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가작 몽유기행

2012.12.16 00:5312.16

* '신음'이라는 제목으로 탄생 이벤트에 응모했던 중편을 각색해서 단편으로 올립니다.



#1
  복잡한 의사들의 설명과는 달리 내 병명은 그저 흔한 자기혐오의 하나쯤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언제나 또 다른 나와 싸웠고 적대당한 나의 무의식은 밤을 틈타 나를 지배하려고 했다. 내 몽유병은 다름이 아니라 그러한 영토 다툼의 과정에서 무의식이 우위를 점할 때 일어나는 증상이었을 것이다. 뇌 깊은 곳에는 미지의 심해저 생물이 잠복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을 볼 수 없었지만 그들은 원할 때마다 수면으로 올라와 나를 조종하려 했다.
  잠드는 것은 곧 의식을 잃는 것이었으므로 저무는 해가 두려웠고, 버티다 못해 실신하듯 빠져드는 잠도 깊지 못했다. 잠든 동안에도 항상 반쯤 깨어 있던 까닭에 나는 언제나 꿈을 꾸었다. 재밌게도 나는 꿈을 꿀 때마다 어김없이 신음을 했다. 혼이 빠져나가듯 꿈이 증발하면 신음은 어디 가지 않고 귓바퀴에 달라붙는다. 아침이 오는 것처럼 그것은 알면서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 신음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없었다. 신음은 한밤중에 시작되어 깨어날 때쯤 절정을 이루는데, 내 귀가 기능하는 건 깨어난 이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신음소리는 완만한 비탈을 그리지 않고 언제나 깎아지른 절벽처럼 갑작스레 솟아났다.
  새벽에 외로이 찾아오는 그 반쪽짜리 신음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신음의 단절은 꿈과 현실의 단절을 의미했고 그것은 곧 나와 꿈속의 나 사이에 뇌간腦幹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 신음은 이 길고 지루한 싸움에서 나를 응원해 주는 유일한 친구였던 셈이다.  

#2
  그날 나는 한창 심해진 불면증 때문에 늦은 오후에야 눈을 떴다. 이상하게도 신음의 끝머리가 들리지 않았다. 익숙지 않은 고요함이 섬뜩했다. 꿈을 꾸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나 낯설었다. 깨어난 곳은 침대 위였지만 어제의 일이 기억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뭘 했는지, 어디서 어떻게 잠들었는지 도저히 떠올릴 수 없었다. 나는 평소 즐겨 입는 외출복을 입은 채 구두까지 신은 상태였다. 그런 차림으로 차디찬 방에서 이불을 깔아뭉갠 채 엎드려 있었다.
  괴이한 기분에 휩싸인 나는 차분히 최근의 기억을 짚어 보았다. 처음에는 근래의 며칠이 희미하게 떠오르는 듯 싶었으나 결국에는 모두 흩어져 버렸고, J의 생일이었던 몇 주 전의 일이 어렴풋이 생각날 뿐이었다. 영락없이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결정적으로 위화감을 느낀 것은 탁자 위에 놓인 달력을 발견했을 때였다. 11월이 펼쳐진 그 달력을 발견했을 때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집었다. 연기를 빨아들여 머리를 팽팽히 당긴 후에 다시 한 번 기억을 더듬었다. 지금은 분명 2월이다. 잔디가 다 덮이지 못한 J의 묘지에서 그녀의 생일을 홀로 기념했던 일이 생생하다. 급히 들인 담배연기가 가슴에서 빠지질 않아 헛구역질이 났다.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액정에서 확인한 11월 3일이라는 날짜가 엄정한 선고처럼 다가왔다.
  달력이 작년 것이라는 걸 확인한 나는 비틀거리며 책상을 짚었다. 그러자 섬광처럼 지난밤의 꿈이 떠올랐다. 거세게 밀려오다가도 곧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처럼 흩어지던 여느 꿈과 달리, 지난밤의 꿈은 한바탕 내닫은 후에도 썰물이 없었다. 머릿속이 꿈에 잠겼고 꿈은 늪처럼 굳어서 손에 잡힐 듯했다. 잠에서 깨며 신음을 하지 않았던 건 꿈이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꿈에서 들었던 대로 나는 정말 3개월 전의 과거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내가 혼란을 느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가 역행한 것은 시간뿐만이 아니었다. 기억이 죽음 너머까지 통용되는 개념이라면, 나는 당시 내가 죽었다는 사실과 그 과정을 기억해냈다고 할 수 있겠다. 선종宣宗의 깨달음처럼 한순간에 찾아온 불쾌한 기억, 그것은 직직거리는 흑백TV 화면처럼 군데군데 끊어지고 순서가 없었지만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걸 확인하는 데는 모자람이 없었다. 당시의 비장했던 심정도 선명히 떠올랐다.
  그때 나는 애처로운 삶의 파도 속에서 최후의 저항을 감행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이미 나는 어떠한 이유에서 목숨과 재회하였고, 결과적으로 그 마지막 반란 역시 생전의 다른 것들처럼 좌절된 셈이었다. 꿈속에서 누군가로부터 살려 주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종교적 경외나 신비로운 감격 따위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다만 완벽하게 무시된 나의 유지遺志를 되새기며 아무리 힘을 다해도 결국에는 무력화되고 마는 현실에 몸서리칠 뿐이었다.
  “너를 살려주겠다.”
  꿈속에서 그 목소리는 벼락같았고 산사의 범종 같았다. 깨우침과 종용이 모두 거기에 있었다. 그 목소리는 부활한 것이 엄연한 현실임을 가르쳐 주는 동시에 약속했던 일을 빨리 실행에 옮기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퍼뜩 꿈속에서의 약속을 기억해냈다. 그것은 말하자면 살아나기 위해서 치러야만 하는 대가였다.

#3
  실마리는 날짜뿐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휴대폰으로 날짜를 확인했다. 11월 3일. 다음날이 아버지의 생일이었다. 잊고 있었던 그 날짜를 일깨워준 건 3개월 전에 있었던 계모와의 통화였다.  
  “환갑이시니 올해는 꼭 올라오너라.”
  계모라는 호칭은 하나의 지위처럼 후보자들 사이에 수시로 계승되었다. 나는 현직에 누가 앉아 있는지 몰랐다. 굳이 숨기려고 들지 않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부터 가족 간의 살가운 부름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고, 간헐적인 연락도 나를 감시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 역시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환갑연에 참석했던 것은 후술하게 될 모종의 사정 때문이었다.
  환갑연 이틀 전에 서울에 올라갔으니, 지금 이 시간 나는 서울의 모 호텔에 있을 것이다. 창가를 핥던 노을이 입김에 부서졌다. 시계는 오후 5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서둘러 방을 나오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교대시간이어서인지 택시는 잡히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시내버스 정류장을 찾았지만 20분이 지나도록 버스는 오지 않았다. 허공을 훑던 시선이 정류장 맞은편의 공사현장에 이를 때까지 나는 유령도시 한가운데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공사현장에 우뚝 솟은 커다란 빌딩은 나를 단번에 현실로 끌어내렸다. 갓 달아맨 건물의 간판에는 <S교단敎團 D시 지부>라고 적혀 있었다.
  나의 불안정은 그 근저가 상당부분 S교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이제 비교적 인적 드문 이곳 D시까지 진출하기 시작한 S교단은 흔히 말하는 사이비 신흥종교단체였다. 자취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 회관이 착공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간신히 도망친 나의 뒤를 따라 이 도시까지 스며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서울에서 어머니 손에 이끌려 드나들던 S교의 중앙회관은 비주류의 피해의식 탓인지 그 규모가 과도했다. 그 10층짜리 건물은 어딘지 모르게 근원적인 공포를 자극하며 입구에서부터 내 작은 심장을 죄어오곤 했다. 거울처럼 번쩍이는 대리석 바닥을 가로지르던 어머니의 남루한 구두가 아직도 기억나는 걸걸 보면 어린 나의 눈에도 그 대비가 극명했던 모양이다.
  10대에 혈혈단신으로 상경해 곧바로 S교단이 운영하는 다단계 사업체에 취직을 한 어머니는 일생을 열렬한 신도로 살았다. 아버지를 찾는 나의 질문에 어머니는 항상 대답을 회피하다가, 요절하기 직전에 내가 그녀의 신앙의 산물이라는 뜻 모를 고백만을 남겼다. 그리고 끝내 남겨진 피붙이에 대한 미련과 걱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섬뜩한 미소로 숨을 거두었다.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어머니는 본인이 천국에 들어갈 거라고 굳게 믿었다.
  교단 산하의 보육시설에 들어간 후에도 나는 은밀한 곁눈질과 수군거림을 감내해야 했다. 나를 찾아온 한 중년의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러한 괴롭힘의 이유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외부의 시선에 무뎌지기 시작했을 때쯤 나는 그 남자가 S교의 총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바로 내 아버지였다.
 그는 가끔씩 보육원을 찾아오더니 입학에 즈음하여 나를 사저로 데려갔다. 최초에 보였던 그의 은근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게 혈육의 정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눈치 챘다. 가진 씨가 적은 탓인지 대여섯의 첩 사이에서도 그는 후사를 두지 못했다. 드물게 잉태된 여자아이가 몇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기업을 이어줄 아들을 원했다. 계모들이 자주 바뀌었던 것도 아마 그 덧없는 노력의 일환이었을 거라고 추측된다.
  이런저런 시도가 좌절되자 그는 지난날 순수함과 광기를 아울러 품은 눈으로 자신과 육체를 맺었던 여자를 기억해냈을 것이다. 버리듯이 관계를 끊은 이후에도 죽을 때까지 10년 넘도록 맹신을 보였던 그녀를 떠올리자 언제부턴가 그녀를 따라 회관을 드나들던 남자아이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으리라.
  그는 내게 어머니와 같은 열성적인 신앙이 없음을 깨닫고 나서는 격렬하게 나의 불신을 꾸짖었다. 저주 섞인 푸닥거리를 하면서도 그는 깊이 실망하는 듯했다. 나는 그때부터 몽유증세를 겪기 시작했다. 항상 애정에 굶주렸던 내게 처음 느낀 아버지의 정은 가뭄의 물처럼 달았고, 따라서 그것이 차가운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허구였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마침 어머니의 삶을 망가뜨린 S교에 대해 적대감을 품기 시작했던 내가 철저한 종교인으로서의 아버지의 모습에 충격을 느꼈던 것일까.  
  아무튼 몽유의 직접적인 원인은 내 불안정한 무의식의 반작용 때문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애증과 아버지에 대한 혐오감, 그리고 족쇄처럼 나를 얽매고 있는 교단에 대한 무력감은 하나로 합쳐져 스스로에 대한 적대감으로 변증되었다. 나는 분열되었고 서로 싸웠다. 썩은 상처에 덮인 붕대를 들춰보지 못하듯 나는 곪은 내면이 두려웠다.

#4
  버스에 오른 건 저녁 6시가 한참 지났을 무렵이었다. 비가 그친 후 해는 빠르게 저물었다. 달릴수록 도로는 좁아지고 구불구불해졌는데 목적지인 터미널이 구도심에 위치한 탓이었다. 어둠에 잠긴 도시는 무겁게 일렁거리는 검은 바다처럼 보였다. 밤이 가까워질수록, 저항을 무색하게 만드는 절대적인 권력에 의해 잠식당하는 기분이었다.
  어둠이 오면 수면과 함께 어김없이 꿈이 그 뒤를 따라 찾아오고, 꿈속에서 무의식의 바닷물은 하굿둑을 뛰어넘어 독한 염기鹽氣로 내 아가미를 절였다. 나는 가냘픈 방파제 위에서 질식하듯 체념을 하다가도 탈진한 팔다리를 휘저으며 도망치곤 했다. 하지만 곧 꿈틀대는 바닷물이 나를 온통 함몰시켜 달음질은 오래가지 못했다.
  “너를 살려주겠다.”
  간밤의 꿈에서 그 목소리를 들은 것도 날개 젖은 벌레처럼 무기력에 휩쓸리고 있을 때였다.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뿐, 마치 깜깜한 관 속에 갇힌 것처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예수인지 옥황상제인지 알 수 없었다. 정체를 묻는 나의 질문에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되살려준다는 말은 반가울 것도 없었고, 오히려 나의 저항을 스스로 무위로 돌리지 않겠냐는 굴욕적인 제안으로 들려서 우울함을 돋울 뿐이었다. 다만 내가 죽은 경위를 알리지 않은 것만큼은 내심 고마웠는데, 모르긴 몰라도 자살이 거의 확실하거니와 그렇다면 굳이 목을 매달았는지 강으로 곤두박질을 쳤는지 돌이켜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다.
  내 생각은 관심도 없다는 듯이 그 목소리는 나를 되살려주는 조건을 제시했다.
  “너를 죽여야 한다.”
  그가 이르기를, 나는 과거로 돌아가 살아날 것이며 내가 되살아날 과거에는 엄연히도 그 과거를 살아가는 또 다른 내가 존재할 것이라고 했다. 똑같은 나라고 해도 시대가 다르며 세상이 다르니 당연한 이치라면 이치였다. 또 다른 나의 목숨을 내가 직접 취하여 죽여야 하는데, 해가 지고 다시 뜨기 전에 일을 마치면 온전히 살아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다시 죽음을 맞게 된다는 것이었다. 초저녁에 깨어났으니 여명까지 대략 반 하루의 유예가 생긴 셈이었다.
  결국 내 손으로 나를 죽이라는 간명한 사주였다. 그 특별한 살인행위가 결과할 것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굳이 목소리의 주인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두려움과 죄의식과 자기부정의 공허함이 시커먼 고구마처럼 줄줄이 맺힐 것이다. 목숨 값으로 그보다 더 합당한 게 어디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그는 한 가지 주의사항을 덧붙였다. 바로 제3자들에 관한 것이었다.
  “죽일 때까지 들키지 말라.”
  일을 완수하기 전에 누구에게든 정체를 발각당하면 그 즉시 무덤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까다로울 듯 했지만 생각보다 큰 문제는 아니었다. 외양은 생전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고 몸뚱이 외에 휴대폰과 지갑 등 휴대하던 물건의 점유 역시 복구되어 있었으므로, 산 사람을 연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겉모습만으로 의심을 품을 일은 없었다.
  신경을 써야 할 부류는 따로 있었다. 바로 노인들과 병자들이었다. 꿈속의 목소리는 그들처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자들을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그들은 육체의 감각이 녹슬었을지라도 죽음의 냄새에 예민해진 상태이므로 망자를 알아볼 능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삶을 되찾는다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다시 족쇄에 묶는 일이었으므로, 기왕 관 속에 들어간 내가 다시 살아나기 위해 뇌와 사지를 수고롭게 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모순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은 부러진 반역의 칼날을 다시 한 번 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충동 때문이었다. 나는 사진이 아닌 실물의 나를 보고 싶었다. 버스 차창 밖의 사람들처럼 살아 움직이는 나를 보고 싶었다. 나는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그를 부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 눈으로 직접 몽유하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그 비굴한 복종을 철저히 비웃고 싶었다. 나는 자조 역시 희미한 저항의 한 갈래라고 믿었고, 절정에 이르러서는 내 손으로 그의 목숨을 끊어 못 이룬 쿠데타를 완수하리라는 자못 비장한 각오를 품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성공의 확신은 없었으며 꿈을 깨고 난 후에는 살인의 부담이 점점 자라나기 시작했다. 자조는 쉬운 일이지만 내쳐 목숨까지 빼앗는 것은 역시나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렇다고 손을 놓은 채 재차 죽음을 맞을 수도 없었다. 단 한 번의 반역도 성공하지 못한 채 안식을 맞는 것은 차라리 한스러울 것 같았고, 실패는 곧 꿈속을 헤매고 있는 내 분신에 대한 묵인이 될 거라는 사실 역시 용인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결의를 굳힌 가장 큰 동기는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미 한 번 겪었을지언정 죽음은 말 그대로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되살아나는 것에 대해 불안정한 목소리로 수락의 의사를 표시한 뒤, 나는 도망치듯 꿈에서 깨어났던 것 같다.

#5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 어느새 목적지가 보였다. 장지葬地에 도달한 관처럼 버스는 시외버스터미널 앞에 멈춰 섰다. 공복에 느꼈던 늦가을 비바람이 제법 찼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추운 날씨보다도 괴로운 것은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그것은 나의 가면을 뚫지는 못했지만 계속해서 살과 털을 자극했다. 간혹 노인들과 마주칠 때면 나는 재빨리 턱을 어깨에 파묻었다.
  건물 안에도 창백한 노인들이 여럿 앉아있었다. 발걸음이 부산하게 교차되어야 마땅할 장소에 무거운 정적을 안기고 있는 그들의 존재가 나는 매우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행선지가 없었으며 오로지 죽어버린 운행표를 외울 듯 읽고 있을 뿐이었다. 굳이 꿈속에서 주의를 듣지 않았더라도, 나는 그들의 날카로운 눈빛에서 그들이 내 정체를 읽어낼 능력이 있다는 걸 눈치 챘을 것이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에게서는 여지없이 죽음의 냄새가 났다. 그들 역시 내게서 그 냄새를 감지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들의 시선은 들쥐 시체를 쑤시는 올빼미의 발톱 같았다. 서둘러 표를 사고 싶었지만 그들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급했던 나는 도망치듯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싸늘한 화장실 여기저기에 장기매매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별다른 설명 없이 ‘신장’이란 두 글자만 적힌, 그래서 더욱 불쾌한 해부학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스티커들이었다. 그걸 보니 내 몸에서 역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냄새를 지우기 위해 세수를 했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하다못해 염殮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친 것은 얼얼해질 정도로 낯을 문지르고 허리를 일으켰을 때였다.
  서로 돌아보는 눈이 마주쳤다. 등산복 차림에 커다란 여행 가방을 끌고 있는 노인이었다. 넓은 턱과 꽉 찬 어깨가 나이에 비해 다부져 보였고, 세월에 바랬을지언정 끝내는 그것을 이겨낸 흔적이 고집스럽게 남아있는 얼굴이었다. 그의 첫인상이 더욱 강렬했던 것은 다른 어떤 노인들보다도 노골적으로 내뿜고 있던 죽음의 냄새 때문이었다. 되살아난 후 이제껏 마주쳤던 노인들을 고려해서 나름대로 추측을 해보자면, 그 정도 냄새를 풍기기 위해서는 이미 반쯤은 송장이 다 되어 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는 어느 한군데 불편해 보이지 않았고, 다소 거친 인상에서는 나이를 거스르는 정정함마저 느껴졌다. 죽음보다 삶에 기울어진 형색을 하고서도 시체의 냄새를 풍기고 있는 기괴한 노인이었다.
  나는 막다른 골목에서 저승사자를 마주친 것만 같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 내 시한부 영혼이 발각된다면 나는 즉시 재사형再死刑을 언도받을 것이다. 정체가 탄로나 무덤으로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하지만 노인은 뱀 앞의 개구리처럼 굳어있는 나를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노인의 표정에서 뜻밖의 두려움과 초조를 읽었다. 낯빛뿐만 아니라 억눌린 숨소리에서도 공포와 긴장이 묻어나고 있었다.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의 관심이 나를 향하고 있지 않다는 건 분명했다. 노인의 복잡한 심리상태가 순간적으로 나의 냄새를 가린 것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나는 그의 관심이 쏠리기 전에 화장실에서 서둘러 내빼기로 했다.
  나는 혼이 반쯤 나간 채 정신없이 걸음을 옮겼다. 바쁜 걸음의 여행객들이 옆을 휙휙 스쳐 지나갔다. 이따금 노인이 따라오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나는 최면에 걸린 것처럼 두 다리를 쉬지 않고 놀렸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난시가 생긴 것처럼 초점이 흐려졌다. 일시적인 비수면非睡眠 몽유에 빠지기 직전에 찾아오는 증상이었다. 어느새 무의식은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처럼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눈을 부릅뜨며 가까스로 의식의 끈을 붙잡자, 이번에는 불현듯 묘한 데자뷰 현상이 찾아왔다. 뒤늦게 노인의 얼굴에서 어딘지 모를 낯익음이 느껴졌던 것이다. 어쩌면 내가 제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도 그 이상한 기시감 덕분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다시 그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생각할수록 그 노인과 오래 전 어디선가 마주쳤던 것 같았으나 끝내 그가 누구인지 확실히 기억해낼 수는 없었다.

#6
  8시 11분 차였다. 버스는 오래지 않아 D시를 벗어나 고속도로를 달렸다. 도로 옆으로 원숭이 등골 같은 산릉선이 이어져서 달빛이 온전히 들지 못했다. 빗방울이 은근하고 안개가 자욱한, 실로 죽은 자가 살아나기에 모자람 없는 밤이었다.
  밤길을 침묵으로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실내등을 밝힌 것은 내가 약기운에 겨워 졸기 시작했을 때였다. 마이크를 잡은 버스 기사는 15분 간 휴게소에 정차하겠노라고 했다. 약기운에 조금만 더 일찍 취해서 주의력이 바닥나 있었다면, 혹은 버스가 휴게소로 접어들기 전에 잠들어 버리기라도 했다면, 불안한 대로 그 음울한 기행紀行을 온전히 끝마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두려움 탓에 나는 쓸데없이 졸음에 저항하고 있었다.
  실내등이 모든 것의 방아쇠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실내가 밝혀지자 유리창은 거울로 변했다. 바깥 풍경 대신 버스 내부를 비추기 시작한 차창에 웬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의자 머리받침 위로 뒤통수만 살짝 보이던, 맞은편 창가 앞쪽에 앉은 여자였다. 무의식중에 그 이목구비를 살핀 나는 약 때문에 나른해졌던 심신이 화들짝 깨어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분명 J였다. 연인의 얼굴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눈썹에 약간의 경련이 일어났다. 죽음의 끝에서 본 그 얼굴이 반갑고 아득해서 마른 눈으로는 쳐다볼 수 없었다. 버스가 샛길로 빠져 이름 모를 휴게소로 향하는 동안, 몇 번이고 차창을 손으로 비비며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하지만 휴게소에 도착하자 가로등 불빛 때문에 차창에서는 그녀의 얼굴이 지워지고 말았다. 창문이 다시 밖을 비추고 그녀의 얼굴이 신기루처럼 사라졌을 때 나는 비로소 왜 그녀가 지금 이 버스에 타고 있는 것인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그 상황이 곧 나를 맹렬한 의혹의 파도 속으로 몰아넣었다.
  부지를 둘러싼 산 때문에 휴게소는 초입부터 안개가 짙었다. 건물은 환하게 밝혀져 있었지만 인적은 드물었고, 주차장은 거의 비어있었다. 마치 안개 속에서 우연히 다른 세상으로 미끄러진 것 같았다. 차가 멈추자 몇 안 되던 승객들 대부분이 기지개를 켜면서 하차했다. J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나는 잠깐의 망설임 끝에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짙은 안개를 헤치며 그림자가 닿을 거리에서 뒤를 밟는 동안에도 그녀의 뒷모습이 믿어지지 않았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길수록 놀라움과 충격은 점점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내가 J를 처음 만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다. 지난 10년간 S교의 신도들은 더욱 광적으로 변모했고, 아버지는 신앙과 헌금의 불가분성을 강조함으로써 재벌의 권세를 얻었다. 이복 누나들과 계모들이 교단 산하의 계열사 쟁탈전을 벌이면서 대하드라마를 찍는 동안 나는 어찌어찌 법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교단의 입김이 닿는 학교였으므로 교수들은 내게 특별히 신경을 썼고, 나의 자폐적 성격도 생활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계모들은 가끔 모정을 가장하여 내게 관심을 보이기도 했으나, 나를 제 편으로 삼아 서로간의 싸움에 무기로 사용하려는 본심은 잘 숨기지 못했다. 끝내 포섭할 수 없음을 깨닫고 나면 그들은 지우개로도 지워지지 않는 연필자국처럼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교단은 매달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생활비를 보내왔고, 사전 상속의 혐의가 짙은 대규모 증여도 몇 차례나 이루어졌다. 그것이 도태된 왕자에 대한 냉소 섞인 배려였는지 아니면 후계자로 부활시키기 위한 포석이었는지는 분간할 수 없다. 다만 그 돈을 찾아 몽땅 태워버리거나 어딘가에 기부해버리기에는 이미 저항에 대한 피로감이 너무나 깊어진 상태였다. 나는 그 돈을 거리낌 없이 쓰면서, 작게나마 포기와 순응을 꾸짖는 나의 젊은 목소리를 매수했다.
  나는 황폐화된 내면을 잊기 위해서, 그리고 일종의 콤플렉스의 반작용으로서 집요한 독서에 빠져들었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었지만 애초에 사고의 틀 자체가 결정론으로 굳어져 있었던 까닭에 읽으면 읽을수록 모든 것이 허무해졌다. 텍스트는 내 안의 불모지를 오히려 부각시켰고 한줌의 지식으로 콤플렉스를 덮어 보려던 시도 역시 부질없다는 게 확인될 뿐이었다. 고매한 진리도 약간의 틀어진 관측을 거치면 결국 의미 없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았고, 아무리 완벽한 논증도 그 꼭대기에는 더 이상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최초의 정의定議가 있었다. 그 부동점에는 신의 말씀이나 선험적 이성 혹은 배중율排中律 따위가 놓여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모두 궁색한 변명이라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S교의 교리를 태산 같은 진리로 믿고 있는 신도들을 보면, 인간의 손으로 북극성을 매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짐작할 만했다.
  허무에 눌린 나는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1년 만에 자퇴를 했다. 학교뿐만 아니라 S교단으로부터도 멀리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아예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여인숙과 모텔을 전전하며 한 달에 걸쳐 방랑을 하다가 결국 나는 D시의 한 자취방에 자리를 잡았다. 돈은 넉넉했으므로 굳이 거친 곳에 머물 필요는 없었지만, 그러한 자극조차 없다면 나의 존재가 통째로 소멸해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보잘 것 없는 시나 소설 따위를 쓰며 소일했다.
  그해 가을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된 나는 같은 병동에 있던 J를 만났다. 그녀가 희귀병을 앓고 있으며 몇 년 내에 꽃다운 젊음으로 죽음을 마주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난 그동안의 허무와 공허에 대한 동조가 그저 표층적이고 피상적인 것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그제야 비로소 모든 것의 유한함이, 그리고 원하는 것을 손에 쥐지 못하는 무기력의 감정이 가슴에 통렬히 새겨졌다. 그것은 일찍이 논파된 바 있는 회의주의자들의 말장난과 달리 오류가 없는 완벽한 논리로써 머리에 각인되었다.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러한 섬뜩한 증명 뒤에 역설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한 열정의 불길이었다. 나는 허무의 불가역성을 깨달은 동시에 그것과 역행하고자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J는 나의 집안과 교단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한낱 고학력 백수에 불과했던 내게 그녀가 헌신적이었던 것은 이성으로서의 매력보다도 모성애적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아원에서 자란 J는 시간이 지날수록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을 나에게 쏟음으로써 대리만족을 느끼려 했다. 본인의 부모를 알지 못해서였는지 그녀는 나의 가족사에 대해 일체 묻지 않았다. 다만 일생을 외로움 속에서 지낸 까닭에, 자신만의 가족을 간절히 원했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그 가족의 일원이 되기를 바랐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나는 그녀와 결혼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동사무소에서 우리의 혼신신고는 거부되었는데, 뜻밖에도 내가 이미 다른 누군가와 혼인을 한 상태였던 것이다. 이미 형성되어 있는 혼인관계를 해소하지 않는 한 새로운 혼인신고는 중혼重婚이 되는 까닭에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아연실색하면서도 나는 곧 그것이 교단이 개입한 일임을 알아차렸다. 고위급 신도는 때로 정략적인 결혼에 동원되곤 했기 때문이다.
  꿈꾸고 그렸던 신혼의 알뜰한 계획들이 산산이 부서지자 J는 크게 실망했고, 동시에 약간의 배신감을 느꼈다. 그녀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나는 치부를 드러내듯 가족사를 설명해야만 했다. 침울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듣던 그녀는 어떻게든 함께할 방법을 모색해 보자고 했다.
  상대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과거 교단에서 목격했던 유사한 사례들에 미루어 보아도 법으로 다투는 것은 승산이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아버지를 직접 설득해 보자는 소박하고도 유일한 선택지를 골랐다. 그녀에게는 모두 잘 될 거라고 이야기했지만, 아버지가 노쇠에 의한 혼미로 자비를 흘리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서류상으로라도 후계자를 만들어서 교단을 계승시키겠다는 고집스러운 의도가 보였기 때문이다. 따로 알아본 바에 의하면 나와 혼인을 한 것으로 되어 있는 여자는 재벌인 H그룹 회장의 차녀였다. 그녀 역시 나의 얼굴도 모른 채 정략적인 결혼에 동원된 것으로 보였다.
  나는 저항할 수 없는 파도 앞에 항복하기로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엎드려서 빌 생각이었다. 모든 것을 다 바칠 테니 제발 그녀만을 내게 허락해 달라고 매달릴 생각이었다. J를 위해서라면 거짓된 신앙을 품는 것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 아버지를 신으로 인정하고, 광기와 같았던 어머니의 신앙을 이어받은들 문제될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을 뜻대로 행할 테니 다만 동의 없는 혼인만을 무효로 되돌려 달라고,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할 생각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아버지의 환갑연에 참석하기로 했다. 거기서 아버지의 숙원대로 신앙으로써 왕국을 계승하겠노라고 밝히는 동시에 나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킬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대답은 차가웠다. 교단에 귀의하겠다는 나의 제안에 잠시 귀를 기울이는 듯싶었지만, 신도가 아닌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며 단호하게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낸 이유는 그러했지만 그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추측건대 아버지가 가장 우려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H그룹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를 설득하려던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자 J는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서울에서 돌아온 후 나는 그녀를 전혀 만날 수 없었다. 거리가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달아오를 무렵에 병원으로부터 그녀의 죽음이 통보되었다. 나는 극심한 자책을 느꼈다. 그녀의 먼 친척이라면서 등장한 낯선 사람들이 간병과 장례를 도맡아 진행한 까닭에 나는 그녀의 임종을 지키지도, 향을 피우지도 못했다. 나는 그들의 지나친 경계심과 폐쇄성에 약간의 서운함을 느꼈으나 그때까지 이상한 점은 아무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녀의 죽음은 뒤이은 나의 죽음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를 했을 테지만, 나는 그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의도적으로 기억에서 배제했다. 지난 3개월 동안 한층 더 격렬히 내면에 저항했던 것도, 무의식의 가면을 쓴 그 기억들이 한밤중의 노크처럼 나를 찾아오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내 앞을 걷고 있는 J는 누구인가. 항상 입원실 침대에 신세를 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가벼운 산책 이상은 힘겨워 하던 그녀가 어떻게 고속도로 휴게소를 걷고 있는 것일까. 평소의 수수함과는 거리가 먼 진한 화장에 날렵한 가죽옷을 입고 있는 그녀가 정말로 J일까.  
  죽어가고 있는 그녀라면 지나간 곳에 응당 죽음의 냄새가 잔향으로 남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익숙한 향수 냄새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왠지 다른 사람은 똑같은 향수를 쓰더라도 그 향을 내지 못할 것 같았다. J는 죽기 직전까지도 희망의 깃발을 놓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삶의 의지로 발효된 일종의 변형된 죽음의 냄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망상이었고 인지부조화였으며, 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이미 머릿속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의 전말을 그리면서도 의도적으로 그것을 부정하려 했고, 향기를 따라 통째로 달려든 추억이 그러한 시도를 더욱 애잔하게 만들었다. 나는 구토가 나올 것 같아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J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입을 막고 소리 없이 신음을 짜냈다.

#7
  정차시간 15분이 거의 다 지나갈 무렵 나는 버스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은 후 허탈한 표정으로 창밖을 살폈으나 J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출입문이 닫히고 시동이 걸릴 때까지도 그녀가 나타나지 않자 나는 초조해졌다. 설상가상으로 머릿수를 확인할 줄 알았던 기사는 버스에 오른 후 곧바로 운전대를 잡았다. 좌우를 살피는 모양새가 당장이라도 출발할 기세였기에 나는 서둘러 달려 나가 그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그가 뭐라고 대꾸하기 전에 내 손으로 직접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버스 주위를 한 바퀴 빙 돌며 둘러보았지만 안개 때문에 시야가 멀리 닿지 못했다. 기사는 내게 차에 타라고 소리쳤지만 나는 못들은 척 휴대폰을 꺼내 J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J의 목소리는 아득히 멀었다. 마치 관 속에 누워서 전화를 받은 것 같았다. 어딘지 모르게 그 음성이 낯설고 어색해서, 죽은 지 두 달도 안 된 그녀를 거의 10년 만에 접하는 것 같았다.  
  “왜요? 또 무슨 일이에요?”
  이어진 반응에 나는 당황했다. 귀찮다거나 신경질적인 목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재빨리 상황을 파악했다. 직설적이고 꾸밈이 없어서 때로는 냉정하게 들리기도 하는 J의 화법은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해야 옳은 경우가 많았다. 그녀는, 방금 전에 통화를 했는데 무슨 일로 다시 전화를 했냐고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방금 전에 나와,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서울에 있는 나의 분신과 통화를 했을 것이다. 나는 그냥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전화했다고 얼버무리며, 슬쩍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방금 누웠다니까요.”
  무슨 소리냐는 듯 피곤한 목소리였다. 멋쩍은 어조로 적당히 대꾸하자 그녀는 아버지와 이야기를 잘 마무리하라는 응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과 귓불 사이로 찬바람이 밀려들었다.
  신경안정제는 가끔씩 부작용을 일으켰는데, 환각이 보이거나 요란한 꿈을 꾸게 되는 것 등이었다. 버스에서 본 J도 약이 만들어낸 환상일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환상이 아니었다면, J는 거짓말을 한 셈이다. 나는 차라리 환상이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유리창에 맺혔던 J의 얼굴이 또렷했고 뒤쫓으며 맡았던 냄새가 생생했다. 꿈과 현실을 줄타기하며 위태롭게 흔들리던 그 믿음은 결국 나를 뒤쫓아 온 버스 기사의 한마디에 의해서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 여자, 버스 안 탄대요.”
  그 말에 나는 맥이 탁 풀렸다. 환상이라면 다른 사람의 눈에 그녀가 보일 리 없지 않은가. 뒤이어 기사는 얼떨떨한 말투로 화장실 앞에서 그녀를 마주쳤다며, 자기도 설득해 보려 했지만 막무가내로 뿌리치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기사는 일단 출발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짜냈다. 그녀가 환상이 아니었다고 해도 단지 J를 닮은 사람이 우연히 그녀와 같은 향수를 사용했던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그처럼 허름한 가설에 의지해서 그 의문의 여자를 완전히 못 본 척해 버리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마음속에서는 믿고 싶은 것을 믿으려는 욕구와 진실을 파헤치려는 욕구가 서로를 곁눈질하며 양립하고 있었다. 어느 쪽인지 분명히 확인을 하기 위해서는 그녀를 다시 만나 보는 수밖에 없었다. 무의식은 나에게 모든 것을 덮어두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떠나는 게 이로울 거라고 속삭였지만, 이미 실체를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자라나기 시작한 의구심이 그것을 허락지 않았다. 다분히 충동적으로 결심을 굳힌 나는 기사에게 버스를 타지 않겠다고 말했다.  
  기사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다가 그 여자가 누구이기에 그러느냐, 아는 사람이거든 전화로 연락하면 되지 않느냐며 나를 붙잡았다. 하지만 이미 사라진 그녀를 찾을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던 나는 단호했다. 창밖으로 불만스런 표정을 내비치는 승객들과 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발을 구르던 그는 결국 나를 버려두고 버스로 돌아갔다. 낡은 버스는 육중한 몸을 움직이며 신경질적으로 배기가스를 뿜었다. 그것은 먹이를 놓치고 돌아서는 짐승의 단내 나는 입김 같았다.

#8
  화장실 우측에는 커피숍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커피숍 구석에 앉아있는 J를 발견했을 때, 한참 동안 엉뚱한 곳을 헤집고 다닌 나의 수고가 미련스럽게 느껴졌다. 먼발치였지만 J의 얼굴이 분명했다. 불치병에 걸린 젊은 여자가 깊은 밤에 홀로 고속도로 휴게소의 커피숍에 앉아 있는 그 광경은 동네 이발소에 걸린 풍속화처럼 설득력이 없었다. 끊임없이 시계를 매만지며 주위를 살피는 그녀의 초조한 기색에서 간신히 현실성을 부여잡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무표정하게 커피나 마시고 있었다면 나는 또 한 번 그 모든 것이 환상일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약기운이 떨어질수록 나는 불안해졌다. 안정제 본연의 효능이 약화된 탓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불확실한 인지능력을 핑계 삼아 그 여자가 J가 아닐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현실도피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눈에 초점이 돌아오고 머리가 차가워질수록 나는 점점 원치 않는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커피숍의 여자는 J를 닮은 게 아니라, J였다. 당장이라도 다시 J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서 그 여자의 전화벨이 울리는지 확인하고 싶었으나, 현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에 막상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갑자기 그녀의 전화벨이 울렸을 때, 나는 깜짝 놀라서 만지작거리던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누군가로부터 온 전화를 받으며 J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잰 걸음으로 커피숍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뒤를 밟았다. J는 휴게소를 빙 돌아서 건물의 뒤편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은 휴게소가 등지고 있는 야산의 초입이었고, 그 기슭을 따라 철조망이 세워져 있었다. 건물과 철조망 사이의 골목으로 희미하게 새어든 가로등 불빛이 위태로웠다. 어둠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다시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상대방은 오래지 않아서 모습을 나타냈다. 처음엔 잘 보이지 않았으나,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면서 그 얼굴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멀리서도 그 30대 후반의 남자가 구면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예상대로 반가운 얼굴은 아니었다.
  S교단 수석 집사 Y. 공식적인 직함과는 달리 실제적인 직무는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다. 신도들은 대체로 그를 아버지의 오른팔이자 개인 비서로 생각하고 있었다. 조직적으로 로비할 일이 생기거나 법으로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발생하면 종종 그가 나서서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다. 몇 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지만 그의 도드라진 광대뼈와 형형한 눈빛은 여전히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내가 아는 한 J와 Y는 전혀 연결점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시간이고 장소가 장소인 만큼 나는 불길한 예측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왜 하필 아버지 환갑 전날 밤, 상행선 휴게소의 후미진 곳에서 이 둘이 만나야만 하는 걸까.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달래면서 나는 그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갔다. 마침 근처의 식당 뒷문에 커다란 음식물 쓰레기통이 있었으므로 나는 거기에 몸을 숨겼다.
  “……팔자 고쳐 보려다가 참 안타깝게 됐어.”
  Y의 목소리였다.  
  “얘기 다 끝난 거 아니에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약속한 물건이나 보여줘요.”
  J가 대답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톤으로 빠르게 쏘아내는 그 말투가 나에게는 아주 낯설었다. Y는 담배를 꺼냈다. 라이터 불빛에 비춰진 그의 얼굴에 냉소가 가득했다.
  “듣자 하니 본인이 죽을병에 걸렸다고 했다면서? 보통 남자들은 그러면 오히려 부담스러워서 떨어져나갈 텐데, 도련님도 별종이야. 그게 다 계산된 거였다면 당신도 정말 무서운 여자군.”
  나는 몸살에 걸린 것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뼛골을 얼리는 듯한 추위가 엄습했다. J를 따라 버스에서 내려서 뒤를 밟을 때처럼 머리가 어지러워졌고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나는 냄새가 더욱 비위를 자극했다. 눈알이 빠질 것 같았고, 헛구역질에 밀려온 위액 때문에 입이 끈적였다.
  “이제 돈이나 내 놔요.”
  “결혼한 다음에는 도련님을 죽여서 상속받으려고 했나? 그게 안 될 것 같으니까 아쉬운 대로 교단에서 뜯어내려는 거 아니야?”
  “……”
  거기서 J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부정의 제스처가 아니었으며, 가책을 동반한 부끄러움의 표시도 아니었다. 그저 당장의 대꾸가 궁해서 침묵한 것에 불과했다.
 내면에 격동이 일었다. 제일 처음 밀려온 것은 분노였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나. 속삭였던 모든 말들은 다 거짓이었나. 오한 때문에 팔을 움켜쥐고 벌벌 떨면서도, 가슴속은 시뻘겋게 타올랐다.
  J에게서 죽음의 냄새가 나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눈물겨운 삶의 의지에 의해 발효된 죽음의 냄새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에게는 죽음 자체가 예정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황홀하게 느꼈던 향기의 정체는 천박한 합성조미료에 불과했다. 입천장이 말랑말랑한 어린애처럼 나는 그 독한 자극에 오랫동안 중독되어 있었던 것이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 애송이는 이제 우리 교단 후계자가 아니야. 환갑연에 나타나서 한바탕 난리를 피우시겠다고? 그런 걸로 눈이나 깜짝할 줄 알았나?”
  “얘기가 다르잖아. 조용히 사라져 주면 원하는 대로 해 준다면서?”
  “그깟 사진, 인터넷에 뿌릴 거면 마음대로 해.”
  “거짓말 하지 마요. 당신들 두려워하고 있잖아. 내연녀 있다고 밝혀지면 그 결혼도 무사하지 못해. 얼굴도 모르는 정신병자랑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H그룹 회장 딸 설득하는 데 꽤나 애먹었다지?”
  “입 조심해.”
  무너져가는 나를 아랑곳 않고 둘은 날이 시퍼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무방비상태로 그들의 대화에 난도질을 당한 나는 또다시 거대한 족쇄에 매이는 기분이었다. 나는 꿈에서 침식되고 현실에서 마모되어, 끝내는 가루처럼 흩어질 것 같았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면 왜 보자고 한 거야. 갑자기 버스에서 내리라고 한 이유가 뭔데. 당신들이 급하니까 못 가게 막은 거 아냐?”
  이제 J는 거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Y는 담배를 끄고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그가 양복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는가 싶더니, 둘의 거리가 갑자기 좁혀졌다. 다음 순간 어둠 속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전기충격기였다. 배를 움켜진 J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왜긴 왜야.”
  Y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J가 가지고 있던 사진을 주워들었다. 다시 한 차례 주위를 살핀 그는, 사진을 품속에 챙겨 넣은 다음 J를 들쳐 메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나는 음식물 쓰레기통 뒤에 숨어 있었다.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나는 참았던 구토를 쏟았다. 쓰레기통은 휘청거리는 내 몸을 견디지 못하고 요란하게 엎어졌다. 음식물 쓰레기 냄새 때문에 숨쉬기가 힘들었다. 어지러움 속에서도 나는 용케 Y가 미처 수습하지 못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진흙 속에 처박힌 그 사진은 나와 J가 함께 찍힌 것이었다. 병실 침대에 누운 J와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있는 나. 절망의 한복판에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행복을 힘껏 부여잡고 있는 내 얼굴이 참을 수 없어 잠깐 고개를 돌렸다가도, 나는 결국 그 사진이 떨어진 곳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새삼스러운 미련이나 추억 때문이 아니라 단지 스스로의 애처로운 모습을 하늘 아래 방치하기 싫어서였을 것이다. 마지막 힘을 모아 그 사진을 집어든 후에 나는 의식을 잃었다.

#9
  정신을 차렸을 때 처음 보인 것은 쓸데없이 투명하기만 한 밤하늘이었다. 나는 빗물로 질퍽해진 흙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깨어나자마자 삼키기 힘든 분노와 박탈감이 밀려왔지만 그것은 어느새 허탈과 무기력으로 바뀌어 사지를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얼음장 같은 땅바닥이 한없이 나를 빨아들였다.
  J는 어떻게 되었을까. 오간 말들로 미루어 볼 때 그들 사이에 거래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어디론가 끌려가서 입막음을 당하지 않았을까. 3개월 전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이미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의식이 맑아지자 음식물 쓰레기와 토사물이 뒤섞인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고약한 냄새가 나의 처지를 무겁게 함축하고 있었다. 문득 내가 나의 분신을 연민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갑자기 나의 분신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보고 싶어졌다. 아무 것도 모른 채, 결연한 마음으로 다음날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의지를 다지고 있을 그가 보고 싶었다.
  오물 범벅이 된 겉옷을 벗어 버릴 생각으로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가로등 불빛이 미치고 있는 골목 저편으로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어디론가 숨고 싶었지만 팔다리가 따르지 않았다. 그 그림자는 좌우를 살피면서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긴장 속에 눈을 부릅떠 살펴보았으나 Y는 아니었고, J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림자는 멀리서 나를 발견한 듯 주춤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림자는 곧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계속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그가 서로를 식별할 수 있는 거리에 도달했을 때 나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넓은 어깨와 사각턱. 터미널 화장실에서 마주쳤던 바로 그 노인이었다.
  그는 대뜸 눈을 가늘게 뜨더니 나를 자세히 관찰하려는 듯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무릎부터 손끝에 이르기까지 마비된 것처럼 굳어버렸다. 유일하게 자유로웠던 눈동자마저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어지러웠는데, 그 와중에도 나는 그의 옷이 바뀌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노인은 종전의 등산복 대신, 운송회사 상표가 박힌 버스 기사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가 여기에 나타난 이유를 추측할 수 없었다.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인상은 여전했지만, 돌연 나에게 접근하는 까닭 역시 알 길이 없었다.
  노인은 경직된 나를 한참동안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분명 나의 정체를 완전히 파악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차분한 그의 시선에는 어떠한 위협도 섞여있지 않았다. 우연이기 어려운 거듭된 조우와 원인모를 기시감 때문이었을까. 나 역시 꿈에서 들었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정체를 들키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옷 말고도 바뀐 게 있다면 그의 낯빛과 냄새였다. 여전히 표정이 밝은 축은 아니었지만 긴장과 초조가 역력했던 이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미간에 비친 한가닥의 경계심도 단지 갑작스러운 마주침 때문인 듯했으며,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어떠한 압박감에서 해방된 것처럼 희미한 여유가 묻어나고 있었다. 냄새의 변화는 더욱 뚜렷했다. 저승사자를 연상케 했던 강렬한 죽음의 냄새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상당부분 중화되어 비슷한 연령의 평범한 노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수준이 되어 있었다.
  두 가지 변화를 인식하면서 나는 화장실에서 보았던 그의 어두운 표정이 유달리 심했던 죽음의 냄새와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떠오르려는 순간 노인의 고백이 생각을 앞질렀다.
  “나는 죽었다가 되살아났네. 자네도 원래는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 같은데……”
  나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교차되는 눈빛 속에서 그가 어떠한 은유도 사용하지 않았음이 분명히 드러났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확신이 들자 갑자기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무슨 근거에서 나는 이 세상을 나만의 비극을 위한 무대로 단정했던 걸까. 죽음에서 구원을 해 주겠다는 비상식적인 제안을 받고도 별다른 동요 없이 순응했던 것은, 대체 어떤 보상심리의 발현이었을까. 신에게 일말의 자비가 있다면 응당 나의 삶을 한 번쯤 되감아 주는 게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일까.
  관객들이 있다면 나의 유치한 허세를 비웃고 있을 것이다. 대학 시절 흔히 관찰한, 소통의 부재를 목말라하며 스스로의 가슴에 세상의 모든 슬픔을 귀납하고자 했던 여대생이 된 기분이었다. 그들이 비운의 드라마 주인공 행세를 할 때마다 나는 얼마나 노골적으로 경멸의 눈빛을 보냈던가.
  노인은 내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었다. 손을 잡는 순간 전율과 함께 내 몸에서 역한 죽음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제까지 잊고 있던 스스로의 체취가 비슷한 처지의 노인을 만남으로써 객관화되었던 것일까. 나의 냄새는 내가 화장실에서 맡았던 노인의 그것과 비슷했다. 나는 일찍이 노인에게서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나의 표정이 극적으로 바뀌는 과정을 노인은 유심히 지켜보았다. 지식으로 연마된 얼굴은 아니었으나, 날카로운 통찰력이 엿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는 짧은 시간에 일어난 나의 심경변화와 깨달음을 모두 다 관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보아하니 자네는 아직 일을 처리하지 못한 것 같군.”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노인이 이미 그 의무에서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가 분신을 죽인 것은 나와 화장실에서 마주친 이후의 어느 시점이었을 것이다. 지독했던 죽음의 냄새가 사라진 것은 그가 온전히 되살아났다는 증거였다. 편안해진 안색과 여유로운 목소리 역시 그 출처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운전기사 차림으로 후미진 건물 뒤편을 거닐게 된 경위는 여전히 가늠할 수 없었다.
  나의 의문스러운 표정을 읽었는지 노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고속버스 운전사는 원래 노인의 직업이었다. 그는 나보다 몇 개월 앞서서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음주 상태로 중앙선을 넘어 돌진한 트럭 때문이었다. 그는 환생을 제의받았을 때 망설였다. 그의 과실은 아니었지만 목숨을 잃은 버스 승객들에게 죄책감을 느꼈던 탓이다. 끝내 목숨을 수락한 것은 그에게 남다른 자기애가 있어서가 아니고, 세상에 남겨둔 마흔 줄의 외아들 때문이었다.
  소아마비를 앓던 아들은 합병증으로 혈액투석에 의존하고 있었고, 약값 또한 만만치 않았다. 회사는 그런 노인을 배려해서 정년이 훌쩍 넘도록 그를 고용하고 있었다. 담담하게 말하는 노인과 달리 나는 가슴이 먹먹했다.
  “자네와 처음 마주쳤을 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지만, 너무 불안하고 초조해서 신경을 쓸 수 없었네. 내 분신이 용변칸에 앉아 있었거든. 자네가 화장실에서 도망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의 목을 졸랐네. 가지고 온 여행 가방에 시체를 담아서 버스 화물칸에 넣었지.”
  커다란 가방을 끌고 있던 그의 모습이 기억났다. 화장실에서 분신의 목을 조를 생각을 한 그의 대범함이 놀라웠고, 그것이 남의 일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 나의 처지가 새삼 막막하게 느껴졌다.  
  “9시에 서울행 스케줄이 있었네. 화물칸에 시체를 실은 채로 고속도로를 탔어. 휴게소가 마침 인적이 드물고 야산까지 끼고 있어서, 여기에 시체를 묻으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네. 오늘 묻을 수는 없지만 일하다 보면 자주 지나는 곳이니 언제든 기회가 있겠지. 그래서 장소나 물색해 두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참이네. 그런데 자네를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그렇게 말하는 노인의 얼굴에 어지러운 기색이 없지는 않았으나 살인을 저지른 사람치고는 매우 침착한 편이었다. 삶을 되찾아야 할 정당화사유가 있었기에, 혹은 살인의 대상이 완벽한 타인은 아니었기에 죄책감이 무겁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노인은 나의 자초지종을 물었다. 터미널 화장실에서 마주쳤던 젊은이가 오물을 뒤집어쓴 채 휴게소의 후미진 곳에 쓰러져 있으니 호기심이 동했을 것이다. 나는 서울행 버스를 탄 목적과 중간에 내리게 된 경위를 노인에게 간략히 설명했다. 버스에 빈 좌석이 있거든 서울까지 신세를 져도 되겠느냐는 나의 부탁에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겉옷을 버리고 얼굴을 씻어낸 나는 노인이 몰고 온 버스에 올랐다. 승객은 거의 없었다. 휴게소를 빠져나갈 때, 버스는 신음소리를 냈다. 마치 꿈에서 깨어날 때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10
  서울에 도착하자 승객들은 바퀴벌레처럼 흩어져 종적을 감추었다.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회사에 보고할 서류를 작성한 후에, 노인은 빈 버스를 차고지로 몰았다. 밤거리를 달리면서 노인은 나의 살인을 돕고 싶다고 했다.
  인적 없는 차고지에는 차갑게 식은 버스들이 시체처럼 안치되어 있었다. 공모자가 된 우리는 그곳에 버스를 세운 후 택시로 한참을 달렸다. 목적지는 다음날 아버지의 환갑연이 열릴 예정인 도심의 한 호텔이었다. 나의 분신은 그곳에 묵고 있었다.  
  빌딩 숲 너머로 호텔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심장이 뛰었다. 금색으로 빛나는 그 호텔은 마치 미라를 감싸고 있는 이집트의 관 같았다. 우리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따로따로 건물에 들어갔다. 나의 얼굴과 신분증을 확인한 지배인은 약간 갸우뚱하면서도 선선히 여분의 카드키를 내주었다.  
  “신장이라는 거, 일단 사람이 죽으면 꺼내 써도 제 구실 못하겠지?”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인이 불쑥 물었다. 나로서는 영문을 모를 소리였다. 내 표정을 읽은 그가 멋쩍은 듯이 손을 저었다.
  “자네 분신에게서 신장을 하나 꺼내 아들놈한테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아 농담을 한 건데 자네가 좀 불쾌했을 수도 있겠군. 미안하네.”
  문득 터미널 화장실에 붙어있던 장기매매 스티커가 떠올랐다. 나와 마주쳤을 때 먼 곳을 쳐다보는 것 같았던 노인의 시선은 혹시 거기에 머물러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스스로에 의해서 장기마저 강탈당하고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할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쓴웃음과 함께 시큰한 연민이 일었다. 그래도 시체보다는 마땅히 살아있는 사람의 온전함을 먼저 헤아려야 했기에,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노인에게 신장을 내어주고 싶었다. 다만 사체의 신장은 이식이 불가능하며, 설령 살아있는 상태에서 적출한다 해도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만 한다는 점이 문제였다. 뒷골목을 뒤지면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해 줄 브로커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양심의 가책은 둘째 치고 턱없이 모자란 시간 때문에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노인 역시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어색한 미소로 쓸쓸함을 감추는 그가 처량해 보였다.
  카드키가 스치자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14층에 위치한 그 방에 들어서자마자 낯설지 않은 죽음의 냄새가 풍겨왔다. 도시에 희석되어 간신히 유리창을 넘어온 달빛이 희미하게 침대를 비추고 있었다. 숨 막히는 고요 속에 어둠을 떠돌던 먼지만이 때때로 연보라색 야광에 반짝일 뿐이었다. 그 먼지 아래에 짓눌린 듯 나의 분신은 잠들어 있었다. 내일 오전의 환갑연에 참석하기 위해서 약기운을 빌려 불면증을 달랬을 것이다.
  나는 화장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다가 침대에 누운 분신의 얼굴을 관찰했다. 둘은 같았고 또 달랐다. 그는 평소보다 야위어 있었다. 턱에는 드문드문 수염이 돋아 있었고 갈라진 입술은 속살이 보일 듯했다. 푹 꺼진 눈두덩에는 솟았다가 마르기를 반복한 눈물이 하얀 자국을 이루고 있었다. 아마도 지난 몇 주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뜨겁고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머리맡에 놓인 쓰다 만 편지가 눈에 띄었다. 그가 쓴 것은 곧 내가 쓴 것이었으므로 굳이 들춰보지 않아도 그 내용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쓴 굴욕적인 항복 문서였다. 저주스러운 나의 내면은 광신과 결핍으로 뒤틀린 유년기의 기억들로 조형된 것이었으므로, 아버지에게 굴복하고 교단으로 귀의한다는 것은 곧 내 손으로 무의식의 하굿둑을 허물어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결국 미치지 않으려던 끈질긴 노력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광기의 늪으로 던져 넣겠다는 선언이었다. 하지만 그 편지를 쓰면서 종이가 눈물로 얼룩지고 한 글자 한 글자가 살에 새기듯 아팠던 것은, 좌절된 저항에 대한 미련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내 항복이 받아들여질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이 가슴 아팠던 것이다. 단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절박하게 매달리고 있을 뿐 끝내는 J에게 실망을 안기게 될 터였기 때문이다.
 끝까지 그녀에게 이용당한 것을 모른 채 헛된 가슴앓이만 했으니 어떻게 보면 미련한 신파극이었지만, 이미 깊게 고여 버린 눈물의 출처를 따지는 것도 무상한 일이었다. 나는 더 이상 자책하고 싶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그를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 혼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창가에 앉아서 아주 오랫동안 분신을 지켜보았다. 밤이 깊어져서 도시의 불빛도 저물어갈 무렵, 그는 작은 소리로 신음을 하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단절된 꿈속의 신음소리였다. 그 신음소리는 조용하게 그리고 낮게 시작되어 조금씩 격렬해졌다. 새벽이 밝아오면 그는 외마디 신음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날 터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닫힌 눈꺼풀 아래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분신의 모습이 또한 안타까워서, 눈물은 더욱 굵어졌다. 나는 내가 불쌍해서 그리고 내 분신이 불쌍해서 울었다.
  꿈속을 헤매고 있는 또 다른 나를 한껏 비웃어 주겠다던 최초의 마음가짐과는 달리 나는 그를 조소하지 못했고 밀어내지 못했으며 오히려 연민을 하게 되었다. 그를 죽여야 한다는 결론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죽이는 이유는 달라졌다. 이제 저항이나 쿠데타 따위는 내게 의미가 없었다. 또 다른 나, 무의식 속의 나, 꿈속의 나, 몽유하고 있는 나, 유년시절의 나…… 그 모든 나와 화해하고 싶었다.
  신음이 잦아드는가 싶더니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마치 잠에서 깬 것처럼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노인이 깜짝 놀라 다가왔지만 나는 그를 진정시켰다. 꿈을 꾸고 깨어날 때에는 반드시 신음을 했으므로, 신음을 하지 않은 이상 그는 잠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몽유를 시작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서 다시 침대에 눕혔다. 그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으나 반쯤 열린 눈은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축축하고 초점 없는 그 눈빛을 마주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내 손이 목을 감싸자 그는 수긍하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11
  나는 아버지의 환갑연에 참석하지 않았고, 편지 역시 전하지 않았다. 그 후로 전기장판 깔린 자취방 침대 속에서 담배를 피우며 연말을 보냈던 것 같다. 뜻하지 않은 두 번째 삶의 방향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 한동안 고민을 하다가, 나는 우선 가정법원에 혼인무효 확인소송을 제기했다.
  시체를 모두 처리한 후에 노인과 나는 한 달 정도 연락을 끊고 지냈다. 서로 새로운 세상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노인은 계속해서 버스를 운전했고, 나는 D시의 작은 보습학원에 강사로 취직을 했다. 교단으로부터 받은 돈은 모두 찾아서 기부한 후 계좌를 폐기해 버렸다. 교단과의 연락은 완전히 끊어버렸고, 더 이상 시나 소설을 쓰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난 후 나는 서울행 고속버스 표를 끊었다. 미리 알아본 바대로 기사는 그 노인이었다. 평일 오전이었으므로 승객은 거의 없었다. 노인은 나를 보고 말없이 눈인사를 건넸다. 버스가 서울에 도착한 후에 나는 노인과 함께 버스에서 내렸다. 터미널 구석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나는 그에게 신장을 기증하고 싶다고 했다. 대기 순서를 뛰어넘어 제3자로부터 기증을 받는 것도 절차가 다소 복잡할 뿐 불가능한 건 아니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노인은 내 손을 붙잡고 말없이 한참을 울었다.
  수술실에 누워 마취를 했을 때 나는 꿈을 꾸었다. 뱃속에서 검붉은 덩어리가 빠져나오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벌거벗은 채 웅크리고 있는 내 모습이었다. 그것은 곧 잠에서 깨어나 몽유를 하듯 어디론가 걸어가 버렸다. 20년 넘게 내게 달라붙어 있었던 또 다른 나의 파편은 그렇게 나를 떠나갔다. 떨어뜨리려고 발버둥 칠 때에는 꼼짝하지 않던 그 신음의 결정체는, 끌어안고 화해를 구하자 비로소 멀어지기 시작했다. 묵은 고름을 짜낸 듯했지만 미운정이 든 벗과 영영 이별을 하는 것 같아서 묘한 아쉬움이 일기도 했다. 이별에 대한 그 예감이 들어맞았는지, 마취에서 깨어난 이후에 나는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았고 몽유를 하지도 않았다.  
  시체를 매장하던 때가 기억에 남는다. 노인은 본인의 계획대로 휴게소 근처에 매장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지만 나는 그곳에 다시 발을 들이기가 싫었다. 결국 우리는 D시 근교의 야산에 시체를 묻기로 했다. 우리의 시체는 가방 속에 태아처럼 웅크린 채로 굳어 있었다. 어두운 밤에 랜턴 불빛에 의지해 시체를 암매장하면서도, 왠지 그들을 편안한 자궁 속으로 되돌려 보내는 듯해서 무섭다거나 으스스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체를 모두 파묻고 나서는 삽에 기댄 채 막 떠오르기 시작한 새벽별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던 것 같다.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찾아 주머니를 뒤졌더니 뜻밖에도 거기서 J와 찍은 사진이 나왔다. 휴게소 뒤편에서 주운 그 사진이었다. 나는 잠시 그 사진을 바라보다가, 입고 있던 양복 안주머니에서 호텔에서 가져온 편지를 꺼냈다. 사진은 진흙으로, 편지는 눈물로 구겨져 있었다. 나는 그 둘을 포개서 불을 붙인 다음 삽으로 다진 땅 위에 올려놓았다. 따로 향을 사르지 않아도 봉분 없는 무덤은 그 이상의 제의가 필요치 않을 것 같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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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작 안내 2016년 4분기 우수작 및 2016년 최우수작 2017.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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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작 다수파 - 이나경 2016.11.30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후보작 심사평2 2016.11.01
선정작 안내 2016년 3분기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6.09.30
우수작 스마트폰은 이제 우리 몸의 일부나 다름없습니다 201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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