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8월의 날씨는 글쓰기에 좋은 날씨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이번 달은 일부 작품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수준이 높아 읽으면서 무척 즐거웠습니다. 작품 수 자체는 전달에 비해서 다소 줄었으나 질적으로 우수한 작품이 많아 풍족한 느낌이었습니다. 매달 우수작과 가작을 선정하는 데 고민을 많이 합니다만, 이번 달은 특히, 작품 하나하나 개성이 풍부한 글들이 많아 선정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 달은 가작 한 편과 함께 우수작으로 두 작품을 뽑았습니다. 판타지라는 장르의 개성을 십분 활용하여 장르 독자들에게 재미있게 읽힐 수 있는 글이 한 편, 사회 현실을 인터넷 카페라는 현실적 소재를 활용하여 희화적으로 그려낸 글이 한 편입니다. 후자는 장르 소설로 보기 어렵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만 거울에서는 장르의 범위를 폭넓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보기에 우수작으로 뽑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어느 작품을 우위에 놓을 수 없어 고민했음을 밝혀 둡니다.
이번 달의 심사 제외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분량의 측정은 아래한글 프로그램의 기본 여백으로, 문단 구분은 분량에서 제외하여 계산하였을 때 A4 5장 이하의 작품입니다.
1) 분량 미달  
        김현우 환자 : 뫼비우스  
        비오는 밤에 칵테일 한 잔 하실래요? : 균
        전형적인_로봇_이야기 : 큰스님
        이혼송사 : clancy
        잉여의 입맞춤 : dcdc
        김진사댁 셋째딸 : 균
        죽음은 비와 함께 찾아온다 : 균
        비가 내리는 날 : k.kun
2) 심사 제외 명시 - 새로운 하늘 4차판 : 니그라토




프로그램 - 뫼비우스

A: ‘인간으로서 살아온 당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 것인가.’라는 묵직한 화두를 로봇이라는 소재를 통해 풀어나간 글입니다. 평범하고 발랄한 여고생의 일상은 삼촌에 의해 로봇임을 알게 되는 순간 붕괴됩니다. 주제가 무거웠던 만큼 조금 더 깊은 사변을 전개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인간이라는 정체성이 무너지고 로봇임을 깨닫는 순간 일상은 파괴되고, 살아온 역사는 거짓이 되어버리지요. 그 때의 느끼는 허탈감, 존재의 부정, 두려움이 너무 간결하고 단조롭게 묘사되었습니다. 전반부에서 진행되는 인간으로서의 일상이 너무나 일상적입니다. 로봇임을 모르기에 일상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것이 당연하지만, 주인공이 그 일상을 몹시 사랑하고 집착하는 느낌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으로 남고 싶을 만큼 소중한 일상이 설득력 있게 그려졌다면, 사람이고 싶다는 절규가 훨씬 더 강렬하게 와 닿지 않았을까요. 주제가 감정 혹은 심리와 밀접한 만큼 심리적 흐름에 훨씬 더 집중하고 깊이 있게 파내려갔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B: 자신이 인간인 줄 아는 로봇의 관점으로 글을 전개하다가 마지막에 자신도 로봇이었다는 결말을 내는 단편은 그다지 새롭지 않습니다. 글의 플롯이나 전반적인 전개 방식 역시도 평이합니다. 전체적으로 많은 고민 없이 쉽게 쓴 느낌이 강하게 드는 글입니다. 이미 많은 글에서 다루어졌던 아이디어나 설정으로 글을 쓸 때는 자신만의 재해석이 포함되거나 혹은 독특한 전개방식이 들어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주제에 대한 깊은 성찰을 느낄 수 있어야 독자들에게 무언가를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대화나 서술에 말줄임표가 자주 사용되면서 글의 긴장이 떨어지고,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라는 수영의 심리나 행동은 초등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지막 부분의 수영의 절규가 전체적으로 녹아들지 못하고 붕 뜨는 느낌입니다.
마지막의 삼촌의 대사에서 “이제 인간은 지구위에 얼마 남지 않았어. 아예 없다고 말해야 겠지.”(띄어쓰기는 작품에 실린 대로) 라는 문장이 나타납니다만, 글 전체에서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던 설정이 돌연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면서, 이것이 반전인지, 혹은 글의 연속성이 깨어지는 추가 설정인지 알 수 없어집니다. 반전이라고 보기엔 임팩트가 적고, 글의 전체에서 줄곧 의도한 설정이라면 제시가 지나치게 갑작스럽습니다.





지구적 양식업자 - 니그라토

A: 인류에 대한 고민을 유광철이라는 한 남자의 일생에 담은 글입니다. 종교와 유물론, 비도덕과 양심 등의 풍랑을 헤쳐나간 남자는 지구의 생명권에 대한 결론에 이릅니다. 인류가 우주로 떠나서 지구를 비움으로서 지구가 인류의 영향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결론이죠. 작가는 이상적인 사회 ‘모모지세’(모든 사람들이 모든 사람을 지켜주는 사회)에 대한 고민을 이 작품에서도 계속 이어갑니다. 전작들에서도 그랬듯이 인류에 대한 증오와 애정, 희망과 절망이 교차로 오가면서 작가의 혼란스러운 고민을 드러냅니다. 온건하고 선량한 사회를 건설했지만, 인류가 지구를 잠식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유광철의 결론은 변함이 없습니다. 결말에서 드러난 이 모순은 아직도 인간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헤매는 작가 자신의 모순이기도 합니다. 글을 통해 표출되는 고민들이 갈수록 깊어지는 만큼, 모순이 해결되어 혼란스럽지 않고 정립된 주제가 담긴 글이 곧 나오겠지요. 자주 쓰시는 어색한 수동태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B: 전체적으로 글의 플롯이 많이 안정되어 기 작가의 단점이 많이 극복된 글이라고 하겠습니다. 글 전개를 대사에 의존하는 점도 많이 줄어들었으며 인물도 전작에 비해서는 개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기승전결이 균형 있게 배치되면서 적절한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전개도 좋습니다. 결말 부분이 다소 늘어지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군요.
구원자로서의 캐릭터 이인혜가 실은 입양 가정 출신이라는 것은 글 전체로 보았을 때 불필요한 설정입니다. 우수하기 때문에 입양되었다는 이인혜는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결혼을 선택하면서도 모성애와 부성애에 집착하면서 사회적인 성공을 동시에 거머쥐는 인물로, 주인공인 유광철에 비해서 작위적으로 보입니다.
전반적인 사건의 전개가 지나치게 유광철을 신격화 시키고 있다는 점은 둘째로 치더라도, 유물론자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이 글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생명윤리적 문제들이 어떻게 독자에게 받아들여질지는 생각할 여지가 있습니다. 힌두교와 기독교 등 기존 종교에 대한 몰이해와 비판이, 유물론자인 주인공 유광철의 관점과 작가의 주장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유물론자를 자칭하는 과학 만능주의자를 위한 자위적인 소설로 읽힐 가능성도 있습니다.
작가분이 계속 글쓰기에 대해서 깊이 숙고하고 계신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글에서 노력의 결과가 나타나고 있어 매번 기대하는 마음으로 새 글을 읽고 있습니다. 다음 작품도 더 나은 작품을 보여 주시길 기다리겠습니다.




드래곤이 쏘아올린 작은 공 : 들개

A: 소재가 아주 재미있는 글이었습니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의 설정을 살짝 바꾸어서 드래곤이 철거민이 된 상황을 재미있게 풀어내었습니다. 시장에게서 철거 통보를 받은 드래곤이라는 설정과 개성 있는 캐릭터 등 판타지 장르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을 잘 사용한 글이지요. 그렇지만 친구를 만난 뒤에 드래곤이 순순히 이사를 하는 바람에 조금 밋밋한 이야기가 된 것 같습니다. 난쏘공이 도시 빈민층의 삶과 애환을 다루었듯이 철거민 신세가 된 드래곤의 삶과 애환이 더 많이 재미있게 보여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또한 드래곤과 필로의 할아버지가 ‘색’을 이용해서 나누는 대화부분은 독자에게 너무 비약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B: 이 글의 가장 큰 장점은 유쾌한 전개방식과 인물 설정입니다. 드래곤이 인간에게 살 곳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재미있는 상황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빗댄 제목을 붙여 경쾌하게 전개하고 있습니다. 문장이 비교적 탄탄하고 아마투스트라와 고트윙 등의 등장인물이 개성을 가지고 있어서 독자가 즐겁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다만 글의 분량에 비해서 갈등과 사건이 부족해, 글을 읽고 나서는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지금의 글대로 단일한 사건으로 유지하려면 군더더기 부분을 과감히 덜어낼 필요가 있으리라고 보입니다. 다양한 인물들을 그대로 등장시키고자 한다면 인물 사이의 갈등 구조 혹은 사건을 조금 더 구체화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흰 숲에서 얼음 계곡으로 떠나는 계기가 되는 노인과 드래곤의 대화는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겠지만 다소 추상적입니다.





(미)확인 비행물체 : 조나단

A: SF를 시도하는 많은 창작가가 쉽게 알려진 소재를 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경우 너무 식상하거나 구태의연한 글이 될 우려가 많습니다. 신문을 매개로 해서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점은 흥미롭지만 아쉽게도 이 글에서 택한 웜홀 역시 너무 많이 알려지고 사용된 소재입니다. 소재가 신선하지 않은 만큼, 보다 새로운 해석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B: UFO의 실체가 실은 이런 것이었다는 설정 자체는 새롭다고는 할 수 없고, 웜홀 이동의 설정도 그렇게 신선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UFO의 실체를 알고도 이용하려는 신문사의 대처, 그 때문에 한 인물이 UFO에 대해서 냉소적인 시선을 갖게 되는 점 등이 현실 비판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글의 전반과 후반이 양분되면서 ‘현재’와 ‘미래’의 이야기가 되는데, 그 둘을 이어주는 것은 UFO의 정체(E.R 수송기) 하나뿐이어서 결합이 다소 느슨해 보입니다. 글의 중심을 전반에 두었는지 후반에 두었는지 혹은 양쪽 모두를 대등하게 전개하려고 했는지는 작가의 의도에 따르는 것이겠습니다만, 만약 글의 중심이 전반에 있고 후반을 반전으로서 제시한 것이라면 후반을 압축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글의 중심이 후반에 있다면 그 반대가 되겠지요. 양쪽 모두의 이야기를 하시려고 했다면, 두 부분의 관련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지 고민해 보실 필요가 있겠습니다.





모럴 헤저드 - yzombie

A: 모럴 해저드. 도덕적 해이. 모든 인류는 전멸하다시피 했고, 오로지 혼자 생존하기도 급급한 상황 속에 세 사람이 놓입니다. 혼자 생존해 나가야 하는 소년, 버려진 소년을 돌볼 정도의 도덕성은 아직 있는 사휘, 생존을 위해 소년을 죽여서 먹는 남자. 소년을 중심으로 사휘와 남자는 각기 다른 도덕적 해이를 가집니다. 사휘는 소년을 동정하긴 했지만 버려두었고, 남자는 소년을 식량으로 삼지요. 두 사람은 서로가 가진 도덕적 해이를 각기 다른 가치관으로 비난합니다.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 소년을 버려둔 사휘와 식인이라는 금기를 저지른 남자 중 누가 더 도덕적으로 해이한가 하는 문제는 하인쯔의 딜레마처럼 독자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집니다. 극한 상황을 배경으로 무거운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를 잘 풀어나갔고, 흡입력도 강한 글입니다. 그러나 작가가 도덕성과 결부하고자 한 ‘신’의 존재가 계속적으로 언급됨에도 불구하고 글의 주제에 잘 녹아들지 않아서 아쉽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목도하고 있는 신이야말로 가장 도덕적으로 해이하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살짝 읽히긴 하는데……충분히 표현이 되지 않아서 확신할 수가 없군요.


B: 세기말적인 상황과 그 세계의 인물을 탄탄한 묘사와 서술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템포 자체는 단편보다는 장편에 가까울 수도 있어 보입니다. 종교의 문제로 생겨난 종말적인 상황 하에서 인간이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 상황 자체는 흔히 다루어지는 소재로 자칫 진부할 수 있습니다만, 문장이 탄탄하고 인물의 심리 묘사가 치밀해 완성도 있는 글이 되었습니다.
소년과의 만남과 그 이후 결말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며 끌어가는 힘이 돋보입니다. 1인칭에 가까울 3인칭 주인공 시점이 인물에 밀착해서 독자의 몰입도를 높이기 때문이겠지요. 다만 결말 부분의 사휘의 행동과 대사는 다소 갑작스럽습니다. 인간성을 잃어가는 세계에서 남자가 소년을 죽인 행위와 사휘가 남자가 죽인 행위의 차이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합니다. 두 ‘살인’의 차이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파고들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세기말적인 상황의 원인이 된 종교 문제와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계속 주변을 맴돌기만 하고 본질을 파고 들지는 못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직전에 살인을 하고, 그 시체 옆에서도 공복 때문에 통조림을 따는 결말 장면은 소년을 떠올리는 소재와 어우러져 인상적입니다.





방구석, 버려진 검은 색 과속딱지들 - vino

A: 죽은 사람이 자신이 사라진 뒤에 남은 현실을 되짚어 가는 글입니다. 작가는 ‘누군가 있었던 세상과 없을 세상이 어떻게 다른가요?’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 현실 속을 헤맵니다. 주인공은 과속 때문에 죽었습니다. 글 속에서의 과속은 누군가로부터 주목과 관심을 받기 위해 저지르는, ‘일상의 평온을 파괴하는 행위’로 규정됩니다. 일탈 행위를 통해서라도 간절하게 누군가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하고 사랑을 갈구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기 때문입니다. 타인이 있어야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주인공의 죽음은 ‘타인에게서 잊히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도 타인의 세계(이승)을 잊으며 진정한 죽음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주인공의 감정 속에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고민을 담아 진지하게 풀어나 나간 글이지만, 주인공의 감정 묘사에 그쳐서 단조로워진 것이 아쉽습니다.


B: 죽은 자가 화장될 때까지를 죽은 자의 시선으로 그립니다. 시를 연상시키는 정제되고 탄탄한 문장이 모호하게 현상을 그려내어, 사건 자체와 독자의 거리를 떨어뜨리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죽은 자 자신의 기억이 흐려진다는 설정 하에서 죽은 자 주변을 냉정하게 그려내는, 망각과 죽음과 허무를 그려내기에 적합한 문장입니다.
그러나 글 전체에서 대화가 극단적으로 적은데다가 1인칭 서술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 자칫 글을 단조롭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분위기와 느낌은 생생하게 살아났지만 글 속의 사건은 적고 말하고자 하는 바도 선명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아쉬움을 가지고 있는 글이긴 하지만 죽음과 그 이후의 짧은 시간 하의 간단한 사건을 이렇게 형상화 해 낸 문장력에는 박수를 보냅니다. 작가분의 신작을 기대하겠습니다.





죽음, 환상 - 가리새

A: 주인공은 미정의 죽음을 도와준 뒤 감옥에 갇혀서 과거를 회상합니다. 주인공은 누구나 죽음에 대한 환상이 있으며 죽는 방식의 자유를 꿈꾼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미정의 죽음을 도와준 행위는 타인의 절망을 공감한 행위인 동시에 죽는 자유를 지켜준 숭고한 행위입니다. 여기서 죽는 방식의 자유는 죽음에 대한 환상의 실현이자 욕망의 충족이지요. 그러나 미정의 죽음을 도와주는 행위가 죽음에 대한 환상과 오롯이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병, 삶의 절망 등 죽을 ‘이유’는 등장하지만 미정이 지니는 죽음에 대한 환상이 충분히 보이지 않아 아쉽습니다. 죽음에 대한 환상을 충족할 권리가 죽을 자유로 이어진다는 것을 주제로 두었다면, 주인공의 동정이나 공감보다 미정이 지닌 죽음에 대한 환상이 더 비중 있게 다뤄져야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B: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들어간 사람이 과거를 회상합니다. 이 인물의 행위는 실상 살인에 가깝습니다만, 자신은 죽고 싶어 한 사람을 도와 준 것이라고 믿습니다. 심리 묘사도 서술도 비교적 안정되어 있고 사건의 기승전결도 분명합니다. 1인칭의 서술로 극도로 감상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주인공에게 밀착해 글을 끌어가면서, 독자까지 우울하게 만들 정도의 서술이 돋보입니다.
다만, 이 글에서 작가가 과연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가 의문입니다. 글 전체가 죽음에 대한 환상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동경’ 자체에 동조하지 않는 독자에게는 접근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한 번쯤 죽고 싶다는 생각에 철저하게 빠져 본 사람이라면 이 글을 읽으면서 주인공이나 ‘그녀’의 생각에 동조하면서 글에 몰입하게 되겠지요. 글 속 인물의 행위에 독자가 어느 정도 공감하느냐는 독자의 개인적인 경험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며, 그에 따라서 이 글의 평가 역시 양분되리라 여겨집니다. 계속 죽음을 동경했던 ‘그녀’가 자살이 아닌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죽음을 원하면서 주인공에게 도움을 청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주인공의 고뇌는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만 미정의 고뇌는 그에 비해 다소 가볍게 다루어 진 것이 아쉽습니다.





헤카테 여신은 세 번 웃는다 - Mothman

A: 재미와 상상력이 가득한 연작, 시간 보호군이 이번에는 물질을 넘어서는 새로운 형태로의 진화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거대한 폭발 사고에 휘말린 파충류 외계인 연구원은 정신형태의 모습으로 탈바꿈합니다. 육체에 집착하며 지구인들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육체를 강탈하지만, 유전인자와 뇌에 저장된 기억 때문에 만만치 않습니다. 시간한계 등의 문제로 본의 아니게 전염병처럼 인류를 학살하던 연구원은 시간 보호군을 만나게 되고, 결과적으로 궁극적인 진화를 이루게 되지요. 돈과 명예 등 물질에 대한 집착을 육체에 집착하는 연구원의 모습을 사용해서 재미있게 풀어간 것 같습니다. 발상 역시 독특하고 신선합니다. 자칫하면 어렵고 무거워질 수 있는 주제를 담백하고 재미있게 다룬 글입니다. 다만 문장이 매끄럽게 계속 발전했으면 합니다.


B: 사고로 정신생명체가 되어 버린 세 인물의 사건을 중심으로, 그 사고를 표면적으로밖에 볼 수 없는 바깥 세계의 사건을 액자로 하는 소설입니다. 중심 사건에서 실제 일어난 ‘정신생명체’의 결말을 모르는 액자상의 헤레티네 연구주임의 열변이 아이러니한 재미를 줍니다. ‘정신생명체’라는 소재는 작가분이 전작 ‘디에프의 어둠’에서도 다루셨던 내용이군요. 이 글에서 새로 등장한, 서로 다른 인격은 융합될 수 없다거나, 기억이 유전정보를 포함하고 있어서 다른 유기체에는 적응할 수 없다거나 하는 설정상의 재미가 돋보입니다.
제목에서 나타난 헤카테 여신은 세 얼굴을 가진 그리스의 여신으로, 여신의 세 얼굴을 정신생명체 셋의 다른 결말과 결부시키고 있는 듯합니다. 다만 세 정신 생명체의 사건이 다소 늘어지면서 글 전체가 산만한 느낌이 들고 말았습니다. 한 문장을 한 단락으로 처리하는 서술 방식은 작가분이 선택하실 부분입니다만, 글의 연속성을 떨어뜨릴 위험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편으로 담기에는 세 정신 생명체의 결말은 다소 과중해 보입니다. 액자 부분의 필요 없는 서술을 과감하게 생략해서 글을 압축하거나, 혹은 각 정신생명체의 사건에 더 살을 붙여서 중편 이상의 글로 만들어 보시는 것은 어떨지요.





클리오 여신은 모두를 지배한다 - Mothman

A: 역시 연작으로 시간보호군의 이야기입니다. 이번에는 과거의 문명에 열광하는 미래 인류가 소재입니다. 문명이 완전히 소멸된 인류에게 누군가 과거에 찬란했던 문명 역사를 보여주고 제공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를 풀어간 글입니다. 1인칭을 사용해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없고, 창조는 미래로의 도약이 아니라 과거의 재발견에 지나지 않는 비애를 서정적으로 잘 표한 것 같습니다. 인물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 보호군에는 개성 있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역시 주인공은 ‘특출한 외모와 초인적인 육체를 가진, 인간형 병기’ 제라드 대령이겠지요. 조금씩 제라드 대령의 매력이 드러나면서 부각되는 것 같군요.


B:  역사의 여신 클리오의 이름을 제목에 두고, 시간보호군이 표면 위에 나타난 세계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는 소설입니다. 시간보호군은 기 작가의 세계관에서 계속 등장하는 설정이고 기존 캐릭터들도 등장해서 줄곧 읽어오던 사람으로서 즐거웠습니다만, 하나의 독립된 단편으로 본다면 이야기 전체에서 제라드 대령의 등장은 갑작스럽지 않았을까요. 주인공이 소년 시절에 만난 인물이 변함없는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라는 것만으로는 의미하는 바가 모호해질 수 있겠습니다.
역사의 흐름을 보호하려고 하는 시간보호군이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역사기록물’은 역사 자체라기보다는 매스미디어의 힘으로도 읽힙니다. 역사 속 과거에 대한 추억에 사로 잡혀 있는 인물은 권력이 장악한 매스미디어의 노예가 된 대중을 보는 것 같습니다. 기 작가의 전작에 비해서 진지한 접근이 돋보입니다만, 위트와 재미는 다소 떨어집니다. 한 문장을 단락으로 처리하는 문체는 경쾌하고 발랄하던 전작에서는 효과적일 수 있지만 진중한 이야기를 다루기에는 다소 방만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나가 둘이다 - dcdc

A: 이 글은 각기 ‘하나’라는 장남장녀를 둔 두 부모가 재혼을 해서 새로운 가정을 꾸렸을 때 발생하는 문제를 ‘하나’라는 이름의 중의성을 가지고 풀어나가면서 시작됩니다. 같은 이름 때문에 자기가 하나라고 우기는 두 아이의 싸움은 부모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 벌이는 투쟁입니다. 그러나 허탈하게도 부모에게는 다시 두 사람만의 ‘진짜’ 하나가 생기게 되고, 이 지점에서 글은 방향을 전환 합니다. 이제 ‘하나’라는 이름은 첫 번째가 되고 싶은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으로 변합니다. 하나라고 주장하는 존재는 너무나 많고, 하나가 되고 싶은 욕망은 진정한 하나가 되는 통합을 가로막는 이기적인 장애물로 변합니다. ‘하나’라는 말에 담긴 수많은 의미에 대한 고민, 가족에서 시작해서 사회 전체로 번져나가는 괴물 같은 근원적 욕망에 대한 고찰엔 깊은 주제의식이 담겼습니다. 극적이고 강렬한 결말도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주제와 고민들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주제가 명확히 하나로 통합되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가족 형태 속에서 ‘하나’는 부모와 자식 간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심리적 이유(離乳), 자식에게 존재성을 부여하는 부모의 역할 등 다각도로 해석됩니다. 전반부에서 이러한 복잡한 의미를 넓게 풀어내었기 때문에 글이 결말을 앞두고 너무 갑작스럽게 한 가지 주제로만 전환하는 느낌입니다. 조급히 서두르는 바람에 결말이 너무 급하게 느껴지는 점 역시 아쉬움 중 하나입니다.


B: ‘하나’라는 이름에서 시작해서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끌어간 것에 감탄을 표합니다. 동음이의어, 중의법 등을 적절히 활용해서 글을 끌어간 솜씨가 글을 맛깔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는 쓰기 힘들, 작가분의 장점이 확실하게 잘 살아난 글이었습니다.
재혼가정의 문제, 학교의 왕따 문제, 개인의 아이덴티티 문제 등 무게감 있는 소재와 주제를 초등학생의 눈으로 서술하면서도, 사실성을 잃지 않고 현실감 있게 그려낸 점은 단연 압도적입니다. 주인공인 하나와 다른 하나, 동생 두나, 학급 친구인 동훈, 어머니와 아버지 등의 인물의 개성이 잘 살아나 있는 것도 장점입니다. 밉살스럽게 그려지는 유하나의 대사나 초등학교 친구들의 대사도 많이 숙고한 흔적이 엿보입니다.
단지 전작에서도 그러했습니다만 작가분이 단편 하나에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 하시는 나머지 글의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호해지는 것이 아쉽습니다. 새엄마의 임신이라는 새로운 갈등 국면이 맞게 되는 결말은 독자에 따라서는 취향이 갈릴 듯합니다. 매번 읽는 재미를 주시는 작가분이니만큼, 다음 작품도 기대하겠습니다.

75호 독자 우수단편 가작에 선정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토크쇼 - 한켈

A: 판타지 장르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상상력을 아주 잘 사용한 글입니다. <무릎팍 도사>를 연상시키는 판타지 세계에서의 토크쇼와 그 세계에서만 초대할 수 있는 게스트, 마찬가지로 그 세계에서만 가능한 시청자들의 반응이 신선하고 재미있었습니다. 무시무시한 게스트의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토크쇼 중간에 발생하는 반전도 잘 이끌어내었습니다. 토크쇼라는 설정, 게스트, 시청자의 반응 등 세 가지를 균형 있게 잘 맞춰서 깔끔하게 마무리한 글입니다.


B: 대화 위주로 경쾌하게 진행하면서 낯설지 않은 판타지 설정을 충분히 녹여낸 솜씨에 감탄을 표합니다. 대화 위주로 전개되는 소설의 경우에 자칫 잘못하면 서술로 표현해야 할 것까지 인물의 대사로만 처리하면서 독자가 동감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은 토크쇼라는 장면에서 인물들이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게 해, 독자가 오히려 이 글에 등장하는 시청자처럼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인물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의심의 군주, 검은 구름, 공포의 군주, 마법사 등은 평범하다고도 할 수 있는 설정이지만 그것이 토크쇼라는 현대적인 소재와 결합되면서 독특한 개성을 낳았습니다. 간결하고 쉽게 읽히며 군더더기가 없이 글을 풀어내는 솜씨가 돋보입니다. 다만 루퍼스 모하임의 최후는 글에서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을 부분인데, 그 부분까지도 대화에 의존해서 글의 전개가 다소 완만해져 버린 점이 아쉽습니다. 보다 입체감 있는 글을 위해서 이 부분의 서술을 조금 더 보강해서 클라이막스를 효과적으로 만들어 보시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입니다.

75호 독자 우수단편 우수작에 선정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이런 변이 있나 - clancy

A: 똥이라는 소재로 주제를 풀어나간, 이색적이고도 유쾌한 글입니다. 취업 재수생으로서 실패감에 주눅이 든 나는 완벽한 똥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그 똥은 사회에서 쓸모가 없는 존재로만 여겨지는 나 자신의 투영인지도 모릅니다. 완벽한 똥에 집착한 나는 같은 사람들이 모인 카페에 가입하게 되어 완벽한 똥 사진으로 엄청난 스타가 되어 존재감을 얻지만, 경쟁자의 등장으로 점점 잊힌 존재가 되어갑니다. 보다 완벽한 똥을 향한 노력, 그것은 내 자신의 건강과 생활태도의 변화로 돌아오고 결국 사회에서 자리를 잡는 큰 원동력이 됩니다. 똥처럼 별 볼일 없었던 내가 비로소 현실에서 존재감을 갖게 되는 거지요. 인터넷 동호회와 똥, 현실적 사회와 나라는 대비를 통해서 한 인간이 사회에서 존재감을 얻게 되는 아이러니한 과정을 노련하고도 재미있게 풀어나갔습니다.


B: 독특한 소재를 유쾌하게 다루는 방식이 돋보입니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고, 거기에 삶의 의의를 찾다가 또 다른 인물에게 주목이 옮겨가면서 상실감을 경험하고 극복하는 과정은 현실 비판 의식도 느껴집니다. 청년 실업 문제, 인터넷 의존증 등 현실 사회의 문제점이 ‘집착’ 이라는 병리적 심리와 어우러져 있으면서도 글은 유쾌함을 잃지 않습니다.
인터넷 게시판이나 채팅룸을 연상시키는 서술 자체는 이미 흔하게 여러 소설에서 사용되어 신선하지 않습니다만, 과도하지 않은 정도로 적절하게 일부 댓글만을 제시하여 글 전체에서 돌출되지 않게 녹아들도록 사용한 것이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가장 돋보이는 점은, 글 전반에서 필요 없는 부분이 없다는 점, 즉 전체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매끈하게 마무리 된 완결성입니다. 집착의 시작에서부터 현실 도피와 결합해서 집착이 극대화되어 좌절을 경험하고 또한 극복하기까지의 심리적인 감정 묘사가 돋보입니다. 주인공이 좌절하게 만든 대상이 실제로는 부정한 방식을 사용했다는 결말은 다소 맥이 빠지는 점이 있습니다만, 실제 현실에서도 그런 허탈한 결말이 많겠지요.

75호 독자 우수단편 우수작에 선정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거울 독자우수 단편에 선정되신 분들께는 책을 한 권씩 보내 드립니다. ltpimento @ paran.com 으로 우편물 수령할 주소, 성함, 전화번호(택배 발송시 필요)를 보내 주세요.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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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스님 09.08.29 00:39 댓글 수정 삭제
    조금만 일찍 올렸다면 이번 달에 심사평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평 잘 읽고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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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켈 09.08.31 17:46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작년엔가 우연히 처음 이 곳을 알고 이어 배명훈 님의 '초록연필'을 너무 재미있게 읽고 난 뒤로는 저의 평온한 안식처가 된 거울입니다. 평, 책 선물, 선정까지 모두 감사합니다. B 평의 지적하신 클라이막스 부분도 다시 고민해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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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ancy 09.08.31 19:23 댓글 수정 삭제
    우수작에 선정되다니 기쁘네요, 좀 더티한 소재라 예상은 못했는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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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뫼비우스 09.09.01 07:56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첫작이라 그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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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no 09.09.19 12:36 댓글 수정 삭제
    늦게 봤습니다. 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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