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심사단 B조 김보영, 앤윈입니다. A와 B는 매달 무작위로 바뀝니다.


새해 첫 우수작이 나왔습니다. 12월 16일부터 1월 15일까지 올라온 단편 여섯 작품을 심사했고, 그 중 별까마귀님의 ‘고양이의 보은’을 우수작으로, beily 님의 ‘악몽’을 가작으로 선정했습니다.
좋은 작품을 읽고 발견하는 것은 언제나 큰 즐거움입니다. 그 작품에 작으나마 선물 하나 드릴 수 있는 것도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닌가 합니다. 
글은 긴 세월에 걸쳐 자라납니다. 언제 찾아올지, 떠나갈지, 또 나도 모르는 사이에 크게 성숙해서 옆에 자리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긴 세월 남들이 모르는 곳에서 홀로 글과 싸워 왔을 겁니다. 한두 번의 평에 ‘내가 재능이 없는가’ 하며 일희일비하시기보다는, 내가 어떤 과정에 있구나 생각하시며 꾸준히 자신의 글을 가꿔나가시기를 기원합니다. 모두 건필하소서.






내가 가장 예뻤던 순간 - ey2yey


A : 문제점이 많은 소설입니다만 그 중의 압권이 결말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충고를 하고 교훈을 줍니까?
만약 독자가 이야기에 충분히 공감하고 몰입했다면, 그리고 작가의 필력과 묘사가 그럴만하게 만들었다면, 독자는 자신이 살아보지 않은 다른 인생을 경험하게 되고, 그 가상의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성장을 합니다. 모든 소설의 교훈이란 그런 겁니다. 작가가 뛰어들어 교훈을 주는 게 아니예요. 이 글이 소설이 아니라면 모르겠거니와, 소설이라면 최악의 결말입니다.
글이 미성숙할 수는 있습니다. 그건 괜찮아요. 천천히 성장하면 되니까. 하지만 소설을 통해 남을 가르치거나 교훈을 주려는 생각은 지워 주세요. 그런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전달할 수 없어요.


B : “무슨 멋인지 모르겠지만 고민이 있을 때 두 가지를 한다. 일기를 쓰거나, 지금처럼 무언가를 미친 듯이 적어 내려가거나,”
이 글에서 가장 공감이 갔던 문장은 바로 위의 인용문입니다. 이건 소설이라기보다는 아무런 계획 없이 무언가를 그저 적어내려 간 것에 더 가깝습니다. 특히 결론 부분은 그야말로 아연하네요. 소설은 상황을 보여주고 독자가 그 상황을 경험하게 하는 종류의 예술입니다.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해 좀 더 고민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외투를 입은 사나이 - 미역의 춤


A : 의문으로 가득한 소설입니다.
외투는 왜 입었는지? 어머니는 왜 부르는지? 남자는 왜 폭력을 썼는지? ‘놈’은 누구고 왜 빵을 노리는지? 빵은 왜 맛이 없는지? 마지막에 들어오는 남자는 누구인지?
작가 자신만의 상징이 담겨 있으리라는 생각은 듭니다만 독자가 느끼게 하는 데에는 실패한 듯합니다. 설명이 모호해도 독자가 나름의 상상을 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러기에는 빵 / 외투 / 어머니의 상징은 너무 크고 보편적이라 여지가 너무 넓습니다. 외투는 중간에서 잊혀져버리고요.


B : 옛날 외국 소설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설입니다. 말 그대로 아름다운 분위기로 승부하려고 한 것처럼 보입니다. 서사에 개연성이 너무 적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 치고는 그리 아름다운 분위기가 조성되지는 못했네요. 발효하지 않은 빵, 먹기 위한 것이 아닌 빵, 그런 맥락에서 본래적 의미를 잃어버린 가치(축적되기 위한 자본 등)를 연상되기는 하지만 그런 상징을 섬세하게 연결했다고 하기에는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특히 제목이 ‘외투’인데, 작품 내에서 외투가 가지는 역할이 뭔지 너무 모르겠어요. 매우 중요한 것처럼 말은 하고 있으나, 말만 하고 있을 뿐 실제 외투가 가지는 역할은 아무 것도 보여주고 있지 않거든요. 조끼로 만드는 장면은 주인공이 중요한 무언가를 상실하는 장면이어야 할텐데 그 때문에 아무런 충격이 없습니다.



정신 강탈자 - 엄길윤


A : 철문을 두드리는 환청이 들리기 시작하더니 한 남자가 머릿속으로 침범합니다. 그리고 마치 자각몽의 전쟁처럼, 상상의 싸움이 펼쳐집니다. 하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머릿속의 전쟁인데도 주인공의 대응은 단순하고, 적의 침입도 지나치게 직선적입니다. 남자의 정체와 목적을 모르는 상태에서 단순히 침입을 막는 묘사가 계속되는 것은 다소 심심하기까지 합니다.
주인공이 침범당하면 자신을 빼앗길 거라는 예측을 하기는 하지만, 정작 ‘놈’이 그런다고 얻을 이득을 알 수가 없어서 ‘아닐 수도 있잖아?’라는 생각이 듭니다. 덕분에 위기감도 줄어들고요. 마지막까지도 ‘놈의 정체를 모르겠다.’라고 한 건 좋지 않았어요. 주인공의 추측일 뿐이라도, 작가가 ‘놈’의 정체를 좁혀 주는 편이 좋았을 겁니다.
하지만 생생하고 농밀한 묘사가 좋았습니다. 


B : 재미있습니다. 영화로 만들었다면 긴박감이 넘치는 장면들이 굉장할 것 같은 소설이었습니다. 조금 아쉽게도 영화는 아니고 소설이었죠.
주인공이 ‘놈’이 자신의 정신을 강탈하려는 사람이라고 느끼는 장면이 지나치게 직관적입니다. 어째서 그가 자신의 정신을 강탈하려는 사람인지, 그의 목적이 과연 무엇인지 좀 더 알고 싶습니다. 이 상황에서는 쫓기는 주인공과 쫓아오는 놈만 있을 뿐입니다. 그 장면을 섬세하게 묘사한 건 좋았는데, 실제로 제대로 된 사건이 이 이야기를 단단하게 받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네요.



추모 + 집착 - D


A : 설명이 많이 없는 글입니다. 왜 물건 매개체가 필요한지, 죽은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것은 환상인지, 시간여행인지, 영매인지, 아니면 평행세계인지? 왜 몇 분만 만날 수 있고 왜 그 이상 남아 있으면 폭파하는 건지? 
이런 이야기에 현실의 과학이 적용될 필요는 없습니다만 내적 논리는 필요합니다. 오히려 가상의 논리를 끌고 들어올 때엔 현실보다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현실 논리에 맞는 것들은 이미 독자들이 알죠. 그래서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작가의 머리에서 새로 만든 논리는 독자가 알 수가 없으니 자세히 말해 줘야 해요. 어떤 의미로는 훨씬 더 정교한 인과관계가 필요합니다.
이미 현실에 존재하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인 사건을 소재로 쓰는 것은 다소 위험하지 않을까요? 제가 이 사건의 관계자라면 그저 환상의 해결책일 뿐인 이 이야기에 슬픔만 더할 것 같습니다. 


B :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집필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소설과 같은 충동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자신이 낳은 아이들도 모두 어린 나이에 죽어버린 이후, 그녀는 어떻게 하면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골몰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낸 많은 사람들이 아주 간절하게 희망하는 것일 것입니다. 매우 보편적인 소망이죠.
메리 셸리는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낸’다는 것이 아주 위험하고도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이성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에 가장 최신 기술이라고 여겨지던 ‘전기’라는 것을 사용해 어떤 식으로 이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있는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참혹한 결과까지도 냉정하고 이성적인 시선으로 그려냅니다.
이런 작품들은 꼭 프랑켄슈타인만 있는 것은 아니겠죠. 강철의 연금술사도 떠오르네요.
저는 이 주제가 뻔하고 새삼스럽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슷한 주제가 여러 번 다뤄진다는 것은 그 주제가 인간에게 얼마나 원천적으로 중요한 것인지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치지도 않고 사랑에 대한 노래가 계속 나오는 것처럼요. 저는 이 주제를 다루는 무게감에 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이 소설에서 가장 불편했던 것은 이렇게 중요하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도 어디서 느닷없는 공지가 날아오고, 느닷없이 가족들을 설득하고, 느닷없이 전 연인을 만나게 되더니, 느닷없이 폭발을 하는 겁니다.
초반부에 캠코더로 연인을 몇 번씩이나 찍어놓고 그 테이프에 집착하는 부분은, 주인공의 감정을 전달하는 데에는 성공적이었으나, 단순히 감정을 전달하려는 이유만이라면 너무 분량이 많습니다. 전체 서사(특히 결말)에 영향을 못 끼치는 부분이 이렇게까지 길어야 할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레베카의 어머니가 죽는 부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이란 결말을 향해서 모든 장면들을 첨예하게 구성하고, 그 결말을 향해 내달리는 깔대기 같은 구조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단편소설이라면 더더욱 그렇죠. 분량이 길지 않은 만큼 삼천포로 빠질 여유가 없습니다. 이 소설은 산만하면서도 주제가 가진 만큼의 무게감이 없습니다. 자신이 고른 주제에 대해서 좀 더 긴 시간을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더불어 단편소설이라는 소설의 형식에 대해서도요.



악몽 - beily


A : 제목 그대로 악몽 같은 이야기입니다. 큰엄마에게 무력하게 학대당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큰엄마가 밉고 주인공이 불쌍합니다. 그 어떤 다른 것 없이 이 감정을 전달한 것만으로도 이 이야기는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환이를 살해하는 결말은 다소 인과관계가 멀다 싶은 기분도 들면서도, 학대로 일그러진 주인공의 마음이 사랑과 구원마저도 거부하는 것이 한편으로 이해가 갑니다.  


B : 굉장히 끔찍하고 소름이 돋아, 어떤 의미에서는 아름답다는 생각까지 드는 이야기였습니다. 큰엄마가 지환이에게 성적 충동을 느끼는 부분이나, 지환이가 주인공을 성적 대상으로 보는 부분이 약간 사족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깊고 격렬한 감정을 ‘비밀스러운 성적 장치’들을 통해서 만들어내는 방법은 상당히 간편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합니다. 인과관계를 섬세하게 제시하는 대신, 너무 쉬운 길을 택하신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어요. 그러나 주인공의 심리가 섬세하게 전달되어서 그 정도 비약은 있을 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그 두 가지 부산물이 연결되는 지점이 섬세합니다. 큰엄마가 주인공을 학대하는 부분과 큰엄마의 성적 충동, 그리고 지환이의 성적 충동이 주인공의 악몽 속에서 결합되는 장면은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 섬세함이 앞서 다루었던 비약을 넘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어요. 즐겁게 읽었습니다.


* 12월 가작으로 선정하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고양이의 보은 - 별까마귀


A : 숨도 못 쉬고 읽어나갔습니다. ‘층간소음’, ‘불법 증축’이라는 독자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소재에, 윗층에서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소리에서부터 불현듯 나타난 고양이, 점점 공포심을 자아내는 바퀴벌레의 양상과 마지막의 충격적인 결말까지, 흥미와 의문을 놓치지 않으면서 천천히 공포를 쌓아가는 기술이 훌륭합니다. 똑같은 층간소음이 아래로 전해지며 비극이 반복되리라는 막연한 예상과 함께요. 
마지막 순간에 고양이의 지난 행동이 면면이 떠오르며 이야기 전체가 하나하나 짜맞춰집니다. 아마도 윗층의 사람의 비극을 목격했을 고양이가 온 힘을 다해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애썼다는 생각을 하면, 공포스러운 가운데에서도 애잔한 기분이 듭니다. 진심으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B : 완전히 몰입하면서 읽었고, 다 읽고 나니 정말로 두려워졌습니다. 바퀴벌레와 고양이라는 소재의 선택도 훌륭합니다. 바퀴벌레는 원초적으로 인간이 누구나 두려워하는 존재이며, 조의 아파트 같은 영화에서 드러나는 방식들을 보면 인간과 매우 친숙할 수밖에 없기도 하죠. 바퀴를 잡는 고양이의 행동 양식을 여기에 적용시킨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주인공이 고양이에 대한 애정을 버린 순간 고양이가 타인에 의해 살해당하는 것도 필연적인 죽음과 그에 따른 공포를 극대화시키는 데에 매우 적절하게 기능하고 있습니다. 꿈이라는 소재는 조심스럽게 쓰지 않으면 지나치게 쉽게 이야기를 진행시켜서 설득력을 떨어뜨릴 수 있는데, 이 소설의 경우 마지막에 주인공이 꾸는 꿈이 모든 상황을 갈무리하며 대단원으로 끌고 갑니다. 즐겁게 읽었습니다.
(어째서 고양이의 보은은 항상 이렇게 끝나게 되는 걸까요…… 포의 검은 고양이도 그렇고…… 한 번쯤은 성공적으로 보은하는 고양이가 보고 싶습니다.)


* 12월 우수작에 선정하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거울 독자 우수단편에 선정되신 분들께는 책을 한 권씩 보내드립니다.
beily님과 별까마귀님은 pena12 @ gmail . com으로 우편물 수령할 주소, 성함, 전화번호(택배 발송시 필요)를 보내주세요.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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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까마귀 14.02.01 18:28 댓글
    두 분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좋은 평 감사합니다.
  • No Profile
    엄길윤 14.02.02 06:21 댓글

    평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좀 더 손을 봐야 겠어요!

  • No Profile
    beily 14.02.03 02:21 댓글

    기대도 안 했는데. 뜻밖의 새해 선물이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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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작 안내 6월 심사평 및 2분기 우수작 안내4 2018.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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