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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검은 것은 아름답다

2003.11.01 01:4011.01

제5호 우수 단편은 9월 21일부터 10월 20일 자정까지 올라온 23편의 단편 중에서 선정되었습니다.
선정작은 제이님의 “검은 것은 아름답다”입니다.
아래는 단평단의 단평입니다.

제이님의 “검은 것은 아름답다”는 두 여자와 한 남자의 관계가 세련된 방식으로 암시되었고 의대라는 특수한 배경을 이야기와 밀착해서 소화한 작품입니다.
기조가 되는 신화의 재해석이 진정 재해석으로 세간에 알려진 신화의 모습과 사뭇 달랐기 때문에 반전이 될 수 있었으며 소재와 형식이 새로웠습니다.
장르적인 면에서 볼 때 성인이 아닌 사람에게 터부시 되는 영역을 자연스럽게 건드리고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뛰어난 점입니다. 판타지는 - 반지의 제왕으로부터 나오는 하이 판타지는 - 장르 소설들 중에서도 보수적입니다.
서구 판타지나 SF는 여성 작가들이나 일부 남성 작가들이 그 부분을 메꿀 만한 작품을 써왔지만 우리나라 작품 중에서는 그 한계를 뛰어넘는 작품이 많지 않은데 드문 진정한 성인물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 기대하겠습니다. :)

moodern님의 작품은 스토리성보다는 단상에 가깝고 하나의 기이한 생각을 발전시켜서 글로 만든 것이 특징입니다. 화자인 ‘나’가 작가를 대변하는 느낌이 매우 강합니다.
아이디어가 독창적이고 신선한만큼 필력과 스토리성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빡살님의 “사이”는 글과 독자 사이, 글 안의 왕과 그녀 사이가 단절된 느낌이었습니다.
그녀는 소유할 수는 있어도 사랑할 수는 없는 존재라고 나옵니다.
그녀가 그러한 존재라면 작가는 야마가 그 말을 하기 이전에 무엇이 소유이고 무엇이 사랑인지 그 경계선을 전제로 깔아주어야 했습니다. 굳이 말로 하지 않더라도 표는 나도록요. 아니면 그 자체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던지요.
왕이 그녀를 사랑하려 한 것은 맞는지, 그녀를 ‘여자’로 대하려고 한 것인지에 대한 암시나 고민이 앞부분에서 나오지 않았고 독자와 작가가 그 점에 대해 보편적인 공감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몇 마디 관념어로 결론을 지어줬다는 점에서 닫힌 느낌이 들었습니다.
단지 존대말을 사용했기 때문만이 아닌 우화적인 분위기를 잘 살린 글이었습니다. 안정된 문체도 돋보였고요.
건필하세요. :)


아래는 우수 단편으로 선정된 제이님의 “검은 것은 아름답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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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 ( jayjoke@chol.net )



어둡다. 너무 밝아 눈부시기 때문이다.
- 기형도, 1984





1. 제희
  끝없이 달리고 있었다. 어둡고 축축한 기분 나쁜 풀숲. 불유쾌한 공기가 몸의 끈적이는 땀과 함께 달라붙고 있었다. 물씬 풍기는 소금기 섞인 땀내, 음산한 땅과, 빛 하나 들어오지 못하게 하늘을 가려버린 나뭇가지들이 나를 가두어 놓고 있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나 자신에서든, 땅에서든, 하늘에서든. 어떻게 해서든 이 불길한 풀숲을 벗어나야만 했다. 발목이 울렸다. 나는 맨발이었고, 찢어진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그 무엇이 앞을 가로 막아도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뾰족한 모서리의 돌을 거침없이 밟았고 까칠한 흙바닥을, 진흙탕처럼 물이 고여 더러운 곳도 발바닥이 찢어지는 줄 모르고 세차게 달음질 하였다. 단지 달리고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을 뿐, 그 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조원이 교재를 들고 기관에 대해 알려주면, 나는 구조가 상하지 않도록 핀셋으로 조심스럽게 우리가 학습해야 하는 기관을 찾아내었다. 이런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기 이전에, 스킨을 걷어 내거나 지방을 제거하는 일 또한 도맡아 하는 편이었다.  
  카데바(cadaver)의 뱃속에 얼굴을 들이밀고 손가락으로 내장을 헤쳐, 이론 시간에 배웠던 장기를 관찰한다. 내장에 코를 박지 않도록 숨을 멈춘 채, 사지가 굳는 듯한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 날숨- 귓속으로 두근거리는 나의 심장 소리가 들려온다. 꼼짝 못하는 무기질의 내부를 잔인하게 파헤치고 있는 유기질의 알리바이가 명백해지는 이 순간, 들숨- 강렬한 포르말린 냄새와 부패한 내장의 악취가 간간히 섞여, 코끝과 입술 사이로 차가운 기운이 들어오는 것이다. 이공간의 무기질과 3차원의 유기질이 하나가 되어 눈앞은 온통 청록으로 물들여졌다. 담즙으로 물들여 진 것은 내장기관 뿐만이 아니다. 이것 봐, 옆구리 터진 녹색 만두야. 어디선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상상을 한다. 교재를 들고 있는 소현에게 메스를 쥐어주고 일부러 두꺼운 정맥을 가리켜 주는. 카데바에 손을 대는 것을 극히 꺼리는 소현에게 ‘너만 깨끗할 테냐?’ 노려보면서 소리친다. 다른 세 명이 가혹한 처사라고 흰 동자를 굴리면, 나의 동공에 굴복할 때까지 강력하게 밀고 나갈 것이다. 소현은 동기들을 위해 메스의 날을 세워 스윽, 소리를 내듯이 팔목을 놀린다. 그리고 전기가 튄다. 하지만 전기의 날카로운 빛이 아니라, 포르말린과 오랜 보관시간에 변색된 보라 색 피가 솟아오를 것이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소현과 나의 눈과 턱, 성대 부분에 너저분하게 달라붙어, 웃는 소리는 일말의 비명소리로 뒤바뀐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벨이 울림과 동시에, 구제 청바지 속에 있는 핸드폰의 진동이 격렬하게 울렸으므로, 나는 카데바의 뱃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반질거리는 지방이 잔뜩 묻은 수술장갑을 내던지고, 조원들에게 잠시 쉬었다 하자고 했다. 왠지 눈이 몹시도 피곤하다. 고개를 들고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나다. 저녁에 외식을 하려고 하는데 해인이 너 없으면 안 나온 댄다."
  달갑지 않은 목소리. 권위적인 힘을 잔뜩 실어 투박하게 낮은 바리톤으로, 상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나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을까. 내키지 않는 전화번호를 누르면서 그 두툼하고 굳게 닫혀 있는 입가는 불쾌함으로 잔뜩 뒤틀려 있었을 것이다.
  "7시, A동에 있는 저번 그 레스토랑으로 늦지 않게 나와라."
  뚜욱. 그것이 전부였다. 할 말이 모두 끝난 상대는 너에겐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 일말의 배려도 두지 않은 채 통화를 끊는다. 초대가 아닌 일방적인 통고. 너의 대답 따위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아버지’의 행동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갑자기 차가운 캔 음료가 볼에 닿아서 흠칫했다. 모를 미소를 띠며 진헌이 어느새 옆에 와 있었다. 캔 음료를 건네며 진헌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진헌의 하얀 손이 '네스카페' 라고 써있는 캔 음료의 로고에 닿아 있었다. 나는 로고가 보이지 않도록 진헌의 손을 맞잡았다.
  하얀 손. 나는 남자의 것 같지 않도록 하얗고 마른 진헌의 손이 좋았다.
  "포르말린 냄새난다. 실습 끝나고 학교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면 사람들이 모두 쳐다 봐. 의대건물이라 모두 실습 때문인 걸 알고 있으면서도 냄새난다고 일부러 흉을 보지. 장난이더라도 가끔 기분 상할 때가 있어. 그래도 가장 기분이 상할 때는, 네 손에 이상이 생기는 거야. 그럼 꼭 내 몸에도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거든."
  진헌은 웃었다. 항상 포르말린 냄새가 배겨 있긴 하지만 나도 자기 손이 좋다고, 함부로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실습이 끝나면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했다. 나는 따라 웃으면서 선약이 생긴 것 같아 안 되겠다고 대답한다.
  다시 핸드폰의 진동이 왔다. 액정에 발신번호가 뜨지 않지만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진헌에게 고갯짓을 하고 잠시 창가로 나왔다. 예상했던 해인의 목소리가 전화기 저편으로 흘러나온다.
  "내키지 않으면 오지 않아도 돼, 제희야."
  항상 나를 구원해 주는 목소리. 물론 아버지를 본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해인을 본다는 것 또한 다른 의미로 괴로운 일이었다. 실습실로 먼저 돌아가는 진헌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머니 뵌 지도 오래됐고. 갈게."
  '어머니'라는 어감이 혀에서 감길 때 나는 실눈을 떴다. 오래 전부터 꺼내지 않던 단어였는데. 나는 냉소했다.
  쉬는 시간이 끝나는 벨이 울리고 있었다. 해인에게 간단하게 인사말을 하고 나는 통화를 끊는다. 해인은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실습실로 들어가면서 다시 포르말린의 차가운 기운을 느낀다. 다른 조원들이 웃었고, 배속이 다 헤집어진 카데바가 손을 들어 「여, 친구, 나머지 얼렁 해줘」하면서 웃고 있었다. 나는 수술장갑을 끼고 핀셋을 집어 들며, 「내 솜씨가 마음에 들었나 보군」하고 웃었다. 카데바의 복부 스킨을 열어 재끼면서 다른 조원들의 웃음소리도 커졌고, 카데바의 웃음소리도 커져갔다. 눈이 찔러오듯 아파온다. 카데바의 얼굴을 덮은 거즈가 카데바의 웃음소리로 들썩거리고 있었다. 나는 카데바의 귓가에 입을 대고 「모두가 쳐다보잖아. 이제 조용히 해」하고 속삭였다. 카데바는 내 말을 잘 들었다. 조원들의 웃음소리와 카데바의 웃음소리는 동시에 그치고 눈의 통증도 말끔히 사라졌다. 나는 이내 해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해인은 세련된 체크무늬의 깔끔한 연두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하얀 살결과, 어깨를 살짝 스치는 검은 내추럴 웨이브. 언젠가 로마그리스 신화 책에서 본 삽화에서 아리아드네 공주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머리가 소의 형태를 하고 있는 괴물에게서 용사를 구해내기 위하여 지혜를 짜내고 있던 순결한 눈의 아리아드네 공주. 미궁 안의 괴물, 괴물을 처치한다 하더라도 미궁 속에서 헤매다 죽을 운명이었던 용사를, 이 순진하고 아름다운 공주는 온 마음을 바쳐 사랑한다. 그리고…… 버림받는다.
  레스토랑은 예전에 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고급스러운 샹들리에가 눈부셨다. 붉은 빛을 띠는 윤기 나는 원목 탁자와 의자가, 아라베스크 자수가 놓여진 상아색 실크 식탁보와 잘 어울렸다. 한 가운데 놓여진 안개꽃과 장식된 한 떨기 노란 장미는, 어머니의 취향을 고려한 아버지의 특별 주문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하필 노란 장미꽃이라니, 왠지 뜻을 알 것도 같아 나는 슬쩍 조소했다. 주변은 어둑한 조명으로 샤콘느(chaconne)가 애잔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고풍스러운 분위기에는 일찍이 익숙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나는 항상 이방인이었다. 남이라도 알 세라 쉬쉬하며 길러왔던 처지여서 한 집에서 살았던 적도 없고, 아버지, 어머니 또한 부모다운 애정을 제대로 베풀어 준 적이 없었다. 한 달에 두어 번 숨죽여 해야 했던 어머니와의 통화,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자신에겐 힘이 없다고 말하곤 했었다.
  나는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해인의 눈총을 받고 있었다. 일부러 그랬음을 단번에 알아챘는지 내 허벅지를 꼬집고 있었다. 청바지라서 그녀의 손가락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나만 알아채도록 한숨을 쉬는 해인에게 나는 눈웃음 지어 보였다. 언제나 해인을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났다. 처음 해인을 보았을 때에는 울고 있었지만, 그 이후로 해인에게 눈물을 보인 적은 없었다.
  어머니는 불안한 미소를 띠며 내내 침묵을 지키고, 아버지는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해인에게 안부를 묻는다. 멋지게 분산된 분위기였다.
  "향수 냄새가 너무 짙구나."
  아버지가 침묵하던 불편한 심기를 마침내 드러내었다. 아버지의 눈은 여전히 나를 향하지 않은 채였다. 레드와인을 마시며 디저트로 나온 과일푸딩을 포크로 적당히 잘라 내고 있었다. 여린 푸딩 조각을 잘라내는 데에도 아버지의 굵고 힘 있는 손동작을 보면서, 저 손으로 메스를 잡으면 다른 구조들이 한꺼번에 잘려나가 모두 상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섬세하지 못한 손길에 분노한 지방덩어리가 저 건방진 손목을 질퍽하게 감아올릴 것이다. 아마도「날 내버려 둬!」라고 소리치는 것이겠지. 그렇다. 카데바는 좀더 소중하게 다루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오늘 해부학 실습이 있었거든요. 포르말린 냄새를 없애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향수를 이렇게 뿌리지 않으면……."
  나는 잠시 곁눈질로 해인의 동태를 살폈다. 해인의 눈은 '안돼.' 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다지 개의치 않기로 한다. 해인에게 눈치를 준 것은 알아서 할 테니 끼어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손이고 얼굴이고 내장 기름이 묻어서 이상한 냄새가 나거든요. 물론 포르말린에 깨끗하게 소독하고 절인 시신에서 나온 거라 썩은 냄새는 심하지 않겠지만. 아직 하고 있는 실습은 어떤 영화에서 나왔듯이 뇌를 꺼내는 단계는 아니에요. 있잖아요, 살아 있는 사람을 마취약으로 취하게 해서 두개골을 그대로 쪼갠 채, 뇌를 잘라서 프라이팬에 지지는 장면이요. 우린 아직 압도멘(abdomen)의 스킨을 잘라……."
  챙캉ㅡ! 차가운 금속성이 차이나 접시를 날카롭게 찍어내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푸딩 위로 포크를 내지르듯 던진 것이다. 상아색의 윤기가 흐르던 실크 식탁보 위에는 연두색 푸딩 파편들이 참담하게 튀어 있었다. 어머니는 어두운 표정으로 나와 아버지를 번갈아 쳐다보고, 해인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샤콘느의 애처로운 G단조 선율은 이윽고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다다다단다다……. 나는 점차 빨라지고 있는 바이올린의 선율을 따라 마음속으로 흥얼거리고 있었다. 다단다다다, 다다다단…….
  "널 부르는 게 아니었는데. 다시는 네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박차고 일어서는 아버지의 거친 의자 소리가 음침한 G단조와 어울리는 듯싶었다. 나는 여유 있는 웃음으로 의자에 깊게 눌러 앉았다. 어머니는 어쩔 줄을 모르다가 이내 핸드백을 가지고 아버지를 따라 황망하게 자리를 일어섰다.
  아버지 앞에서는 딸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붙이지 못했던 친어머니가, 곱디고운 자태로 어두운 조명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다다다-다, 따-다ㅡ안.
  자, 하나의 희극 디 엔드.

  끝없이 달리고 있었다. 어둡고 축축한 기분 나쁜 풀숲. 나는 몹시 넘어지고 뒹굴어서 보기 흉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잘려진 머리카락에는 흙과 마른 나뭇잎이 한데 섞여 지저분한 모습이었다. 발목이 시리고 아팠다.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나는 닦을 생각도 없이 개처럼 헐떡거리면서 달리고 있었다. 추웠다. 햇빛이 들었으면 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알을 굴렸다. 거미줄처럼 얽힌 나뭇가지들은 조금의 빛도 새어 들어오지 못하도록 나를 내려다보며 비웃고 있었다.
  물이 필요했다. 물은 없었다. 힘이 없어 비틀거렸지만 중심을 잡으려고 필사적이었다. 그래서 우스꽝스런 포즈로 춤추듯 한 바퀴 돌다가 넘어졌다. 습기 젖은 흙바닥 때문에 특별하게 통증이 오는 곳은 없었다. 단지 이빨 하나가 침 섞인 선홍색 피와 함께 툭, 하고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타들어 가는 듯한 끔찍한 갈증을 조금이나마 없앨 수 있을까, 잇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있는 힘껏 빨아들인다. 나는 발목에서 흐르던 피에 허리를 숙여 짐승처럼 핥고 빨았다. 모자랐다. 앞 이빨을 내 발목에 박는다. 피가 난다. 다시 핥고 빤다. 그리고 웃었다. 이 비릿하고 짭짤한 맛이 땀인지, 피인지 구분할 수도 없을 정도로 나는 한 마리의 짐승이 되어 있었다. 혹은 모른다. 눈물이었는지도…….

* 카데바(cadaver) : 해부용 시체
* 샤콘느(chaconne) : 토마소 안토니오 비탈리(Tomaso Antonio Vitali, 1660~1711)
* 압도멘(abdomen) : 복부


2. 해인과 제희
  나는 괴물이었다. 나를 두려워 한 인간들이 매년 7명의 소년과 7명의 소녀를 바쳐왔다. 사춘기 아이들의 육질은 적당히 질기고 육즙이 신선했다. 복부는 피하지방이 많아 씹는 맛이 별로였지만, 허벅다리 안 쪽의 내전근과 종아리의 탄력적인 비복근은 그야말로 최상급이었다. 그러나 가장 아껴 먹는 것은 두 눈알이었다. 눈꺼풀에 손톱을 박아 그대로 파내면 댕글댕글한 것이 선홍색 시신경과 함께 달려 나왔다. 입안 깊숙이 넣고 어금니로 깨물었을 때 터지는 시큼한 방수가 또 다른 묘미였다.
  이틀에 한 명씩, 야금야금……. 14가 13이 되고, 13은 곧 10이 된다. 그것은 곧 9, 8, 7, 6……. 숫자가 작아질수록 아이들은 미쳐간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거나 알 수 없는 말로 끝없이 중얼거린다. 개중엔 목이 쉬어라 웃어대다가, 며칠 씩 혼절해 버리는 것들도 있다. 그렇게 창살이 울리도록 시끄럽게 구는 녀석은 잡아먹기 전에 혀부터 뽑아 버린다. 이미 시체와 같이 정신이 나간 아이는 그 순결한 신체를 마음껏 유린한 다음, 손톱과 발톱부터 천천히 뜯어먹었다.
  나는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해인이 계속 빤히 쳐다봐서 머쓱해졌다. 해인은 둘만 남은 레스토랑에서부터 줄곧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중간에 진헌에게 전화가 왔을 때를 제외하곤, 자신도 벅찬 빠른 걸음을 하다가, 뒤를 돌아 내 얼굴을 쓱 쳐다보고 다시 걷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였지만 싫지 않았다.
  해인의 길고 가느다란 다리가 연두색 치맛자락 아래에서 보였다가 숨었다가 했다. 어둑한 저녁, 해인의 하얀 다리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 앞서 걸어가는 해인의 저편으로 강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람이 조금씩 차게 불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해인이 얇게 입었을 텐데 추울 것 같았다. 실제로 내 손을 잡은 해인의 손은 얼음장 같이 찼다. 마치 받침대에 가만히 누워 나의 메스와 핀셋을 기다리고 있는 카데바의 연고동색 살갗처럼.
  "전화 했던 사람은 남자친구인가 봐."
  강변의 둔치에 치마를 오므려 앉으며 해인은 지나가듯 말했다. 진헌을 말하는 건가하고, '으응' 하면서 얼버무렸다. 아버지를 화나게 했던 나의 무례한 태도를 나무라지 않을까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해인이 내뱉은 말은 뜻밖이었다.
  "잤어?"
  나는 잠시 놀란 눈을 했다가 피식 웃었다. 해인이 그런 것을 물어오는 것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나온 김빠진 웃음이었다. 하지만 해인은 퍽 기분이 상했는지 토라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해인이 그런 것을 물어오는 것에 장난스러워졌다. 가지런히 옆에 앉아서 한 쪽 다리를 해인의 흰 다리 위에 걸친다. 다리가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고 발목을 움직여 내 쪽으로 당겼다. 너는? 하고 묻자 해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하얗고 얇은 발목은 금방 내 쪽으로 끌려 들어온다. 오므렸던 치마가 벌어지자, 해인이 서둘러 치마 사이를 잡는다. 그 사이 해인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서 간지럼을 태웠다. 캇,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넘어지자, 나는 해인의 등을 받쳐서 다치지 않게 했다. 가볍다. 처음 만났던 10살 적이나, 스무 살이 넘은 지금이나 해인의 몸무게는 별반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해인은 목까지 빨개져서 짓궂다고 난리도 아니다.
  "나 길 잃었을 때, 언니가 집 찾아줬었지."
  '언니' 라는 말에 반응하는 건지 해인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내가 능청스레 웃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해인도 웃어 버렸다.
  "오랜만에 들어본다. '언니' 라는 말. 제희, 너 보기 흉하게 울고 있었잖아. 길 잃어 버려서. 처음 만난 날이었어."
  해인은 내가 살고 있었던 '소망의 집'을 찾아 주었다. 양 길가의 버드나무가 푸르게 늘어져 있던 화창한 초여름 날이었다. 평소와 같던 그다지 뜨겁지 않은 햇빛, 적당하게 불던 바람이 유달리 인상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한 줄기 바람을 따라 터뜨렸던 울음은 나에게 해인을 데려다 주었다.
  훗날 우리가 피로 연결된 사이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하지만 각자 다른 씨로 한 어머니 몸에서 잉태하여 났다는 사실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래도 우리 둘의 사이는 변함이 없었다. 법적으로는 해인의 '아버지'를 나도 '아버지'라 불러도 된다는 것, 그러나 나는 해인의 집에 들어갈 수가 없고 해인의 '아버지'도 나를 딸로서 완고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따위는 해인과 나를 갈라놓을 만한 충분한 계기가 되지 못하였다.
  "제희야,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
  해인은 스무 살이 되자 집에서 아주 나왔다고 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아버지와의 갈등이 이유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갈등이 나로 인해 비롯되었다는 것 또한.  
  아버지가 내키지도 않는 나를 가족모임에 불렀던 것은, 내가 없으면 해인도 고집을 피우며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 라는 존재는 당신에게 있어 '하나 뿐인' 딸을 만나기 위한 가장 합당한 빌미였다.  
  강바람이 차가웠다. 해인의 어깨도 으스스 떨리고 있었다. 먼저 일어나 해인을 일으켜 줄 심산으로 손을 내밀었다. 해인이 내 손을 잡았다. 다른 손으로 해인의 하얗고 작은 손을 맞잡았다. 언제 보아도 흡족한 손이었다.  

  끝없이 달리고 있었다. 어둡고 축축한 기분 나쁜 풀숲. 이빨이 떨어져 나가고, 발목엔 살점이 뜯어진 생채기가 있어 절뚝거리면서도 달리고 있었다. 갈증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입술주변엔 말라붙은 피가 너저분했다. 흙투성이인 손으로 입술을 쓸었다. 부르터서 갈라진 입술에서 또 피가 흐르고 있었다. 까칠한 혀로 가까스로 핥고, 한 발짝씩 어렵사리 걸음을 옮겼다. 아까처럼 달음질을 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어느덧, 물 냄새. 분명히 들려오는 이 소리는 '물'이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허겁지겁 다리를 움직인다. 휘청, 몇 번이고 쓰러져도 필사적으로 몸을 놀리기 시작한다. 우스운 모양으로 허우적대도, 발바닥이 데인 것처럼 고통스러워도,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것은 신기루가 아니었다.
  우물이 있었다. 돌 틈마다 이끼가 끼고 무성한 잡초가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우물에서는 물이 넘치고 있었다. 우물 안을 들여다 볼 틈도 없이 흘러나오는 물을 손으로 받아 마셨다. 차갑지만 상처 때문에 뜨거웠다. 세수를 한 다음 발목부터 닦아내, 스커트 자락을 올려 땀에 젖은 허벅지와 둔부를 씻어내었다. 어깨와 가슴에 물을 내던지듯 씻어낸다. 젖무덤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간지러웠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차갑다 못해 시린 기운을 느낀다. 옷은 모두 젖어 온몸에 흉측하게 달라붙었다.  
  우물 안의 물은 어두컴컴하여 고여 있는 물마저도 검은 색으로 보이게 했다. 우물도 하나, 나도 하나였다. 어두운 풀숲, 나는 계속 혼자였다.

  현관문을 열자 플로럴 계열의 방향제 향기보다 유화물감 냄새가 먼저 느껴졌다. 해인이 그림을 전공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 물감냄새가 강렬하게 느껴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더 좋았다. 정말 해인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캔버스와 이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한 쪽 벽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화구 박스가 몇 개씩이나 그 앞에 쌓아 놓여져 있었다. 그 밖에는 침대 하나, 작은 옷장과 오디오가 전부였다.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문지르며 욕실에서 나오자, 해인이 티셔츠와 반바지를 내놓았다. 갈아입으려고 등을 돌렸더니, 웃는 소리가 난다. 어느새 해인의 손에는 콩테와 크로키 북이 들려져 있었다. 나도 따라 웃어주고 윗도리를 벗었다. 해인은 나에게 주었던 티셔츠를 도로 가져갔다. 눈빛이 ‘아직 안돼’ 라고 말하고 있었다. 무슨 뜻인지 곧 알아차리고 청바지마저 주저없이 벗어 버렸다.
  침대에 배를 깔고 누워 해인이 가져다 준 과자를 먹는다. 침대에 있던 쿠션과 인형을 만지고 해인이 벗어둔 연두 색 원피스를 껴안았다. 몸을 일으켜 원피스를 가슴에 안고 스탭을 밟았다가, 오디오로 핑크플로이드(Pink Floyd)를 틀었다. 현란한 전자기타 음과 워터스의 허스키 보이스가 좋았다. 해인의 원피스를 몸에 대고 음악에 맞추어 몸을 움직인다. 크로키 북 너머 해인의 눈이 웃고 있었다. 손놀림이 빨라지고 크로키 북의 장수가 넘어가는 속도도 빨라졌다. 나는 발끝으로 자연스럽게 턴했다. 턴턴턴, 턴!
  "머리, 길러볼까."
  길게 누운 자세로 크로키 북을 한 장씩 넘겼다. 그 안에서 벌거벗은 여자가 침대에 누워 과자를 먹고 있었다. 인형과 원피스를 들고 어설픈 춤도 춘다. 핑크플로이드의 음악은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르지 마."
  해인은 무언가를 찾는 듯, 그 많은 캔버스를 어질러 놓고 있었다. 나는 흐응, 하고 대답하면서 크로키 북을 계속 넘겼다. 간간히 크로키가 아닌 그림들도 있었다. 풍경이나 인물의 간단한 스케치 정도. 참 경치 좋은 곳을 다녀왔구나 생각하면서 마침 나오고 있는 ‘Goodbye Cruel World’를 따라 낮게 흥얼거렸다. 스케치 세 네 장이 지나가자 다시 크로키가 나왔다. 남자였다. 남자는 발가벗은 채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크로키 북이 내 손에서 없어졌다. 해인은 보여줄 게 있다고 하면서 크로키 북을 구석으로 내던졌다.  
  해인은 조금 큰 캔버스를 침대 위에 올려놓고 '널 생각하며 그린 거야' 라고 말했다. 붉은 색이 주축으로 된 강렬한 느낌의 유화였다. 유방이 한 쪽만 있고 머리카락은 하나도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잘록한 허리에 비해 과장하여 두껍게 한 허벅지가 탐스러웠다. 칼로 긋고 붓으로 뭉갠 필치가 여실히 드러났다. 사타구니를 그릴 때엔 손가락으로 문댔는지 부드러운 느낌이 났다.
  "그림 그릴 때 손가락 사용하지 마. 고운 손 상한다."
  해인은 소리 없이 웃었다.
  "내가 아무리 머리가 짧아도 대머리인 건 좀 심했는데."
  해인은 이 그림을 가져가라고 했다. 우리들의 ‘첫날밤’을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확실히, 해인은 어머니를 많이 닮아 있었다. 어머니는 유달리 미모가 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나이가 들어도 고결한 청순함을 지닌 여자였다. 나는 부모님의 어느 쪽도 닮아 있지 않았다. 어머니를 닮았다면 해인처럼 하얀 살결과 밤하늘 같은 머릿결을 가졌을 것이다. 같이 살자고 해인이 나를 ‘집’으로 데리고 왔을 때,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었다. 「눈이 그 자식이야. 항상 그 눈이 마음에 안 들었지.」그리고 나는 내 발로 걸어 나왔다. 사실 나의 ‘친아버지’에 대해 ‘아버지’가 분노하는 것은, 그 어린 나이에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 집에 있기 싫다고 느낀 이유는, 해인과 아버지가 전혀 닮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노력해 봐도 아버지에게서 해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의 투박한 손은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칙칙한 고동빛을 띠는, 마디가 굵고 주름이 많은 손. 싫었다. 해인의 손은 저렇지 않아.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갈 수 없다’라고 직감하자, 그것은 곧 쓸모없는 결의가 되고 지독한 자기혐오가 되어 버렸다. 왜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잤는지, 그리고 왜 나를 낳았는지 등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것이, 아마 그 때쯤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학기 초, 실습을 시작하기 전에 카데바의 얼굴을 보는 시간이 있어. 페이스(face)에 들어가기 전까진 포르말린을 뿌린 거즈로 얼굴을 덮어두거든. 거의 한 학기 내내 라고 보면 돼. 메스로 긋고 지방 제거하고 내장을 자르고 별 짓을 다 해봤지만, 가장 잊혀지지 않는 건 실습 첫 시간, 카데바의 얼굴을 봤던 거야. 이것도 정말 ‘사람’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유일하게 들었던 때였어. 무섭다는 생각보다 슬픈 기분이었어."
  "나라면, 메스로 배를 가를 때가 가장 좋을 것 같아. 감촉도 그렇고 메스로 그으면서 배가 열리면 재미있을 것 같거든. 널 보면서 나도 죽을 때, 내 몸을 기증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봤어. 메스를 손에 들 수 있는 날은 죽을 때까지 오지 않을 테니, 죽어서라도 그 느낌을 직접 당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야. 내 몸에 칼이 들어와서 마음껏 파헤쳐 진다니, 멋진 상상이잖아."
  캔버스를 침대 아래에 내려놓으며 ‘죽으면 그런 거 느낄 수 없잖아.’ 라고 말했다. 해인이 죽는다는 건 싫었다. 터무니없는 생각. 어느새 해인은 바로 뒤에 와서 내 허리를 감았다. 등에 해인이 얼굴을 대는 것이 느껴졌다.
  "이왕이면…… 네 손에 파헤쳐 지고 싶어."
  나는 망설이지 않고 허리에서 해인의 손을 풀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해인과 눈을 마주치며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죽는 건 안돼. 기증은 더더욱 안돼."
  해인은 잠시 무표정하게 나를 올려다보다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
  단정하고 무표정한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해인은 내 양 팔을 잡았다. 상체가 기울면서 얼굴이 가까이 왔다.
  "강을 건너고 싶어 하는 전갈이 있었어. 그래서 개구리에게 자신을 태우고 강을 건너게 해달라고 부탁했지. 개구리는 전갈에게 꼬리의 독으로 자신을 찌를 거라며 거절했어. 그러자 전갈은 대답했어.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 둘 다 빠져 죽을 텐데." 개구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전갈을 등에 태워 강을 건넜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더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은. 하지만 해인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한참 강을 건너다 전갈은 갑자기 개구리를 찔렀어. 개구리는 죽어가면서 전갈에게 물었지. 왜 나를 찔렀느냐고. 개구리와 물 속으로 가라앉던 전갈이 말했어……. 제희, 넌 뭐라고 했을 것 같아?"
  별로 궁금하지 않았기 때문에 ‘글쎄’ 라면서 말끝을 흐렸다.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해인은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얼굴이 더욱 가까이 왔다.
  "전갈이 말하길……."
  벨소리가 울렸다. 이 숨 막힐 듯한 무중력 공간이 깨어졌다. 나는 벌떡 일어나 옷장 앞에 있던 가방을 뒤져 전화를 받았다. 해인은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등은 돌리고 있었지만 시선이 느껴졌다.
「여보세요」진헌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현관 밖으로 나갔다.

* 핑크플로이드(Pink Floyd) : 65년 영국에서 결성된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 로저 워터스(Roger Waters) : 핑크플로이드의 베이스 및 보컬리스트
* Goodbye Cruel World : Pink Floyd, 「The wall」, 1979
* 전갈과 개구리의 이야기 : 프랑수아 자콥(Francois Jacob),「파리, 생쥐, 그리고 인간(La souris, la mouche et l.homme)」



3. 진헌과 제희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손이었다. 희고 마른 손. 키보드 위,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아까부터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가 잘 보이는 대기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른손엔 자판기 커피를, 왼손에는 학생회에서 나누어 준 페미니즘에 관련된 문단지를 들고서. 시선이 느껴졌는지 남학생은 뒤를 돌아다본다. 눈이 마주쳤지만, 피하지 않고 미소까지 띠어가며 목례를 해 주었다. 남학생도 어떨 결에 목례로 대답한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자세를 고쳐 잡는 모양이, 타의에 의해 중단된 문서 작업에 열중하려는 것 같다.  
  의자에서 일어나 문단지를 휴지통에 버리고, 미디어 실의 유리문을 열고 나갔다. 20분 정도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컴퓨터에서 일어나려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물 밖으로 나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왼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힐끗 보아하니 아까 그 남학생이었다. 미디어 실에 다시 들어가기 뭐해서 엘리베이터에 그냥 오르자 남학생도 같이 들어온다. 1층을 누르고 가만히 있으려니까 남학생이 닫힘 단추를 마저 눌렀다. 손끝이 갸름한 게 하얀 손등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남학생이 말을 걸어 왔다.
  "아무리 봐도 아는 사람이 아닌데……. 이 건물에 있어요?"
  어감에는 어색함이 묻어 있지만 이상하진 않았다. 의외로 야무진 데가 있는 듯 했다.
  "이 건물에 있어요. 예과 2학년이에요."
  남학생은 나보다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1층에 도착하자, 아주 내 옆에서 걷는다.
  "같은 학과 동기네요. 왜 여태 한 번도 보지 못했지."
  우리는 통성명을 했다. 유제희에요. 저는 서진헌입니다.
  서로를 알아 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같은 학과에, 동갑이라는 것이 편리하게 적용하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진헌의 손이 마음에 들었으므로, 나 자신을 알리는 것에 소극적이지 않았다. 그 후, 수업 시간 때마다 진헌은 눈에 잘 띄었고, 진헌도 마찬가지였는지 멀리서 나를 발견해도 큰 소리로 아는 체를 했다. 사람들은 우리가 제법 잘 어울린다고 했다. 그런 소리가 듣기 싫지 않았다. 미디어 실에서 만난 지 정확히 한 달 반이 되던 날, 진헌과 나는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했다.

  본과 1학년, 교재가 두꺼워진 만큼, 뇌 주름살 사이에 어거지로 끼워 넣어야 할 내용도 방대하게 늘어났다. 그리고 선배들에게 말로만 전해 듣던 해부학 실습에 들어갔다. 이론적으로 배우던 것들을 직접 메스로 가르고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의학도들을 기대 이상으로 흥분시켰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한 조의 구성원은 다섯 명이고, 각 조마다 카데바가 한 구 씩 배치되었다. 우리 조의 카데바는 건장한 30대 남성으로 사인은 의사(縊死)였다. 그래서 수술한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편이었으며, 근육도 굵고 무난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조원들은 크게 하지와 상지, 머리로 나누어 쉐이빙(shaving)을 하였는데 내가 자원한 부위는 펠비스(pelvis)였다. 실로 카데바는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갑게 감기는 감촉, 나는 내가 만졌던 카데바의 부위에 손톱자국을 내면서 '영역표시'를 하고 있었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던 펠비스를 도맡은 것도 '영역표시'를 하기 위함이었다. 누가 먼저 손을 대기 전에 내 것으로 해두고 싶었다.
  하나씩, 정복해 나갔다. 나는 수술장갑을 벗고 면도칼을 들었다. 면도칼을 들이대기 이전에, 방광 부근의 스킨에 엄지손가락을 세워 「X」모양의 손톱자국을 내었다. 꾸욱 들어가는 느낌이, 그대로 힘을 주면 카데바의 스킨을 뚫고 들어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요도와 고환에도 차례로 손톱자국을 낸다. 귀두에도, 나는 망설이지 않는다. 쪼그라든 카데바의 성기는 어두운 고동색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손톱자국으로, 형광등에 비쳐 작은 음영이 생긴 것을 보고는 이내 흡족해 했다. 이제 다른 사람이 이 부위를 건드려도 아무렇지 않을 듯 했다.
  면도날이 잘 서지 않아 음모는 깎이지 않고, 그 위에서 서걱거리기만 했다. 늘어진 성기를 잡고 왼쪽으로 잡아당겨, 적나라하게 드러난 오른쪽의 음모를 벗겨내듯 밀어냈다. 까맣게 말라비틀어진 털들이 성기 주변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쓸데없이 길다. 음모들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잡아당겼다. 카데바가 소리를 지를 것 같았다. 자신의 중요한 부분을 감싸고 있던 검은 수풀이 강제로 잡아당겨지는 느낌은, 고통이 아니라 쾌감에 가까울 것이다. 더 세게! 카데바는 소리를 지른다.
  인기척. 나는 시선을 의식하고 다시 면도날을 들었다.
  "도와줄까."
  진헌은 내가 잡고 있던 성기를 대신 받아든다. 어쩐 일인지 진헌도 수술장갑을 벗은 채, 맨손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하얀 손이 카데바의 길쭉하고 어두운 그것을 감싸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역겨운' 광경이었다. 나도 모르게 진헌을 밀쳐 버렸다.
  다시 추락하는 카데바의 그것을 공중에서 받아낸다. 카데바와 나만의 비밀스러운 의식(儀式)이 진헌이 나타남으로써 산산이 깨어져 버렸다. 치졸한 수치심. 속마음을 들켜버린 듯, 순간 죽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카데바의 성기에 다시 한 번 '영역표시'를 한다.
  너만큼은 안돼. 저리 가.
  진헌은 자기 조의 카데바는 할머니라서 남성 카데바의 성기를 보고 싶었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성격 좋게 웃으며 다시 다가오는 모양이 내가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하지만 양보하지 않았다. 진헌은 강요하지 않고 한 쪽 손만 뻗어 면도기로 음모를 쓸어버리듯 밀어냈다. 음모는 금세 떨어져 내렸다.
  진헌은 나를 보고 씨익 웃는다. 자신의 조로 돌아가면서 내 귓가에 대고 '내꺼 보다 형편없지?' 라고 속삭였다.
  나는 그대로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 날, 해인이 찾아온 것은 뜻밖이었다. 꼼꼼하고 예의바른 성격의 해인이 사전 연락도 없이 누군가를 무작정 만나러 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실습이 막 끝난 참이라 진이 다 빠져 있었지만 오랜만에 보는 해인의 얼굴이라 진정 반가웠다.
  아직 쌀쌀한 기운이 남아 있는 초봄, 해인은 단정한 베이지 색 투피스를 입고 큐빅이 박힌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고, 손에는 케익 상자가 들려 있었다. 어찌됐건 해인의 마음이 고마웠다. 나에게서 이상한 냄새가 나지 않느냐고 무안한 표정을 짓자, 해인은 코를 쥐고 과장되게 얼굴을 찡그린다. 이내 웃음을 터트리고는 케이크 상자를 들어 흔들어 보였다.
  배고프지? 네가 좋아하는 모카 케익이야.      
  싱글거리던 해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가신 것은 내 옆에 누군가가 섰을 때였다. 진헌이었다. 진헌이 카데바의 살점과 기름이 잔뜩 묻은 흰 가운을 벗으며 ‘누구야’ 하고 묻자, 해인의 눈이 가늘어 졌다. 케익 상자를 받아 들면서 빈 강의실에 가서 먹자고 해도, 해인의 굳은 얼굴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진헌은 끈질기게 해인에 대해 물었다. 내가 머뭇거리고 있으려니 해인은 ‘제희의 언니에요.’ 라고 짤막하게 내뱉었다. 그리고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온 복도에 울리며 진헌과 나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하나도 닮지 않았는데, 저런 언니가 있었어?"
  진헌이 말하는 데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뒤에서 진헌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모르는 척 했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빠져 나가고 있는 해인을 놓치지 않기 위해 베이지 색 옷자락을 쫓았다. 마침내 해인의 팔을 잡고 돌려 세웠을 때, 그녀는 확실히 기분이 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흔들림 없이 내 눈을 직시한다. 해인이 내 눈을 피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사물함에 벗어 넣고 오지 않은 흰 가운에서 포르말린 냄새가 습기 찬 기류를 타고 진동하고 있었다.
  "케익은 집에 가져가서 먹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났을 뿐이야."
  의외로 침착하고 부드러운 어투였지만, 거짓말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해인은 시선을 잠시 멀리 두는가 싶더니, 그대로 뒤를 돌아 평상시의 발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중요한 무언가를 잊었다는 듯 다시 뒤로 돌았다.
  "그리고…… 너희 둘, 전혀 어울리지 않아."
  나는 해인의 입가가 살며시 올라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라비린토스(Labyrinthos). 사람들은 내가 있는 곳, 아니 ‘우리’가 있는 곳을 그렇게 일컫고 있었다. 한 번 들어오면 절대 빠져 나갈 수 없도록 설계된 저주받은 미궁.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그 곳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제물들을 잡아먹고 난 이후면 어김없이 그 사람이 들어와 방을 정리했다. 피 비린내가 자욱한 ‘인육 도살장’에서 안면근육 하나 변하지 않고, 사리는 것 없이 찢겨진 살점과 핏덩이들을 손수 치우고 닦아냈다. 그럼에도 그에게선 항상 좋은 냄새가 났으며, 탐스럽게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은 건강한 윤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 허연 팔뚝을 난잡하게 잡아 뜯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보기 좋게 부풀어 오른 젖가슴을 찢어버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를 보고 있노라면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혼란의 시간이 점차 길어질수록 피에 젖은 흉측한 몰골과 떠나가지 않는 죽음의 냄새를 통렬하게 자인(自認)할 뿐이었다.
  초일, 인계의 대륙에서 제물을 태운 배가 건너오던 밤이었다. 경계를 상징하는 붉은 휘장을 걷고 차가운 돌계단을 올라 그는 내 곁으로 와 있었다. 한 장의 천 조각, 한껏 피어오른 여체가 달빛에 으스러질 것처럼 비쳐 보였다. 낮게 으르렁대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그는 우유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가엾은 사람, 당신을 낳은 파시파에 왕비는 나의 어머니이기도 하지요. 당신에겐 아무런 죄가 없어요. 총명하신 신께서 저주를 내린 건 그 여자였는데, 이 세상의 온갖 고통과 질타는 당신이 받는 군요. 당신이야 말로 나에게 있어 가장 순결한 사람, 사랑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에요. 이제 외롭지 않을 거예요. 내가 있으니까……. 내 이름을 기억해 주세요. 나는 '아리아드네' 라고 해요."
  
  진헌은 스푼으로 황도를 떠서 나에게 먹여주었다.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올린 채, 묵묵히 받아먹는다. 지독한 감기였다. 한 여름철에 걸린 몸살감기라니, 사람들에겐 스트레스성 장염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누워있는 참이었다. 열기가 식은 강변의 밤바람은 무시할 것이 못된다며 진헌은 핀잔을 주었다.
  해인의 자취방에서 새벽에 빠져나와, 학교로 곧장 향하여 수업을 들었던 것까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전부터 열이 오르는 게 이상하다 싶더니, 점심시간 즈음이 되자 오한이 나면서 도저히 오후의 해부학 실습을 할 수 없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결국 진헌을 호출해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진헌은 자신의 써클룸에 나를 데리고 와서 소파에 뉘어 주었다. 낡은 캐비넷 안에서 이불을 꺼내 덮어주고, 소형 냉장고에서 황도 통조림을 꺼냈다. 진헌이 덮어준 이불에서는 캐비넷의 미미한 쇠 냄새가 났다.
  어느덧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굵어지는지 빗소리도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뜨거운 홍열, 적당한 정점을 찾지 못한 채 세상과 나는 분리되어 이공간의 세계로 자꾸만 떨어지고 있었다. 편치 않은 나른함에 팔은 늘어지는데, 온몸의 세포가 제멋대로 날뛰는 듯한 느낌. 실제로 내 몸에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몽환에서 눈을 뜬 것은 나지막하게 들려 온 진헌의 신음소리 때문이었다. 통조림을 따다가 뚜껑에 손을 베었다고 했다. 진헌의 손에는 약간 치우쳐지게 지어진 긴 상흔이 있었다. 피가 상흔을 따라 흘렀고, 진헌은 침착하게 근처에 있던 두루마기 휴지로 손을 감싸 지혈했다. 휴지는 금방 선명한 붉은 색으로 물들여 졌다.
  나는 진헌의 손을 잡고 내 쪽으로 이끌었다. 손을 감싼 휴지를 풀어내고 상처 부위의 핏방울이 솟는 대로 핥아 주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피 맛이 났다. 진헌의 손이 잠시 흔들리더니 내 입술에서 빠져 나간다. 곧 내 혀에는 딱딱한 플라스틱 스푼의 감촉이 느껴지고, 달달한 수액이 가득 담긴 황도가 입안 가득히 들어왔다. 진헌의 손에는 밴드가 붙여져 있었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을 깜박여서 흐릿하게 진헌을 올려다보았다. 진헌의 뒤쪽 벽면에 보이는 수많은 사진들이 불투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여기가 사진 동아리였던가, 몽롱한 기억 속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이 익은 풍경사진 몇 장이 유독 신경 쓰인다. 자신이 아니라 뒤 쪽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진헌은 내가 시선을 두고 있는 곳을 돌아본다. 아, 하는 탄성. 자신감 있는 어조로 힘주어 말한다. 「저기 붙여져 있는 건 거의 다 내가 찍은 거야. 신학기였을 즈음인가? 경기도 쪽의 계곡을 다녀온 적이 있어. 서울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았는데 물도 맑고 공기도 다르고 좋더라구. 이번 주말에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그 때 사진도 더 찍어오고 싶었는데 비가 많이 와서 그러지 못했어.」자꾸 눈이 감겼다. 무언가에서 도피하고 싶은 것처럼.  
  빗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진헌이 덧붙여 뭐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들려오는 것은 시리도록 떨어지는 빗소리뿐이었다. 난 분명 저 곳을 알아…… 어디서 봤더라…… 그리고 이내 빗소리마저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 펠비스(pelvis) : 생식기, 배설부위
* 라비린토스(Labyrinthos) :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나오는 미궁(迷宮)


4. 제 3자
  끝없이 달리고 있었다. 어둡고 축축한 기분 나쁜 풀숲. 아무리 달려도 나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 숲을, 적어도 이 우물만큼은 보이지 않은 곳으로 멀리 달아나고 싶었다. 한참 달음질 쳤는가 싶으면 어둠 저편에서 물소리가 들렸고, 풀숲을 헤친 그 앞에 검은 물이 넘치는 우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몇 번째 마주하는 것일지 모를 우물 앞에서 탈진하여 무너져 버렸다. 이미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지가 아니었다. 밭은 숨을 할딱일 때마다 습기를 한껏 배어 물은 흙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 이빨을 우물거려 뱉어낼 힘조차 없었다. 내 몸을 타고 가로지르는 바람이 느껴졌다. 몸뚱어리는 싸구려 플라스틱 같은 껍데기로 굳어 있었다. 어디선가 불결하고 쾌쾌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내 몸에서 기이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루살이는 악의가 없다. 지금 내 눈을 후벼 파고 있는 것은, 24시간 살아가기에 급급한 하루살이 따위가 아니라 악독한 뇌염 바이러스를 옮기는 작은빨간집 모기임에 틀림없었다. 나의 안구에서 나오는 미미한 암모니아 냄새를, 조잡하게 움직이는 촉수로 감지한 뒤 날카롭게 뻗어 있는 주둥이로 필시 동공의 한 가운데를 뚫었음이리라. 무리한 에어컨 바람으로 냉병까지 걸릴 지경인데 이놈의 모기들은 도무지 제압당할 줄을 모른다. 조금 괜찮은가 싶으면 눈의 한 가운데가 다시 찌르듯이 아파왔다.
  역시 카데바는 원망의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페이스가 거즈로 덮인 탓에 직접 볼 수는 없지만, 매서운 시선이 온 몸에 꽂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따끔거리는 눈을 비비지 않는 대신 수술장갑을 끼고 메스를 들었다. 카데바의 몸체를 덮고 있는 덮개를 들어 올렸을 때, 미미하게 풍기는 비릿한 노린내가 단순히 소독약 냄새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기기관에서 피어오른 균사는 스킨의 윗부분까지 타고 올라와 이미 심하게 얼룩져 있는 상태였다. 듬성한 연녹색 파편을 뒤덮은 포자가,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부패한 내장의 악취와 함께 먼지처럼 흩날렸다.
  담낭에서 터져 나온 담즙 탓에 장기는 애초부터 녹색 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것을 다시 청록으로 정복한 다핵의 단세포는 부생(腐生)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카데바의 전신을 삼켜버릴 듯 위압을 내뿜고 있었다. 무성적으로 번식한 포자가 자신의 생존권에 '영역표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그스름했던 근육은 검붉은 빛을 띤 채,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카데바를 뉘인 받침대에서는, 죽은피와 뒤섞인 검붉은 체액이 고여 카데바를 조금만 건드려도 그것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덮개를 열어 재낀 지 몇 분되지 않아 견딜 수 없을 만큼 역한 냄새가 사방으로 진동했다.    
  우리 조원들은 포르말린을 있는 대로 쏟아 붓고 닦아 내면서, 급속한 속도로 부패하고 있는 카데바를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이 무색하게, 조교는 태연히 각기 다른 조에 우리들이 알맞게 나뉘어 지도록 배치했다. 토락스(thorax)를 거쳐 압도멘 파트가 한창인 요즘 때, 카데바의 부패현상은 종종 일어나는, 대단치 않은 사건으로 치부되어 있었다. 사실 포르말린을 당일마다 뿌려두어서 카데바의 실습부위가 상하지 않도록 사전에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철저한 방부처리를 한다고 해도, 이처럼 이틀에 한 번 꼴로 비가 오는 저기압의 습기 찬 대기를 무력한 단백질 덩어리가 견뎌내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었다.
  내 등 뒤에 대고 카데바가 소리치는 것이 들려왔다.「충분히 갖고 놀았으면서 책임을 회피하는 군. 날 가장 저질스럽고 처절하게 벗겨낸 것은 바로 너였잖아.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을 뿐인데. 인위적으로 산화된 메틸알코올이 자연 에너지에 굴복했다고 해서 너 역시 그 힘에 굴종해 버리는 거냐?」나는 잇몸까지 소름이 돋도록 질려 버렸다. 우리는 애초부터 친구 따위가 아니었다. 그래서 매몰찬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야. 난 네가 필요로 할 때마다 적절하게 사용했고 이제는 필요 없어졌어. 네 신체가 썩어버린 이상, 나 뿐 아니라 앞으로 어느 누구도 너를 필요로 하지 않을 거다. 마음이 중요한 게 아니야. 네 '몸'이었던 거지.」카데바는 필경 나를 비웃고 있었다. 그것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으득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내 조교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다른 조의 해부 실습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카데바의 발목이 드러나도록 덮개를 바싹 올렸다. 카데바의 손이 갑자기 덮개에서 빠져나와 내 가운을 잡아 뜯을 것만 같았다. 그는 이렇게 소리친다.「날 죽여주고 가! 이대로 가버리면 평생 저주할 테다. 응고되어 푹푹한 피가 엉겨 붙은 내 심장을 봤잖아. 결국 고지에 닿지 못하고 쓸모없어진 헤모글로빈처럼 날 버리지 말란 말이다!」나는 뒤돌아서서 돌아보지 않는다. 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안녕'이란 단어만이 혀끝에서 맴돌 뿐, 한 번 돌아선 발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눈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쏴아 소리가 나도록 장대비가 오고 있었다. 그리고 약속했던 것처럼 해인이 찾아왔다. 해인은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오래도록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만나기로 했던 학교 정문이 아닌, 의대 실습실 복도에서 해인을 볼 수 있었다. 민소매 실켓 블라우스와 다리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플레어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적당한 굽이 있는 검은 샌들이 잘 어울렸다. 미소 띤 얼굴이었기 때문에 예전의 일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은 모양이라고 안심했다. 새벽에 혼자 빠져 나온 것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내심 염려했던 것이다.
  해인 옆에서 흰 가운을 벗어 사물함에 걸어두며 '아차' 싶었다. 아침에 향수를 챙기지 않은 탓이다. 향수와 같이 인공적인 냄새는 좋아하는 편이 아니어서 매번 뿌리는 것이 곤혹스럽긴 했지만, 실습 후 외출할 일이 있다면 이런 매스꺼운 소독약 냄새는 풍기지 않는 것이 에티켓이었다. 특히 해인에게 있어서, 나는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유독 강했다.
  일정하게 사이를 두고 걷는 것을 알아챘는지 해인은 가까이 다가와 팔짱을 낀다. 냄새나서 안돼. 네 옷에도 묻을 거야.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팔을 뺐다. 해인은 자그맣게 소리를 내서 웃었다. 핸드백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내 가슴팍에 칙, 소리를 내면서 뿌리는 모양이 향수인 모양이다.
  "'롤리타 렘피카'. 독사과의 향수라고 불리는 거야. 너랑 잘 어울려."
  왠지 사치스런 향기다. 나와 잘 어울린다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향수병은 실제로 사과모양을 하고 있었다. 짙은 탑 노트(top note) 때문에 알아채기 힘들었지만, 이 고혹적인 향기는 분명 해인에게서 나는 향기였다. 따뜻하지만 차가운, 그 격렬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기류의 경계선에 내가 있었다. 아니, 우리가 있었다. 해인은 다시 내 팔 안쪽에 자신의 가느다란 팔을 넣는다. 건물을 나설 때까지도 해인은 자신의 우산을 펴지 않은 채, 내 우산 아래에서 팔짱을 빼지 않았다. 해인의 발걸음은 미묘하게 경쾌했다.

  내 청바지의 끝에서 타고 올라온 빗물이 무릎까지 축축하게 감아 올랐다. 튀어 오른 모래들이 종아리 부근에 제법 붙어 있었다. 어둑한 조명 아래, 자리에 앉아 청바지를 털었다. 나를 둘러 싼 공기보다 무거운 물기가 느껴졌다. 카페에서는 터틀즈(Turtles)의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해인은 배가 고프지 않다고 했다. 메뉴판을 돌려주면서 칵테일 쪽을 보라고 말해 주었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해인은 오렌지 주스를, 나는 가미가제(kamikaze)를 주문했다.
  해인은 가미가제(神風)를 알고 있었다. '신의 바람'인 거냐고 묻는다.
  "바로 맞아. 제 2차 세계 대전 때의 일본의 자살 특공대야. 전투기를 타고 적진에 용맹하게 날아들었지. 엄청난 함선을 구식 비행기 하나로 날려 버리는 거야. 칵테일 가미가제는 미국에서 만들어 진 거지만, 톡 쏘는 맛이 일본의 돌격기과 비슷하다고 해서 그렇게 지어졌대."
  "조국을 위해서, 인가……."
  해인의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가 호기심이 나는 것을 발견하면 눈을 크게 뜨고 집게손가락으로 턱을 받치는 습관은, 나만이 알고 있는 해인의 버릇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천황'을 위해서겠지."
  흰 연기가 가득 찬 것처럼 뿌연 액체가 록 글라스에 담겨서 나왔다. 커다란 얼음이 세 개, 나는 습관적으로 록 글라스를 둥글게 흔들었다. 해인은 빨대로 오렌지 주스를 젓기 시작했다. 흐음, 하는 모양이 뭔가에 골몰했지만, 줄곧 무언가에 즐거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런 해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부드러운 보드카를 타고, 쌉쌀한 화이트 큐라소의 알싸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얼음이 입술에 닿아 차가웠다. 의대 건물 안에서 해인이 나에게 뿌려 주었던 독사과의 향기가 아직 내 가슴에 남아 있었다.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해인은 앞서 말을 잇는다.    
  "나, 네가 마시고 있는 가미가제 라는 칵테일, 맛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
  오늘은 특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라는 생각으로 가미가제를 목구멍으로 한 모금 넘겼다. 무색, 무취, 무미한 보드카. 화이트 큐라소의 빛깔은 마치 해인과 같지.
  "나, 임신했어."
  방금 어떤 단어가 테이프를 길게 늘어뜨린 듯 무척 거슬리는 발음을 가지고 있었다. 역시 해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날 죽여주고 가! 이대로 가버리면 평생 저주할 테다.」고막을 진동시킨 카데바의 목소리가 달팽이관 속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2개월 되어 간대. 하긴, 이른 봄이었으니 그 정도는 됐겠다 싶어. 오늘처럼 비가 많이 왔었어. 계곡의 물이 불어나서 굉장한 소리를 내고 있었지. 대낮부터 달라붙어 하루 종일 그 짓을 해댔던 우리의 음탕한 신음은, 밖에까지 한 번도 들리지 않았어.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 정말 단 한번도 들리지 않았단 말이야."
  비, 계곡. 검은 색으로 코팅된 창 밖에서는 선이 굵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이 울릴 정도로 새된 비명이 들려왔다. 곰팡이로 얼룩 진 카데바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카데바의 비명소리는 점차 웃는 소리로 뒤바뀐다. 성량이 점점 커지는가 싶더니, 터틀즈의 보컬 목소리로 변해 어느새 인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빠른 템포의 여린 드럼과, 낮게 깔리는 남성의 아련한 보이스. 카페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터틀즈의 노래였음이 틀림없었다.  
  비, 계곡……. 무언가가 계속 싱크로 되고 있었다. 해인은 태연하게 오렌지 주스를 빨대로 빨아 마신다.
  "반드시 '그' 여야만 했어. 내 안에 있는 것은 나와 그의 부산물 따위가 아니야. 이 아인 바로 너와 나의 아기야."
  뇌수가 흔들리도록 머리에 둔탁한 무언가가 내리쳐진 것 같았지만, 애써 침착한 시선을 유지했다. 해인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었고, 실제 표정도 해인의 나긋한 목소리와 하나의 수평선을 이루고 있었다. 방망이질 쳐대는 심장이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해인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해인의 방에서 본 크로키 북의 벌거벗은 남자를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였기 때문이 아니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예전에 내가 해 준 이야기 기억나? 전갈과 개구리의 이야기. 왜, 전갈이 강을 건너기 위해 개구리 등 위에 탔는데 전갈이 개구리를 찔러 버리잖아. 개구리는 독 때문에, 전갈은 강에 빠져 같이 죽어가고 있었지. 날 왜 찔렀느냐는 개구리의 물음에 전갈이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지 않니? 전갈이 말하기를……."
  글라스에 비쳐 해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보였다. 하얀 손.
  "어쩔 수 없었어. 본능이었거든」."
  해인은 작게 소리를 내서 웃었다. 찬찬한 태도로 탁자에 엎드려, 탁자 위에 있는 오렌지 주스 글라스를 돌리면서 손가락 장난을 쳤다.  지금 흐르고 있는 곡명은 'Happy Together' 였다. 낯익은 리듬, 예전에 수도 없이 입 속에서 되뇌던 가사. 나는 이 노래를 알고 있었다.
  《 나와 당신 당신과 나,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 상관없어요
당신은 나의 유일한 사랑이고, 난 당신의 유일한 사랑이에요  
너무 행복해요, 너무 행복해요…… 》  

  음산한 물기, 그것은 우물에서 나오는 검은 물이었다. 차갑지만 빛깔처럼 혼탁해서, 내 몸에 자리 잡고 있는 진균류 미생물에는 전혀 해를 끼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그것들이 내 신체 구석구석에 점령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것 마냥 생각되었다. 온 몸의 구멍으로 흘러나온 검붉은 체액은 마치 살아 있는 듯 끈적거렸다. 조금씩, 검은 땅으로 스며든다. 땅이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빨아 먹히고 있는 것이다.
  녹색 가루가 흩날렸다. 솜털 같은 포자가 눈꺼풀에 앉은 것이 느껴진다. 쾌쾌한 곰팡이 냄새는 복부를 타고 올라와 식도와 턱 부분을 감싸고 있었다. 허벅지에 맞닿은 손바닥에서 두텁게 덮여진 그것들이 느껴졌다. 귀에서 뺨으로, 뺨에서 입술을 타고 퍼지는 균사의 감촉이 소름끼치게 보드라웠다. 균사는 안구 깊숙한 곳까지 침식하여 나의 마지막 의지가 담겨 있는 눈꺼풀을 무력으로 꺾어 내린다.
  이제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체액마저 빠져 나오면, 점점 식어가는 내 몸은 바람에 공명할 것이다. 껍질만 남아 이내 바스러져 버리겠지. 그러면 나는 이 검붉게 물든 흙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오래도록 풀리지 않아 내 신경을 갉아먹던 의문이 있었어. 그런데 지금 그 의문이 풀린 것 같아. 왜 네가 날 죽일 수밖에 없었는지 말이야. 그 밑바닥까지 내려가던 환상이 결국 현실이 되어 버렸어. 그렇게 의아해 하는 표정 짓지 마. 모두 설명해 줄 테니까.』
  손톱처럼 뾰족한 것으로 철판을 긁는 흉측한 소리가 성대에서 울렸다. 해인의 크게 뜬 눈동자는, 내가 말한 것 때문이 아닌 이 괴상한 목소리 탓이었을지 모른다. 그녀는 집게와 검지로 꼬고 있던 하얀 손가락을 글라스의 표면에 대고 물방울을 훔쳐냈다. 그런 모양이 해인의 불안정한 심정을 담아내고 있진 않았다. 오히려 어린아이가 엄마 앞에서 모래장난을 하는 것처럼 꾸밈이 없어 보였다. 해인의 시선은 점차 글라스 쪽으로 내려갔다. 글라스 표면에 맺혀 응결된 물방울은 손가락 위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른 손가락으로 받아내지만 잘 되지 않는 듯, 해인은 자꾸 글라스를 훑어 올렸다.
  나는 이미 차가워진 그 가느다란 손가락을 휴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휴지에 감싸진 해인의 손가락을 살며시 그러쥐었다. 한 장의 얇은 각막(角膜)을 사이에 두고, 나의 체온이 해인의 손가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옛날에 괴물과 그를 사랑했던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어. 괴물은 아이들을 잡아먹으면서 생을 연명해 가고 있었지. 사람들은 괴물이 죽기만을 바랐어. 그러던 어느 날, 한 용사가 찾아왔어. 공주는 용사를 도와 괴물을 죽이고 두 사람은 미궁에서 탈출했지. '난' 죽어가면서 원망했다. 아리아드네는 왜 '나'를 죽였을까.
  그것은 아리아드네의 하나의 표현 방식이었던 거야. 그녀는 후일 용사에게 버림받고 뱃속에 용사의 아기를 가진 채 자결했어. 헌데 그건 틀려. 그녀는 버림받아서 자결한 것이 아니라 자의로써 목숨을 버린 거였어.』
  내 목소리는 점차 굵직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자신이 본래부터 괴물의 형태를 가진 이계의 생체였다는 것을 쾌감하고 있었다. 톱니 같은 송곳니가 돋아나고, 짙은 갈색을 띤 털이 자라나고 있을 것이다. 털 사이를 비집고 솟아나는 두 개의 뿔과, 탁한 붉은 빛으로 변해가는 나의 눈동자. 나는 더 이상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해인, 넌 내 심장이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어. 아주 왼 쪽이 아니라 여기 쇄골, 가운데에서 조금 치우쳐진 왼 쪽이라는 것을. 칭찬해 줄게. 잘 겨냥했다. 되살아나서 다시 생의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잘 끝내 주었어.』
  해인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해인이 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웃고 있다는 것을.
  『결국, 너와 난 이 미궁을 빠져나갈 수 없었던 걸까.
   말을 하지 그랬어. 나는 너와 끝까지 갔을 텐데.』
   카데바가 손짓하는 이공간(異空間)으로 발을 내딛는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결국 인영마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눈을 감아 버린다.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해인의 손가락이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 어떠한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 토락스(thorax) : 흉부
* 터틀즈(Turtles) : 60년대를 풍미했던 아메리칸 팝그룹
* Happy Together : 터틀즈(Turtles), 1964

※ 검은 것은 아름답다(Black is beautiful) : 60년대 후반, 흑인 인권 운동의 슬로건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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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아 03.12.15 23:12 댓글 수정 삭제
    5호부터 익명의 기증자께서 우수단편으로 선정된 작품에 도서를 기증하기로 하였습니다.
    제이님에게는 "2004 세계 환상문학 걸작 단편선" 1권과 2권이 보내졌습니다.
분류 제목 날짜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6 2009.04.24
우수작 유령들4 2009.04.24
가작 건방진 와트슨과 흰 벚꽃 잎 2009.04.24
가작 화구의 공포 2009.04.24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6 2009.03.27
가작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 2009.03.27
가작 죽음과 소녀1 2009.03.27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13 2009.02.27
가작 1999년, 매미를 위하여1 2009.02.27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6 2009.02.04
우수작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2009.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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