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우수작 이름을 쫓던 모험

2004.08.28 01:5008.28

매 달 우수 단편은 전달 20일부터 이 달 19일까지 올라온 단편 중에서 선정됩니다.
이 달은 지금까지 중 우수 단편을 선정하기까지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전반적으로 수준이 고른 대신에 딱히 눈에 띄는 한 편이 없었습니다.
어느 광고 문구처럼  2%가 부족한 느낌이었습니다.

이수완님의 “처음이 아니기를”은 주제도 좋고, 차분한 전개도 여전히 좋았습니다.
그런데 제목, 주제와 소재, 인물의 두 가지 요소 사이에 연관성이 없어 보여서
뜬금없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원형님의 “르네상스”는 글을 이끌고 나가는 솜씨라든가, 약간 건조한 서술이라든가, 감정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소재 등이 좋은데 뒷마무리가 약하고, 붙인 제목을 받쳐 주는 주제의식이 그다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moodern님의 “이름을 쫓던 모험”은 단일한 주제 - 이름, 잊혀진다는 것에 글이 집중되어 있고
이건 사실 중간을 생략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만, 전개가 무리하게 건너뛰거나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갔으며 이름에 집착하는 행태들도 과도하지 않게 잘 묘사가 되었습니다.
단점이라면 일단 제목에서 말한 것처럼 이름을 쫓는 '모험'이라고 할 만한 구석이 별로 없고,
잊혀지지 않기 위한,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한 필사적이지만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행태의 해결방법이자 결말로 제시된 것이, 또 다른 파괴라서 글에 어떤 반전이라거나 묘미라든가 감동 같은 요소를 많이 저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로냥님의 “길동무”는 주제를 알기 어려웠습니다.
이야기로서는 술술 잘 흘러가서 완결성 있게 (너무 닫히지는 않게) 잘 끝낸 글이고
특유의 옛이야기 체가 예전 올렸던 글처럼 혼란스럽지 않고 잘 살아 있다는 점이 돋보였습니다.
이 글은 장편의 외전이라고 미로냥님이 말미에 밝히셨지만 겉보기에도 외전처럼 보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 글이 인물에 치중한 글이며, 그것도 한 인물이 현재의 모습을 구성하게 된 계기라든가 변하는 결정적인 장면, 이야기내에서 핵심이 될 수 있는  결정적인 무언가를 보여 준 게 아니라
이 인물의 여러 면 중 하나라는 걸 계속 작가가 의식을 해서 두 주인공이 만나거나 하는 계기나
실제 원인이 글 안에 있지 않고 독자가 모르는 옛날 일에 있어서이기도 합니다.

많은 고민 끝에 이 달은 moodern님의 “이름을 쫓던 모험”과 미로냥님의 “길동무”를 공동 선정하였습니다.

축하드리며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기다리겠습니다.
moodern님과 미로냥님은 편집부로 주소(우편번호 포함)와 받는 분 성함 보내주세요. ^^



---------------
moodern



#


추격의 끝에,

비가 멈추는 밤. 바람이 비구름을 걷어낸 뒤 드러난 달 아래에서

나는 마침내 그녀를 찾아냈다. 습기가 채 가시지 않은 무더운 여름밤이었다.

마침 그녀는 예의 그 싸구려 조각칼로 남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있는 중이었다. 이젠 비명도 지를 수 없게 된 남자가 흘린 피는

그와 그녀와 주변의 축축하고 짧은 풀들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 그 장면은 꽤나 초현실적으로 보였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드디어 왔구나"

그 어떤 불안도 쾌감도 깃들지 않은 눈으로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그래, 꽤 시간이 걸렸어"





#



나는 그녀를 회전문 앞에서 처음 만났다.

그녀는 내가 쉽사리 좋아하게 되는 다정다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그 표정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더욱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난 그녀를 스쳐지나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겠지.

구름처럼 피어나고 연기처럼 흩어지는 호감따위야

나의 일상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를 지나치는데

문득 그녀가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붙잡은 내 손에 무언가를

적었다. 나는 당황해서 그녀가 내 손을 놓아 줄 때까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손바닥을 펼쳐보니,

"그건 내 이름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그녀는 회전문의 반대편에 있었다.





#


11명의 희생자를 내고서야 나는 그녀가 남기는 메시지를

알아챌 수 있었다. 경찰이 수사를 은폐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살인사건으로만 여겼다.

곧 그것이 연쇄살인으로 밝혀졌고 매스컴에서

집중보도를 하기 시작했지만 나에겐 그런 대사건도

하찮은 일로 치부할 만큼 몰두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곧 희생자들의 사진과 동영상이

인터넷을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직장동료의 어깨너머로

그것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범인이 그녀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물론 끔찍한 흉터였지만

어쨌든 사체에 새겨진 것은 무수하고도 정다운

그녀의 이름이었기에.

그때 내가 느낀 희열이란..

그녀를 찾아온 지난 10여년의 세월만큼의 격정이

나의 목줄기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


회전문 너머로 사라졌던 그녀는 곧 나의 연인이 되었다.

이상한 일이다. 내게 남아있던 것은 그저 손바닥에 희미하게

새겨진 이름뿐이었는데. 그것조차 금방 지워지고 말았는데.

어떻게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었는지,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 얼마나 오랬동안 그 감정에 서로를 매어놓았는지

이젠 기억조차 할 수 없다. 오직 마지막 장면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을 뿐. 그렇다, 우리가 헤어지던 그 날 밤.



지방에서 올라와서 대학교를 다니던 우리는 그 덕분에 꽤나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날도 그녀는 나의 자취방에서

예의 괴벽을 늘어놓고 있었다. 어떤 물건이든 자신의 이름을 써놓는

그녀의 행동에 나는 늘 개들이 자기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오줌을

누는 것을 연상하곤 했다.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내 방 벽지,

책상에 쓰여지고 새겨진 그녀의 이름을 보면서 한숨을 내쉴 수 밖에.

'도무지 성한 물건이 없군'

그때 이마에 뭔가 서늘한 느낌이 들어 눈을 들어보니

나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과 손에 들고 있는 유성펜이 보였다.

"어, 뭐야?"

나는 감짝 놀라 일어나서 거울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내 이마에까지 그녀의 이름을 써 놓은 것이 아닌가.

"야, 이제 이런 배설행위는 그만 해"

나는 나도 모르게 격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녀는 잠깐 놀란 표정을 짓다가 곧 말했다.

이러지 않으면 넌 금새 나를 잊을껄.








#


사실 그녀의 첫번째 희생자는 내 두 번째 여자친구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녀와 헤어지고 좀 시간을 걸렸지만 난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은영. 그래, 은영은 떨치지 못할 기억이나

강박증같은 것은 없는 보통의 여자였다.

은영은 과일을 깎으며 내 변명아닌 변명을 들어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곰보자국 책상이 그래서 그런거라고?"

"그래, 도배도 하고 펜으로 쓴 것은 지우기도 하고

해서 간신히 없앴지만 칼로 새겨 놓은 것은 워낙 깊어서

그냥 사포로 문질러서 윤곽을 없애는 수 밖에 없었어"

내 말에 은영은 어깨를 으쓱하는 제스츄어를 취했다.

"뭔가 지독한 실연의 기억이라도 있었나봐, 그 애"

"야, 사과깍다가 그런 포즈는 하지말라고, 하마트면

찔릴뻔 했잖아"

"남자가 겁은 많아서리"



그때 순간적으로 은영이가 들고 있는 과도의 나무 손잡이에 채 지우지

못한 그녀의 이름을 보았다.





#


다시 한번 그녀와의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가서.


그녀를 보내고 나는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신경질적인 나의 반응과 음침한 그녀의 행동도 그랬지만

뭔가 더 미묘하고 예지에 가까운 불안이었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쳇, 정말 내 머리에 뭔가를 새겨 놓은 것 같은걸'

물론 그럴리 없었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들여다 보아도

그건 그냥 펜으로 쓰여진 낙서였다.

그래도 이 통증에 가까운 두통이란.

세수를 했지만 유성펜으로 썼는지 잘 지워지지 않았다.

'아, 이런 짓만 안하면 정말 괜찮은 앤데..'

몇 번이나 비누칠을 하고 문질러 댔는지.

이제 지워졌나 하고 고개를 들고 거울을 보니...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어억...어..언제..어떻게 들어온거지?"

나는 어느샌가 내 뒤에 서 있는 그녀를 보고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를 뻔 했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거봐, 금새 지워지잖아"

"뭐라고?"

그녀의 손끝이 반짝였다. 조각칼이 내 이마를 찍었다.

그녀의 얼굴이 조각나 흩어졌다. 내 겁에 질린 옆모습도.

내가 피하는 바람에 거울에 꼽힌 조각칼이 다시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나는 그 팔을 붙잡았다.


그날도 오늘처럼, 달빛이 환했었다. 푸르스름한 달빛아래서

그녀는 지금처럼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는 것일까, 웃는 것일까. 지금 다시 그녀의 눈을

보니 그때도 그녀는 결코 광기에 젖은 눈으로 나를

본 것은 아니던 듯 하다.

하지만 나는 그때 그녀를 미쳤다고 생각했다.

칼날의 번뜩임. 내 손에 잡혀있는 그녀의 양팔, 실갱이를 하느라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들. 그녀의 그 눈과 입.

왠지 그 장면은 늘 슬로우 모션이다.

달빛 아래서

춤을 추는 듯한 기억.



결국 나는 그녀를 문밖으로 내동댕이 쳤다.

"꺼져버려"

꽤나 심한 욕설을 퍼붓고는 문을 닫아걸었다.

그녀는 금방 떠나지 않았다. 곧, 뭔가,

날카로운 것으로 문을 긁는듯한 소리가 들렸다. 뾰족한 것으로 철판이나

유리를 긁어낼 때의 그 소름끼치는 소리가 밤새도록 들렸다.

악몽같은 밤. 정말 꿈을 꾸었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어느새 잠이 들었던 나는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을 때

나는 그녀가 남긴 것을 보았다. 피투성이의 부러진 손톱과

문에 얼룩져 있는 그녀의 이름.






#

은영은 과일을 깎다가 과도에 베였다. 작은 상처였지만 피는 멈추지 않았다.

과다출혈로 쓰러진 은영을 안고 병원으로 달려갔었다.

그 사이 압박을 위해 임시로 천으로 감고, 두꺼운 수건을 매어놓았지만

계속 흘러나오는 피가 베여들어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갔다.

그러더니 피는 곧 수건위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자꾸만 위로.

팔위로, 어깨로, 얼굴쪽으로. 나는 그것이 단순히 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핏자국을 닦아내자 상처가 드러났다. 반점이 번지는 것처럼

상처들이 급격히 번져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피와 고름을 뿜어내는

상처들은 그녀의 이름처럼 보였다.






#


살인자가 남긴 다정한 이름이여.

나만의 이름이여.







#


그녀를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그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이마에서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건 슬프고도 무시무시한 고통이었다.

그래도 그것은 차라리 일종의 구원이었다. 회색의 세계에 새하연 번개가

치는 것처럼, 통증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기억들은 무의미한 나날들에

선명함을 가져다주곤 했다. 그 때 내가 느끼는 감정은 늘 틀렸다.

공포도 아니고 분노도 아니었다. 슬픔도 아니었다. 어느 것도 닮지 않기도

했고 그 모든 것을 닮기도 하는 감정에 휩쌓여

그녀를, 그 이름을 쫓아다니던 그 세월이여.

드디어 오랜 추적 끝에, 나는 그녀를 찾아낸 것이다.

그 마지막 장면의 밤처럼, 달빛은 고고하고 그녀의 표정은

기쁨과 슬픔 중간에 있다. 그녀의 미소는 괴이하지만 아름답다.

피웅덩이에서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말했다.

"너무 오래걸렸어"

"그래"

나는 대답했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은영이 울 것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이제 내가 가져갈께, 쉬어도 돼"

은영의 몸이 안길려는 듯 나에게로 기울어졌다.

나는 그것을 받쳐들었다.

그녀의 손에 힘이 풀리면서 피로 범벅이 된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만 이 애를 놓아줘."

이 육신은, 이 가엾은 육신은 이제 평안을 되찾게 되겠지.

그녀의 목을 조르는 내 손에 더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곧 가져야 할 것을 갖고, 버려야 할 것을 버리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다.

그 이름은 완전히 나만의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그녀의 이름을 쫓던 나의 나날들이 끝나가고 있었다


댓글 2
  • No Profile
    mirror 04.09.24 22:53 댓글 수정 삭제
    moodern님에게는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 전달되었습니다.
  • No Profile
    moodern 04.10.10 03:51 댓글 수정 삭제
    네, 받았습니다.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간의 고독'을
    참 재밌게 읽었는데, 이번 책을 받으니 너무 좋더군요.
    감사드립니다.
분류 제목 날짜
우수작 유령들4 2009.04.24
가작 건방진 와트슨과 흰 벚꽃 잎 2009.04.24
가작 화구의 공포 2009.04.24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6 2009.03.27
가작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 2009.03.27
가작 죽음과 소녀1 2009.03.27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13 2009.02.27
가작 1999년, 매미를 위하여1 2009.02.27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6 2009.02.04
우수작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2009.02.04
가작 차이니즈 와이너리2 2009.02.04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 2월 6일 발표합니다. 2009.01.3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3 2008.12.26
가작 젠틀맨 캉브리올뤠르 2008.12.26
가작 나와 그녀 사이 2008.12.26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5 2008.12.08
우수작 사소한 것이 부재할 때 우리가 겪는 문제들4 2008.12.08
우수작 추적자1 2008.12.08
가작 비엔나 2008.12.08
가작 담배 2008.12.08
Prev 1 ...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 2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