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마감 직전에 올라오는 글의 수는 줄었지만 글 전체의 분량은 늘어난 한 달이었습니다. 꾸준히 글을 올려 주시는 분들의 발전과 변화가 눈에 띄기도 하고, 새롭게 나타나신 분들의 글을 읽으며 새로운 바람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원고지 150장 분량의 상한 때문인지 요즘 자주 간발의 차이로 150매가 되지 않는 글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분량의 글들 중에는 꼭 그 분량이 되어야 할 정도의 내러티브를 포함하지 않은 경우도 상당해 안타까움을 느끼곤 합니다. 분량 제한을 둔 이유는 단편으로서의 압축성과 완결성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단순히 분량 제한에 들어가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이라면 분량 제한을 둔 의미가 퇴색됩니다. 장편과 단편의 차이점에 대해 생각하시고 단편의 장점과 매력을 충분히 살려낸 글을 쓰려는 노력을 계속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4월 16일부터 5월 15일 자정까지 올라온 총 26편의 글중 심사대상이 된 글은 19편이었습니다. 84호는 독자 우수단편 우수작이 없이 가작을 두 편 선정했습니다. 노 새 님의 ‘이중 공생’, 빈군 님의 ‘Hotel California’ 2편입니다. 두 분 모두 축하드립니다.
심사대상에서 제외된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분량 미달  
Affable Blague(친절한 헛소리) (은세준, 원고지 42매), 나마스테지(먼지비, 원고지 13매), Glass of Wall of Limbo(湛燐, 원고지 20매), 지옥에서 온 사자(은세준, 원고지 28매), 부인(초삭, 원고지 38매)
2) 타 사이트 수상작 : 책 읽는 남자( DOSKHARAAS, 문장 4월 우수작)


악몽 : 장마

A : 기이한 악몽이 현실로 나타날 것 같다는 전조가 등장하고 실재 그것이 벌어질 것을 암시하는 결말이라는 전형적이고도 모범적인 구조를 따라간 글입니다. 전형적인 구조를 사용하면 그만큼 안전한 반면 사건을 가지고 전형성을 탈피해야하는 부담을 안게 되지요. 그러나 아쉽게도 이 글에 드러나는 사건에는 전형성을 벗어날만한 독특함도 주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악몽에는 주인공이나 독자들이 악몽으로 인식할만한 심리적인 요소가 담겨야 타당합니다. 그러나 주인공의 악몽은 죽는다는 단순한 사실적 공포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래서 악몽이 던져주어야 할 심리적인 공포나 긴장감이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B : 글 초반에서는 지연과 그 애인인 친구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룹니다. 무기력하게 생활하면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나’를 비웃듯이 자신만만한 친구에 대한 불만 속에는 꿈꾼 삶을 살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불만이 녹아있는 듯 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현실과 타협해 ‘사회인’이 되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가 했습니다만 후반부로 가면서 친구의 이야기는 자취를 감추고 프로그램 출연을 희망하는 기이한 아이와 그 어머니의 수상한 행동으로 초점이 옮겨갑니다. 공포를 조장하는 행동이 실은 꿈이었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한 번 비틀리더니 그 꿈은 다시 현실로 나타나죠. 이번이야말로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중심이 살아날 클라이막스로 향해 가나 싶었지만 글은 돌연 멎어 버립니다.
글의 초반과 후반은 친구의 죽음과 아이의 힘 사이에 무리한 연결 고리를 하나 만들어 두었을 뿐 개연성도 연관성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서술자의 감정에 밀착한 서술은 때로 다른 사람의 직설적인 감정 표현을 보는 것처럼 불편할 정도로 생생합니다만, 이야기 서술이 산만하고 중심이 살아나지 못하면서 오히려 글의 중심을 더욱 흐리는 요소로만 작용하고 말았습니다. 작가가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쓴 글이 아니라 손 가는 대로 감정을 서술한 듯 느슨한 구조는 아무리 묘사력이 치밀하더라도 만회하기 힘든 치명적 단점이 될 수 있습니다.


마트 : 장마

A : 카트에서 일어난 기괴한 사건을 다루지만, 주제를 찾기 힘든 글입니다. 사건의 인과관계와 주인공의 심리 등 글 전체를 아우르는 탄탄한 전개가 없어서 아쉽습니다.

B : ‘악몽’ 과 마찬가지로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흐릿하고 오직 여과없이 드러나는 ‘나’의 감정만이 생생할 뿐입니다. 마트에서 일어난 기이한 상황은 매력적일 수 있는 소재였습니다만 글 전체에 녹아들지 못하고 글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나’를 동거녀에게서 분리시키는 역할만 하고 있네요. 전작과 마찬가지로 글 전체적으로 공통되게 느껴지는 것은 대학을 나오고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교양을 갖추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여성들에 대한 적대심 정도입니다. 마트에서의 사건으로 ‘정신적 히스테리’를 일으키게 되었다는 ‘나’의 이후 행적조차도 강렬한 감정에 삼켜져 버리는군요. 화자에 동조하는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감정적으로 동조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 지도요.

명수의 꿈 : 장마

A : 많은 글에서 이미 사용된 일장춘몽이라는 모티브를 사용하였으나 새로운 주제나 인상적인 사건이 보이지 않으며 구성이 두서가 없고 산만합니다.

B : 이상할 정도로 잘 풀려가는 인생이 어느 순간 ‘꿈’이었더라는 건 낡은 소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낡은 소재를 생생하게 살려낼 수 있으려면 그 글만의 독특한 장점이 필요하지만 이 글에서는 전작 두 편에서 느껴졌던 정밀한 감정 묘사력조차 보이지 않아서 단순한 습작을 보는 것 같네요. ’선가드가 5관문을 지난다’는 반복되는 소재에서 작가가 무엇을 의도하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긴 잠 : 청빙

A : 기면증을 가진 남자와 이상한 사건이 배치되면서 전개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그러나 사건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며 현실적인 긴장감이 떨어지는 점이 흠입니다. 지나치게 손쉬운 면회과정 등은 너무 손쉬워서 현실감이 적어 보입니다. 특히 주인공이 인터넷 검색 결과와 오빠의 기면증을 연결하는 것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매일같이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 중 왜 특별히 그 사건들이 오빠와 관련이 있다고 여겼는지 어떤 설명도 없습니다. 논리적인 당위성이 적은 것이 이 글이 지닌 매우 큰 흠으로 보입니다.

B : 인터넷에서 날짜를 검색하면 과연 어느 정도 많은 사건이 검색이 될까요. 당일이 아니라 그 사건이 일어난지 며칠 뒤에야 신문 보도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정작 그 사건은 인터넷에서 당일에는 알 수 없을 수도 있고, 그 날에 오직 하나의 사건만이 인터넷의 중심 사건인 경우도 많지는 않습니다. 오빠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많은 살인사건이 오빠가 잠든 날에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내는 데 이렇게 간단하고 손쉽게 해답이 주어질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오빠’의 성격은 1인칭 시점의 타자라는 점을 고려하고라도 성격적으로 잘 잡히지 않고, 사건과 인물의 개성들도 전반적으로 흐릿합니다. 후반부의 ‘오빠’가 돌변한 후에 내뱉는 대사는 20대 청년의 대사라고는 도무지 느껴지지 않네요. 여자 피의자가 혼자 있는 구치소에 남자 경찰 혼자서 지키고 있다는 상황 등 현실과 맞지 않는 설정이 글 전체의 개연성을 떨어뜨립니다.  법적인 근거와 규정 등 여러 가지 확인해 보아야 할 사실을 작가 편의 위주로 해석하여 써낸 글은 작위적이고 개연성이 부족해 질 수 밖에요.  

Ghost of You : 빈군

A : 기 작가는 하나의 작품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합니다. 항상 하고 싶은 말이 넘쳐나서 한 편의 글이 담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버립니다. 그런 경우 대개는 글이 장황하고 두서가 없어지기 마련입니다. 이 글의 가장 큰 단점도 바로 그것입니다.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를 명확히 하고 그것을 장황하지 않게 전달하면 어떨까 합니다. 반면 흔히 우리가 많이 받게 되는 행운의 편지에 담긴 내용을 소재로 하여 진실의 행방을 찾아가는 방식은 흥미롭습니다. 반박과 반박을 이어가면서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사변을 드러내는 점도 인상이 깊었습니다.

B : 행운의 편지를 소재로 하면서 두 번 글이 크게 방향을 선회합니다. 반전의 반전으로 이어지는 격이죠. 인물과 대사 없이 편지글이라는 형식만으로 독자를 끌어가는 힘은 탁월합니다만 자칫 그런 단순함이 글의 긴장감을 떨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가 글을 마지막까지 읽어 과연 진실은 어느 쪽인지 독자가 생각하게 하는 필력은 상당한 수준이네요. 다양하게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면서 글을 많이 쓰고 계신 작가분의 저력이겠습니다.
다만 전작에서도 다수 발견되는 부분입니다만 단편이라는 짧은 분량 안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소재를 지나치게 많이 담으려고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되네요. 글 안에서 소소하게 나타나는 소재들은 흥미롭습니다만 독자가 생각할 여지가 너무 많다보니 글의 중심이 흐트러질 여지도 있어 보입니다.
‘진짜 행운의 편지’라는 소재를 통해 진짜를 잃은 세상을 이야기하는 이 글에서는 글의 내용을 부정하는 주석과 그 주석을 부정하는 주석을 연이어 서술하는 방식으로 진실의 본질과 믿음에 대해서 묻고 있습니다. 깊이 있는 주제입니다만 글에 다양한 사건들이 언급되다보니 자칫 글 전체가 단순한 말장난처럼 느껴질 가능성도 있어 보이는 게 아쉽네요.

로커 램 브로드캐스팅 : 현서

A : 사건을 전개하고 주제를 드러내기엔 너무 짧은 분량입니다. 구성 역시 치밀하지 못해서 이렇게 쓰고 싶다고 구상을 한 글인 인상을 받았습니다. ‘로커 램 중후군’이라는, 작가가 고안한 발상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인 것으로 보입니다만 걸맞은 구성이 밑받침되지 않는다면 쓸모없는 단순한 소재로 남게 되지 않을까요?

B : 원고지 100장을 넘긴 분량이니 단편으로서 짧다고는 할 수 없는 분량입니다만 이 글에서 담고자 하는 내용은 그릇 안에 담기지 못하고 넘쳐납니다. 제대로 무언가 일부분이라도 분명하게 글의 중심을 잡아 준다면 다행이겠습니다만 아쉽게도 ‘로커 램 증후군’ 이라는 병을 바탕으로 방송 멘트, 타자로부터의 명령 등이 다양하게 배치된 글에서는 혼란스러움만 남았습니다.
사변적인 서술만으로 글을 끌고 가는 솜씨는 인정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글에서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인지가 보이지 않네요. 밴드에 대한 환상을 깨부수는 것을 통해서 작가가 독자에게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는 길 잃은 양처럼 헤매고만 있습니다. 소재는 독특하지만 글의 소재를 완전히 작가가 내면화해서 압축시키는 데는 아직 부족하네요. 글은 소재만으로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안개 속 해당화 : 해나

A : 연인을 잃어버린 젊은이와 언젠가 비슷한 사건을 겪은 늙은이를 병렬로 배치하여 무엇을 드러내고자 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연인상실을 매개로 하여 젊은이와 늙은이가 지니는 다른 관점과 감정을 드러내서 대비하고자 한 의도는 읽히나 특히 늙은이의 감정이나 심리묘사에 깊이가 적습니다. 늙은이의 회한은 독자에게 마음의 울림을 전달하기보다 오히려 늙은이의 회한은 이러이러할 것이라는 전형적인 고정관념에 머물고 맙니다. 그러한 회한을 깊이 있게 표현하려면 작가의 직간접 경험이나 연륜 등이 풍부해야겠지요. 소설이라기보다 심상적 스케치에 머문 추상적인 글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끌고 가는 차분한 어조와 글의 행간에서 느껴지는 감수성이 앞으로 발전할 많은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B : 애인의 실종. 애인의 기묘한 말 한마디. 몽환적인 서술로 작가는 안개가 자욱한 산길을 오르는 인물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중반에서 안개속에 등장한 노인은 신비로운 이미지까지 느껴지지요. 그러나 노인을 화자로 하여 서술되는 이중 구조로 넘어가면서 ‘나’와 ‘노인’의 목소리는 차이점을 갖지 못하고 마치 동일인의 현재와 미래처럼 느껴지기까지 하죠. 작가가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해서 묘사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불분명합니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연장자의 심리를 묘사하는 것은 힘들다고들 합니다만, 이 글에서는 특히 ‘노인’의 감수성이 전형적이고 평면적이어서 작가가 이 인물을 만들면서 어느 정도 고민을 했을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특히 노인이 청년에게 마음과 반대되는 말을 하는 부분은 서술이 비약적이어서 의아함까지 드네요.
부드러운 문체와 감수성이 녹아드는 몽환적인 서술을 바탕으로 작가분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글을 언젠가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마이 리틀 클레버 주니어 : 바보마녀

A : 이 글의 특징은 동화적 형식의 차용입니다. 흔한 판타지와 형식적인 면에서 차별화를 꾀하였으나 탄탄한 구성이 뒷받침되지 않아서 다른 글과 사소한 차이를 낳았을 뿐입니다. 동화적인 형식은 글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야기가 더 유치해 보이는 역효과를 낳은 점이 아쉽습니다.

B : 10살이 되면 모두 더 자라지 않고 성장을 멈추는 우주의 이야기는 흥미로워 보입니다. 사람은 135cm 이상은 자랄 수 없어, 라는 대사에서 이 글이 어떤 이야기로 흘러갈지 기대감이 생기죠.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것은 열 살박이 어린아이의 난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난동 속에서 무언가 되새겨야 할 주제가 보이지도 않습니다. 클레버 주니어를 제압하고자 나타난 클레버의 어이없는 패배 이후 글은 삼천포로 치달아 버리네요. 완벽한 성인들의 세상은 완벽이라고 부를 여지가 조금도 없어 보이는 것도 문제입니다.  

상쾌한 아침 : 최쓸

A : 현실와 과거의 유사한 사건이 뒤엉켜서 독자의 이해를 어렵게 합니다. 이 글은 추리나 서스펜스 소설 범주에 속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곳곳에서 독자에게 트릭을 쓰기 위한 작가가 고군분투한 흔적이 보이지만, 그러한 트릭이 ‘모호함’이라는 것이 큰 흠입니다. 즉, 작가가 고의적으로 설명을 모호하게 흐리거나 비약해 버린 곳이 많이 눈에 띕니다. 추리나 서스펜스 소설의 트릭은 ‘모호함’이 아니라 명확한 단서를 제공하고 그러한 단서를 연결하며 추론하는 과정에서 ‘논리적 오류’를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의도적이었건 그렇지 않았든 간에 사건 진행의 논리적 흐름을 명확히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덕분에 숨겼던 반전 역시 힘을 잃은 것은 아닐까요?

B :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해 왔던 여동생을 생각하면서 아버지를 증오하고 있는 ‘나’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유령을 볼 수 있다는 소년이 등장하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여동생이 ‘나’에게 말을 전하려고 한다는 상황이 연출됩니다. 아버지의 죽음의 비밀과 엉켜 주인공의 비밀이 어렴풋이 윤곽을 드러낼 때까지 원고지 140매에 가까운 긴 분량의 내용이 전개되는데 정작 정답을 주고 싶지 않았던 탓인지 이야기가 명확하게 잡히질 못합니다. 경찰인 ‘나’를 둘러싸고 이야기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건들이 함께 서술되는데, 정작 등장 인물들의 성격은 평면적인데다가 몰개성적입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을 통해 주인공의 감정에 밀착해 서술하다 보니 독자에게 추리의 여지는 더더욱 부족해지고 말았네요.

☆★☆★본격 에로물★☆★☆ : 김정훈

A : 성적 행위에 초점을 맞춘 전형적인 글로서 구성이 짜임새 없고 산만합니다.

B : 과다하게 노출된 성적 묘사와 감정의 발산, 즉시적이고 여과되지 않은 감각의 표출 외에 이 글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없네요. 원고지 150장에 걸쳐서 서술된 글 전체가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빈약합니다.

달로 가는 티켓 : 이터너티

A :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가 소재인, 전형적인 이야기 구성입니다. 이러한 소재를 다룰 때 중요한 주인공들의 심리도 섬세하고 호소력 있게 다뤄지지 못한 느낌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떠나는 화해여행이 우주여행이라는 발상만이 무의미한 독특함으로 남을 뿐입니다.

B : 달로 가는 여행이라는 소재가 글 전체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죽음을 눈앞에 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화해라는 장면이 꼭 달을 소재로 했어야 했는지 의문입니다. ‘그가 입은 알로하 티셔츠가 오늘따라 그의 허세를 더욱 배가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같은 영어식 문장이나 ‘눈에 띄고 시대에 도태되는 것들이 먹잇감이 되지. 늘 그래’ 같은 실생활에서 쓰이지 않을 것 같은 어색한 대화 때문에 글 전체에 몰입하기 힘드네요. 항암치료, 죽음, 그 앞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꿈을 이루어주고 싶다는 아들의 절실함이 달 여행으로 연결되었습니다만, 아버지와 화해하는 장면에서 극적으로 감정적 고조가 이루어진다거나 부드럽고 서정적인 문장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거나 하는 매력이 나타나질 않다보니 글 전체가 밋밋해지고 말았습니다. 글의 스토리를 배치하는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 감정의 고조를 일으키고 어떤 식으로 사건에 조명을 줄 것인가도 작가의 역량입니다.

고흐와 함께한 시간 : J씨

A : 주인공들의 입을 빌어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글로 보입니다. 주인공이나 사건 전개보다 오로지 하고 싶은 말에만 집중해서 줄거리가 없는 인형극을 보는 느낌입니다.

B : 묘사가 치밀해서 이미지가 선명한 것이 글의 장점입니다만, 인물의 개성이나 특성은 잘 드러나지 않았네요. 고흐의 그림 제목과 그 그림의 이미지가 글 전체에서 큰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만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인물과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대사가 글의 매력을 반감시킵니다.
클라이막스도 사건도 없이 나열된 이야기 안에서 주인공들의 대사는 사변적이고 감성을 자극할 의도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감정에 호소할 정도의 매력은 없습니다. 인물의 개성과 특성이 뒷받침될 때 인물의 대사가 힘을 발휘하겠죠. 신비한 이미지의 여성과 만나 꿈처럼 지나간 사랑 이야기는 사람들이 한 번쯤은 꿈꿀 로맨틱한 환상이긴 합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식상하기 쉽죠. 생생하게 인물을 살리고 두 사람의 감정에 독자가 수긍할 수 있을 정도의 사건이나 감정적 교류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글은 문학소년소녀가 한 번쯤 써낸 습작에 그치고 맙니다.

황금으로 된 별을 발견한 사람 : 먼지비

A : 재미있는 이야기로 구성될 여지가 많은 글이었으나 사건의 흐름이 지나치게 단순하고 클라이맥스가 없어서 깔끔하지만 밋밋해져 버린 글로 보입니다. 기 작가의 글에 대해 일전에도 지적한 적이 있듯이 글에 리듬감을 부여하는 연습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황금으로 된 별을 발견했지만 황금이 아무런 가치가 없어져 버리는 과정 등 경제적인 소재는 흥미로웠습니다.

B : 감정적 묘사가 사라지면서 작가는 사변적인 서술에 집중하는 듯 보입니다. 전작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건조한 문체에는 감정적인 표현을 억제하는 서술이 오히려 어울립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때문인지 상당히 문체와 분위기에서 안정적인 느낌이 드네요. 황금으로 된 별을 발견한다고 하는 환상적인 모티브가 현실적인 경제 문제와 얽히는 발상이 흥미롭습니다만, 기승전결의 변화가 밋밋하여 소재가 제대로 살아나지 못해 아쉽습니다. 점점 발전하시고 계신 만큼 고민하시는 대로 좋은 성과가 나타나리라 보입니다.

넷북 : 1군

A : 주인공이 경험하는 기묘하고도 포르노그라피적인(?) 사건의 매개는 넷북입니다. 그러나 넷북이 사건의 매개가 되는 단서가 명확하지 않아서 발단-전개와 절정-결말 부분이 각기 따로 노는 느낌입니다. 넷북이라는 소재를 충분히 활용했으면 어땠을까 합니다.

B : 정체 불명의 가게에서 넷북을 구입하고 하드 속의 동영상을 보다가 강간 사건에 휘말리게되는 이야기는 스토리 전개가 빠르고 긴장감이 있습니다. 다만 주인공이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다는 부분에서 ‘학교’라는 이야기가 등장하긴 하지만 대학교라고 생각해 버릴 정도로 주인공의 행동 소비 패턴은 고등학생으로는 보이지 않네요. 고교생이 체크카드라고는 하지만 몇십만원짜리 물건을 한 순간에 구매하는 것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넷북 속의 동영상을 열어보고 강간 장면을 실행해보겠다고 공원으로 나서는 주인공의 행동은 무모하고 설득력이 없습니다. 마치 인형처럼 범인들의 명령대로 행동하는 것도 어색하죠. 마지막의 결말 부분은 뉴스 형식을 빌어 사건의 결말을 요약하고 있습니다만, 사건의 마무리를 능숙하게 하지 못하는 작가들이 손쉽게 객관적인 시선인 듯이 결과를 해석할 방법으로 쉽게 사용하는 방법임을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어느 정도 글의 군더더기를 줄이고 ‘내’가 몰락하는 상황에 밀착해 묘사하신 후에 여운을 두고 종결하는 건 어땠을까요.

즉흥 환상 : 1G

A : 식상한 판타지물로 시작해서 SF로 끝내는 구조로 반전하면서 다른 이야기와 차별을 꾀한 흔적이 보이나 무의미해 보입니다. 이야기의 독특성은 “구조”가 아니라 “구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B : 원고지 127매에 걸쳐 써야 할 정도의 내용이었을까요. 뻔하디 뻔한 전형적 판타지를 겨우 읽고 넘어갔더니 실은 판타지가 아니라 SF 이야기였어요 하고 결론을 내립니다. 반전으로 의도하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회로가 고장 나서 횡설수설하는 로봇도, 투명 드래곤의 클리세도, 기사와 공주의 이야기도, 전형성 아니 진부함에서 별로 벗어나 있지 않네요. 무엇을 말하고자 하고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하는지, 글쓰기의 근본 중에서도 근본인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면 어떨지요.

장화 신은 메리 : 별난

A : 신선하고 새로운 글은 아니지만 솔직하고 따뜻한 글입니다. 진지하고 상냥한 고양이를 재미있게 그려냈고, 작가의 진솔함 그리고 글에 대한 몰입도가 느껴집니다.

B : 고양이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인간 세상을 그린 글은 많습니다. 고양이를 특히 좋아하는 일본 소설이나 애니메이션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소재입니다. 그러나 어른스러운 고양이가 지켜내려고 하는 메리의 순진무구함과 메리의 새아버지의 품성이 따뜻하네요. 작가가 글을 쓰면서 즐거웠을거라는 느낌이 글 전체에 배어 있습니다. 새아버지가 악당인 듯이 보이더니 실은 그렇지 않더라는 반전은 반전으로서는 다소 약한 느낌입니다만, 이런 따뜻한 이야기에는 그 정도의 반전도 나쁘지 않겠네요.

잉여 인간 : 김진영

A : 잉여인간이라는 소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자한 욕구는 읽히나 조금 무리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잉여인간이라는 소재에 담긴 사회철학적인 깊이는 만만히 풀어낼만한 무게가 아니지요. 손창섭의 <잉여인간>이 사회의 시대상과 맞물린 잉여인간을 어떤 식으로 그려내고 표현하는지 참고하고 어떻게 재해석해 낼지 고민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일 것 같습니다.

B : 20대의 방황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글인데도 20대의 방황의 모습이 제대로 잡히지 않습니다. 잉여라는 말이 갑자기 유행하고 있는 요즈음에 잉여인간이라는 말에서 받아들이는 느낌은, 손창섭의 <잉여인간>과 비교하면 상당한 거리가 있겠죠. 작가분이 20대를 아직 경험하지 않으신 때문인지 대화도 행동도 그 나이의 것과는 상당히 달라 보여 글의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드네요. 간접 경험을 포함해서 사람 자체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이해의 깊이가 깊어진다면 같은 이야기를 쓰더라도 훨씬 깊이 있는 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중 공생 : 노 새  

A : 개미와 주홍날개꽃매미가 공생하는 대가로 주인공에게 작곡을 해주는 소재가 매우 독특했습니다. 소재에 비해서 특별한 주제가 담기지 않았고, 이야기의 구조가 단순하고 평면적이어서 표절사건이 반전으로 느껴지지 않는 점이 큰 흠입니다. 지나치게 이야기 진행을 단순화해 버린 결과겠지요. 독특한 소재를 살려서 그에 걸맞은 소소한 재미를 담았더라면 훨씬 더 이야기가 입체적이고 흥미롭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스토리텔링으로 끌까지 독자를 붙드는 흡입력이 있습니다.

B :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외래 곤충의 피해를 생각하면서 시사성 있는 글로 읽었습니다. 전작들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소재로 잡아내는 솜씨가 탁월합니다. 인간에겐 해충인 주홍날개꽃매미의 분비물이 개미가 좋아하는 먹이가 된다는 설정도 재미있고, 중심 소재가 되는 벌레가 작곡을 돕는다는 설정도 좋군요. 벌레들이 오선지 위에 악보를 그리는 방법도 독특했습니다.
창조적이고 인기도 있는 곡을 써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창작의 벽에 부딪혀 있는 작곡가가 진지한 자세가 아닌 벌레의 도움에 기대 히트를 노린다는 요행수가 좌절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겠습니다만, 그 귀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그려낼 수는 없었을지 아쉬움이 남네요. 생생함이 살아있는 소소한 에피소드와 함께 글 전체의 기승전개를 강조할 수 있는 사건의 흐름이 더 포함되었다면 글이 더욱 매력적으로 살아났을 것 같습니다.

84호 독자 우수단편 가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Hotel California : 빈군

A : 노래 가사를 소재로 풍부한 이야기를 끌어낸 글입니다. 망자들의 세계인 호텔과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 아내를 찾으러 간 남편은 오르페우스가 등장하는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도 보입니다. 유령들만이 머무는, 지도에도 없는 호텔의 쓸쓸함과 스산함이 잘 전달되었습니다. 다만 유령들을 글로써 구원하는 행위와 아내를 찾는 사건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느슨합니다. 유령들을 정화해주는 사건이 크게 부각되어서 주요하게 다루어져야 마땅할 아내의 비중이 오히려 줄어든 느낌입니다. 이야기의 시작이 아내와의 사이에서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심적 과제라면 이야기도 그것을 해소하는 과정이 보다 더 중요하고도 섬세하게 다루어져야 하지 않았을까요?

B : ‘호텔 캘리포니아’라는 팝송에 헌정하는 곡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야기의 기본 배경이나 설정이 해당 곡에 많이 의존하고 있습니다. ‘1969년 이래로 술은 팔고 있지 않아‘라는 가사를 떠올리는 설정 등 곡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웃음을 머금어가며 읽을 수 있겠죠. 유령이 떠도는 호텔의 분위기도 적절하게 잘 살아났네요. 단지 사건 서술에 있어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경중을 가려 배치할 수 있으면 글의 매력이 더욱 더 살아나지 않을까요.
다른 작품에도 나타난 문제입니다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어느 정도의 깊이와 내용을 가지고 배치해야 효과적일지 생각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유령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서 유령들을 해방시키는 ‘나’의 행동은 상징적이고 인상적입니다만, 그가 그 행동을 왜 선택했는지는 다소 모호하네요. 글 안에 많은 것을 담고자 한다면 중요한 것과 장식적인 것을 적절히 배치시켜 하나로 아우를 필요가 있겠습니다.

84호 독자 우수단편 가작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거울 독자우수 단편에 선정되신 분들께는 책을 한 권씩 보내 드립니다. Itpimento @ paran.com (첫글자는 소문자 L입니다)으로 우편물 수령할 주소, 성함, 전화번호(택배 발송시 필요)를 보내 주세요.

댓글 1
  • No Profile
    노 새 10.05.29 09:34 댓글 수정 삭제
    미흡한 부분에 대한 훌륭하신 지적들
    깊이 새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분류 제목 날짜
선정작 안내 거울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5.07.01
선정작 안내 거울 독자우수단편 선정1 2015.06.01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5.06.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 2015.04.30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3 2015.04.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1 2015.02.28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5.02.28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1 2015.01.3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4.12.31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4.12.3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5 2014.12.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4.11.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4.10.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5 2014.09.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 2014.07.31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4.07.3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4.07.01
선정작 안내 선정작이 없습니다. 2014.06.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2 2014.06.01
선정작 안내 독자우수단편 선정3 2014.04.30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 13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