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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아내의 눈물

2010.06.26 01:1206.26

깜박 잠이 든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달빛조차 새어 나오지 못할 정도로 짙은 안개가 창 밖을 온통 가리고 있다. 검은 창은 거울처럼 안쪽 세상만을 비췄다. 그 안엔 내가 있었고, 그 옆으로 낯선 여자아이가 혼자 앉아있었다. 누굴까. 돌아보니 대여섯 살쯤 되어보이는 아이는 물처럼 투명한 눈동자에 호기심을 가득 담은 채 나를 쳐다봤다. 아마도 외국인인 내가 신기한 모양이다. 뭐라도 쥐어주고 싶어 배낭을 뒤적거리니 초콜릿이 손에 잡혔다. 몇 조각을 떼어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는 작고 까만 손으로 조심스레 받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쪼르르 달려나갔다.
아이가 사라진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3~4미터쯤 떨어진 곳에 앉아있던 아이 엄마가 이를 드러내 웃으며 고개인사를 했다. 땟국물에 절은 낡은 티셔츠를 입은 젊은 엄마는 초라한 행색이었지만, 아무런 문명의 여과 없이 태양을 받아들인 거칠고 검은 피부는 오히려 건강한 생명력으로 빛났다. 나는 아이 엄마를 향해 초콜릿을 들어 보였지만, 그녀는 수줍은 웃음과 함께 손사래를 쳤다.
얼마나 달린 걸까.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선잠을 잔 탓인지 두통이 났다. 진통제만 먹으면 온몸이 휴대폰의 진동처럼 떨려오고 호흡이 가빠지는 부작용 때문에, 두통 정도는 참아야 했다. 가끔씩 견딜 수 없는 두통이 찾아오면, 미친놈 같지만 면도칼을 꺼내 손가락을 그었다. 순간적인 고통이 두통을 잡아먹어서인지, 붉은색이 주는 시각적 강렬함이 신경세포를 건드려서인지는 몰라도, 하얀 살갗 위로 번지는 피를 망연히 바라보다 보면 두통이 서서히 가라앉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다.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긋이 누르며 창에 머리를 기댔다. 창밖에 뭔가라도 보이면 좋으련만, 슬픔에 일그러진 내 검은 모습만이 그림자처럼 붙어있다. 2주 전 짐을 꾸릴 때만 해도, 한국을 훌쩍 떠나오면 조금은 나아질 줄 알았다. 강렬한 태양을 보면, 산들산들 부는 바람에 나른하게 흔들리는 야자수를 보면, 더위에 늘어져 있는 길 잃은 개들을 보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질 줄 알았다. 하지만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나를 빨아먹는 슬픔 때문에, 여전히 두통에 시달리고 있다.
3년이다. 아내가 실종된 지 이제 3년이 됐다.
2007년 5월 3일. 퇴근 후 돌아온 집에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이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현관 위 신발들은 여느 때와 똑같이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거실 탁자 위 크리스털 꽃병 안의 장미꽃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났으며, 침실의 하얀 린넨 시트는 빳빳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단지 아내가 없었을 뿐이다. 나는 멍청히 거실 소파에 앉아 아내를 기다렸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 다섯 시간이 지나도 하루가 지나도 아내는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 일주일동안은 절박하게 나무에 매달린 매미처럼 전화기 옆에 바싹 붙어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정적에 휩싸였다. 난 초조함에 수화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다 놓았다 반복했지만, 한심스럽게도 아내와 관련해서 전화를 걸만한 곳을 단 한 곳도 알지 못했다. 아내는 고아였고,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정기적으로 만나는 친구도 없었다.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실종의 증거가 없기 때문에 단순 가출일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가출의 증거도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지만, 그건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아는 줄을 모두 동원한 끝에 간신히 실종 접수가 처리됐고, 경찰은 수사라는 것을 시작했다. 아내가 사라진 지 일주일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수사라는 게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어떤 실오라기 같은 단서조차 나오지 않아요. 근처 CCTV를 모두 분석해봤지만 선생님 부인이 찍힌 건 단 한 컷도 없었습니다. 봤다는 사람도 전혀 없구요. 범죄의 단서가 있어야지만 실종처리가 되는데… 아니 뭐 그렇다고 실종이 아니라는 건 아니지만… 암튼 참 이상한 일입니다."
아내가 사라진 지 한 달째 되던 날까지 여전히 앵무새처럼 같은 소리를 반복해 지껄이는 담당형사를 향해 나는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그럼 내 아내가 증발이라도 한 거냐고. 당신 부인이라도 그 따위 말이나 지껄일 거냐고… 그 후 경찰은 내 전화를 슬금슬금 피했고, 하루 이틀 더 지나 기다렸다는 듯 수사를 아예 접어버렸다.
나는 직장을 그만둔 채 그녀를 찾으러 나섰다. 전단지를 곳곳에 붙이고, 동네를 수소문했지만 경찰의 말처럼 아무런 단서도 나오지 않았다. 아내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다른 세계로 순간 이동한 사람처럼 그렇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정말로 증발해버렸다.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고 잠도 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온 몸을 불사르는 분노,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슬픔, 뼈를 깎는 절망, 머리를 하얗게 만드는 공포 속에서 나는 서서히 죽어갔다. 세상은 아무 탈 없이 돌아갔고, 미치는 건 오로지 나뿐이었다.


스피커를 통해 후아힌 역의 도착을 알리는 차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나 느긋한 열대지방의 사람들은 아무도 먼저 일어나 짐을 챙기지 않았다. 하지만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던 나는 한시라도 빨리 침대에 몸을 눕히고 싶은 생각에 일어나 문쪽으로 향했다. 열차가 서고 문이 열리자마자 잰 걸음으로 밖으로 나섰다.
안개는 제법 거쳤지만 물기를 머금은 무겁고 축축한 바람이 달갑지 않은 손님처럼 몸에 달라붙었다. 대합실을 향해 걸어가는데 그 옆으로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뻗은 붉은 지붕이 사방으로 겹쳐있는 작은 왕궁 같은 건물이 눈에 띠었다. 붉은 기둥에 황금 빛의 양식적인 문양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고, 육각형의 창문이 양식미를 더하는 목조 건물이었다. 옆에 서 있는 역무원이 왕실 전용 대합실이라고 일러줬다. 여기가 왕족들의 휴양지라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대합실을 나서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툭툭 기사들은 먹이를 발견한 잉어떼들처럼 몰려들었다. 가이드북에서 추천한 바닷가 근처 게스트하우스의 이름을 말하자 가장 연장자처럼 보이는 기사가 150바트라는 얼토당토않은 가격을 불렀다. 난 다른 기사들을 쳐다보았지만 모두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흥정할 힘조차 안 남아있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툭툭에 올라탔다. 예상대로 5분 정도 달리자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알고도 바가지를 썼지만 쉴 수 있다는 안도감에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짐을 풀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뒤 침대에 누웠다. 두통 때문에 생각처럼 쉽게 잠에 빠져들지 못한 채 이리저리 뒤척였다. 허리부분이 푹 꺼진 침대는 숨어있던 디스크의 통증까지 일으켜 깨웠다. 폭신한 집의 침대가 그리웠다. 내 옆에 누웠던 아내의 보드라운 살갗이 그리웠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평온했을 내 삶이 그리웠다. 그러다 이내 죽음처럼 깊은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침에 눈을 떠 잠시 식당에 내려가 허기를 채운 뒤, 바로 침대에 돌아와 누웠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방안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머리 속을 괴롭히던 통증은 말끔히 사라졌고, 몸도 비교적 가벼워졌다. 난 진한 커피를 마실 생각에 게스트하우스 1층의 노천 식당으로 내려갔다.
해변이 바라보이는 자리에 앉아 커피 한 잔을 시켰다. 왕실휴양지라는 명성에 걸맞게 바다는 근엄한 회색 빛으로 빛났다. 해변의 모래사장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을 느릿느릿 맴돌다 사라졌다. 오른쪽 구름은 서서히 장밋빛으로 물들었고, 반대편에는 초생달이 유령 같은 실루엣을 그려넣었다. 모처럼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오랫동안 바다를 바라보았다. 늘 머릿속에 그리던 파란 바다는 아니었지만, 차분한 회색바다는 일종의 신경안정제 같은 효과를 주었다.
"민우, 한 잔 하러 같이 나갈래?"
돌아보니 같은 방을 쓰는 영국 청년 리처드가 서 있다. 아침식사 때 마주쳐 통성명을 한 게 전부였는데… 많이 쳐줘도 20대 후반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맑은 피부에, 좌절 하나 겪지 않았을 것 투명한 눈빛을 가진 싱그러운 청춘에 눈이 부셨다. 어쩌면 그의 뒤에서 저물어가는 태양이 태우는 마지막 불꽃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난 그런 청춘과 술잔을 기울이며 수다를 떨만한 기분이 아니었다. 고개를 흔들자, 리처드는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는 나가버렸다.
구름은 이내 짙은 어둠 속에 묻혔고, 바람이 윙윙 소리를 내며 식당에까지 밀려들어왔다.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의 커피를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옆 테이블 위에 놓인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리처드가 놓고 간 책 같았다. 다가가 천천히 책을 집었다. 말라 죽은 나무들이 초현실주의 회화보다 더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나미비아의 사막 데드플라이의 사진 위에 Around the World, 라는 평범한 제목이 붙어있었다. 난 별 생각 없이 책의 목차를 살펴봤다
아프리카, 남미, 유럽, 동남아… 참 많이도 돌아다녔군. 마치 세계일주가 무슨 벼슬이라도 되듯, 자기가 돌아본 곳의 사진과 내용을 의기양양하게 전시해놓은 그렇고 그런 흔한 여행기였다. 요즘은 넘치는 여행자들만큼이나 여행관련 책들이 넘쳐난다. 이 책을 들고 갔다가 나중에 리처드에게 돌려줘야 하나 그냥 놓고 가나를 잠시 고민하며 망설이는 동안 책은 툭 하며 내 손을 달아나 바닥에 떨어졌다.
허리를 굽혀 책을 주웠다. 책의 먼지를 털고자 후루룩 넘겨보는 순간, 낯익은 실루엣이 눈동자를 스쳐 지나갔다. 난 망치로 머리를 맞은 사람처럼 그대로 자리에 얼어붙었다.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책장을 넘겼다. 없다. 환영을 본 건가. 그래. 그런 적은 많았다. 길을 걷다가 아내와 비슷하게 가느다란 몸매를 가졌거나, 하늘거리는 블라우스를 입었거나, 흔들리는 밤색 퍼머머리를 한 여자만 봐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런 거겠지.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겼다. 어디였더라. 중간쯤이었던 것 같은데… 여기다. 184페이지. 그 곳엔 영원히 해가 지지 않을 것 같은 파란 하늘과 바다가 넘실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다를 향해 그녀가 앉아있었다.
아내를 닮은 여자가 아니라, 바로 3년 전에 사라진 내 아내가.
얼굴 옆 모습과 몸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는 사진이었지만, 수선화처럼 청초한 눈매와, 약간 처진 어깨를 따라 허리까지 이어지는 보드라운 곡선과, 허리 옆에 새겨진 불긋한 작은 상처자국까지… 내 눈을 의심하며 여러 번 깜박거렸지만, 사진 위 여자는 분명 그녀가 틀림없었다. 밤이 내린 바닷바람을 싣고 온 축축한 한기가 기분 나쁜 벌레처럼 몸에 스며들었다. 난 온 몸을 부르르 떨며 사진을 노려보고 또 노려보았다.
파란색 비키니 차림으로 바다를 향해 앉아있는 그녀는, 옆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난 바다 색깔처럼 푸른 눈을 가진 금발 머리의 남자 역시 그녀를 바라봤다. 태양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가 닮은꼴인 두 사람은 영락없는 연인의 모습이다. 나는 도대체 뭐가 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소제목을 살펴보니 그 곳은 인도네시아 발리였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고작 7시간 거리인 그 곳. 여기서는 아마 3~4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다.
도대체 왜 그녀가 발리의 해변에 앉아있는 걸까.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기억을 잃어버린 걸까. 내가 아는 한 그녀는 비키니 차림으로 당당하게 해변에 앉아있을 여자가 아니다. 푹푹 찌는 한여름에도 민소매나 반바지는 절대 입지 않았던, 내게조차 수줍게 속살을 내보이던 여자였다. 그렇다면 영화 속에서나 존재한다고 믿었던 도플갱어, 즉 그녀와 똑같이 생긴 여자가 지구상에서 또 숨쉬고 있는 걸까.
어지러웠고 숨이 가빠왔고 가슴이 맹렬하게 고동쳤다. 그녀가 살아있다는 기쁨 때문인지, 날 배신했다는 분노 때문인지, 아님 이 낯선 남자에 대한 질투심 때문인지 도통 알 수 없이 끓어오르는 감정으로 내 가슴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머리 속에 흐물거리는 하얀 덩어리가 가득 차오르는 것 같았다. 난 그렇게 사진을 바라보면서 한참을 서 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끈이 끊어지듯 갑자기 맥이 탁 풀린 나는 주저앉듯 의자에 앉았다. 속눈썹에 눈물이 괴었고 이내 주르륵 쏟아져 내렸다. 파란색이 출렁거리는 그 사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그리워했던,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내 아내가 나와 같은 지구상에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무슨 계시야. 외국 여행자의 카메라에 우연히 찍혀 마치 화석처럼 책자 위에 영원히 새겨진 뒤 내 손에까지 굴러 들어왔다는 건 분명 무슨 초자연적인 계시임에 틀림없었다. 난 그녀를 찾아 나서야 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책을 다시 살펴봤다. 지은이는 크리스토퍼 테일러. 미국에서 올해 3월에 출판된 책이었다. 마음은 당장이라도 그녀가 앉아있는 발리로 날아가고 싶었지만, 이미 그곳은 과거시제다. 단서를 찾아야 했다. 책을 끌어안은 채 다리가 잘린 도마뱀처럼 비틀거리며 게스트하우스 안으로 들어왔다. 침대 구석에 기대 앉았다. 다시 책의 184페이지를 펼쳤다. 빠르게 요동치는 맥박소리를 애써 잠재우며 천천히 책을 읽어나갔다.

발리는 연인들의 천국이라고 할 만큼 낭만적인 섬이다. 내가 이 낭만의 섬을 혼자 용감히 찾은 건 2009년 6월이었다. 바닷바람은 거셌지만 달콤한 허니문을 즐기는 커플들을 갈라놓기엔 역부족이었다….

2009년 6월이라면 벌써 1년 여 전이다. 아직까지 그녀가 그 곳에 있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난 그곳에 가야 했다. 그녀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어디라도 갈 것이다. 아니 지구 끝까지라도 뒤져서 그녀를 찾아낼 것이다. 배낭에서 아껴두었던 보드카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감정이 회오리바람처럼 소용돌이 치면서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면도날을 꺼내 왼쪽 엄지손가락의 첫 마디 위를 힘껏 그었다. 벌어진 살갗의 틈새로 동그란 피가 몽글몽글 맺혔다. 떨어지는 핏방울을 오른쪽 손바닥으로 받았다. 눈부시게 새빨간 피를 한참동안 바라보자 마음의 고통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밤은 점점 짙어지고 풀벌레 소리만이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취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미미, 당신이야?
과일의 속내처럼 달콤한 향과 부드러운 감촉이 전신에 퍼졌다. 눈을 뜨자 아내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이내 뒤돌아 뛰어갔다. 봄의 산들바람이 부드럽게 내 몸을 어루만졌다. 눈이 부시도록 새빨간 모란꽃이 지천이다. 그녀를 뒤따라 뛰어갔지만, 먹이를 좇는 치타처럼 빠르게 그녀는 점점 멀리 사라져 작은 점이 되어버렸다. 난 다리에 힘이 풀릴 때까지 뛰고 또 뛰었다. 그러자 모란꽃은 사라지고, 거대한 사막이 눈 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거기엔 수천 년 동안 말라죽은 채로 서글픈 존재를 전시하는 검은 나무들이 띄엄띄엄 서 있었다. 여기가 나미비아의 데드플라이일까. 아내는 어디로 간 걸까.
아침 햇살이 눈꺼풀을 적시자 번쩍 눈이 떠졌다. 시계는 오전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난 자궁 속 아이처럼 침대 구석에서 책을 안고 웅크린 채 누워있었다. 리처드의 침대는 여전히 비어있다. 술을 마시다 여자와 눈이라도 맞아 하룻밤 사랑을 나눴을지도 모를 일이다. 난 리처드가 돌아오기 전에 부랴부랴 짐을 싸들고 숙소를 나섰다.


잿빛이 감도는 파란 눈을 가진 스튜어디스가 내 옆에 서 있다. 무어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보이는 미소가 신출내기 같다. 거기다 풍성한 몸매 탓에 촌스러운 초록색 유니폼이 몸에 꽉 껴서 몹시나 불편해보인다.
"와인이나 맥주를 하시겠어요?"
"노 땡큐."
내가 괜찮다며 손을 내젓자 그녀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돌아간다. 그제서야 돌아보니 대부분의 승객들은 한껏 들떠 와인이나 맥주를 들이키고 있다. 그래. 난 지금 발리로 가는 비행기 안에 타고 있지. 아무도 슬픔으로 가득찬 표정을 지은 채 발리로 향하지는 않는다. 발리는 현지인을 제외하고는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들이나 휴가를 오붓하게 즐기려는 가족들을 위한 곳이다. 생각해보니 사진 속 아내는 행복해보였다.
발리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번화가라는 쿠타 시내로 향했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투어, 트랜스포트를 외치는 현지인들 때문에 정신이 없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PC방을 들러 이메일을 열어봤다. 다행히 크리스토퍼 테일러로부터 답신이 와 있었다. 태국을 떠나기 전 공항에서 책의 저자에게 이메일을 보냈었다. 혹시라도 사진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해서다. 떨리는 손으로 그의 메일을 클릭했다.

아시다시피 여행자의 렌즈에 포착된 사진은 우연성의 산물입니다. 당연하게도 저는 그 사진 속의 인물이 누구인지 전혀 모릅니다. 단지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건 그 사진이 발리의 로비나 리조트 앞 해변에서 찍은 것이란 사실뿐입니다. 아내를 찾는데 도움을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바로 거리로 나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관광지답게 영어가 능숙한 기사는 어디로 가냐고 물었고 난 로비나 리조트라고 말했다. 기사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돌아봤다. 가는데 4시간이나 걸리는데 시간이 너무 늦었다고 했다. 난 얼마면 되겠냐고 물었고, 난처하다던 그는 50달러에 엑셀을 힘껏 밟았다.
호텔에 도착하니 이미 자정이 넘었다. 붉은 기와 지붕과 회색 벽돌벽이 가정집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호텔은, 객실이 10여 개 밖에 안돼 보이는 아담한 곳이었다. 리셉션에 앉아 졸고 있었음에 분명한 직원은 택시가 들어오는 소리에 놀라며 밖으로 나왔다. 늦은 시간에 예약도 없이 찾아온 방문객이 그리 달갑지는 않아보이는 눈치였다. 난 그에게 다가가 방이 있는지 물었고, 하루치 숙박료를 지불했다. 뭔가를 알아보기엔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낡았지만 운치 있었던 겉 모습과 달리 방 안은 하늘색 얇은 시트가 초라하게 깔려있는 낡은 침대와 목조 협탁, 나무의 테두리가 닳은 거울과 작은 냉장고가 전부였다. 하얀 타일 바닥과 액자하나 없이 휑한 아이보리색 벽 위에, 방 안의 가구처럼 닳아버린 내 그림자가 어렸다. 난 불을 껐고, 침대에 누워 천정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작은 도마뱀 한 마리가 사지를 쭉 뻗은 채 죽은 듯 천정에 붙어있는 게 보였다. 어쩌면 여기에 아내가 묵었을지도 모른다. 저 도마뱀은 그 때도 저렇게 어둠 속에서 그녀를 지켜봤겠지. 뾰족하게 귀를 세우고선 그녀가 토해낸 신음소리를 들었을 거다. 슬픔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와 동시에 알 수 없는 묘한 흥분에 휩싸였다.
아침의 태양이 어김없이 떠오르자 허기를 느꼈다. 바다와 맞닿아있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사진 속 바로 그 바다가 눈 앞에 넘실대고 있었다. 다른 게 있다면 해변가에 아무도 없다는 것과, 바닷물이 사진처럼 파랗지 않다는 것 정도. 바닷물의 색깔이란 원래 날씨와 하늘빛에 좌우되는 거니까 항상 같을 수는 없겠지. 난 아침식사로 토스트를 시키고 책을 펼쳤다. 투숙객이 거의 없는지 레스토랑엔 나 혼자 뿐이었다.
말라비틀어진 토스트를 입에 구겨넣다가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어젯밤 만났던 호텔 직원이 서 있었다. 그는 어제 무뚝뚝하게 맞았던 게 미안했는지 아님 다른 의도가 있는지 관광책자에나 나올법한 순박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투어 같은 거 하시려면 제게 말하세요, 라는 의례적인 말과 함께. 난 바라보고 있는 책의 사진을 그에게 내밀었다.
"어 바로 이 앞 해변이네요."
그는 자신이 늘 일하는 곳이 책에 나온 게 신기한 모양인지 사진을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다가 책 표지를 보고는 기어이 주머니에서 종이와 볼펜을 꺼내 책 제목을 한 자 한 자 적었다. 그러다 자신의 행동이 멋쩍게 느껴졌는지 나중에 다른 직원에게 알려 주려구요, 라고 했다.
"사진만 보고 여기인지 어떻게 알죠?"
"여기서 5년 이상 근무했거든요. 야자수 생김새와 배열만 봐도 바로 알 수 있어요. 그리고 여기 이 여자 우리 호텔에서 묵었던 분이거든요."
그는 정확히 내 여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가슴은 또다시 소용돌이 치고 있었지만, 최대한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투숙객이 꽤 많을 텐데 어떻게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나요?"
"뭐 그게… 동양인하고 서양인 커플이 흔한 게 아니잖아요."
그는 괜한 말을 꺼냈다 싶었는지 말꼬리를 흐리다가 화제를 돌려 횡설수설했다. 오늘 투어일정은 있는지, 가이드는 구했는지 등을 물었다가 우리 식당에서 제일 잘 하는 메뉴는 나시고랭이에요,라고 묻지도 않은 것까지 친절히 말해줬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서는 감출 수 없는 비밀의 기운이 새어 나왔다. 난 할 수 있는 한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은 이 여자가 내 오랜 친군데 소식이 궁금하던 참이었거든요. 이름을 최근에 바꿨다는데 몰라서요. 이름 좀 찾아봐주실 수 있나요? 작년 6월 이전에 묵었다는 거 같은데…"
그는 뜻을 알 수 없는 듯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투숙객 정보를 함부로 알려드릴 수는 없어요."
난 땀으로 축축한 그의 손에 슬쩍 10만 루피를 쥐어주었다. 그는 따라오라고 했고, 카운터의 한 대뿐인 낡은 컴퓨터 안에서 그녀의 새로운 이름과 여권번호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혼자 투숙한 것으로 되어있었다. 난 사진 속 남자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다.
"아 그 사람은 가이드 잭이란 사람이에요. 유일한 발리의 백인 가이드죠. 발리에서는 인도네시아인만이 가이드를 하도록 법적으로 정해져 있어요. 잭은 원래 프랑스인이었는데 인도네시아로 귀화해서 발리에서 가이드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는 말을 꺼내놓고는 뭔가를 말할 듯 말 듯 입이 간지러운 어린아이마냥 머뭇거렸다.
"당신, 친구를 찾으러 온 거 아니죠? 친구를 찾으러 여기까지 올리는 없죠. 그 여자 당신 여자인가요?"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무렴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죠. 잭이 좀 안 좋은 소문이 많아요. 혼자 여행 온 여자랑.. 무슨 말 뜻인지 아시겠죠?"
그가 내 앞에서 창녀를 꿰어내는 사내처럼 음흉한 웃음을 흘렸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내밀한 속내를 까발려서 천박한 욕망을 채우는 연예지 기자와 같은 종류의 인간이었다. 더 이상 말할 가치가 없었다. 그래도 난 그에게 답례로 10만 루피를 더 건넸다. 내가 이런 걸 물었다는 걸 비밀로 해달라고 하면서. 그는 웃으며 그런 건 제 전공인걸요,라고 말했다.


야자수가 늘어선 좁은 길을 달리고 있다. 아무리 달려도 길에는 씻은 듯 말간 하늘 위로 곧게 뻗어있는 야자수와, 태양열에 끓어오르는 1차선 아스팔트 도로와, 양 옆에 펼쳐진 눈이 시리도록 푸른 논뿐이다. 간혹 성스러움을 상징한다는 체크무늬의 천들이 나무를 끌어안고 팔락거릴 뿐 이 풍경은 지겹도록 반복되고 있다. 모든 반복되는 것들은 몽환적이다. 끊임없이 같은 속도로 고동치는 맥박처럼, 사이키델릭 음악처럼 날 미치게 만든다. 그리고 열대지방의 냄새, 땀으로 얼룩진 아이의 체취처럼 부드럽고 달큰한 향내가 나의 체온을 달뜨게 한다.
"Lovely country!!"
내 옆에 앉아 운전을 하는 잭이라는 이름을 가진 프랑스계 인도네시아인은 가이드란 직업을 가진 자답게 수다스러웠다. 도대체 만난 지 한 시간밖에 안되었는데 그 사이에 ‘러블리 컨츄리’를 몇 번이나 외쳐댔는지 모른다. 사진과 달리 면도날로 밀어올린 듯 짧게 깎은 갈색 머리였고, 사진 그대로 쌍꺼풀이 깊게 파인 아름다운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열대지방의 태양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는 여자를 홀릴만한 매력을 풍겼다. 난 그가 한시간 내내 떠드는 소리를 흘려 들으며, 몽환적인 풍경에 젖어 바로 이 자리에 앉아있었을 그녀를 떠올렸다.
"한국말 잘하는 로컬 가이드들도 많은데 왜 날 찾았어? 물론 나를 찾은 건 참 잘한 거야. 내가 물 좋은 데를 많이 알고 있거든. 낮에는 관광하고 밤에는 클럽에 가고. 환상적인 휴가가 될 거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잭은 매력적인 백인 남성이었지만, 아내는 이런 수다스러움과 자유분방함을 싫어했다. 아무리 기억을 잃는다해도 인간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 법이다. 왜 아내는 이 자와 가까웠던 걸까. 나는 책을 펼쳐 사진을 그의 눈 앞에 가져갔다. 그는 눈썹을 찡그리며 이게 뭐야,라는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커다란 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어 이거 나네. 우와. 모델료도 안 받고 누가 이걸 실었대? 그래도 멋지네. 그지?"
난 사진 속 내 아내를 가리켰다.
"이 여자 누구야? 당신 여자 친구야?"
"무슨 소리. 난 여자친구 같은 거 없어. 이 여자? 일주일의 연인이었지. 정말 뜨거운 여자였는데… 아시아 여자들은 다 수줍음을 타는 줄 알았는데, 다시 봤다니까."
나는 얼굴이 불꽃처럼 활활 타올랐다. 입안이 바싹 마르고 귀에서는 고장난 라디오의 주파수 같은 소리가 났다. 그는 그 때를 회상하듯 휘파람을 불어대기 시작했다.
"세계여행 중이라고 했는데 아직 동남아를 못 벗어났나봐. 얼마 전 피피섬에서 엽서를 보냈더라구.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화끈한 밤을 보내고 싶은데, 일이 끊이질 않으니…"
그는 내쪽으로 손을 뻗더니 조수석 앞 사물함 안을 뒤적뒤적거렸다. 거기서 종이를 하나 집어 내게 자랑하듯 건넸다. 두 개의 섬 사이로 반짝이는 에머랄드빛 바다와 투명한 물빛 속을 유유히 평화롭게 유영하는 열대어들의 사진이 담긴 엽서였다. 난 엽서를 뒤집어봤다. 영어였지만 분명 아내의 필체였다. Dear Jack 으로 시작한 글은 I miss you로 끝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잠깐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 거칠어진 맥박소리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차에서 내려 심호흡을 했다. 내가 한참동안 돌아오지 않자, 잭도 문을 열고 나왔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구불구불 지루하게 뻗은 길에는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오로지 하늘에만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이 낮게 원을 돌며 날고 있었다. 나는 새들의 움직임을 무심히 눈으로 쫓았다.
잭은 휘파람을 불며 계단식 논을 향해 길게 오줌을 내뿜었다. 길가에는 군데군데 작은 돌들이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난 그 중 가장 커다란 돌멩이를 집었고, 새처럼 빠르고도 날렵하게 그의 머리에 힘껏 내리쳤다. 붉은 피가 그의 목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는 단 한마디 소리조차 내뱉지 못한 채 앞으로 쓰러졌다. 새들만이 술렁거리며 더 높은 곳으로 파드득 날갯짓을 했다.


발리에서 태국 푸켓으로 향했고, 선착장에서 바로 스피드보트를 타고 에머랄드빛 바다를 갈랐다. 하늘은 낮았고 싸늘한 바닷바람은 살갗을 뚫고 들어왔다. 건기의 피피섬은 여행자들로 들끓었다. 나는 호텔, 게스트하우스, 식당 등을 돌아다니며 아내의 사진을 내밀었지만,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만을 지었다. 그 어느 곳에서도 아내를 찾을 수 없었고 아내의 흔적조차 없었다. 그 곳의 한 식당 주인이 아내의 사진을 보고 기억이 나는 것 같다고 했지만, 이미 어디론가 떠나버렸을 것이라고 했다. 모든 여행자들이 그렇듯이.
나는 세계지도를 펼쳤다. 아마도 망각의 블랙홀에 빠져버렸을 그녀를 찾아내는 건 생각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아내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지난 3년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사정은 훨씬 나은 편이다. 이렇게 한 발 한 발 나아가면 된다. 기억이 돌아온 아내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그녀의 발자취를 끝까지 더듬을 것이다.


세계여행을 하고 있다는 아내를 찾기 위해, 난 1년째 세계의 대륙을 돌고 있다. 라오스, 베트남, 캄보디아, 파키스탄, 이란, 터키,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 수단, 이디오피아, 케냐, 탄자니아 등 이런 일이 없었다면 내 생애에 결코 가보지 않았을 온갖 국가들을 거쳐 유럽과 미국 그리고 남미대륙까지. 내가 들른 58개국 424개의 게스트하우스의 게시판마다 아내의 사진을 복사해서 붙여놓았다. 그리고 그 밑에 나의 이메일 주소와 아내의 새로운 이름과 함께 이렇게 썼다.

도와주세요. 사라진 아내를 찾습니다. 아내는 내 삶의 전부입니다.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게시판을 본 여행자들은 모두들 내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언제나 떼로 몰려다니는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자신들만의 저녁식사에 나를 초대했고, 6개월째 배낭여행중이라는 한 이탈리아 여대생은 잠자리 날개 같은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내 침대 시트 안으로 들어와 아이처럼 연하고 보드라운 살갗을 선물했다. 아내와 비슷한 여자를 봤다는 사람들도 몇 있었지만 다들 확신이 서지는 않는다고 했다. 심지어 어떤 프랑스 남자는 정말이지 사진 속 여자와 닮은 사람을 발견해서 그녀에게 게시판의 내용을 알려줬으나 자신은 결혼한 적도 없다고 말하더라면서, 동양인은 생긴 게 다들 비슷해 참 헷갈린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매일 두 세 통의 이메일이 왔지만 쓸만한 건 없었다. 하루는 케냐에서 그녀를 봤다고 하고, 다음날은 브라질에서 그녀를 봤다고 했다. 사설탐정임을 자칭하며 돈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믿을만한 정보인 거 같아 비행기를 타고 급히 찾아가면, 아내인지 아내를 닮은 여자인지는 숨바꼭질 하듯 이미 사라져버렸다.
나는 그녀가 분명 기억을 잃어버렸을 거라고 확신했다. 세상이 넓다고는 하지만, 론리 플래닛의 영향인지 여행자들이 다니는 길은 거의 비슷했다. 세계를 떠돌아다니고 있다면 아마도 지금쯤은 그녀도 내가 붙인 내용물을 봤거나 전해 들었을 것이다. 나의 가엾은 아내는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조차 잃어버린 채 정신과 육체를 모두 유린당하고 있는 것이다. 아픔도 슬픔도 먼 기억의 저장고 속에 묻어버렸을 것이다.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아내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점차 희미해지고, 여행은 일상이 되어갔다. 볼리비아의 수크레에서 1500달러와 노트북을 털린 뒤에는 더 이상 여행하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이제는 돌아갈 때야. 할 만큼 했어. 사랑의 기억도 시간 속에서 부식되는 걸까. 아내를 정말 사랑하긴 했던 걸까. 아내와 함께한 내 시간과 내 삶만을 사랑한 건 아니었을까.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표 시간을 알아봤다. 일주일 내로 떠나야지. 아니 떠날 수 있을까. 익숙해진 것을 떨쳐버리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난 이미 아내를 찾는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 아내가 없는 삶을 견디기 힘든 것 만큼이나, 아내를 찾는 삶을 포기하는 것도 힘들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영어로 된 한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당신이 찾고있는 여자는 지금 발리의 우붓에 있습니다. 뜨갈사리 호텔 안쪽으로 들어오면 세 채의 이층집이 보일 것입니다. 그 가운데 맨 왼쪽 2층으로 오세요. 28일 오후 3시에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추신 : 만약 한국으로 돌아갔다면 굳이 오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은 모든 걸 과거로 인정한 셈이니까요.)

머리 속에 흐물거리는 하얀 덩어리가 다시 가득 차오르면서 아득해졌다. 28일이라면 이틀 뒤다. 메일을 보낸 사람은 나의 절박함을 시험해보려는 걸까. 아내를 납치한 자인가. 그렇다면 왜 지금 와서 메일을 보내는 걸까. 아니면 또 다른 놈들이 아내를 납치하고는 내게 돈을 요구하는 걸까. 그것도 아님 그냥 장난편지인가. 도대체 정확한 뜻을 알 수 없는 내용의 이메일 앞에서 브레이크가 고장난 채 언덕아래로 굴러가는 절박한 바퀴처럼 머리를 굴리다 드디어 결론을 내렸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만약 이번에도 허탕을 친다면 정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짐을 싸서 바로 공항으로 달려가 발리 행 비행기에 두 번째로 몸을 실었다.


태양빛을 닮은 강렬한 원색의 색채가 거리에 넘실대고 있다. 서너 집 건너 한집이 화랑이다. 시각을 자극하고 욕망을 일깨우는 색의 마력에 빠져 길을 걸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빛 바랜 흑백사진처럼 느낌은 시들해졌다.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듯 화랑에 걸려있는 그림은 거의 비슷했다. 인기 있는 그림이 있으면 다들 그것을 모사하는지, 아님 그림 표본이 있는지는 몰라도, 오리지널이라고 주장하는 그림들이 이 곳 저 곳에 똑같이 걸려있었다.
발리의 예술혼이 담겼다는 우붓은, 관광객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관광상품의 전시장에 불과했다. 거리의 상점과 레스토랑과 화랑을 메우는 건 이방인들뿐이었고, 현지인은 모두 이들을 위한 종업원뿐이었다. 이방인들을 위해 존재하는 마을.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어쩌면 이방인에게 발리는 아름답고 편한 곳일지도 모른다. 고향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얽어매는 구속도 없고, 이방인에게 보내는 낯선 경계의 시선도 없는 곳이니까. 아내도 그런 이유로 이 곳을 사랑하게 됐는지 모른다.
뜨갈사리 호텔 앞에 다다랐다. 투숙객인양 자연스럽게 리셉션을 거치지 않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작은 돌길이 나왔고 그 길을 따라 들어가자 갑자기 눈앞에 바다보다도 더 푸른 논이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논 옆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한 자국 한 자국 천천히 걸어갔다. 아내를 만나러 가는 길일지도 모르는데, 왜 그런지 내 발걸음은 돌덩이를 발등에 얹은 것처럼 무거웠다.
편지의 내용대로 길의 끝쪽에 이층 건물 세 채가 있었다. 나는 맨 왼쪽 건물로 다가갔다. 개구리 한 마리가 펄쩍 뛰어올라 풀숲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난 팽팽한 긴장감으로 뻣뻣해진 다리를 겨우 움직이며 계단을 올랐다.
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정확히 오후 3시였다.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다. 역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문고리를 잡고 돌리자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문 안쪽은 테라스였다. 논을 향해 뻗어있는 커다란 테라스엔 나무로 된 티테이블과 대나무를 엮어 만든 의자가 놓여있었다. 테라스 뒤편으로는 격자무늬로 장식된 커다란 미닫이 유리문이 굳게 닫혀있었고, 그 너머로 짙은 갈색 커튼이 내려져있었다.
유리문을 향해 걸어갔다. 저 문은 분명 열려있을 것이다. 나는 움찔거리며 멈춰 섰다. 다리가 손가락 길이만큼 긴 벌레 한 마리가 내 발 앞에서 느릿느릿 기어가다 어느새 사라졌다. 나는 갑자기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무엇이 끝없이 앞으로만 질주했던 나의 발목을 움켜쥐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다시 발걸음을 떼면서도 뒤를 돌아 달아나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천천히 유리문을 열고 커튼 속으로 몸을 불쑥 밀어넣었다.
문을 닫았다.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여느 때보다 크게 귀청을 울렸다. 벽과 바닥이 어두운 오크나무로 되어있어, 방안은 태양이 가라앉은 밤처럼 어두웠다. 구석구석에서 불안한 기운이 새어 나왔다. 방의 어둠을 응시하자 어둠 끝에 낯익은 실루엣이 보였다.
오랜 여정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나와 그녀는 침묵 속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커튼을 살짝 젖히자 방 안에 빛이 흘렀고, 나는 눈을 껌벅거렸다. 그녀가 보였다. 이마와 뺨 아래로 짧은 곱슬머리가 흘러내렸고, 붉은 리본이 달린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울고 있었다. 손에 은빛으로 차갑게 빛나는 권총을 들고서.
"날 찾아오지 않길 바랬어. 제발 날 좀 내버려두지 그랬어."
균열이 간 얼음처럼 그녀의 차가운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날 기억하는 거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그런데 왜 나를 찾아오지 않았는데? 왜 날 떠난 건데? 내가 널 얼마나 찾아다녔는 줄 알아?"
나는 무슨 오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발걸음이 얼어붙어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의 권총이 계속 나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정적만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녀와의 재회를 오랫동안 꿈꿔왔지만, 막상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가 내게 왜 그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순종적이고 내성적이고 가정적이었던 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인지.
난 용기를 내어 한 발자국 그녀를 향해 내디뎠다. 그녀는 고양이 발걸음처럼 소리없이 뒷걸음질 쳤다. 나는 다시 돌처럼 굳어버렸다.
"왜 그래? 널 보고 싶어서 이렇게 달려왔는데… 널 찾으려고 내가 얼마나…"
그녀는 내 말을 끊으며 마치 기다렸다는 듯 소리쳤다. 절규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제발 찾지마. 제발 나를 찾지 말라구. 당신의 집착 때문에 난 매일매일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었어. 다른 남자한테 말 한마디도 못 걸게 하고, 푹푹 찌는 여름날에도 다른 남자가 쳐다본다며 반바지도 못 입게 했어. 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하면서, 집에선 당신의 욕망을 채우려 나를 창녀처럼 갖고 놀았어. 난 매일매일 집에 갇혀서 숨이 막혀 미칠 것만 같았다구."
"그건 널 사랑해서 그랬던 거야. 알잖아.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 같은 사람한테 바깥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줄 당신이 몰라서 그래? 이젠 당신도 알 거 아니야?"
  그녀는 한 손으로 옷자락을 들어올렸다. 우윳빛처럼 하얀 피부 위에 내 상상보다 깊은 칼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왼쪽 옆구리부터 허리까지. 그건 그녀가 딱 한 번 내게 헤어지자는 말을 했을 때, 그녀를 잡으려고 나도 모르게… 당시 난 피가 철철 흐르는 그녀를 안고 병원으로 내달렸다. 내 살갗 위로 번지는 그녀의 붉은 피를 보면서 다시는 그녀가 떠나지 않으리라고 안도했었다.
"위험한 건 당신이야."
"그.. 그건 사고였어. 당신도 날 용서한다고 그랬잖아."
"그 때 깨달았어. 당신은 결코 날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거. 그 후 난 죽은 듯 살았어. 당신이 원하는 모습대로. 그리고 떠나는 날을 준비했지.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길 바랬는데… 당신이 이렇게 날 찾고 돌아다니니 이제 나도 어쩔 수 없어. 그리고 아마도… 잭… 그 자 역시 당신이 죽였겠지?"
어느새 그녀의 눈물은 말라있었다. 그녀의 다문 입술 사이로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번져 나왔다. 모든 걸 체념한 자의 미소였을까 아니면 긴 싸움에서 승리한자의 미소였을까. 그녀는 방아쇠를 당겼다. 순식간에 총알이 내 가슴을 관통했고, 그 순간 난 그녀의 눈 속에 웅크리고 있는 익숙한 죽음의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 그리고 온 몸에 힘이 빠졌고 천천히 쓰러졌다. 바닥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래 이 느낌이었어. 그녀의 눈물… 어쩌면 난 그걸 알았는데 지금까지 애써 외면했었는지도 모른다. 죽음에 직면해서야 팽팽하게 감겼던 거짓된 의식의 끈이 스르르 풀리고 있었다.


2007년 5월 3일. 그녀가 사라지던 날. 그 날 따라 아내는 참 예뻤다. 시폰 소재의 하얀 블라우스 레이스 위로 꽉 움켜지듯 묶은 밤색 퍼머머리가 찰랑거렸다. 살짝살짝 보이는 하얀 목선과 아침햇살을 받아 블라우스 사이로 비추는 속살이 애간장을 태웠다. 식탁 의자에 앉아 사과를 한 입 배어 문 나는, 더 참지 못하고 설거지를 하는 아내를 뒤에서 덥석 안았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싱크대 위에 그릇이 떨어져 빚어내는 파열음이 신호탄처럼 타오르는 열정에 불쏘시개질을 했다.
나의 손길을 기다리며 봉긋하게 솟아오른 그녀의 가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스커트를 들어올리자 그녀는 꿈틀댔다. 나는 거칠게 그녀의 깊숙한 곳을 찾아 들어갔다. 나비 날개처럼 파르르 떠는 그녀의 몸짓과 낮은 신음소리가 아련하게 느껴졌다. 그녀에 대한 욕망으로 내 몸이 사그라들 것만 같았다. 시폰의 부드러운 결을 따라 그녀의 온 몸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그리고 욕망을 거침없이 그녀에게 쏟아 부었다.
끓어올랐던 열정이 잠잠해지자 나는 서서히 그녀를 감싸 안았던 손의 힘을 풀었다. 따사로운 아침햇살이 우리를 부드럽게 에워쌌다. 하늘은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했고, 구름은 사진의 한 장면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있었다. 그 때 갑자기 내 손 위에 얼음처럼 차가운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설거지 하던 아내의 손에 묻은 물방울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아마도 그녀의 눈물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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