에 삼켜져 삽시간에 증발해버렸다. 철구는 마음이 아득해져 고개를 돌렸다.

   여자가 웃고 있었다.

   분명 무너져가는 세상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철구는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그리고 동시에 녀석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엉뚱하게도 그녀가 낮에 봤을 때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무언가 삐뚤어졌다. 바로 눈앞부터 그가 볼 수 없는 저 멀리까지. 그때, 균형을 맞추듯 밖에서부터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것을 깨우는 알람같이.

 

 

 6.

   낮아진 해가 침대까지 들어와 발등을 간질인다. 잠결에 이 아이가 처음 내 방에 머물던 날이 떠올랐다. 지금에 와서는 모든 것이 부분, 부분 인상으로만 남아있을 뿐이지만.

   “새벽에 학살이 있었지. 그건 마음 아픈 일이었어..”

 

   육지로 떠났던 마지막 선박이 포구로 돌아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야에 잡힌 그 배의 상태는 그들이 우려했던 대로였다. 갑판 전체가 살아난 시체들로 뒤덮인 상태였고, 살아남은 대여섯의 사람들이 조타실로 몰려 덤벼드는 시체 떼들을 간신히 막아 내고 있었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어떻게든 배를 섬 쪽으로 진행하려 했고, 구원을 기다렸다.

   재앙의 실제를 눈앞에서 본 사람들은 공포와 광기에 휩싸였다. 거의 대부분이 도망쳤지만, 남은 사람들은 재빨리 움직였다. 일단 젊은 섬의 어부들이 그물로 그 배의 섬 진입 속도를 늦추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배에 불을 질렀다. 과감한 결정이었다.

   그날 새벽, 소년은 몸에 불이 붙은 채 비명을 지르며, 조타실에서 갑판으로 기어 나오는 자기 친구의 모습을 봤다. 회항선이 거의 포구까지 근접해 왔을 무렵이었다. 갑판 위에 있던 시체들은 몸에 불이 붙자 저주에서 깨어난 듯 일제히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소년의 친구는 시체들 사이를 뒹굴다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때 나는 소년을 붙잡았다. 아무도 어떻게든 수면을 움켜쥐려 짐승처럼 울부짖던 그의 친구를 돕지 않았다. 주변의 모두는 그저 아무거나 무기될 만한 것을 손에 움켜쥔 채, 배가 포구에 닿기 전에 다 타기만을 빌 뿐이었다. 그 친구의 마지막 외침은 나와 그 외엔 아무도 듣지 못 했다. ‘살려줘!’ 오직 우리만 기억한다.

   어쨌든 섬 위에 남겨진 사람들은 그날 그들의 바람대로 살아남았다. 우리도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밤새 소년을 안고 있어야 했다.

 

   잠든 소년의 뺨을 쓰다듬는다. 그의 온기에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났다.

   “원래 그래. 세상은 원래 그렇게 잔혹한 거야. 이젠 알겠지? 그나마 이 곳이 낫지?”

 

 

6. 

   전기, 가스, 통신은 물론 식수도 확보하기가 힘들어졌다. 밀려난 도미노 블록처럼 고립된 그 섬은 완벽히 원시시대로 돌아갔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계속 손님을 받았다. 섬은 불안과 고독에 시달렸고, 아내와 애인을 잃은 남자들이 넘쳐났으니까. 그네들이 그녈 찾을 때면 철구는 조용히 밖으로 나와 여관 뒤편의 언덕을 향했다. 그 곳엔 섬에 발이 묵인 관광객 중 거처를 확보하지 못 한 일부가 천막을 치고 거주하고 있었다. 철구는 그곳을 걸으며 너무나 큰 충격에 무기력해진 얼굴들을 계속해서 확인했다. 그리고 한편에 안도감과 약간의 수치심을 안고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계절이 바뀔 무렵, 본격적으로 식량문제가 닥쳤다. 가공식료품들이 그 해가 가기 전에 떨어진다는 것이 자명해져 갔고, 섬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래야 본래 보잘 게 없었다. 필연처럼 외지인과 섬 원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서로 이를 갈만한 상황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이 때까지도 그녀는 꾸준히 손님을 받을 수 있었다.

 

   땜통은 섬토박이로 섬에서 유일한 철구 또래였다. 활달하지만 황소고집으로 대하기 거북스러운 성격이라 이런 상황이 아니면 친해질 일이 없는 애였다, 게다가 양친이 모두 죽은 자들의 날뭍으로 나갔다가 다신 돌아올 수 없게 된 이후로는 행동이 더욱 괴팍해졌다.

   “상관없어. 그 꼰대들 아주 지겨웠으니까..”

   땜통에겐 평생 바라던 것이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섬 바깥으로 나가서 사는 것이었다. 그것은 완전히 좌절됐지만, 두 번째는 부모가 물려준 양봉상자 두 개 덕에 이룰 수 있었다. 그녀의 단골이 된 것이다!

  원주민과 외지인 사이에 첫 번째 유혈 사태가 났던 밤, 땜통은 철구를 불러내 빈 방을 돌았다. 그리고 몰래 숨겨둔 맥주 캔들을 귀신같이 찾아내 그녀의 방으로 가져갔다. 간만에 유쾌하게 취한 땜통은 자신이 왜 땜통이 됐는지 말해주겠다며, 지 대갈빡에 거머리가 붙어 밤톨만한 땜통이 생겼다는 시시한 옛 얘기를 풀어놓아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무릎에 고개를 박으며 넌지시 물었다.

   “근데 자기는 어쩌다 이런 섬까지 오게 된 거야?”

 

 

7.

   유혈 사태는 그때까지 섬에서 작동되던 유일한 시스템인 경찰들에 의해 진압됐다. 땜통은 과감하게 그 과정의 복판에 껴들어갔다.

   “어차피 경찰 놈들도 먹을 거 압수하고, 챙기려는 거야. 똑같이 해도 돼.”

   빠져나온 녀석의 손엔 경찰관이 차고 있던 권총이 한 자루가 들려있었다.

   두 소년은 섬 뒤편에 위치한 바다와 경계를 이루는 험준한 절벽이 있는 지역까지 걸어갔다. 곧 침목들 사이로 낡은 별장 하나가 보였다. 지은 지는 꽤 되었지만, 꽤 큰 면적에 상당히 고급스럽게 설계가 된 건물로 세상을 삼킨 재앙이 오기 전까지 섬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이던 곳이었다.

   그곳의 주인은 일흔을 넘긴 남자로, 땜통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 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가끔 면장이나 파출소장을 잠깐 보는 것을 빼고는 섬사람들과 교류가 일체 없었고, 거의 뭍에 나가 있거나 자기 별장에 틀어박혀 있었다.

   “유명한 작가라고도 하고, 은퇴한 사업가라고도 하는데, 돈이 엄청 많은 가봐. 어른들 하는 말이 그 사람만 만나면 면장 댁에 고기 굽는 냄새가 난다고들 했거든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 그래도 잘 먹고, 잘 사니까 풍기는 분위기는 완전 끝내주더라. 늙은이 주제에.”

   노인은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초유의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모두에게서 잊혀졌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땜통은 담을 넘기 전, 허리춤에서 훔친 권총을 꺼내 자랑스럽게 한번 훑어봤다.

   “어렸을 때, 여기 영감이 날 육지로 데려가는 상상 진짜 많이 했었는데..”

   “정말 할 거야?”

   “아님 여기 왜 와? 혼을 내주자고!”

   둘은 담을 넘었다.

 

 

 9. 

   집요하게 과거를 묻는 통에 그녀가 마지못해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그 별장에 있는 남자와 같이 왔다.’ 더 이상은 말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땜통에게는 그 말의 사실여부도, 속뜻도 전혀 중요치 않았다. 별장과 관련된 모든 것이 녀석에겐 흥분제였으니까.

   그 놈은 어렸을 적 몰래 그 별장에 발을 들인 적이 있었다. 오래 전이기도 하거니와, 너무 무서워 도망치듯이 나와 기억이 불분명하긴 하지만, 아직까지도 뚜렷이 인상에 남는 장소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그 별장의 지하실. 땜통이 지껄이는 그대로 얘기하자면, ‘그 곳은 거대한 냉장고였다!

   “네 말이 맞다고 치자. 전기가 끊겨서 다른 냉장고들도 싹 다 멈췄지? 거기만 예외겠어? 그 별장 전체가 냉장고였어도 이젠 끝이지!”

   “몇 개월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둘 중 하나겠지. 굶어죽었던가. 아니면 저기만 냉장고가 계속 돌던가! 안 그래?”

   “몇 개월째 전기가 끊겼다니까?”

   “그 영감은 뭔가 다르다니까? 뭔가 급이 달라! 아님 시체라도 확인하자!”

   철구는 이렇게 납득이 안 되는 채로 끌려가는 것이 못마땅했다. 생각해보면 여자의 말부터 의심스럽다. 별장이 있는 남자가 여자를 섬에 버렸다고? 그리고 그 여자가 있는 섬의 반대편에서 계속 살고? 사실 나이에 안 맞게 소녀취향으로 꾸며진 그녀의 방부터 좀 이상했다. 조금만 세심히 살펴보면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방에 공을 들이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붉은 등 아래에서 배설이 끝나면 나가버리는 놈들은 신경도 안 쓰겠지만. 철구는 확신했다. 그녀는 반쯤 망가진 상태다. 그래서 자기를 받아준 거다.

   “넌 기생충이야! 한번쯤은 남자 구실을 하라고!”

   “젠장.”

   “재밌을 거야! 걸리면? 지금 누가 우릴 벌주겠어? 안 그래?”

   땜통이 먼저 부엌 쪽문 창을 통해 집 내부로 들어갔다. 한참 후, -하고 쪽문이 열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갑자기 철구의 팔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철구는 팔이 꺾이고, 입이 막힌 채 부엌 바닥에 쓰러졌다. 뒤에서 철구를 붙잡은 남자가 말했다.

   “들어봐..”

   한참 잊고 지낸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 냉장고가 돌고 있었다.

 

   부엌에 놓인 냉장고에서 꽤 짭짤하게 맛을 본 소년들은 눈이 벌게져 별장 내부를 탐험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지하로 가는 계단은 없었다. 다시 밖으로 나와 주변을 뒤져봤지만 마찬가지. 땜통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철구를 끌고 계단을 올라 2층까지 훑었지만 역시 아무 것도 없었다.

   둘은 널찍이 뚫린 2층 서재의 창을 통해 지평선 위로 해가 떠오르는 광경을 바라봤다. 그 곳엔 거대한 냉동 창고도, 심지어는 노인도 없었다. 태양만이 눈이 멀 것 같은 황금빛으로 두 악동을 비출 뿐이었다. 노인이 쓰던 책상에 걸터앉아 훔친 맥주 캔을 뜯던 철구의 눈에 책상 위로 반송 된 편지 한통이 보였다. 정확히 죽은 자들의 날쓰인 편지였다. 철구는 잠시 맥주를 내려놨다.

   “곧 세상은 막을 내릴 것입니다. 제발 이 곳으로 오십시오.. 난 당신이 필요..”

   “근데 말이야. 냉장고에 저렇게 싱싱한 음식이 있다는 건.. 분명 얼마 전까지 사람이 살았다는 거고, 어디선가 음식을 공수해왔다는 건데. ?”

   “. 이것 봐! 땜통!”

   순간, 홀로 퍼즐을 맞추던 땜통 머리에 갑자기 옛날 일이 떠올랐다. 서재 벽을 가득채운 책장과 책들.. 책상 아래 숨어있는 어린 아이. 노인은 우아한 몸짓으로 책장으로 다가간다. 아이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노인의 발끝만 봐도 몸이 움츠려들었다. 하지만 이 서재의 주인에게서 눈을 뗄 수는 없다. 시간은 점점 더 느려졌다. 노인은 책장 어딘가로 손을 뻗었고, 책을 하나 집더니, 그 책을 힘껏.. 잡아 당겼다. 그러자..

    탕!

   총소리가 별장 전체를 울렸다.

 

 

10.

   소년이 잠에 취한 목소리로 물었다. 봄볕이 그의 목을 휘감는다.

   “이젠 솔직하게 말해봐. 정말 그 남자가 널 여기로 데려왔어?”

   “아니.”

   “그럼 왜 거짓말을 한 거야?”

   “그냥 재미로.”

   나는 편지통에서 그 남자의 편지를 하나 꺼내 들었다. 편지통은 별장 서재에 있던 것이다. 통 안엔 남자가 당신이란 여자에게 보낸 편지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일부러 노년의 신사처럼 낮고, 굵은 목소리를 냈다.

   “당신을 이 섬으로 오게 만들 수 있다면.. 난 무슨 짓이든 하겠지요. 세상 전체를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겁니다. 배양은 끝났습니다. 이 작은 캡슐 하나면.. 어차피 당신 없는 세상이 나에겐 지옥이니까.. ”

   난 읽던 편지를 구겨버린 후, 멀리 던져버렸다.

   “조금 모자라.”

   그리고 다른 편지를 집어 들고, 좀 더 애타는 목소리를 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답이 없으십니까? 기한을 드리지요. 그 기한이 지나면.. 전 목숨을 끊을 생각입니다. 제발.. 어차피 바이러스는 2차 주입이 끝났고..”

   “그 남자는 정말 여자가 안 와서 자살한 걸까? 뭐 그딴 일로 죽지?”

   “그럴 수도 있지. 이 글씨체 봐봐. 예쁘지? 여린 성격인 가봐.”

   소년과 섬 친구가 총소리를 듣고 다락으로 올라갔을 때, 남자는 이미 목숨을 끊은 뒤였다. 총을 찾던 경찰이 그 별장까지 이르렀고 둘은 잡혀갔다. 소문은 삽시간에 섬 전체에 퍼졌다. ! 물론 소년과 섬 친구가 몰래 별장의 두꺼비집을 내려놓은 뒤였다.

   엉뚱하게도 별장 주인의 죽음은 섬 원주민과 외지인들 사이의 반목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원주민들은 그의 죽음을 외지인인 소년이 원주민을 살해한 것으로 이해했고, 외지인들은 섬 친구가 외지에서 온 명망가를 죽인 것으로 봤다. 모두가 자살이라는 경찰의 조사결과를 믿지 않았다. 섬에 살인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먹을 것이 더 줄어들자, 정말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작은 통조림을 두고 다투던 외지인과 원주민간의 우발적인 사건이었다. 바로 보복이 이어졌고, 그 뒤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었다. 양쪽의 남자들은 집결했다. 이미 한참 배를 곯은 경찰들 역시 양 패로 갈라선 뒤였다. 그들은 서로를 물어뜯었다.

   “재밌네.”

   “미친 거지. 계속 반송되는 주소에 편지를 왜 써..”

   “원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미친 거니까.”

 

 

11.

   겨울이 닥쳤다. 땜통과 철구는 방을 떠나지 않으려는 그녀를 간신히 설득해 별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어차피 싸움 끝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서로를 피해 숨거나, 먹을 것을 빼기지 않기 위해 문을 걸어 잠갔기 때문에 셋은 굳이 딴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땜통은 요란을 떨며 서재를 엉망으로 만들더니, 기어이 지하실로 가는 통로를 찾아냈다. 세 사람은 같이 모로 꺾인 책장을 지나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녀가 전원 스위치를 발견하고는 그리 손을 뻗었다. 땜통 말이 맞았다.

   불이 들어오자 지하실 한 면 가득 유리로 된 거대한 냉동 창고가 보였다. 땜통은 보란 듯 팔짱을 끼고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는 나머지 둘을 바라봤다. 게다가 아직 맞은편이 남아있었다. 그녀가 두 번째 스위치를 누르자 철창으로 막힌 방이 보였다. 그곳은 실험 도구로 보이는 이상한 물품들과 기계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벽 한가운데 한 여자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는데, 마치 그 여자의 몸을 난도질한 것 같은 어둡고, 기괴한 느낌의 누드화였다.

   “뭐야 저 것들은.. 그 영감 변태였나?”

   기분을 잡친 그들은 냉동 창고 맞은 편 방의 불을 꺼버렸다.

 

   근 한 달이 넘게 거의 매일 눈이 오는 날씨가 이어졌다. 도대체 어떤 연유로 그 곳에만 전기가 들어오고 난방이 가능한지 알 수는 없었지만, 세 사람은 주인을 잃은 그 별장을 실컷 누렸다. 철구는 주로 거실 진열장에 수집되어 있는 영화들을 보거나, 책을 들고 노인이 자살했던 다락방으로 올라가 시간을 보냈다. 땜통은 당구교본을 찾아내 2층 구석에 있는 당구대에서 당구를 치기 시작했고, 여자는 주로 서재에서 노인이 남긴 편지들을 읽었다. 그러다 기분이 내키면 당구대 옆에 놓인 피아노를 치곤했는데 서툰 솜씨가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이 별장의 안주인이었던 것 마냥 피아노를 연주했고, 그럼 두 녀석은 어디에 있건 간에 귀를 기울이며 이래도 되나싶은 심정이 될 정도로 평화로운 기분에 젖어들곤 했다.

 

 

 12.

    햇살이 또 각을 꺾어 눈꺼풀을 간질인다. tv는 또 소리가 죽은 채로 화면만을 내보내고 있었다, 실눈을 뜨자 붕어처럼 입만 뻥끗대는 연예인들의 얼굴을 보였다.

   “방송국에서 누군가가 저 테이프를 반복 재생 시키고 죽었나 봐. 항상 같은 프로, 같은 얼굴, 같은 멘트.. 예전엔 저 프로 참 좋아했는데..”

   난 소년의 대꾸를 기다렸다. 솔직히 다시 잠드는 게 조금 무섭다.

 

 

13.

   해가 질 무렵이었다. 땜통은 조용히 당구대를 내려놓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피아노를 멈추고 자신을 뒤에서 안는 철구와 곧장 키스를 나누던 그녀의 표정이 이상하게 신경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항상 땜통에게 친절했지만, 철구를 대할 때는 뭔가 달랐다. 별 상관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가끔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는데 별장에 온 이후로 특히 더 그랬다. 근데 그 순간은 스스로 당황스러울 만큼 못 견디겠는 기분이 든 것이다.

   냉동 창고는 물론 지하실을 샅샅이 뒤졌지만 담배는 나오지 않았다. 몇 달간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담배지만, 그때만큼은 너무나 절실해 땜통은 머리가 어떻게 될 지경이었다.

   “젠장! 딱 한 모금이면 살 것 같은데! 그 노인네도 분명 피웠었다고.”

   땜통은 지하실의 전원을 모두 올렸다. 철창으로 막힌 노인의 실험실이 몇 주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담배는 현미경이 놓인 하얀 테이블 위에 있었다.

 

   철구는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그녀를 버려두고 tv를 향해갔다. 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철구를 쳐다봤다. 영화나 틀어놓을까 하고 켜놓은 tv에는 칼라-바 화면이 띄워져 있을 뿐이었다.

   “이거 화면 조정할 때 나오는 거지? 몇 달간 이런 거 본 적 있어?”

   철구는 그녀의 허리춤에 눌려있던 리모컨을 빼내 tv볼륨을 올렸다.

   “생존자 여러분께 알립니다. 생존자 여러분께 알립니다. 인천국제 공항으로 오십시오. 인천국제 공항으로 오십시오. 식수와 식량, 의료품들이 확보되어 있습니다. 정부가 여러분을 지켜드립니다. 식수와 식량, 의료품들이 확보되어 있습니다. 정부가 여러분을 지켜드립니다. 생존자 여러분께 알립니다. 생존자 여러분께 알립니다. 인천국제 공항으로..”

   그때 땜통이 2층으로 뛰어올라왔다.

   “! 이것 좀 봐!”

   “! 이것 좀 봐!”

   둘은 기절할 듯이 놀란 눈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실험실 벽면 한가운데 걸려 있던 기괴한 누드화는 분명 몇 주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액자 속의 여자는 이제 자신을 덮은 유리를 밀어내려는 듯 두 손바닥을 정면에 갖다 댄 채 그래도 주술이 풀리지 않자 분이 난 표정으로 한껏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세 사람은 모두 충격에 휩싸였다. 굳이 땜통의 설명이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그들 앞에 걸린 저 여자는 그림이 아니다. 그 것은 물로 채워진 거대한 유리캡슐 안에 갇힌 인간의 육체였다.

   ‘그것이 미세하게 검지를 구부렸다. 아주 작게 손톱이 유리면을 긁는 소리가 났다.

   “봤어?”

   “.. 살아있어.”

   “멍청아! 물속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

   “너도 들었잖아!”

   캡슐 안쪽은 깊이를 알 수 없이 어두웠고, 그것의 온 몸은 가느다란 전선 같은 게 부착되어 멀리서 보면 꼭 난도질당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것의 피부는 과학실 구석에 놓인 먼지 낀 수조안의 표본들처럼 물에 불고, 군데군데 뜯겨있어 더더욱 그림 같았다. 저게 그림이 아니면 뭘까? 철구는 숨소리라도 들어야 믿겠다는 듯, 한 걸음 그것에게 다가섰다.

   캡슐속의 여자가 눈을 떴다.

   철구와 땜통은 혼비백산해 노인의 서재로 뛰어올라갔다. 곧이어 팔짱을 낀 여자가 숨도 제대로 못 가누는 두 바보들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올라왔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계속해서 욕지거리나 내뱉고 있는 땜통의 정수리를 향해 내던졌다.

   창밖으로 다시 눈이 왔다. 셋 중 그녀만이 차분했다. tv에서는 계속해서 생존자들을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사내애들은 몇 시간째 목소리를 높이며 다투고 있었다. 철구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우린 여길 떠날 거예요. 봄이 오기 전에요.”

   땜통이 이어 말했다.

   “배는 내가 몰 줄 아니까. 일단은 내가 먼저 그 쪽에 가볼까 해. 오케이?”

   그녀는 아무데도 가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 밑에 그걸 보고도 이래? 밑에 살아있는 시체가 있다고! 답답한 년

   그녀는 녀석들을 겁쟁이로 몰아붙이곤 땜통이 물고 있는 담배를 빼앗아 바닥에 던져버렸다. 지하실에 갇혀있는 저 여자보다 바깥세상이 더 더럽다면서.

   “너 정신 나간 건 진작 알아봤어. 근데 이건 아니지.”

   땜통이 여자의 팔을 붙잡았다. 철구가 땜통을 말리려고 놈의 어깨를 잡았을 때, 동시에 그녀도 놀라 놈을 밀었다. 그 덕에 땜통은 중심을 잃고 뒷걸임질을 치다 결국 엉덩방아를 쪘다.

   “뭐야? 니들 년놈들이 지금 나 무시했지? 여기가 그렇게 좋아? 그렇게 좋냐?”

   철구가 흥분해서 달려드는 땜통을 막아섰을 시, 갑작스런 소리가 세 사람의 귀를 파고들었다. 다시 한 번 초인종이 울렸다. 세 사람은 일순간 동작을 멈추고 입을 닫았다. 신경이 징-소리를 내며, 시선을 따라 문으로 향했다.

   띵-.

문 밖에 손님이 와 있었다.

 

 

14.

   상호간의 긴 살육전 끝에 살아남은 열댓 명 정도의 외지인과 원주민 무리는 발가벗겨진 채 뒤섞여 총을 든 군인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집집을 돌며 사람들을 끌어낸 군인들은 지친 표정의 생존자들에게서 그간의 상황을 보고받고, 생존자들의 상태와 과거 경력, 식량 상황, 섬의 지형 등에 대해 면밀히 조사한 후에야 다시 옷을 입혔다. 그리고 일단 포구 주변의 빈 건물을 골라 생존자들에게 방을 배정한 후, 명령 없이는 나오지 말 것과 매일 아침 포구로 나와 점호를 받을 것을 지시했다. 섬에 상륙한 부대원들의 수는 총 아홉. 그들은 다시 총을 들고 섬을 훑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포구에 정착한 1500톤급 상륙함 진격 호에 머물렀다. 일단 섬은 클린했고, 주민의 숫자도 적은 편이지만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아홉 명은 섬의 뒤쪽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곧 그들이 캠프를 꾸리기에 최적의 장소를 찾아냈다.

 

   철구와 땜통은 오랜만에 살아서 짖어대는 개를 볼 수 있었다. 섬에 있던 개나 고양이들은 진즉 다 잡아먹혔기 때문이다. 그 놈은 군인들 앞에 무릎을 꿇은 두 녀석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계속 킁킁대고 침을 묻혀댔다. 덩치만 큰 잡종으로 세상살이엔 도통 관심 없다는 얼굴을 한 주제에 주인을 잘 만난 건 아는지 매우 건방졌다.

   땜통은 군복을 보자 약간 흥분했다. 지하실의 식량창고는 그들을 보자마자 분 후였다.

   “놈들을 물리쳤나요?”

   “놈들이라니?”

   “당연히 걸어 다니는 시체 더미들이죠. 우리 엄마, 아빠를 죽인.”

   “. 몇 마리 잡아본 적은 있지.”

   땜통의 눈빛이 반짝였다. 내가 껴들었다.

   “인천 공황은 어때요? 거기서 왔어요?”

   “무슨 말이지?”

 

   tv에서 나오던 구조방송은 중단이 된 상태였다. 군인들은 구조방송에선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었고 관심도 없었다. 그들은 인천 공황은 이번 사태의 초반에 이미 적들에게 함락당한 지역이라는 짤막한 설명으로 철구의 말을 딱 잘랐다. 당황한 두 소년 뒤로 서재로 끌려갔던 여자가 붙들려 나왔다. 그 뒤로 이 상륙 부대를 이끄는 듯 보이는 남자가 나와 철구와 땜통 앞에 섰다. 주변의 군인들은 그를 권 중사님이라고 불렀다. 40대 중반에 완고한 표정의 남자였다.

   “면담 결과, 저 여성의 요청으로 너희 둘도 여기 남기로 했다. 김 병장?”

   “!”

   “이 녀석들을 일단 지하로 끌고 가. 명령 없이는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고, 내일부터 할 일을 알려주게.”

   “!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 놈도..”

   권 중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젊은 남자는 주변에서 총을 겨누자 권 중사를 비웃으며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그는 알에 금이 간 안경을 끼고, 군복 위로 더렵혀질 대로 더럽혀진 흰 가운을 입고 있었다.

 

  땜통은 끌려가는 내내 자신도 함께 싸우겠으니, 섬에서 떠날 때 데려가 달라고 사정했다. 군인들은 녀석을 비웃으며, 두 녀석과 흰 가운의 남자를 노인의 실험실 철창 안에 집어넣고는 문고리에 자물쇠를 채우고 개줄 감았다. 병사들 중 하나가 흰 가운을 입은 남자에게 경례를 붙였다.

   “중위님. 죄송합니다.”

   “괜찮아.”

   그들은 개 한 마리만을 남기고는 지들끼리 희희덕대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어차피 여긴 아무 것도 없어요! 저기 저 식량을 보이죠? 저걸 챙겨서 여길 뜨자고요! 나도 싸움이라면 꽤 한다니깐!”

   중위가 철창에 매달린 땜통을 제지시켰다.

   “조용히 해라. 꼬마야. 어차피 저 새끼들은 여길 안 떠나니까.”

   “안 떠나다니? 여긴 진짜 아무 것도 없어요?”

   “정확히 말하면 못 떠나는 거지. 타고 온 함선은 이제 연료가 없고, 게다가 항해 장교가 죽는 바람에 정박 과정에서 충돌이 있었거든. 아마 꽤 손상이 갔을 걸? 이제와선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럼 군함 안에 있는 군인들은..”

   “그 배엔 아무도 없어. 먹다 남은 시체더미들 말고는. 여기 온 게 전부야. 딱 맞춰 도착한 거지. 더 이상 약탈할 섬도 없고, 연료도 다 떨어졌거든. 게다가 좋잖아? 여긴 시체들한테서 공격받을 일도 없고, 네가 저 놈들한테 말해준대로 저 대형 냉장고엔 식량이 가득한데다 창녀까지 있으니.”

   땜통은 무슨 말인지 당최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당분간 인육을 먹을 일은 없겠지. 짐승들..”

   “다시 말해봐. 창녀까지 있다니.”

   “못 알아들을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이미 조사가 끝난 거야. 저 새끼들이 왜 니들을 살려뒀다고 생각하지? 괜히 식량만 축낼 텐데. 저 멍청한 개처럼 움직이는 시체들냄새라도 기막히게 맡느냔 말이야. 아님 비상식량? 아니. 그건 마을 사람들로 충분할 거야. 니들은 그냥 그 여자 덕을 본거지.”

   “도대체 무슨 말이야? 비상식량이라뇨?”

   “! 땜통! 이리와 봐! 저 것!”

   철구는 아까부터 의아하게 쳐다보던 곳으로 땜통을 이끌었다. 난도질당한 여자의 그림. 아니, 여자의 육체를 가둬놓은 캡슐에서 그 육체가 사라졌다.

 

 

15. 

   “그날처럼 아침을 바랬던 때가 있었을까?”

 

 

16.

   중위는 밤새 노인이 남긴 연구일지를 읽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아이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 유리캡슐 안은 텅 비어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철장에 묶여있던 개가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두운 캡슐 안 쪽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게 보이더니, 그것이 전속력으로 유리면을 향해 달려들었다. 충격이 좀 가시자 중위는 캡슐 속 여자의 육체를 면밀히 살폈다. 그것은 그 전보다 훨씬 생동감이 넘쳤고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 중위를 보고 웃기까지 했다.

   “! 시발. 밀폐된 공간에선 피지 말라고!”

   땜통은 철구의 기침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아까부터 줄담배를 피워댔다. 중위는 연구일지를 덮고 땜통에게 다가가 담배를 빼앗았다. 그리고 약통을 찾아내 뒤지더니 하얀 가루가 든 약병을 꺼낸 후 아이들을 쳐다봤다.

   “이건 청산가리야. 들어는 봤겠지? 손톱 때만큼 만이라도 입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죽어. 불을 붙이면 아몬드를 볶은 향이 나지.”

   중위는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하나하나 뜯더니, 쏟아진 담뱃가루 위에 청산가리를 뿌렸다. 그리고 다시 담배를 말아 담뱃갑에 담고는 땜통을 향해 던졌다. 땜통은 울상이 됐다.

   “굳이 이렇게까지.. 잘못 했어요. 안 피면되잖아.”

   “날이 밝으면, 난 중사를 만날 거다. 그 전에 니들에게 해줄 이야기가 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오를 수 있는 유일한 통로. 2층 서재로 난 문이 열렸다. 지하실에 햇볕이 들어섰다. 밤새 짖던 개는 이제는 졸린 지 바닥에 턱을 대고 꿈쩍하지도 않았다. 철구와 땜통은 바짝 긴장한 채 끌려나왔지만 별 거 아니었다. 군인들은 둘에게 청소를 시켰다. 중위 역시 권 중사에게 요구한 면담 신청이 받아들여져 서재로 올라올 수 있었다. 몸수색 후, 중위를 끌고 가는 군인들 뒤로 갑자기 개가 짓기 시작했다. 군인 중 어느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철구는 1층 복도를 닦다가 침실에 누워있는 그녀를 봤다. 나체로 멍하게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고, 양 옆으로 군인들이 누워있었다. 철구를 본 그녀는 이불로 몸을 감싸더니 문 앞까지 다가와 문을 닫았다. 철구의 뒤로 막 샤워를 끝내고 나온 병사 하나가 녀석을 향해 지껄였다.

   “. 죽이던데? 저 년도 좋았을 거야. 다 늙어서 영계들 몇이랑 즐기는 거야? 하룻밤 사이에. 니들도 좋았냐?”

   철구는 눈이 뒤집혀 병사에게 덤벼들었다.

 

   면담은 서재에서 이루어졌다. 중위는 책상 위로 노인의 일지를 던졌다. 그리고 권 중사에게 빠르게 용건을 말했다.

   “결국 바이러스였던 거예요! 게다가 백신까지 거의 완성 단계더군요. 간단한 테스트 몇 개면됩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재앙을 끝장낼지도 모릅니다!”

   “.. 그러니까 시체들에게 물어 뜯겨도 감염이 되지 않는다? 놀라운 얘기로군요. 중위. 믿겨지진 않지만.”

   “같이 내려가시죠! 일단 개에게 실험을 해봤습니다. 직접 보세요.”

   “일단 실험? 어떤 것도 내 명령 없이 이루어져선 안 돼! 당신은 지금 지위가 박탈된 상태고, 영창에 갇힌 몸이란 걸 잊지 마!”

   “좋아요. 좋아. 뭐 중요한 건 아니니까.. 실험 결과 개는 멀쩡합니다. 여전히 게으르고, 여기저기 침을 흘려댄다고요. 그 멍청한 개가.. 혀를 헐떡거리면서.. 아직 살아있어..”

   중위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권 중사는 당황했다. 그 옆을 보좌하던 병사가 입을 열었다.

   “중위님! 지금 부대의 지휘관은 권 중사님이십니다. 예의를 지키십시오!”

   “됐어. 핵심을 말하시오. 실험엔 더 뭐가 필요한 거지?”

   “인간 실험자. 내가 보균자가 될 겁니다.”

 

   땜통이 빗자루를 들고 서재로 들어갔을 때, 중위와 권 중사는 날카롭게 대립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무도 녀석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도 눈치는 보이는 상황인지라 빗질 소리도 조심스러워 괜히 혀를 깨물고 있었다. 게다가 들리는 대화는 더욱 충격적이라 땜통은 청소하는 내내 식은땀이 났다.

   “어쨌든 당신은 안 돼. 유일한 의무병과이지 않나?”

   “그렇다고 섬의 주민들을? 너는 미쳤어!”

   권 중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 최대한 오로지 우리 모두를 위해 사고하고 결정해 왔다! 우리 보급량은 절대 저들을 감당할 수 없고, 저들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집단이야!”

   “아니지. 너희들은 여기 냉동 창고를 보고 생각이 바뀐 거야. 더 이상 인육까지 먹을 필요는 없어 보이는 거지. 그렇다고 저 지하에 있는 식량들을 나눠줄 생각은 없는 거야!”

   “닥쳐!”

   “당신이 굶주린 병사들을 자극해 사람들을 사냥할 때부터 알아봤어! 넌 악마야!”

   “그건 모두를 위한 결정이었어. 덕분에 너한테까지 먹을 것이 간 거야. 네가 고고하게 이미 죽은 고깃덩이들조차 먹는 것을 거부하는 동안, 난 내 부하 모두를 살렸다고!”

   “네가 군인이야? 사람들을 지키기는커녕 사냥하는 게?”

   “뭐라고 해도 상관없어. 너도 결국 내 결정 덕에 살아남았다는 건 부정하지 못 할 테니까. 너에 대한 식량 지급 및 연구 지원을 허락한다. 그게 우리 모두가 살 길이라면. 최종 결정 권한은 너에게 넘긴다.”

   “네가 날 막아도 할 수 없어. 실험이 시작되는 순간 난 내 팔에 주사기를 꽂을 거니까.”

   “원하는 대로. 그럼 우리는 원래 계획대로 가면 되니까. 실험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원래 계획?”

   권 중사 옆에 서 있던 병사가 차분히 한 마디를 거들었다.

   “어차피 이곳 원주민들은 3일 이내 모두 사살하기로 결정했었습니다. 어젯밤 다수결로 내린 결론입니다. 차라리 실험 대상으로 쓰이는 게 그들로써도 더 좋을 겁니다. 스스로 실험대상이 되시겠다면, 우린 계획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잘 생각하십시오.”

중위가 어젯밤에 한 얘기가 모두 맞았다. ‘진짜 사람을 사냥하고 먹었단 얘긴가?’ 땜통은 갑자기 오금이 저려와 들고 있던 빗자루를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아우.. 젠장.”

   땜통은 이를 꽉-깨물었지만, 이미 늦었다. 서재 안의 군인들은 모두 땜통을 노려봤다. 그때였다. 서재 밖에서 총소리가 울린 건. 분명 총소리였다.

 

   철구에게 불의의 일격을 얻어맞은 병사는 철구의 목을 틀어쥔 후에 창고로 끌고 갔다. 마침 상륙한 군인 중 셋은 섬 주민들을 관리하러 내려갔고, 셋은 서재에, 나머지 둘은 침실에서 잠을 즐기는 상황이었다. 분이 풀릴 때까지 철구를 때린 병사가 그만 창고를 나가려 몸을 돌릴 때, 철구는 그의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들었다. 병사는 자신을 겨눈 채, 총을 쥔 손을 벌벌 떠는 철구를 보고 차게 비웃었다.

   “.. 사람 죽여 봤어? 형은 말이다. 시체들보다 사람을 더 많이 쏴봤어.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아? 저 떠는 것 봐라.”

   “너희 놈들은 다 시체들이야. 똑같아! 누구든 잡아먹을 준비가 돼있지? 그게 누구든 간에!”

   “다 마찬가지야. 다 다른 사람 물어뜯고 사는 거야. 이전부터 그랬어. 어린놈의 새끼. 세상의 본질이 뭔지 알려줄까? 내가 다른 놈을 잡아먹어야 산다는 것이 본질이야! 그래서 시체들까지 일어나서 저 지랄을 떠는 거라고! 알아들어? 모르겠지? 애송아. 그래서 넌 내 손에 죽을 거야. 넌 절대 못 쏴. 넌 선을 넘을 배짱이 없는 놈이거든.”

   맞다. 철구는 겁이 났다. 자신 앞에 서있는 그 병사와 마찬가지로. 그래서 그를 죽였다.

 

   철구가 군인들 손에 붙들려 가는 걸 보고, 땜통은 얼른 다락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 몸을 감췄다. 조그만 창을 통해 별장 앞으로 끌려나오는 철구가 보였다. 군인들은 그 놈의 머리에 총을 겨눴다. 그때, 여자가 총구를 막아섰다. 그리고 중위가 뭐라고 열심히 군인들에게 떠들어댔다. 그런데 권중사가 갑자기 그런 중위의 등을 발로 차더니, 쓰러진 그의 무릎을 꺾어 부러뜨려버렸다.

   “으아아악!”

   “너같이 똑똑한 척! 정의로운 척! 하는 새끼가 알고 보면 제일 개새끼야! 모두 너 때문에 죽은 거야!”

   그리고 중위의 다른 쪽 무릎을 마저 짓밟았다. 여자가 비명을 질러댔고, 군인 중 하나가 개머리판으로 여자 머리를 내리쳤다.

   “내가 널 죽일 것 같지? 절대! 넌 실험을 계속해야 돼! ? 내 말을 안 들으면 주민들을 하나씩 하나씩 죽일 거니까!”

   중위의 양팔도 성치 못 했다. 여자는 기절한 채 거실로 옮겨졌다. 권 중사는 자신이 행사한 폭력의 자장 속에서 스스로 악이 받쳐 울부짖었다.

    ‘까짓것 앞으로 네 놈 손발이 돼줄게! 일단 저 꼬맹이부터 실험해보시지. 모두 지하로 끌고 가!”

    땜통은 중위의 비명에 귀를 막고, 다락방을 빠져나오며 생각했다.

    ‘아홉 놈 중에 한 놈은 죽었고, 한 놈은 우리 편, 세 놈은 아직 밑에.. 젠장!’

 

   오전 내내 어둠속에 방치됐던 개는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끊임없이 짖어댔다. 군인들은 노인의 책상을 쓸어버리고, 그 위로 고통 속에 신음하는 중위를 던져 놨다. 그는 부러진 팔다리를 바르르 떨었다. 그 앞으로 철구가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철구의 눈에 반대편 냉동 창고에 자신이 쏴 죽인 병사가 별 성의 없이 눕혀져 있는 것이 보였다. 곧 자신도 그렇게 될 터였다. 그는 살인자니까. 그런데 피살자의 마지막 숨만이 간신히 산 듯, 냉기를 제외한 모든 것이 부동 상태인 냉동 창고 안에서 무언가가 슬쩍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병사 하나만이 철장 안으로 들어가 철구의 팔에 백신을 주사했다. 아이는 넋이 나간 상태였다. 중위는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 백신이 들어있는 병을 병사에게 설명했다. 권 중사와 그의 부하 둘은 만약을 대비해 철장에 자물쇠를 달아놓고, 실험실 밖에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숨을 고르던 중위가 갑자기 흐느끼듯 웃기 시작했다. 권 중사는 또다시 기분이 언짢아졌다.

   “왜 웃는 거지? 네놈이 원하던 실험이야.”

   “재밌지 않아? 이 상황이?”

   “뭐가 재밌지? 네 팔다리가 아작 난 게?”

   군인들은 권 중사가 웃자 따라 웃기 시작했다. 중위의 얼굴이 굳었다.

   “담배 한 대 피고 싶소. 중사.”

   권 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위는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담배를 물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불을 붙이려는 병사에게 말했다.

   “잠깐..”

   그리고 철창 밖에서 계속해서 짖고 있는 개에게 덧붙였다.

   “조용히.. 곧 재밌는 광경이 펼쳐질 거란다. .”

 

   개가 짖는 걸 멈추자, 모두의 몸이 삽시간에 굳었다. 나서는 안 되는 소리. 너무 쉽게 연상이 돼 이 지하에선 외려 너무 비현실적인.. 짐승이 짐승의 살을 씹는 소리. 그 소리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군인들은 힘겹게 냉동 창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웃고 있었다.

   끽- 유리문이 열렸다. ‘그것의 손엔 죽은 병사의 목이 자신의 몸뚱이까지 핏자국을 늘인 채 붙들려있었다. 중위는 다시 웃었다. 그는 이미 이 실험실에 내동댕이쳐졌을 때 확인했다. 흥건히 젖은 바닥과 살짝 열린 캡슐 문을..

독사 앞에서 온몸이 굳은 쥐가 간신히 꼬리를 꿈틀대는 것 마냥 군인들은 떨리는 손을 총을 향해 뻗었다. 하지만 늦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한 명의 목덜미를 물고, 방패막이로 삼았다. 냉동 창고의 유리벽이 박살이 났고, ‘그것은 유리 파편들 사이로 피를 사방으로 튀겨가며 시체의 숫자를 늘렸다. 그리고 시체들은 모두 다시 살아나 최후의 생존자를 쫓았다. 권 중사는 총을 난사하면서 서재로 난 문을 향해 뛰었다.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곧 총알이 떨어졌다.

 

   그 순간, 포구로 뛰어 내려갔던 땜통은 다시 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녀석은 어제 중위가 자신들에게 한 말을 상기했다. 좀 어려웠지만 대충 이해하자면 그 별장 노인은 저명한 세균 학자였고, 이미 죽은 한 여자를 되살리려 했고, 반은 성공했다. 연구는 노인이 배양한 바이러스가 죽은 세포에 다시 활력을 주는 데까지 진행됐으니까. 그리고 역시 중위의 말에 의하면, 아마 그 덕에 세상은 그런 세포를 지닌 시체들로 뒤덮였을 것이다. 기적을 요구한 그 미완의 실험 덕에. 어쩌면 캡슐안의 여자가 이 모든 재앙의 숙주였을 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쩌면.

   “멋진데? 역시 그 영감은 달라.”

   땜통은 이를 악물고 계속 달렸다.

 

   여자는 땜통이 시키는 대로 지하로 향하는 문을 잠근 후,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곧 권 중사의 마지막 비명이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그제야 여자는 독한 표정을 풀고 문에서 떨어졌다. 그때, 섬 주민들을 감시하던 병사 셋이 땜통의 인도 하에 서재로 들이닥쳤다. 땜통은 그들이 지하로 뛰어들자마자, 다시 문을 잠가버렸다.

   어젯밤 아이들에게 일러준 중위의 계획은 이랬다. ‘그것에 대해선 일단 절대 함구. 중위가 군인들을 모을 때, 땜통이 캡슐에 근육마취제를 투여한 후, 마비된 그것을 냉동 창고로 옮겨 놓는 게 핵심이었다. 그런 후, 중위는 군인들 앞에서 자신의 몸에 백신을 투여할 생각이었다. 그 사이 철구가 서재로 통하는 통로를 잠근다. ‘그것이 깨어나 군인들을 공격했을 때, 백신이 효과가 있다면, 군인들은 죽고, 중위는 살 것이다. 만약 효과가 없다면 중위 역시 감염된 시체가 돼 미쳐버린 전우들과 함께 지하실을 한참 떠돌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 전에 청산가리가 든 담배를 피워 물 생각이었지만..

   어차피 모 아니면 도. 땜통은 자신의 임기응변이 저지른 여파를 다 수용하지 못해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언제 이 문을 열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연 후에 안에선 누가 나올 것인가?

 

   감염된 시체들이 실험실 철장 앞에서 울부짖었다. 중위의 손발 노릇을 하려고 실험실에 들어왔다 살아남게 된 병사는 이성을 잃고는 자신을 향해 포효하는 시체들을 향해 총을 난사해댔다.

   “백신을 주사해..”

   중위가 말했다.

   “그게 유일하게 자네가 살 길이야..”

   병사는 얼른 철구에게 주사했던 약병을 다시 집어 들었다.

   “아니야. 그건.. 그건 수술할 때 쓰는 신경마취제야.. 널 속인거야. 저기 푸른 병. 저거.”

   병사가 자신의 팔에 주사를 놓자, 중위가 다시 웃었다. 그때, 세 명의 군인들이 시체들로 가득 찬 지하실로 투입됐다. 그들은 여러 차례 난전 끝에 이미 많이 훼손된 감염자들을 비교적 손쉽게 제압했다. ‘그것을 포함한 모든 시체들은 모두 움직임을 멈췄다.

   철창 안의 병사는 어서 문을 열라고 울부짖었다. 군인 중 하나가 기어이 살아남아 시체들을 뜯고 있는 개를 발로 차버린 후에 실험실 문을 열었다. 철구는 중위를 부축했다. 중위는 아까부터 철구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얘기했다.

   “.. 1차 실험 숙주.. 찾아서..”

   먼저 뛰쳐나간 백신을 맞았던 병사는 불안한지 중위를 향해 뒤돌았다.

   “이 백신인가 뭔가 하는 거 별 상관없는 거죠? 별 이상 같은 건 없는 거죠? 중위님?”

   “담배에 불 좀 붙여주겠나?”

   중위는 한참을 불 없이 물고 있던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았다.

   “미안하다. 자네가 맞은 건 바이러스야. 이 어린 애가 맞은 게 백신이 맞고. 그냥 보고 싶었다. 이 세상에 희망은 있는지. 꼬마야.. 이제 총을 집어라.”

   철구는 바닥에 나뒹구는 소충 하나를 집어 들었다. 군인들이 놀라 철구를 향해 총부리를 겨눴을 때, 감염된 병사는 이미 제일 가까이 있는 동료의 목을 물어뜯기 시작한 상태였다.

 

   총격전이 멈추었다. 철구는 중위를 방패삼아 총알을 피할 수 있었다. 바닥엔 시체들이 즐비했다. 철구는 덜덜 떨며 중위의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는 시체들 사이에 철퍼덕 몸을 눕혔다. 피범벅이 된 녀석의 몸 구석구석에 감염자들이 남긴 이빨자국이 남아있었다. 녀석은 숨을 헐떡이면서 눈을 감았다. 불을 붙일 용기는 도무지 나지 않았다.

   서재 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철구는 눈을 떴다. 석양 빛을 뒤로 하고, 두 사람이 지하로 내려오고 있는 모습이 흐릿하고 아련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백신은 효과가 있었다. 철구는 살아남았다.

   부축을 받으며 지하를 빠져나오던 녀석은 고개를 돌려 중위를 쳐다봤다. 아직 반쯤 뜨고 있는 그의 두 눈을 감겨주고 싶었다.

 

 

17.

   철구가 긴 샤워를 끝낸 후에 가장 먼저 챙긴 건 노인의 연구 일지였다. 중위와의 약속이었다. 녀석은 서재의 불을 끄고 밖으로 나와 친구들과 합류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몸 전체에 알 수 없는 에너지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다시 그녀의 방으로 되돌아갔다. 그간의 과정에 비하면 너무 평온한 길이었다. 군인들이 키우던 덩치 큰 똥개가 자꾸 자길 괴롭히던 땜통의 손등을 물고 도망가 버린 것을 빼놓고는.

   이미 하늘에는 별이 떠 있었다.

 

   “잠깐 쉴까? 별 참 많네.”

   땜통은 풀 섶에 벌렁 눕더니 하늘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곧 코를 골았다.

   “야 이 미친놈아! 일어나! 이 추운 날에!”

   “철구야. 담배 있냐?”

   철구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나 얼마나 잠들었었지?”

   여자가 대답했다.

   “2?”

   “나 꿈속에서 엄마 봤다. 정말 몇 달 만에..”

   칼바람이 불었다. 땜통은 어깨에 메고 있던 소총을 철구를 향해 던졌다. 여자도 그때 철구의 상태를 깨닫고는 입을 틀어쥔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언제?”

   “몰라. 그 똥갠가? 짐승한테는 백신도 소용이 없었나봐. 자식이 좀 괴롭혔다고 날 물어?”

   “오버하지 말고 일어나. 인마.”

   “넌 냉정해야지.”

   철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슬퍼서가 아니라 분해서였다. 그리고 맘을 추스른 후, 땜통이 던진 소총을 주웠다.

   “잠깐.. 잠깐만 쏘지 말아줘. 잠깐만.. 엄마 꿈을 조금만 더 꾸고 싶어.”

   땜통은 꿈속에 빨려들 듯, 서서히 눈을 감았다. 밤하늘 위로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18.

너는 온 섬을 뒤져서 기어이 그 개를 찾아내 쏴버렸지. 하지만 이미 마을 사람 몇을 물은 후였어. 녀석은 엄청 불쌍한 신음 소리를 냈어. 그리고 한참을 군인들 시체를 게워낸 후에야 죽었어. 그것 때문이었을까? 아님 백신은 아무 소용이 없던 걸까? 그럼 넌 왜 아직도 안 변한 거야?”

 

 

19. 

   둘은 친구가 그렇게 좋아했던 노인의 별장 한가운데 그의 시신을 눕혔다. 그리고 별장에 불을 질렀다. 별장을 태우던 불은 날이 다 밝을 때까지 꺼지지 않았다. 철구와 여자는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서로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렇게 밤새 친구의 마지막을 지켰다.

   화염이 주던 취기가 서서히 가셨다. 겨울바람이 일출마저 외롭게 보이게 만들었고, 잔불은 까맣게 탄 목재를 마저 태우면서 탁, - 소리를 냈다.

   철구가 입을 열었다.

   “이 섬을 떠나야겠어.”

 

 

20.

   마을 주민들은 모두 감염되었다. 그렇지만 감염 증상은 그 전과는 조금 달랐다. 우선 움직임이 현저히 느렸다. 그리고 몽유병 환자들처럼 눈을 감은 채 소리만으로 목표를 쫒았다. 가끔 눈을 뜰 때도 있었는데, 그때 눈빛은 마치 이성을 되찾은 듯 서글퍼보였다.

   두 사람은 굳이 그들을 사냥하지 않았다. 얼이 나간 듯 선량해 보이는 표정 때문이기도 했고, 그들을 그대로 두는 편이 훨씬 재미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별장의 냉동 창고에 남은 식량을 가지러 갈 경우, 철구가 장난으로 박수를 치면, 여자가 조금 앞으로 가고, 또 여자가 노래를 불러 감염자들을 불러 모으면, 철구가 그들의 등을 발로 차고 얼른 달아나는 식이었다. 나중엔 좀 더 과감해져 두 사람이 고함을 치고, 춤을 춰가며 일부러 그들을 불러 모았다. 감염된 시체들의 엉거주춤한 걸음걸이로는 절대 그 둘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걸 거듭 확인했기 때문이다. 물론 섬 밖을 나가려는 자신을 자꾸 붙드는 여자 때문에 화가 난 철구가 2층 방 창가에 앉아 소총으로 몇을 사냥한 적은 있었다. 그 것도 곧 여자의 제지를 받았다. 그녀는 감염자들이 모두 사라질 경우 어쩌면 둘의 삶이 외로워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새벽녘에는 창밖으로 누군가 우는 소리도 가끔 들려오곤 했기 때문이다.

   그 겨울은 정말 기록적인 폭설이 쏟아졌다. 만약 기록할만한 누군가가 살아있다면. 다행인지도 모를 이 두 번째 이상 현상으로, 세상은 무척 고요해졌다. 죽은 자들을 모두 덮어버린 것이다.

   그 이상한 평화 속에서 두 사람은 겨우내 서로를 보듬은 채 한기를 견뎠다. 어쩌면 이제 이 세상에는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죽은 자들과 산 자들이 작은 인기척에도 견디지 못하고 일어나 서로를 잡아먹는 이 살벌한 세상에서 그녀의 방만은 두 사람을 허락했다. 늙은 창녀와 소년을..

   그녀에겐 그의 피부, 온기, 그리고 녀석의 숨결을 따라 미세하게 방향을 같이 하는 이 방의 잡다한 사물들. 이 세계만이 유일한 질서였고, 의미였다.

 

 

 21.

   솔직히 말하면 그때 소년과 함께 보낸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다.

   “기쁘지? 세상이 멸망했으면 뭐 어때? 얼어 죽으면 어때? 어차피 세상은 나에게 항상 겨울이었어.”

 

 

22. 

   철구는 그녀의 방으로 돌아온 이후로 거의 잠으로 시간을 보냈다. 여자는 나중에야 그 원인을 알았다.

   우선 별장에 왜 난방과 수도가 계속 공급됐는지에 대한 미스터리가 풀렸다. 재가 된 별장의 지하에는 냉동고와 실험실 외에 벽 뒤로 각종 기계들이 들어차 있었다. 철구는 그 기계들과 파이프를 타고 더 밑으로 내려갔다. 그 곳에는 제법 큰 정수시설과 유조탱크가 있었다. 녀석은 여자가 잠들면, 그 유조탱크에서 기름을 빼내 포구로 갔다. 그리고 배를 모는 연습을 했다. 시동 거는 것부터 차근차근. 기름은 충분했다.

   눈이 계속 오는 것도 그에겐 호기였다. 철구는 군함에서 빼내온 잠수복을 입고, 그 위에 군인들의 방탄복과 방한복을 걸쳤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가슴까지 차오는 눈밭을 헤치고 감염자들을 찾아내 사냥했다. 녀석은 눈 속에서 불쑥 몸을 일으키는 놈들에게 붙들려 몇 번을 눈 속에 파묻혀야 했다. 그렇다고 총소리로 그녀를 깨울 수는 없었다. 녀석은 몰래 품고 나온 망치와 손도끼로 순식간에 감염된 시체들을 아작 냈다. 얼굴에 묻은 피는 눈으로 닦아냈다. 감염자들을 모두 제거하지는 못했지만, 녀석은 그 정도면 여자 혼자 지내도 충분히 안전할거라고 판단했다.

 

   그 즈음의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여자는 매일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저녁을 차렸다. 철구가 입을 열었다. 여자는 말없이 꾹꾹 밥을 삼켰다.

   “인천 공항으로 갈 거예요. 만약 그곳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가 보고, 겪은 일에 대해 말해 줘야 해요.”

   그녀는 혼자 남기를 거부했다. 그렇다고 섬을 떠나는 것도 싫었다. 두 사람만이 계속 이 섬에 머물기를 바랐다.

   “먹을 것도 다 떨어져 가잖아. 어차피 봄이 되면 결국 우린 죽어!”

   여자는 죽어도 상관없다는 막무가내 식이었다. 심지어 별장에서 가져온 연구일지를 태워버릴 거라고 엄포를 놨다. 철구는 말문이 막혔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죽도, 밥도 안 될 거라고 판단했다.

   “어차피 백신이 내 몸 안에 있어! 여러 차례 검증됐으니 태워도 상관없어!”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조금만 기다리면 돼. 조금만. 만약, 만약 그 방송이 실제로 맞다면.. 구조대를 데려올게요. 반드시 돌아올 거야. 반드시..”  

   그녀에겐 최후의 방법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땜통이 남겨뒀던 청산가리가 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라이터를 켰다. 철컥- 철컥-.. 철구는 처음으로 여자를 때렸다. 물론 알고 있었다. 어차피 시위일 뿐, 여자가 실제로 불을 붙이진 않으리란 것을. 여자는 녀석의 목을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철구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다시 안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소년은 남자가 되어 있었고, 여자는 한없이 약해진 상태였다.

 

 

 23.   

   오랜만에 비가 내렸다. 여자는 부엌 쪽으로 가 철구가 배에서 떼 내온 발전기를 돌렸다. 지겹도록 봐온 반복되는 토크쇼 방송이라도 볼 생각이었다.

   “생존자 여러분께 알립니다. 생존자 여러분께 알립니다. 인천국제 공항으로 오십시오. 인천국제 공항으로 오십시오. 식수와 식량, 의료품들이 확보되어 있습니다. 정부가 여러분을 지켜드립니다. 식수와 식량, 의료품들이 확보되어 있습니다. 정부가 여러분을..”

   이 것은 희망의 징표일까? 여자는 볼륨을 최대로 낮추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무심히 tv에 떠있는 칼라-바 화면이 어두컴컴한 방의 분위기를 지배했다. 여자는 tv를 꺼버리고, 얼마 전부터 읽기 시작한 노인의 연구일지를 펼쳐들었다. 다시 돌아온다는 약속의 증거로 그가 두고 간 것이었다.

   ‘2차 바이러스 실험 결과, 감염 시, 운동 능력의 급격한 퇴조와 동시에 항시적 가수면 상태에 돌입. 감염자의 육체는 그의 이성적 제어를 벗어나, 2의 숙주를 찾아서 본능적인 공격 및 포식 행위를 보이는 반면, 감염자의 정신은 계속 무의식에 머무는 것으로 보임. 계속 꿈을 꾸는 상태일 것으로 추측.’

   창밖엔 아직 여기저기 많이 쌓여있던 눈 더미들이 비에 섞여 땅속으로 스미고 있었다. 여자는 빗소리에 기분이 좋아졌다.

   “감염이 되면 계속 꿈을 꾸게 된데. 몸이 다 썩을 때까지. 우리 그냥 같이 감염이나 될까?”

   물론 대답은 없었다. 그 방안에는 이미 그녀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24.

   소년은 잠결에 대답했다.

   “욕 나오네. 도대체 바이러스를 몇 개를 만든 거야? 육지에 퍼진 건 몇 차고? 난 운 좋게 맞는 백신을 맞은 거야. 그 개는 아마 2차를 맞은 거고. 어쩐지 뒤뚱거리는 게 잡기 쉽더라니. 멍청한 놈.”

   “연구 일지에서 가장 재밌는 부분이 어딘지 알아? 1차 실험 숙주 부분. 자기가 사랑하던 여자랑 꼭 닮은 아이의 사체를 구해 먼저 실험을 해봤대. 모 재벌가에선 연구비까지 지원했어. 자기 딸이었거든. 운동 능력, 지능, 육체 상태 모든 것이 성공적이었나 봐. 정말로 죽은 아이가 되살아난 거야. 부모는 너무 좋았겠지? 처음에는.. 근데 부작용이 있었어. 급격한 노화 및 불안정한 심리 상태. 그래서 재벌가는 그 아이를 다시 이 섬으로 보냈어. 하지만 노인은 외면했지. 그 아이는 어떻게 됐을까? 지금쯤 죽었을까? 근데.. 이거 꼭 내 얘기 같지 않아? 이렇게 말하니까 꼭 진짜 같지? 진짜야. 나 사실 너보다 어려.”

   “. 당신이 나보다 어리다고?”

   소년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말했잖아. 노인이 날 여기로 데려왔다고. 맞춰봐. 내 말이 진짠지? 가짠지?”

   “무조건 가짜! 그거 방금 지어낸 얘기지?”

 

 

25.

   눈은 대부분 녹았다. 더 이상 그녀를 위협할 감염자들도, 추위도 모두 사라졌다. 더 이상 읽을 편지도, 연구일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떠난 이가 다시 돌아올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텅 빈 섬을 혼자 배회하거나, 언덕에 올라 바다를 보는 일로 하루를 보냈다.

   어느새 섬은 곳곳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날씨로 바뀌어있었다. 여자는 눈에 띄게 행동이 굼떠졌다. 아무 곳에서든 걸터앉으면 머리를 박고 잠이 들었고, 가끔 소년이 옆에 있는 것처럼 혼자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공상으로 보내다가 가끔 꿈과 헷갈리기도 했는데, 가령 꿈속에서 그녀는 소년과 또래의 소녀로 돌아가 풋사랑을 나누기도 했고, 일흔의 할머니가 되어서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 모든 것이 현실 같고, 또 꿈같아 그녀는 퍼뜩 깨어나도 다시 꿈을 꾸길 바랬고, 현실에서도 꿈을 봤다. 가끔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이 할머니로 비춰져서 깜짝 놀랐고, 스스로 연구 일지에서 봤던 실험 숙주라고 생각되어 모든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녀에게 끊임없이 닥치던 세파는 이제 멈췄다. 오로지 기다림과 체념 사이를 거닐며 외로움을 공상으로 이겨낼 뿐이었다. 어떤 때는 이 모든 것이 정말 거짓말 같아서 세상에 닥친 재앙도, 바이러스에 감염돼 되살아난 시체들도, 그녀가 겪었던 별장에서의 일들도 다 자기가 지어낸 환상을 뿐이고, 아무도 없는 섬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단지 꿈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했다. 그러다 불타버린 별장, 반쯤 가라앉은 군함 등의 모습이 눈에 보이면 갑자기 차가운 현실감과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몰려와 몸서리쳐지는 것이다. 심지어 그녀는 시체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이미 대부분 썩어 움직이지도 못 하는 그것들의 입에 자기 팔을 대보기도 했다.

   종국에 그녀는 방 밖으로 아예 나가지 않았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그 세계는 절대 변하지 않을 테니까. 자꾸 울다보니 심지어 소년 얼굴마저 지워졌다. 간혹 얼굴이 떠올라도 그건 그녀를 돈 주고 사서 동정을 떼던 수많은 소년들 중 하나의 얼굴일 뿐이라고, 어쩌면 소년 자체가 자기가 만든 사람일 뿐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소년은 원래 없었다. 원래 그녀는 혼자였다. 아주 옛날부터.

   그녀는 창가로 가 앉았다. 결국 봄이 왔다. 이건 꿈인 것일까? 세상이 다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새 옷을 입고 싶어졌다.

 

   그리고 소년이 돌아온 것이다.

 

 

26.

   나는 소총을 내던지고, 포구로 뛰어 내려가 소년을 안았다. 그리고 비틀대는 그를 부축해 방으로 옮겼다. 그의 팔엔 이빨자국이 있었고, 피가 살짝 배나오고 있었다. 소년은 침대에 눕자마자 칭얼거렸다

   “자꾸 졸려.. 잠이 와

   아! 그는 아직 변하지 않았다.

   철구가 그녀를 다시 봤을 때, 그녀는 이미 할머니였다. 그녀는 창가에 앉아 졸고 있었다. 철구는 의외로 담담한 마음이었다. 섬 바깥으로 나가 백신 실험에 참여해 다양한 실험 군들을 접해봤다. 그는 그녀가 2차 별종 감염에 해당한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증세는 급격한 노화와 정신적 퇴행. 공격성 없음.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녀는 이미 노화가 많이 진행된 상태였다. 그래도 자신이 늦었다는 걸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가슴이 쓰렸다. 언제 감염이 된 것일까? 실제 그녀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 의외로 어릴지도 모른다. 철구는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살며시 닦아준 후,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1차 실험숙주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철구의 팔을 살며시 물었다.

 

   꽃이 피듯, 흰 천에 핏방울이 번져간다. 철구는 침대에 벌러덩 누워 생각했다. 오래전, 중위가 마지막으로 남긴 경고가 그제야 다시 떠올랐다. ‘그녀는 네 생각과는 다른 사람이야. 그래도 상관없다면 잘 관찰해. 1차 실험숙주 부분을 찾아서 읽어봐..’

  그에게 처방된 백신들이 그녀가 준 상처에도 효과가 있을까? 곧 구조대가 올 것이다. 그녀의 상태로 볼 때, 어쩌면 그녀는 그 전에 숨을 거둘 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구하지 못할 여자였다. 하지만 녀석에게 그녀는 수년간을 기어코 살아남게 한 목적이었고, 모험의 유일한 의미였다. 너무 어린 나이에 깨달은 공허를 채워주던 여자. 저 바깥을 떠도는 내내 항상 그리던.. . 어차피 세상은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저기 책상위에 놓인 연구일지나 두 사람의 시체가 이 세상을 치료하는데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다. 창밖으로 벚꽃 잎들이 흩날린다. 생각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도 그녀도. 햇살이 너무 맑아 철구는 약간 슬퍼졌다.

   침대 밑으로 오래된 담뱃갑이 보였다. 그는 피지도 못하는 담배를 한 대 빨았다. 방안 가득 볶은 아몬드 향이 난다.

   그때 그녀가 눈을 떴다. 철구는 그녀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잠이 와

   그녀는 소년을 안심시키고 싶었다.

   “봄이라 그래. 그래서 졸린 거야.”

 

   그녀는 소년에게 다가가 그 옆에 구웠다. 그리고 스르르 눈을 감고는 그를 먹기 시작했다. 따스한 봄 볕 아래에서 그녀는 다시금 꿈을 꿨다. 이건 모두 나의 꿈이다. 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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