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좀비

2015.01.15 09:1901.15


 

 

 

 

 

 

 

그는 눈을 번쩍 떴다. 뜨거운 열기가 전신을 휘감았다. 한여름 밤의 열대야 속에 누워 있는 것만 같았다. 매트리스 안으로 몸이 가라앉는 기분이 들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침대 머리맡에 몸을 기대앉으니 순식간에 열기가 사그라졌다. 그는 좁은 방의 구조상 침대를 창가 아래 둘 수밖에 없었는데 창문을 닫아놓아도 외풍이 느껴졌다. 식은땀이 흘러 젖은 등이 맞닿은 한기로 인해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는 침대 아래로 발을 내리면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햇귀가 들지 않는 새벽이었다. 어슴푸레한 빛에 사물의 윤곽은 확인할 수 있었지만 동이 트려면 아직 멀었다. 그는 손을 더듬거리면서 베개 옆에 높아둔 핸드폰을 들었다. 새벽 5시가 조금 넘어 있다. 일어날 시간에 눈을 떠서 다행이라 여겼다. 종종 그는 불면증에 빠진 사람처럼 새벽 한가운데 깨어나 뜬 눈으로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벌레처럼 꿈틀대는 무언가가 감겨 있는 눈꺼풀을 억지로 벌려 눈 속으로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그럴 때면 등골을 스치는 섬뜩함에 숨이 막혀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지난밤에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무엇이라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몸을 틀어 닫힌 창문을 열었다. 오래된 주택의 창문은 나무로 되어 있어서 조금만 힘을 주어도 소리를 내질렀다.

그의 방을 기준으로 왼쪽은 부엌과 화장실이고 오른쪽은 노인의 방이었다. 그리고 바로 앞에 거실이 있고 방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곳에 베란다가 있다. 새벽녘마다 일어나 기도를 하는 노인은 오늘따라 조용했다. 이가 다 빠져 발음이 새는 목소리를 크게 내면서 뭐라 중얼거리던 기도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몸을 씻어야겠다 싶어 침대에서 내려와 서랍에서 속옷을 꺼낸 후 미닫이 문 앞에 섰다. 막상 문을 열려고 하니 망설여졌다. 미닫이문을 열면 노인이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조금만 움직여도 나무가 요란하게 소리를 내지르는 것이 그는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문을 개조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업체를 부르자니 귀찮고 개조하는 것에도 돈이 많이 들 것 같아 쭉 내버려두었는데 점점 문을 열 때마다 눈치가 보이는 것이다. 그게 또 짜증나서 그는 힘차게 문을 열었다. 어둡고 고요한 실내에 미닫이문이 끄는 소리가 유리를 깨트리듯 소리를 냈다. 욕실 바로 옆에 상자가 쌓여 있었다. 현관 앞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어서 그는 그것을 치울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상자를 보니 괜스레 짜증이 일었다.

노인이 또 홈쇼핑에서 무언가를 산 모양이었다. 무엇을 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보나마나 저번에 주문한 이불이나 전기장판일 터였다. 사이즈로 보아하니 전기장판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같은 물건을 매번 같은 업체에 주문하고 송금을 하는 것이 노인의 유일한 놀이거리였다. 하지 말라고 윽박질러도 소용없었다. 오히려 노인은 자기 돈인데 왜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냐고 쏘아붙였다. 정부에서 조금 받는 국민연금과 노인연금을 모으기도 전에 홈쇼핑에 탕진해버리니 그는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그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는 요양보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따져봐야 하나 곰곰이 고민했다. 혼자서 시내까지 갈 수 없는 노인이 요양보호사의 손을 빌리는 거야 당연하게 귀결되는 논리였다. 노인의 일에 왈가왈부하긴 죽기보다 싫었지만 계속하다 이렇게 돈을 쓰면 분명 노인은 그에게 손을 벌릴 것이 분명했다. 노인의 자존심 상 그에게 손을 벌린다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세차게 젓고는 욕실에 들어섰다. 문고리가 고장이 나서 잠가두면 문이 열리지 않는 사태가 발생했다. 제 세상인 듯 문을 벌컥 열어젖히는 노인만 아니라면 마음 편히 욕실을 쓰겠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노인은 방문을 꼭 닫은 채 방에 틀어박혀 있으면서도 그가 욕실을 사용하는 순간만큼은 기가 막히게 알아차렸다. 샤워 부스를 든 채 물을 틀자 문 너머에서 노인의 커다란 기도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구 하나를 죽일 기세로 큰 소리를 내지르는 소리에 그는 문 너머를 노려보다가 차가운 물을 제 몸에 뿌렸다.

누가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신경전이었다. 그러나 그는 노인보다 먼저 죽을 생각은 결코 없었다. 물론 그것은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출근하면 언제나 일을 시작하기 전에 커피믹스를 타 마셨다. 그날도 그랬다. 평상시처럼 종이컵에 커피믹스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숟가락으로 대충 휘휘 젓고는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커피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혀를 자극하는 쓴맛과 달짝지근한 프리마의 맛은 조금도 없었다. 다시 마셔보았지만 혀에 투명한 막이 감싸인 것처럼 돌기에 닿는 것은 어떤 맛이 아니라 뜨거운 감각이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커피를 그대로 화장실에 버렸다. 그가 도로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부팅하자 사장을 비롯하여 한 명밖에 없는 여직원이 출근을 했다.

그는 집에서 버스로 20분 정도 걸리는 K읍에 있는 여행사에서 경리 일을 보았다. 서른이 넘은 나이와 변변한 직업도 없이 살아온 세월은 작은 여행사라 할지라도 내밀기 초라한 것이었다. 그에게 회계 업무를 가르치는 여직원은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며 그가 하는 일을 감시하듯 지적하였다. 서류 하나를 작성하는 것에도 제 일을 보다가 불쑥 고개를 그가 보는 모니터에 들이밀면서 매섭게 그의 실수를 지적하여 몇 분이나 쪼아댔다. 젊은 사람이 이것도 못해요? 서류 작성 안 해봤어요? 글을 적었다면서 맞춤법도 틀려요? 마흔이 넘은 여직원은 평소에는 순한 얼굴로 여행사를 찾아오는 손님을 대했지만 막상 그를 바라보면 히스테리를 부리듯 하나하나 따져댔다.

더존 프로그램에 장부를 기입하다가 차변과 대변을 잘못 넣어서 여직원에게 호되게 잔소리를 들었다. 사장이 점심 먹고 일하자고 하지 않았으면 점심 내내 잔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늘 그렇듯 점심은 뼈다귀해장국이 아니면 백반이었다. 근처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뼈다귀해장국을 세 개 주문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여직원은 다소곳이 의자에 앉으면서 그를 빤히 올려다보고는 공부 좀 더 해야겠어, 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어색하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는 언제나 그녀에게 하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기계처럼 반복하면서 그는 울컥 치미는 짜증을 느꼈다. 얼굴 표정을 가리기 위해 정수기 쪽을 향해 몸을 일으켰다. 잔에 물을 따르고 자리로 오니 해장국이 준비되어 있었다.

맛있게 먹어요.

여직원은 마더 테레사만큼이나 자애로운 얼굴로 말을 건네고는 국물을 한 수저 떴다. 그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크게 국물을 떠서 입에 넣었다고 도로 내뱉고 말았다. 국물이 튀어서 그의 안경알에 묻었다. 여직원이 비명을 지르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아차 싶었다. 그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사장이 허허 웃으면서 호기롭게 말했다.

뜨거운데 천천히 먹지 그랬어?

죄송합니다.

그는 재빨리 고개를 조아렸다. 여직원이 티슈를 뽑아 국물이 묻은 자리를 닦아냈다. 다행히 옷에는 묻지 않았다. 만약 옷에 튀었다면 오후 내내 그것을 들먹이는 소리를 들어야했을 것이다.

자자, 다시 들지.

사장은 큼지막한 뼈가 있는 뚝배기에 밥을 넣고는 숟가락으로 저었다. 그리고 크게 한 입 떠 호호 불면서 먹기 시작했다. 여직원도 그를 흘깃 쏘아보고는 점잖게 국물을 떠먹기 시작했다. 국물 한 번, 밥 한 입. 그렇게 번갈아 먹는 것을 보니 그는 괜스레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 한 입 떠먹은 해장국은 뻘건 빛깔을 드러내면서 역겨운 모습을 담아냈다.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먹었던 주제에 방금 떠먹었을 때의 맛이 입안에 남아 도저히 숟가락을 들 수 없었다. 입안에 남아있던 맛은 해장국의 얼큰한 매운 맛이 아니었다. 들깨가루의 고소한 향기도 아니었다. 썩은 시체의 냄새를 가진 해장국의 맛이 그의 혀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늙으면 죽어야지.

노인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버릇처럼 중얼거리곤 했다. 아침에 혈당을 잴 때, 식후에 약을 먹을 때, 안약을 넣을 때. 3년 전 노인은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눈이 건조해지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안약을 넣어야만 했다. 벌벌 떠는 손으로 혼자서 안약을 넣는 게 여의치 않으면 그는 종종 요양보호사의 손을 빌렸다. 그가 퇴근 후 집에 들어섰을 때에도 침대 위에 두 다리를 뻗고 누워 있는 그의 얼굴 위로 젊은 여인의 손길이 보였다. 조심스레 안약을 두어 방울 떨어뜨리고는 다 됐다면서 노인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가 인기척을 내자 여자가 노인의 방에서 나와 그를 맞이했다. 그는 여인이 다가오자 매력적인 향기가 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노인과는 차원이 다른 젊고 싱싱함이었다. 아직 살아 있는 짐승의 가죽을 벗겨낸 것만 같은 그런 살냄새에 그는 입맛을 다셨다. 갑작스레 허기가 느껴졌다. 그제야 그는 점심을 한 입도 먹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앞에 주문된 뼈다귀해장국은 초라하게 식어갔다. 사장과 여직원은 한 술도 뜨지 못하는 그를 보면서 어서 먹으라고 다그쳤지만 그는 속이 안 좋단 말로 얼버무렸다. 맛있게 먹고 있는 그들을 보니 괜스레 화가 났다. 입안으로 들어가는 붉은 국물과 하얀 밥알을 볼 때마다 속이 더부룩해졌다. 그는 화장실을 가겠다고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입에 들러붙은 맛은 여전히 역했다. 먹어선 안 될 것을 먹은 것처럼 그는 찜찜한 기분을 참을 수 없었다. 코로 숨을 들이쉬니 주변에 떠다니는 공기에서 알 수 없는 냄새를 느꼈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하수구 냄새가 선명하게 다가왔다.

이제 그만 가볼게요.

여자가 거실 구석에 내려놓은 가방과 웃옷을 챙기면서 입을 열었다. 어르신 진지는 차려드렸어요. 조그만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가 퇴근하기 전에 먼저 집을 나서는 여자여서 두 사람이 마주하는 일은 그다지 없었다. 그렇지만 노인의 성화에 못 이겨 여자가 늦게까지 집에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무슨 심보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여인에게 아무리 맛있는 냄새가 나도 상식이라는 게 존재해야만 했다. 그는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에 흠칫 놀라 여인을 보았다. 그제야 여인의 얼굴이 똑바로 보였다.

그와 비슷한 나이를 가졌을 것 같은 여인의 피부는 주름 하나 없이 매끈했다. 입술에 칠해진 붉은 립스틱은 여자에게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색이었다. 검은 머리, 검은 재킷, 검은 바지. 검은색에서 붉은색이 둥둥 떠다녔다. 그는 그 붉은색에서 달콤한 과즙이 나올 것만 같아 한동안 멍하니 여자를 보았다. 여자가 그를 지나치자 어깨에 멘 가방이 아닌 왼손에 들린 쇼핑백이 보였다.

그건 뭐죠?

어르신께서 필요 없다고 주셨어요. 비누랑 수건이에요.

쇼핑백 안을 살짝 열어 보이면서 여자가 말했다. 고개를 살짝 숙이자 턱에 살이 잡혔다. 통통한 몸이라는 것이 그제야 보였다. 그것이 육감적으로 보여 그는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는 여자를 배웅하고는 현관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자 싱그러운 냄새가 사라졌다. 그 자리를 꿰어 차듯 쉰내가 그의 코를 찔렀다. 오랫동안 씻지 않아 내는 시큼한 냄새를 킁킁 대면서 맡자 냄새가 나는 곳이 어디인지 알았다. 닫힌 방문 사이로 노인의 냄새가 흘러나왔다. 그는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가만히 거실에 서 있었다. 노인에게서 이렇게 끔찍한 냄새가 나는 줄은 몰랐다.

늙으면 죽어야지.

그제야 노인의 말이 옳았음을 그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말이 되어 병원을 찾았다. 그는 다시는 대학병원의 문턱을 넘을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노인이 아내가 통장을 들고 도망갔을 때 처음 쓰러져 찾은 곳이 이 대학병원이었다. 당뇨 판정을 받은 후 저혈당으로 다시 쓰러져 찾은 곳도 이 병원이었다. 마지막에 찾았을 때에는 저혈당도 아닌 뇌졸중이었다. 노인이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질 때마다 그는 알게 모르는 희열을 느꼈다. 무언가 벅찬 승리감에 주먹을 꽉 쥐면서 곱고 고통으로 꿈틀대는 왜소한 등을 보았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는 동안 그는 진한 소독내음보다도 짙은 피 냄새를 더 깊이 느꼈다. 의사는 그를 바라보지 않고 무미건조하게 증상을 물었고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맛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겠어요. 의사에게서는 민트향이 풍겼고 그것은 신성함마저 서려 있어서 의사의 하얀 가운을 볼 때마다 그는 손끝이 저릿했다. 의사는 간호사를 불러 그에게 정밀검사를 하자고 했다. 검사가 모두 끝났을 때 일주일 후에 검사결과를 들으러 오라고 했다. 그는 알았다고 하면서 병원을 나섰다. 깨끗한 곳에 있다가 거리로 나서니 질척이고 기분 나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그는 입안을 휘감는 쓴 맛에 침을 뱉고는 빠르게 길을 걸어갔다.

점점 냄새가 심해져만 갔다. 그의 후각이 진화를 했다고 해야 할지 방에 누워 있거나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사람의 냄새가 훅 끼얹어졌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에서 풍기는 알싸한 향기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제과점을 지나칠 때 나는 빵 냄새도, 노점에서 파는 튀김이나 떡볶이의 매콤한 냄새도 누가 지나갈 때 나는 살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혀와 코가 모두 이상해졌음을 확신했다. 코는 자극적이고 그의 식욕을 자극하는 것을 찾아내려고 자꾸만 벌렁거렸고 입은 그가 먹으려는 음식 모두를 거부하기라도 하듯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맛을 느끼게 했다. 맛을 느끼는 맛봉오리가 마비가 된 것인가. 코에서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날 때마다 그는 침을 질질 흘리면서 참을 수 없는 공복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어디에서 그런 냄새가 나는지 알 수 없었다.

노인은 며칠 씻지 않은 것처럼 꿉꿉한 냄새가 났고 사장은 썩은 과일처럼 들큰한 입 냄새를, 여직원에게서는 노인에게서 나는 냄새가 옅게 풍겨왔다. 마흔이 넘은 여직원에게서는 결혼하지 않은 고독한 냄새가 배어져 나오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자 그는 그녀가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에 대해 조금 관대해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용납하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 실수를 한 것을 혐오스럽다는 듯 진저리를 치면 그는 마우스를 꽉 잡으면서 여직원을 살짝 흘겨보았다. 그의 눈꺼풀 아래 들어선 눈동자에 푸른 기운이 들어차는 것을 그도 여직원도 몰랐다.

일주일 후에 찾아갔을 때 병원에서는 아무런 이상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속절없이 돈만 버리고 온 기분을 느꼈지만 탱탱한 얼굴을 가진 어린 간호사를 보면서 그 마음을 풀었다.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향기로운 내음이 났다. 그것은 그의 기분을 한결 좋아지게 했다. 반대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역한 냄새가 났다. 노인의 이마에 자리 잡은 검버섯은 얼마나 눅눅한 냄새를 풍기는지 그는 그것을 볼 때마다 손으로 파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용서하고 사랑하라.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질 때에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노숙자처럼 꾀죄죄한 몰골을 한 중년 남자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가벼운 감색 재킷을 입은 남자는 마른 몸을 갖고서 목울대를 울리며 같은 말을 반복해서 내질렀다. 용서하고 사랑하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하고 사랑하라. 중년 남자의 얼굴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는 그 시선을 피했다. 그렇지만 중년 남자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볼에 닿은 중년 남자의 뜨거운 시선이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거북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마침 중년 남자의 뒤로 높다랗게 세워진 교회의 십자가에 불이 들어왔다. 붉은 불빛은 먼 곳에서 내려온 구원의 불꽃처럼 남자를 감쌌다. 남자는 핏대가 서도록 목소리를 드높였다. 용서하고 사랑하라. 회개하고 사랑하라. 저 목소리를 어딘가로 치울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만큼 그는 예수 그리스도란 이름을 들으면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몰아쳤다.

노인은 젊은 시절을 한량처럼 보내다가 교회 목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내는 그 옆에서 어찌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글을 배우지 못한 아내는 교회의 장부를 정리할 수가 없어 노인이 모두 그것을 다 정리해야만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아내에게 모진 말을 쏟아 부었다. 목사라고 하기엔 어려울 만큼 욕설을 스스럼없이 내뱉었고 가끔 아내를 손찌검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 그는 그런 노인이 태산처럼 거대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밤늦게 잠을 자지 않고 있으면 잔소리를 하고 매질을 해도 그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아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도망갔을 때 그는 오히려 그녀를 축복했다. 평생 노인과 함께 하기엔 그녀의 인생이 아까웠다. 노인이 모은 재산을 들고 사라진 것은 신도 용서해줄지도 몰랐다. 그만큼 그녀는 고생하고 멸시를 받으며 살았다.

쓰러지기 전까지만 해도 노인은 혼자서 무엇이든 할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남자는 살림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읊조리면서 그에게 밥을 하라, 빨래를 하라 살림을 시키기 시작했을 때 그는 노인이 얼마나 웃기는 인간인지 깨달았다. 그가 대학을 간 후 남존여비 사상이 똘똘 뭉친 노인이 스스로 밥을 하고 빨래를 하게 되었을 때에는 자존심을 뭉개버린 것만 같아 통쾌했다.

그가 문예창작학과를 지원했을 때 노인은 화를 냈다. 평소 하던 매질이 아닌 빗자루로 사람을 죽일 듯 팼다. 하지만 그는 노인이 상관할 일이 아니지 않냐 일갈하면서 기어이 문예창작학과에서 대학을 시작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피 터지게 공부를 했고 장학금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휴학을 하면서 학비를 벌었다. 그가 공모전에 당선되어 받은 상금은 학비로 충당이 되기도 하고 용돈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그가 힘겹게 졸업을 했을 때에 그의 나이는 서른이 되어 있었다. 꽤 늦은 나이에 졸업을 했단 사실에 그는 취업난에도 뛰어들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년 더 글을 써보겠다고 허세를 부린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다. 졸업하고서 남은 것은 어디에 자랑할 데 없는 등단소식과 속절없이 먹어버린 나이였다.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왔을 때 그는 비참함마저 느꼈다.

몇 년간 소식도 없이 있다가 훌쩍 집에 들어선 그를 보고 노인은 고소하다는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등이 구부러지고 풍으로 왼쪽 다리를 못 쓰게 된 그는 많이 왜소해졌지만 눈빛만은 젊은 사람처럼 힘이 넘쳤다. 당뇨로 인해 매일 하루에 한 번씩 인슐린을 넣어야 하는 것도 거르지 않고 혼자서 걸으려고 지팡이에 의지하며 하루에 30분씩 동네를 걸어 다녔다. 삶에 집착이 많은 노인이었다. 노인은 식단에도 신경을 써서 짜거나 매운 것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인스턴트를 내오면 접시를 저 멀리 치워서 하루 종일 구시렁거렸다. 부엌살림에는 일절 손도 대지 않던 노인은 자신의 목숨에 해가 간다 싶은 음식을 발견하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요양보호사를 들인 후로 노인은 그녀에게도 그런 소리를 하는지 궁금했지만 요양보호사가 집에 있는 동안에는 그가 일을 하고 있어서 그걸 확인해볼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용서하고 사랑하라.

중년 남자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뒷걸음질을 치면서 몸을 틀었다. 좀 더 아래쪽으로 가서 버스를 타야만 할 것 같았다. 그는 시장 쪽으로 몸을 틀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차가운 밤공기를 크게 들이키니 고소한 냄새가 났다. 그는 코를 킁킁대면서 냄새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건어물과 생선의 비린내가 나더니 정육점에 걸린 돼지의 몸뚱이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그것이 어찌나 먹음직스럽던지 그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는 정육점에 들어가서 불고기를 두 근 주문했다. 진열장에 늘어서 있는 붉은 살코기를 보니 마블링이 잘 된 소고기가 좋겠다 싶었다. 소고기의 빨갛고 고운 살점이 썰리는 것을 보니 바로 입에 넣고 싶었다. 어쩌면 그건 복숭아처럼 달지도 몰랐다. 그 생각을 하자 손에 들린 비닐봉지가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해 보였다.

 

 

 

 

노인은 또다시 홈쇼핑에서 물건을 주문했다. 얼마 전에 전기장판을 샀다는 것을 잊기라도 했는지 넓적한 상자가 거실에 놓여 있었다. 침대에서 끌어내린 듯 원래 쓰던 것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노인은 혼자서 낑낑대며 장판을 깔려고 팔을 허우적대고 있었다.

켜놓은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나왔다. 또다시 참혹한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짐승이 뜯어먹은 것처럼 사체가 훼손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서울과 경기도 수원, 강원도 원주를 이어 이번에 발견된 곳은 대전광역시 중구라고 합니다. 노인은 거친 숨을 내쉬면서 두 손으로 장판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노인은 역시 노인이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먹어도 하루에 30분씩 운동을 해도 이미 사라져버린 젊음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대전광역시 중구, 얼굴이 훼손된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심장을 사라지고 간과 창자는 시체에서 떨어져 나와 바닥을 뒹굽니다. 이번에 발견된 시체는 남녀 두 구입니다. 두 시체 모두 끔찍하게 도륙되어 충격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노인은 뉴스에는 시선도 두지 않은 채 장판을 침대에 올리기 위해 온갖 힘을 내고 있었다. 노인이 움직일 때마다 거리에서 뒹구는 익은 열매의 냄새가 났다. 요양보호사가 매일 와서 오전에 환기를 시킨다고 했지만 노인의 방에선 늘 그런 냄새가 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요양보호사는 일찍 간 모양이었다. 그는 냉장고에 쇠고기를 놓아두고는 겉옷을 벗었다. 경찰은 이번 살인 역시 같은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그 끔찍한 정도를 보고는 고양이와 들개 같은 들짐승이 사체를 훼손한 것은 아닌가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사체는 국립과학연구소에 운반되어 부검할 예정이며 뜯겨진 사체를 찾기 위해 수색견을 투입할 예정이라 합니다. 겨우 노인은 장판을 침대 위에 올려두었다. 비뚤어지진 않았는지 침대에 손을 짚은 채 헐떡이면서 움직이는 노인은 금방이라도 고꾸라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걸음도 온전하게 하지 못하면서 노인은 부득불 우겨 침대를 장만했다. 그는 노인이 다리를 하나 올리기 위해 얼마나 낑낑대는지 보아왔다. 노인은 분명 그가 불편함 없이 침대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시기심에 마련했으리라. 그것을 보면 괜스레 부아가 치밀어 그는 보란 듯이 노인에게 자신의 젊고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간 노인에게 받은 것에 대한 복수라는 듯.

노인은 얇은 이불을 장판 위에 깔고는 그 위에 조심스레 앉았다. 거실에 내던진 장판과 박스는 치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거 안 치워요?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노인에게 말했다. 노인은 그의 말을 들었으면서 듣지 못한 척 텔레비전 화면만을 바라보았다. 뉴스에 고정된 채널이 돌아가면서 중국 드라마로 바뀌었다. 남자가 여인의 몸을 끌어안으면서 뭐라 속삭이자 여인이 빠르게 대답했다. 또또, 맨날 같은 것만 보내지. 노인은 매번 같은 드라마를 보면서 불평을 내질렀다. 불평, 노인의 인생을 통틀어 말하는 단어였다. 목사로 가난하게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도, 당뇨로 몸이 쓰러져 장기를 손상되었던 것에 대해서도 노인은 그 자신이 아닌 도망치기 전에는 아내에게, 쓰러진 후로는 그에게 불평을 내질렀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아? 바로 네 놈들 때문이야. 네 놈들! 그 역성이 아직도 그의 귓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는 욕설을 내뱉으면서 바닥에 있는 장판을 접어 구석에 밀어 넣고는 상자를 밖으로 내다놓았다. 노인이 홈쇼핑에서 물건을 주문하는 것은 멀리 가지 못하는 시위와도 같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물건이 상하지도 않았건만 보풀 하나에도 성이 차지 못해 같은 물건을 주문하는 것은 마치 심술을 부리는 것만 같았다. 그가 미치고 팔짝뛴다는 것을 알면서도 노인은 그를 조롱하듯 늘 같은 방식으로 물건을 주문했다. 그는 미닫이문을 거칠게 열면서 성질을 냈다. 노인과 같은 모습이 그에게 묻어나왔다.

 

 

 

 

현수 씨, 이거 계산이 안 맞는데?

그는 더존 프로그램이 익숙지 않아 홈페이지에서 이것저것 매뉴얼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직원이 기본적인 회계에 대해 일러주었지만 자산과 부채, 자본 항목은 여전히 헷갈렸다. 여직원은 회계가 처음인 그에게 자주 사용하는 항목을 정리하여 보여주었지만 그는 계정을 적는 것도 낯설어 늘 힘겨워했다. 항목이 틀린 것은 그러려니 했지만 계산이 맞지 않는다고 하니 그는 순간 뜨끔했다.

어디가요?

여기. 봐봐, 계산이 맞지 않지?

계산기를 두드리던 여직원이 모니터를 가리켰다. 차변과 대변의 합계가 달랐다. 월계를 정리하고 있던 여직원은 그를 가만히 보면서 볼펜으로 테이블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는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기분으로 여직원의 입을 보았다. 여직원의 입술은 립스틱으로 인해 붉은 빛을 띠었다. 그는 매일 노인을 돌보러 오는 여자를 떠올렸다. 얼마 전에 그는 여자에게 나이를 물었다. 서른둘이에요. 여자는 노인이 쓰다가 버린 전기장판을 두 손으로 들고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서른둘이라고 하기엔 동안이네요. 그는 길을 비켜주면서 그런 말을 했다. 여자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자 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여인에게서는 갓 피어난 꽃 내음이 났다. 얼마 전에 산 불고기에서 느껴지는 감촉과 같았다. 부드럽고 입맛을 자극하는. 장판 무겁지 않아요? 그는 들어주기 위해 그녀에게 몸을 가까이 한 채 손을 뻗었다. 살내가 코를 적시자 그는 아찔해졌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풍기는 것은 싱그러운 꽃향기가 아니라 늙어가는 것을 지우기 위한 노처녀의 향수였다. 라벤더 향기가 어찌나 독한지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뺐다. 여직원은 살짝 높게 올라간 목소리로 모니터를 툭툭 쳤다. 이거 다시 확인해 봐요. 일을 이렇게 하면 어떡해요? 현수 씨 때문에 시간만 버리잖아. 다시 항목 보고 빠진 거 있나 체크해요. 여직원이 금방 멀어졌다. 참았던 숨을 뱉어내듯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행사에서 일을 한 지 두 달이 지났지만 일이 익기는커녕 점점 더 힘겨워지고 있었다. 사장을 빼면 두 명뿐인 직원인 작은 여행사에서 속내를 드러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장은 출근을 하고 나면 점심시간을 빼고는 거의 밖에서 생활했다. 손님이 오면 응대하는 것은 여직원과 그가 돌아가면서 했다. 여행지를 소개하는 것도 버거운 그로서는 가만히 서류 작업을 하는 것이 편했다. 서류 작업이 서툴러도 인터넷 포털에서 검색하면 서류 작성하는 법은 금방 찾을 수 있었고 익숙지 않은 프로그램도 요즘엔 금방 익힐 수 있었다. 그렇게 검색하면서 익혀가는 동안 그는 자신이 엄청나게 많은 업무를 떠맡은 것만 같아 그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K읍과 같은 시골에서 여행하러 오겠다는 손님이 적은 것이다. 오는 손님은 여직원과 비슷한 연배의 중년 여성뿐이었고 가끔 마을에서 단체 여행을 신청해서 벌이는 시원치 않았다. 지난달에는 근처 상인모임에서 태국 여행을 가겠다고 신청해서 사장이 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졌다.

그는 입이 텁텁했다. 공복은 느껴졌지만 힘이 빠지진 않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굶주리는 날이 길어졌는데도 그는 한 번도 힘이 빠진단 느낌을 받지 않았다. 불면도 그다지 심하지 않았고 열기에 휩싸인 채 힘겹게 일어나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굶주릴수록 몸이 가뿐해지는 기분이었다. 안경을 쓰지 않아도 눈이 잘 보였다. 여직원과 사장은 그가 렌즈를 끼고 다니는 줄 알지만 그는 그저 안경을 쓸 필요는 못 느꼈을 뿐이다. 다만 노인을 보거나 사무실에서 여직원을 상대할 때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히는 횟수는 늘었다. 속이 들끓을 때면 그는 빨간 빛깔을 내는 정육점의 고기를 떠올렸다. 이상하게 그것을 떠오르면 속이 가라앉았다. 털이 벗겨진 돼지의 몸통은 그가 가끔 정육점에 들러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살로 가득 찬 고기를 볼 때면 그는 왕성한 식욕을 느꼈지만 정작 아무것도 먹질 못했다.

점심시간이 되어서 여직원이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지만 그는 이따가 먹는다고 대충 대답했다. 여직원은 지갑을 들고는 사장과 함께 나갔다. 두 사람이 빠져나가자 공기가 맑아진 것만 같았다. 여직원이나 사장이 가까이 올 때면 그는 괜스레 숨을 쉬기 힘들었다. 그는 창문을 열고는 차가운 공기를 맞았다. 계산이 맞지 않은 것을 고치려면 모니터를 다시 들여다보아야 했다. 버릇처럼 안경을 올리려다가 안경을 안 쓴 것을 깨닫고는 서류와 모니터를 번갈아 보았다. 겨우 빠진 부분을 채워 넣고 그는 모니터를 껐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점심을 먹고 와 오후 업무를 시작했을 때 여직원이 다시 그를 불렀다.

현수 씨, 일 자꾸 이런 식으로 할 거야?

비꼬는 것도 아니고, 조롱하는 것도 아닌 명백한 분노였다. 항목이 다 틀렸잖아. 어머어머, 이게 대체 무슨 계정이야? 내가 차변과 대변에 대해 다 말하지 않았나? 각 항목도 정리해서 인쇄해 주었잖아. 여직원은 계속해서 소리를 냈다. 사장이 점심 먹고 함께 들어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리 와봐. 여직원이 그를 불렀다. 그는 여직원 옆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의자를 당겨 그 옆으로 가까이 갔다. 여직원이 종이를 펼치면서 손을 움직이자 점심에 먹은 음식 냄새와 함께 다시 뿌린 향수 냄새가 났다. 점심은 순댓국을 먹었는지 창자 냄새가 지독했다. 여직원의 블라우스가 위로 올라가면서 앙상한 손목이 드러났을 때 그는 순간적으로 그것을 물어뜯으면 어떨까 싶었다. 하지만 섬찟한 감각에 그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는 여인의 설명을 들었다.

그거 알아, 현수 씨?

설명을 하다가 여직원이 종이 위에 펜을 놓고는 그를 보았다.

나 아는 사람 중에 일을 정말 못하는 사람이 있었거든. 그 사람은 집이 부자라서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일을 하고 싶어 한 거야. 그런데 정말 같이 일하기 힘들더라. 나이도 그리 젊은 것도 아니었는데 일처리도 느리고 뭘 해도 자꾸 틀리는 거야. 나는 그런 사람이랑 정말 일 못하겠어. 물론 현수 씨야 아직 젊고 금방 일을 배울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나네.

여직원은 자기가 말한 것이 우스운지 입술 끝을 올렸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직원이 적어준 것을 보았다. 수익과 비용에 대해 그는 여전히 헷갈렸지만 대충 알 것도 같았다. 그는 여직원이 적어준 종이를 들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더존 프로그램에 입력해둔 것을 고치기 시작했다. 시간을 보니 야근을 하게 될 것 같았다. 그는 화장실에 가는 척하고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요양보호사 번호를 찾고는 통화를 눌렀지만 여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수신호 끝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여자의 목소리는 어려보이는 외모만큼이나 어리게 느껴졌다. 여보세요. 저 김현수입니다. 오늘 뜻하지 않게 야근을 하게 되어서요. 막차 타고 갈지도 모르는데 그때까지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사무적이지만 조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알겠어요. 여자는 순순하게 늦게까지 노인을 돌봐주겠노라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는 여인의 목소리가 더 들리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끝내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여인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가끔 마주치면서 이렇다 할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노인이 어땠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일러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도 여자에게 이렇다 할 질문을 하지 않았다. 노인에게 홈쇼핑 방송을 보지 못하게 부탁하거나 노인이 입금을 부탁하면 거절해달라고 하는 게 전부였다. 그럴 때면 여자는 전부 알았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대답과 다르게 홈쇼핑 상품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여자의 손에 남는 물건을 들려 보내야 할 판이었다. 노인이 가끔 값비싼 물건을 들려 보낼 때에는 서늘한 감각이 들었지만 그는 뭐라 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노인의 돈으로 산 물건이다. 그가 관여할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퇴근이 늦을 때마다 노인을 돌봐주는 여자에게 고마운 마음도 있다. 어차피 쓰지도 못할 물건, 여자에게 준다고 해도 아쉬울 게 없었다. 노인이 연금이 든 통장을 전부 여자에게 주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아쉬운 대로 물을 따라 마시면서 그는 잔업을 재개했다. 여직원은 6시가 되자 자리에서 일어나 퇴근하겠다고 하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불 켜진 조용한 사무실에서 그는 혼자 서류를 붙잡고 인터넷 포털을 검색하며 회계 일을 해갔다. 9시가 되어서야 그는 일을 마칠 수 있었고 다행히 막차를 탈 수 있었다.

 

 

 

 

일교차가 심해져서 두꺼운 겉옷을 입지 않으면 밤을 버틸 수 없었다. 그는 재킷 깃을 세우고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막차를 타려고 서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버스 정류장 구석에 서 있었다. 백팩을 메고는 발로 바닥을 툭툭 쳤다. 11월이 되지도 않았는데 숨을 내쉬니 입김이 나왔다.

한 남자가 운동을 나왔는지 슈나우저를 대동하고는 지나갔다. 갑자기 슈나우저가 그를 보고는 매섭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남자가 그를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슈나우저를 불렀다. 슈나우저는 주인에게 가기 보단 그의 주위를 맴돌면서 사납게 짖기 시작했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 슈나우저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했다. 개의 이름을 부르는 주인의 목소리가 높다랗게 울렸지만 슈나우저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손짓으로 쫓아내는 시늉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주인이 다가와 슈나우저를 품에 안았다. 주인은 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듯한 몸짓을 하고는 쏜살같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슈나우저의 송곳니를 보았다. 어두웠지만 가로등의 불빛에 따라 하얗게 번뜩이는 이빨은 그의 허벅지를 박아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강했다. 꼬리를 만 채 발을 동동 굴리듯 짖어대던 모습에 그도 정류장 구석에 있던 고등학생도 놀랐다. 금방 사라질 것 같은 울음이 길어지자 그는 불쾌해져서 개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럴수록 개는 경기를 일으키듯 더 크게 울부짖었다. 주인이 개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면 개는 그대로 그에게 달려들었을지도 모른다. 멀리서 버스의 불빛이 보였다. 그는 괜히 재킷을 툭툭 치고는 버스에 올랐다. 개에게서는 정육점에서 보았던 돼지고기와 같은 냄새가 났다.

어둠을 뚫고 버스는 나아갔다. 승객은 고등학생과 그가 전부였다. 고등학생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는 맨 뒷좌석에 앉았다. 그는 문 바로 옆 자리에 앉았다. 버스는 쉬지도 않고 어둠을 나아갔다. 너른 들판이 많은 곳이라 그런지 직선 도로가 많았다. 모퉁이를 돌 때엔 그의 몸은 옆으로 쏠려서 손잡이를 잡아야만 했다. 오래된 버스에서는 녹슨 냄새가 진득하게 배어 있었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엔진 소리만이 가득한 버스는 그가 사는 동네가 아닌 전혀 낯선 곳으로 향하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면 그는 망설이지 않고 떠날 것이다. 노인의 아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섰듯이.

추수가 끝난 가을 들판은 황량했다. 버스의 불빛이 들판의 끄트머리를 비췄을 때 바싹 마른 짚단이 둥글게 쌓여 있었다. 지평선 너머 불빛이 차올라 어둠 속에서 땅의 경계가 모호해져만 갔다. 그대로 버스는 허공을 박차 올라 어딘가로 훨훨 날아갈지도 몰랐다. 그는 손잡이를 두 손으로 꽉 잡고는 어둠에서 빛나는 불빛을 보았다. 둔덕 없는 탁 트인 평야 너머로 울긋불긋한 불빛이 두둥실 떠올라 흘러가고 있었다. 버스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불빛은 반대로 흘러갔다. 어디로 가야 멈추게 되는 것일까. 그는 일렁이는 불빛을 가만히 보았다. 어디로 가는 것이기에 그렇게 모든 것을 쏟아내듯 빛을 내는 것일까. 달빛도 없는 캄캄한 밤하늘 아래 오로지 들판 사이로 드문드문 드러낸 불빛만이 어둠을 빛내고 있었다. 그는 내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부저를 누르기 위해 손을 들었다. 부저를 누르기 전, 붉은 빛깔이 지나치자 그는 불빛이 어디로 향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것을 알아내자마자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걷잡을 수 없는 성욕이 일어 아랫도리가 단단해지면서 부풀어갔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쳤고 달짝지근한 육즙을 핥아내듯 그의 눈이 번득였다. 아아, 그랬다. 언제나 인간은 한 곳을 향해 나아갔다.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부저를 눌렀다. 육중한 버스는 그를 번뇌가 가득한 인간의 세상에 내려놓았고 그는 홀로 남은 고등학생을 보고는 버스에서 내렸다.

 

 

 

 

그렇지만 노인이 여자를 덮치고 있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자는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버둥거리던 것을 멈추고는 그를 보았다. 여자의 입술에 그려진 립스틱이 입술 끝을 빠져나와 있었다. 노인은 여자 위에 엎어진 채 얼굴을 여자의 가슴에 부비고 있었다. 여자가 더러워졌단 생각에 그는 화가 나서 노인을 밀쳐냈다. 노인은 힘없이 바닥에 뒹굴었고 여자는 그 틈을 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여자의 품에서 통장이 떨어져 거실 바닥에 툭 떨어졌다.

어, 어르신께서 통장을 억지로 들이미셨어요.

여자는 통장을 줍고는 그에게 건넸다. 여자의 손이 떨렸다.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나뭇잎이 떨어질 듯 말 듯 보였다.

아냐, 아냐! 그 년이 통장을 달라고 했어!

노인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년이 달라고 했어. 노인의 말은 발음이 전혀 뭉개지지 않았다. 그는 그 말을 온전히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노인을 바라보자 노인은 분노로 하얗게 질린 손을 들어 여자를 가리켰다. 나쁜 년, 나쁜 년! 그 년이 도둑년처럼 통장을 훔쳐가려고 했다고! 노인은 뇌졸중이 왔다는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또박또박 말을 내질렀다. 여자가 사색이 된 얼굴을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에요. 어르신이, 어르신이!

여자가 소리를 지르는 것은 흉포한 짐승 같았다. 버스에 오르기 전 그를 향해 짖었던 슈나우저처럼 사납게 짖어댔다. 머리칼은 산발이 되어 흐트러지고 티셔츠는 목덜미 부분이 찢겨져 있었다. 그는 여자의 입술이 볼 쪽으로 올라간 것을 보았다. 립스틱이 번진 부분은 입이 찢어져 붉은 피를 흘리듯 선명하게 다가왔다. 여자가 악다구니를 쓰며 몸을 흔들 때마다 코 끝에 오는 것은 생명의 냄새였다. 살려달라고 발악할 때마다 그가 절절히 원하던 생명이 흘러나왔다.

그만 가세요.

그는 통장을 건네받고는 여자가 나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여자는 흐느끼는 소리를 내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검은 치마 아래로 보인 하얀 속살이 잔향처럼 남았다.

왜 내보내? 왜! 저 년이 훔쳐가려고 했는데!

노인이 티슈 상자를 들어 그에게 던졌다. 허무하게 바로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그는 정신을 차리기 충분했다.

그만해요, 좀! 저 여자에게 잘못한 건 당신이잖아요. 추하게 젊은 여자에게 매달리기나 하고. 이것저것 다 퍼준 게 누군데?

뭐, 뭐가 어째? 너 지금 누구에게 큰 소리를 내는 거야?

노인은 다시 발음이 뭉개졌다. 말을 더듬으면서 뇌졸중이 온 사람처럼 어눌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무거운 혀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는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노인이 두 팔을 휘저으면서 말을 할 때마다 숨이 갑갑해졌다. 그는 가방을 바닥에 집어던지고는 부엌으로 들어섰다. 냉장고에는 전에 사다 둔 고기가 그대로 있었다. 그는 그것을 꺼내고는 우악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익지도 않은 생살은 입안에 닿자마자 꿀처럼 단 맛이 났다. 그렇게 맛있는 것은 먹어본 적이 없었다. 이를 씹을 때마다 육즙이 혀에 밀려나와서 그의 식욕을 자극했다. 노인은 거실에서 자꾸 뭐라고 악다구니를 썼다. 혀가 굳어서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로 남을 때까지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그는 여린 살코기를 이로 짓씹으면서 꿀꺽 넘겼다.

 

 

 

 

누구의 손인지는 몰랐다. 허우적거리면서 생을 갈구하는 것이 노인이었는지 그였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누군가가 조정을 하듯 그들은 서로 뒤엉켰다. 노인을 깔고 앉았다가 노인에게 깔렸다가 엎치락뒤치락했다. 그렇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뒤엉키듯 얽힌 네 개의 손은 떨어지지 않은 채 강한 힘을 주며 서로의 몸에서 버텼다. 비린내가 코끝을 자극했다. 그는 입을 벌렸다. 붉고 선명한 혀가 입안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만이 남았다.









_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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